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지식아, 보리반야(菩提般若)의 지혜는 세간 사람이 다 본래부터 스스로 가지고 있는 것인데 다만 마음이 미혹하여 스스로 깨닫지 못할 따름이니 모름지기 큰 선지식의 가르침과 인도함을 빌어서 견성하여야 하느니라.
마땅히 알라. 어리석은 자와 지혜 있는 사람이 불성에는 본래로 차별이 없는 것이요, 다만 미혹함과 깨친 것이 다를 뿐이라. 이 까닭에 어리석음도 있고 슬기로움도 있는 것이니라. 내 이제 마하반야바라밀법을 설하여 너희들로 하여금 각기 지혜를 얻게 하리니 지극한 마음으로 자세히 들어라. 너희들을 위하여 설하리라.
선지식아, 세상 사람이 입으로는 종일 반야(般若)를 외우나 자성 반야를 알지 못하니 말로만 음식 이야기를 아무리 하여도 배부를 수 없는 것과 같아서 다만 입으로만 공을 말한다면 만겁을 지내더라도 견성하지 못하리니 마침 내 아무 이익이 없느니라. 선지식아, <마하반야바라밀>이라는 말은 이것이 범어이니 여기 말로는 큰 지혜로 피안에 이르렀다는 말이니라. 이는 모름지기 마음에서 행하는 것이요 입으로 외우는데만 있는 것이 아니니, 입으로 외우더라도 마음에서 행하지 않는다면 꼭두각시와 같고, 허깨비와도 같으며, 이슬과 같고 번개와도 같아서 실이 없으니 입으로 외우고 마음으로 행한다면 곧 마음과 입이 서로 응할 것이니라. 본 성품 이것이 불(佛)이니 성품을 떠나서는 따로 부처가 없느니라.
다음에 어떤 것을 마하(摩訶)라고 하는가? <마하>는 크다는 말이니 심량 광대하여 마치 허공과도 같아서 가이없으며, 또한 모나거나 둥글거나 크고 작은 것이 없으며, 청, 황, 적, 백 등 빛깔 도 없으며, 위아래도 길고 짧음도 없으며, 성날 것도 기쁠 것도 옳은 것도 그른 것도 없으며, 착한 것도 악한 것도 없으며, 머리도 꼬리도 없으니 제불의 국토도 또한 이와 같이 다 허공과 같으니라. 세 간 사람의 묘한 성품도 본래 공하여 가이 한 법도 얻을 수 없으니 자상이 참으로 공함이 또한 다시 이와 같으니라.
선지식아, 내가 지금 공(空)을 설하는 것을 듣고 공에 집착하지 않도록 하라. 만약 마음을 비워 고요히 앉는다면 곧 무기공(無記 空)에 떨어지리라. 선지식아, 세계 허공이 능히 만물과 색상을 갈무리고 있어 일월 성숙과 산하대지와 샘이나, 물골이나 또한 개울이나 초목 총림과 악인, 선인, 악법, 선법, 천당, 지옥이며, 일체 대해와 수미제산이 허공 가운데 있는 것과 같이 세인의 성품이 공한 것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선지식아, 자성이 능히 만법을 머금고 있는 것이 이것이 큰 것이니, 만법이 모든 사람의 성품 중에 있느니라. 만약 모든 사람이 하는 일에 선이나 악을 볼 때 모두를 취하지 않고 버리지도 않으며, 또한 물들거나 집착하지도 아니하며 마음이 마치 저 허공과 같은 것을 이름하여 크다하는 것이니, 이 까닭에 <마하>라 하느니라. 선지식아, 미혹한 사람은 입으로만 말하고 지혜 있는 사람은 마음으로 행하느니라. 또한 미혹한 사람이 있어 마음을 비우고 고요히 앉아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는 것을 가리켜 스스로 큰 것이라고 일컫는다면 이러한 무리와는 더불어 말조차 하지 말라. 지견이 삿되기 때문이니라.
선지식아, 심량이 광대하여 법계에 두루 하니 작용을 하면 요요 분명하여 응용함에 곧 일체가 하나요, 하나가 곧 일체여서 거래에 자유로와 심체가 막힘이 없는 것이 이것이 반야이니라.
선지식아, 일체의 반야지는 모두가 자성에서 나는 것이요, 밖에서 들어오는 것이 아니니 그릇 생각하지 않는 것을 참성품을 스스로 쓴다 하는 것이니라. 하나가 참되매 일체가 참되느니라. 마음은 큰일을 헤아리나 작은 도행도 행하지 않으며, 입으로는 종일 공을 말하면서 마음에 이행을 닦지 않는 그런 일을 하지 말지니 이는 흡사 범인이 국왕을 지칭하는 것과 같아서 아무 소용없나니 이런 자는 나의 제자가 아니니라.
선지식아, 무엇을 <반야>라 할 것인가? 반야라 함은 여기 말로 지혜니라. 일체처 일체시에 생각생각이 어리석지 아니하여 항상 지혜를 행하는 것이 곧 반야행이니라. 한 생각이 어리석으면 곧 반야가 끊어짐이요, 한 생각이 슬기로우면 곧 반야가 나는 것이니 라. 세상 사람들이 어리석고 미혹하여 반야는 보지 못하면서 입으로만 반야를 말하며, 마음속은 항상 어리석으면서 말하기는 항상 내가 반야를 닦는다고 하며 생각생각마다 공을 말하니 진공(眞空) 은 알지 못하니라.
반야는 형상이 없는 것이라 지혜심이 바로 이것이니 만약 이와 같이 알면 곧 반야라 할 것이니라. <바라밀>이란 무엇일까? 이는 서쪽나라 말이니 여기 말로는 피안에 이르렀다는 말이라, 생멸을 여의었다는 뜻이니라. 경계를 집착하면 생멸이 이(生)나니 이는 물에 물결이 이는 것과 같아서 이것이 곧 언덕이요, 경계를 여의면 생멸이 없나니 이는 물이 항상 자유로이 통해 흐르는 것과 같아서 이것이 곧 피안이 됨이라. 그러므로 바라밀이라 하느니라.
선지식아, 미혹한 사람은 입으로만 외우므로 외우고 있을 때는 망(妄)도 있고 비(非)도 있지만 만약 생각생각마다 행하면 이것이 곧 진성이니라.
이법을 깨달으면 이것이 반야법이요, 이 행을 닦으면 이것이 반 야행이라. 닦지 않으면 즉 범부요, 일념으로 수행하면 자신이 불 (佛)과 같으니라.
선지식아, 범부가 곧 불이요, 번뇌가 곧 보리(菩提)니 전념(前念) 이 미혹하면 즉 범부요, 후념(後念)이 깨달으면 즉 불이라. 전념이 경계에 집착하면 번뇌가 되고, 후념이 경계를 여의면 즉시 보리니라.
선지식아, 마하반야바라밀이 가장 높고 가장 위이며 가장 으뜸이니, 현재도 없고 과거도 없으며, 또한 미래도 없으니 삼세제불이 이 가운데서 나오느니라. 마땅히 대지혜를 써서 오온 번뇌 망상을 타파하라. 이와 같이 수행하면 진정으로 불도를 이루리니, 삼독이 변하여 계, 정, 혜가 되느니라.
선지식아, 나의 이 법문은 한 반야로부터 8만4천의 지혜를 내느니라. 무슨 까닭이냐? 세간 사람이 8만4천의 번뇌가 있기 때문이니 만약 번뇌가 없으면 지혜가 항상 드러나 자성을 여의지 않느니 라.
이 법을 깨달은 자는 곧 생각도 없고 기억도 없고 집착도 없어서 거짓과 망령을 일으키지 아니하고, 스스로의 진여성(眞如性)을 써서 지혜로 일체 법을 관조하여 취하지도 아니하고 버리지도 않나니, 이것이 곧 견성이요 불도를 이룸이라. 선지식아, 만약에 깊은 법계와 반야 삼매에 들고자 하면 모름지기 반야행을 닦고 <금강반야경>을 지송하라. 곧 견성하리라. 마땅히 알라. 이 공덕이 무량무변함을 경 가운데서 분명히 찬탄하셨으니 이를 다 말할 수 없느니라.
이 법문은 이것이 최상승이라, 큰 지혜 있는 사람을 위하여 설한 것이며, 상근인을 위하여 설한 것이니라. 그러므로 지혜가 적고 근 기가 얕은 자는 이 법문을 들어도 마음에서 믿음이 나지 않느니라. 선지식아, 근기가 낮은 사람이 이 돈교법문(頓敎法門)을 들으면 마치 뿌리가 약한 초목이 큰 비를 맞으면 모두 다 쓰러져 자라지 못하는 것처럼 근기가 낮은 사람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원래 반야지혜를 갖추고 있기는 큰 지혜 있는 사람과 조금도 차별이 없느니, 어찌하여 법문을 듣고 스스로 개오 하지 못할까? 이는 사견과 중한 업장과 번뇌의 뿌리가 깊기 때문이니, 마치 큰 구름이 해를 가리웠을 때 바람이 불지 않으면 햇빛이 드러나지 않는 것과 같으니라.
반야의 지혜는 크고 작은 것이 없으니 일체중생의 마음 이 미(迷)와 오(悟)가 같지 않기 때문에 마음이 미혹하여 밖을 보고 수행하며 불을 찾으므로 자성은 보지 못하니 이것은 근기가 낮은 것이니라. 만약 돈교를 깨달아서 밖을 향하여 닦는 것을 고집하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 마음에서 정견을 일으켜서 항상 번뇌의 티끌에 물들지 않는다면 이것이 곧 견성이라.
선지식아, 안과 밖에 머물지 아니하고 가고 옴이 자유로와 능히 집착심을 버리면 일체에 통달하여 걸림이 없으리니 능히 이 행을 닦으면 <반야경>과 더불어 본래로 차별이 없으리라. 선지식아, 일체 수다라와 모든 문자인 대소이승(大小二乘) 의 12 부경이 사람으로 인하여 있는 것이며, 지혜의 성품으로 말미암아 능히 건립된 것이니 만약 세간 사람이 없으면 일체 만법이 본래 사람으로 인하여 일어나는 것임을!
일체 경서도 사람을 위하여 설하게 되니 그 사람 가운데는 어리석은 자도 있고 슬기로운 자도 있어서, 어리석은 자는 소인이라 하고 슬기로운 자는 대인이라 하느니라. 어리석은 자는 지혜 있는 사람에게 묻고, 지혜 있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과 더불어 법을 설하므로 어리석은 사람이 홀연히 마음이 열려 깨치게 되면 곧 지혜 있는 사람과 다를 바가 없느니라.
선지식아, 깨닫지 못하면 불이 곧 중생이요, 한 생각 깨달을 때 중생이 곧 불이니라. 이 까닭에 알아라. 만법이 모두가 자기 마음에 있는 것이거늘 어찌하여 자심 중에서 바로 진여본성을 보지 못하는가. <보살계경>에 이르기를 [나의 본원 자성이 본래 청정하니 만약 자심을 알면 견성이라. 모두가 불도를 이루리라]하였으며, 또 <정명경(淨名經)>에 이르기를 [즉시에 활연하면 또한 본심을 얻는 다.]하였느니라.
선지식아, 내가 인(忍)화상 회하에서 한 번 듣고 언하에 문득 깨달아 직하에 진여본성(眞如本性)을 보았으니 그러므로 이 교법을 널리 펴내려가 도를 배우는 자로 하여금 보리를 단번에 깨닫도록 하여 각기 스스로 마음을 보고 스스로 본성을 보게 하느니라. 만약 스스로 깨닫지 못하거든 모름지기 최상승법을 아는 대선지식을 찾아서 바른 길의 가르침을 받아라. 이러한 선지식은 큰 인연이 있어서 이른바 중생을 교화하고 인도하여 견성토록 하나니 일체 선법은 모두 선지식으로 인하여 능히 일어나느니라.
삼세 제불의 12부경이 모든 사람의 성품 가운데에 본래 스스로 갖추어져 있으나 이를 능히 스스로 깨닫지 못하면 모름지기 선지식 의 가르침을 구하여야 바야흐로 보게 되려니와, 만약 스스로 깨친 자는 밖으로 구할 것이 없느니라. 그러나 만약 일향 모름지기 다른 선지식의 지시를 기다려 해탈을 바라볼 수 있다고 고집한다면 이도 또한 옳지 않으니 왜냐하면 자기 마음속에 선지식이 있어서 스스로 깨닫는 것인데 만약 삿되고 미혹한 마음을 일으켜 망념으로 전도하면 비록 밖으로 선지식의 가르침이 있더라도 아무 소용이 없느니라. 만약 바르고 참된 반야를 일으켜 관조한다면 찰나간에 망념이 모두 없어지나니 만약 자성을 알아 한 번 깨달으면 단번에 불지에 이르리라.
선지식아, 지혜로 비추어보면 안과 밖이 사무쳐서 자기의 본심을 아느니라. 만약 본심을 알면 이것이 곧 본해탈이며, 해탈을 얻었으면 곧 그것이 반야삼매며 또한 이것이 무념이니라. 어찌하여 무념 이라 할까. 만약 일체법을 보더라도 마음에 물들고 집착하지 않으면 이것이 무념이라, 작용을 일으킨즉 일체처에 착하지 않으며, 다만 본심을 깨끗이 하여 육식(六識)으로 하여금 육문(六門)으로 나오더라도 육진중에 물들지 않고 섞이지도 아니하며 오고 감에 자유롭고 통용에 걸림이 없으니 이것이 즉시 반야삼매며 자재해탈이니 그 이름이 무념행이니라. 그러나 만약 아무 것도 생각지 아니하고 생각을 끊는다면 이것은 법박(法縛)이며 변견(邊見)이니라.
선지식아, 무념법을 깨달은 자는 만법에 걸림 없이 통하며, 무념법을 깨달은 자는 제불 경계를 보며, 무념법을 깨달은 자는 불지위에 이르느니라. 선지식아, 뒷날 나의 법을 얻은 자가 이 돈교법문을 가지고 견해를 같이 하며, 행을 같이 하기로 원을 발하며, 받아 지니기를 부처님 섬기듯하며, 종신토록 물러서지 않는다면 결정코 성인 지위에 들리라. 그리고 나의 법을 얻은 자는 모름지기 위로부터 내려오면서 말없이 분부하심을 모두 전수하여 정법을 숨김이 없이 하라. 그러나 만약 견해가 같지 않고 행이 같지 않아 다른 법에 있는 자이거든 법을 전하지 말라. 그의 앞 사람을 손해하고 마침내 아무런 이익이 없으리니 저 어리석은 사람이 알지 못하고 이 법문을 비방함으로써 백겁천생으로 부처 종자를 끊을까 두려우니라.
선지식아, 나에게 한 무상송이 있으니 모름지기 각기 외워 지녀라. 재가인 이든 출가 인이든 다만 이에 의하여 닦아라. 만약 스스로 닦지 아니하고 오직 내 말만 왼다면 또한 아무 이익이 없느니라. 나의 송(頌)을 들어라.
무애설법(無碍說法) 진여 마음 모두 통하니 태양이 허공에 있음과 같네.
오직 견성하는 이 법 전하여 세간에 들어내어 사종(邪宗) 깸일세
법인즉 돈(頓)도 점(漸)도 없는 것인데 중생의 미오(迷悟)따라 늦고 빠르네.
성품보아 부처되는 이 수승한 문을 어리석은 무리들이 어찌 다 알까 ?
말로하면 만 가지로 벌어지지만 이치에 들어서면 모두가 하나
번뇌의 안개속 어두운 집안에 지혜의 밝은 태양 항상 빛나라.
사념(邪念)일 때 번뇌가 이는 것이며 정념이면 번뇌가 가시는지라.
사와정 모두 여의어 쓰이지 않을 때 생멸 없는 청정지에 이르렀더라.
보리는 본래로 이 자성이니 마음을 일으킬 때 즉시 망(妄)이라.
정심(淨心)이란 망념 중에 있는 것이니 다만 정심(正心)이면 삼장(三障)이 없네.
세간 사람 만약에 수도 하는 데는 일체 세간사가 방해 안 되니
항상 스스로 제 허물 보면 도와 더불어 서로 맞으리.
일체중생 제각기 도가 있으니 서로서로 방해 없고 괴로움 없으리.
만약에 도를 떠나 도를 찾으면 목숨은 다하여도 도는 못 보리.
부질없이 바쁘게 일생 보내다 백발이 찾아드니 뉘우치누나.
만약에 참된 도를 보고자 하면 행이 바름이여 이것이 도니,
만약에 스스로 도심 없으면 어둠 속에 감이라 도는 못 보리.
참되게 도를 닦는 사람이라면 세간 사람 허물을 보지 않나니.
만약 다른 사람의 허물을 보면 도리어 제 허물이 저를 지내니
다른 사람 그르고 나는 옳다면 그르게 여김이 제 허물되리.
다만 스스로 비심(悲心) 버리면 번뇌는 부서져 자취는 없고
밉고 곱고에 마음 안 두니 두 다리 쭉 펴고 편히 쉬도다.
만약에 다른 사람 교화하려면 모름지기 기틀 따라 방편을 써서
저들의 의심뭉치 버리게 하라. 즉시에 청정자성 드러나리라.
불법은 세간중에 있는 것이니 세간을 여의찮고 깨닫게 하라.
세간을 여의고서 보리 찾으면 흡사 토끼 뿔을 구함 같으니라.
정견은 세간에서 뛰쳐 남이요, 사견은 세간 속에 파묻힘이라.
사와 정을 모두 다 쳐 물리치니 보리자성 완연히 드러나누나.
이 게송의 가르침이 바로 돈교며, 또한 이름하여 대법선(大法船)이니,
미(迷)하고 들으면 겁(劫)을 지내고 바로 들어 깨친 즉 찰나 사인고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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