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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佛陀)와 불전(佛傳)-붓다시대의 정치·경제적 상황

by 회심사 2017. 5. 2.


-붓다시대의 정치·경제적 상황-
    1. 베다 종교의 출현

    지난 호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인도 아대륙(亞大陸)에는 여러 인종들이 들어와 널리 퍼져 살면서 인도 역사를 이루어왔습니다. 특히 그 중에서도 인더스 문명의 주체자였던 드라비다(Dravida)인과 호주-아시아(Austro-Asia)계 이후 인도 아대륙의 새로운 주인공은 인도-아리야(Indo-Arya)인이었습니다. 인도-아리야인들은 인도-유럽인 가운데에서도 인도-이란인(Indo-Iranian)의 지파(支派)에 속하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과거에는 아리야인이라는 말이 모든 인도-유럽인을 나타내는 포괄적인 개념으로 사용하였으나, 현재는 인도 아대륙의 인도-유럽계 사람들만을 한정해서 쓰고 있습니다.

    이들은 원래 인도 아대륙에 살았던 사람들이 아니라 유럽과 인도 아대륙의 어느 중간 지점에서 각기 다른 방향으로 분산·이동하였던 것으로 추정합니다. 이들 중 일부가 힌두쿠쉬(Hindukush) 산맥을 넘어 인도의 서북부를 통해 인더스강과 쟘나강 사이의 판잡(Panjab) 지방에 침입하여 원주민들을 정복하고 살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1,600-1,300년경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시기는 정확한 것이 아니고 학자들에 따라 약간 다르게 추정할 뿐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아리야(Arya)라고 부르면서 다른 원주민들과 엄격히 구별하였습니다. 아리야란 고결한(noble), 명예로운(honorable) 등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리그-베다(Rg-veda) 등에 나오는 이 말의 기원은 근본적으로 선주민(先主民)에 대한 우월의식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아리야인들이 처음에는 인더스강 유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다가 수백 년 동안 동쪽으로 나아가면서 갠지스강 유역에 도달, 거기에서 다시 남인도 쪽으로도 뻗쳤습니다. 현대에 이르는 동안 선주민족(先主民族)과 혼혈하고 문화적으로도 복잡한 발전을 이룩했습니다.

    인도에 들어온 아리야인은 <베다>라는 오래 된 성전(聖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베다>에 의지하여 세습적인 바라문이 희생(犧牲) 등의 종교 의식을 집행, 사람들의 안전과 행복을 도모하려 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베다}는 절대 신성하며, 바라문은 나면서부터 최고라고 결정되어 있었습니다. 아리야인의 생활은 주로 목축이었습니다. 따라서 우유나 유제품(乳製品)에 의존하고 있었으므로 바라문과 함께 소를 신성한 것으로 믿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아리야인은 목축민이라 농경(農耕)은 그렇게 발전시키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아리야인들이 판잡 평원(平原)에서 점차 동진(東進)하면서 농경생활에 적합한 문화와 종교를 발전시켰습니다. 따라서 그들의 종교는 주로 농경에 관계가 깊은 신(神)들을 모시는 제의종교(祭儀宗敎)의 성격을 강하게 띠었습니다. 이를 일컬어 베다(Veda)종교 또는 브라흐마니즘(Brahmanism, 바라문교)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기원전 1,100년-900년경에는 이미 갠지스강 상류지역까지 진출합니다. 그들은 다시 동쪽과 남쪽으로 전진하면서 자연환경에 힘입어 농업을 더욱 발전시켜갔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본래는 사제(司祭)였던 바라문들이 점차 하나의 사회계급을 형성하게 됩니다. 그들은 주술(呪術)의 힘을 기조(基調)로 하는 제식(祭式)의 효과를 강조하고 이 제식을 독점함으로써 종교권 권력을 장악하였습니다. 여기에 바라문 지상주의(至上主義), 제식(祭式) 만능주의(萬能主義)를 특징으로 하는 바라문 중심의 문화가 이른바 바라문 중국(中國)을 중심으로 꽃피게 됩니다.

    이와 같이 바라문 문화는 서력 기원전 10-6, 5세기 경에 성립되었으며, 그 본거지는 남북으로는 빈디야산맥과 히말라야산맥으로 한정되며, 동으로는 프라야가, 서(西)로는 비나샤나에 이르는 지역입니다. 현대의 웃타르 프라데쉬주를 중심으로 하는 지역을 말합니다. 그들은 이곳을 중국으로 불렀습니다. 즉 '바라문 중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붓다가 활약했던 비하르주의 동방은 이곳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곳은 변방이었습니다.

    2. 정치적 과도기(過渡期)

    아리야인이 발전함에 따라 부족간의 대립이나 통합이 생기고 점차 군소 부족이 통합되어 독재권을 가진 왕(Rajan, 라잔)을 지도자로 받드는 왕국으로 발전해 갔습니다. 부족간의 전쟁으로서는 당시 최강의 부족이었던 바라따(Bharata)와 뿌루(Puru)족간의 전쟁이 유명한데, 그 결말은 마하바라따(Mahabharata)라는 장편의 서사시로 구전되고 있습니다.

    붓다 당시의 사회는 정치적으로 격변기(激變期)였습니다. 종래의 군소 부족국가들이 점차 통합하여 강력한 국가 체계가 형성됩니다. 초기경전에는 이른바 16대국(大國)의 이름이 나오는데, 그것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앙가(Anga), 마가다(Magadha), 카시(Kasi), 코살라(Kosala), 밧지(Vajji), 말라(Malla), 체띠(Ceti), 방사(Vamsa). 쿠루(Kuru), 판찰라(Pancala), 맛챠(Maccha), 수라세나(Surasena), 앗사카(Assaka), 아반띠(Avanti), 간다라(Gandhara), 캄보자(Kamboja) 등입니다.

    이러한 16대국의 명칭은 고대 통일국가를 이룩했던 마우리야 왕조 이후에 완성된 것이기 때문에 붓다 당시에 모두 실재(實在)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스럽습니다. 그러나 사실 여부를 떠나서 이것은 당시의 복잡했던 정치상황에 대한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상과 같은 16대국을 포함한 붓다 당시의 여러 나라에서는 공화정(共和政)과 군주정(君主政)의 두 가지 형태의 통치가 행해지고 있었고, 이들은 상호 대립적인 관계에 있었습니다.

    전제군주(專制君主) 국가들은 주로 야무나강과 갠지스강 유역에 분포되어 있었으며, 공화정은 히말라야의 산기슭에 인접해 있었습니다. 군주국가의 팽창에 맞서 공화국들(ga a-sa ghas)은 존립을 위한 전쟁을 치러야 했으며, 또한 군주국끼리의 큰 전쟁도 빈발했고, 공화국끼리의 작은 싸움도 끊이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공화국은 점점 쇠퇴해가고, 군주국은 영토와 국력을 증대시켜 갔던 것이 당시의 일반적인 추세였습니다.

    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에 의하면, 붓다 당시의 석가족은 코살라국에 의해 멸망되었습니다. 장아함(長阿含) 유행경(遊行經)에는 마가다국의 아사세왕이 밧지(Vajji)를 정복하고자 하여 대신(大臣) 우사(禹舍)로 하여금 붓다께 자문을 구하도록 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또한 마가다국의 파탈리가마(Pataligama)는 대신 우사가 밧지국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구축했다는 등의 내용이 나옵니다. 또 사분율(四分律) 권39에는 코살라의 파사익왕(波斯匿王)과 마가다의 아사세왕이 싸워 많은 사람이 죽었는데 비구들이 그 죽은 사람들의 옷을 가서 가져오고자 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또는 베살리(Vesali)의 릿차비족(Licchavi)과 아사세왕이 싸워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기록이 보입니다. 이 밖에도 붓다 당시의 정치 상황을 알려주는 내용은 상당히 많습니다.

    그런데 본래 고대 인도의 공화제는 종족사회를 기초로 하여 발전하였고, 또한 전제군주제는 이러한 공화제 국가 및 그 주변에 잔존(殘存)하는 종족을 정복함으로써 발전하였습니다. 붓다시대의 존존 종족으로는, 사캬족(Sakya)을 비롯하여 말라종족(Malla), 리챠비종족(Licchavi), 비데하종족(Videha), 박가종족(Bhagga), 불리종족(Buli), 콜리야종족(Koliya), 몰리야종족(Moliya), 브라르마나종족(Brahmana), 칼라마종족(Kalama), 티바라종족(Tivara), 판다바종족(Pandava), 카칸다종족(Kakanda) 등이 알려지고 있습니다.

    원래 종족사회란 경제적으로 자립하고 정치적으로 독립한 사회로서, 당시 종족사회는 원시공동체 사회의 최고 조직 형태였습니다. 그러나 결국 공화제 국가의 기초를 이루는 과정에서 해체되어 갔던 것입니다.

    결국 전제군주제 국가든 공화제 국가든 모든 국가들은 종족사회가 붕괴한 폐허 위에 건설되었던 것이며, 더욱이 강력한 전제군주국가는 다른 약소국가를 정치적·경제적으로 종속시켜갔습니다. 코살라국에 의한 석가족의 멸망, 그리고 마가다국에 의한 코살라국의 멸망은 그 좋은 예가 될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에서도 정복적·노예적 관계를 거부하고 종족의 독립과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해서는 종족들은 서로 연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밧지족은 리차비족과 비데히족의 연합종족으로서, 고대 인도 최후의 민주제 사회로 알려져 있습니다.

    3. 상업의 발달과 도시화

    붓다시대에 있어서 사회기구의 변동 가운데 특기할 만한 것은 경제적 사회를 확립하였다고 하는 점입니다. 이것을 확립한 근본기조(根本基調)는 촌락사회기구로부터 도시국가기구에로의 변동입니다. 그리고 이것과 병행해서 직업의 분화(分化), 생산기술의 향상, 대상인(大商人)의 출현, 동서교통로, 특히 서방제국(西方諸國)과의 교통로의 확립 등, 종래의 사제자(司祭者) 바라문에 의한 농촌사회에서는 보이지 않던 현저한 사회변동을 가져왔습니다.

    그 배경에 대해 살펴보면, 대략 기원전 800년경에 철이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철의 사용에 의해 농기구와 그 이외의 도구가 개량되었으며, 이는 숲의 개간과 농업 생산의 증대에 크게 공헌하였습니다. 또한 다양한 수공업 제품의 증산에도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토지가 증가하고, 많은 토지를 소유한 부유한 농민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풍부하게 생산된 제품은 자급자족의 범위를 넘어 상품으로 취급되었으며, 이에 따라 이를 사고 파는 상인계층이 출현하였습니다. 그들은 도적과 교통의 불편함 등의 난관을 극복하고 시골과 도시 사이를 왕래하며 교역했습니다. 그들은 점차로 이 교역로의 안전을 위하여 무력을 지닌 왕족과 관계를 맺었습니다. 그들은 무력에 의해 보호받았으며 교역의 이익을 확장하였으며, 동시에 왕족은 재정적인 혜택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육로와 하천을 이용한 교통로가 개척되고, 시장이 생기면서 시장을 중심으로 하는 거리·도시가 나타났습니다. 이에 따라 폐쇄적인 농촌의 부족사회는 도시에서 붕괴되어 갔습니다.

    특히 상업의 발달은 자연히 교환의 매개체로서 화폐를 필요로 했습니다. 육로와 수로의 무역에서 제일 먼저 취급된 것은 금, 은, 보석 등의 사치품과 특산물이었습니다. 먼지 지역을 운반하기에 부피가 적으면서 값이 나가는 물건들을 취급하다가 점점 다양한 품목으로 발전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당시는 물물교환이 행해지고 있었으나, 점차 금속통화(金屬通貨)가 많이 이용되게 되었습니다. 이 시대에는 주조(鑄造) 동화(銅貨)나 타각인(打刻印)을 지닌 방형, 원형의 은화, 금화, 동화를 이용한 교환 경제가 행해지고 있었습니다. 그 후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화폐의 발행권은 국정의 최고 수반인 국왕의 손으로 옮겨진 것으로 보입니다.

    이와 같이 군주제 국가가 신장됨에 따라 국가의 장벽을 넘는 통상, 경제행위가 발전하였습니다. 이는 불가분 왕권의 강화와 결부되어갔습니다. 화폐경제가 일반화되고, 도시에는 상공업자의 길드도 생겼습니다. 조합장과 대상인의 자본가와 왕족은 도시를 중심으로 사회의 상층계급을 형성하였습니다. 그들은 바라문들이 주장하는 사성제도(varna)에 구속되지 않았습니다. 재래의 농촌과는 다른 새로운 기운과 새로운 가치관의 새로운 문화가 발생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바라문의 종교적 권위는 옛날의 빛을 잃게 되었습니다.

    4. 반바라문적 사상운동의 태동

    당시 바라문이 독점했던 제식(yajna)은 현세의 이익을 기원하는 의례였습니다. 현세이익은 어느 시대에도 변하지 않는 서민의 종교적 요청이지만, 이 시대에는 그 제식에 부수된 동물의 희생이 혐오되었으며, 그 효과도 의심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푸자(puja)라는 새로운 예배의식도 토착문화에서 출발하여 번성하게 됩니다. 옛날의 신들은 몰락하고, 쉬바 또는 비슈누와 같은 신들이 대두되기 시작하였던 것도 이 시기부터였습니다.

    동시에 인간의 지식의 발달은 종교적으로 보다 고차원적인 '해탈'의 경지를 희구하게 되었습니다. 해탈에 관한 수행법과 사상이 정비되고, 그 가치는 일반인에게도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윤회와 업의 사상도 이 시대에 일반화되었는데, 당시의 문헌은 왕족이 이러한 새로운 설을 바라문에게 가르쳤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경제, 사회, 지성, 종교성 등의 여러 면에서 바라문 지상주의가 붕괴되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초기의 불교경전이 사성을 기록함에 있어 크샤트리야를 바라문 보다 앞서 열거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사회상황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됩니다.

    이러한 변모를 겪으면서 초기의 힌두문화는 급격히 동쪽과 남쪽으로 확대되어 갔습니다. 어쩌면 이러한 지역적 발전은 필연적으로 변모를 수반하였던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경향은 특히 동인도에서 현저하였습니다. 동인도는 바라문중국(中國)의 입장에서 보면 변방지역이며, 그러한 점에서 전통적인 바라문 문화의 속박을 덜 받는 지방이었습니다. 힌두세계에 동화되어 가면서도 독자적인 생활양식과 관행을 많이 지니고 있었습니다. 비바라문적 또는 반바라문적 분위기도 강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새로운 사상운동이 꽃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사상운동을 담당한 사람들은 슈라마나(Sramana, 沙門)라는 출가유행자 그룹이었습니다. 그들은 반바라문적 색채를 감추려 하지도 않고 다양한 학설을 제시하였습니다.

    붓다도 이러한 슈라마나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불교는 정치, 경제, 사회, 그리고 종교문화 등 인간생활의 여러 면에서 재래의 전통이 의심되었던 격동의 시대에 태어난 신흥종교의 하나로서 새로운 가치관을 제시하였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