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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사외도(六師外道)

by 회심사 2019. 2. 26.


卍-육사외도(六師外道)-卍
    부처님께서 탄생하셨던 기원전 5, 6세기의 인도 종교 철학계는 마치 중국의 춘추전국 시대에 버금갈 만큼 다양한 종교와 철학사상이 풍미했던 시절이었습니다. 이 말은 뒤집어 해석한다면 그때까지 유일한 종교이며 철학으로써 인도사회를 지배해왔던 전통 브라만교의 권위가 무너지고 새롭고 다양하며 혁신적인 종교와 철학사상이 등장했다는 뜻입니다.

    이 시기 이전까지 인도사회를 지배했던 종교인 전통 브라만교에서는 크게 세 가지 정도의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그들의 성전인 베다(Veda)는 하늘(梵天)의 계시에 의해 씌어졌다는 베타 천계주의, 또 신(梵天)과 인간의 중간자 역할을 하는 제사장 계급인 브라만(Brahman)계급이 최고라는 브라만 중심주의 다음으로 신에게 제사를 올림으로써 인간의 길흉화복이 좌우된다는 제사만능주의가 그것이었습니다.

    이 같은 종교 사상과 전통들에 의해 아리안 족들이 원주민들을 지배하며 인도사회를 지탱해 왔지만 부처님께서 출현하셨던 기원전 5, 6세기에 접어들면 이런 전통들이 무너지고 새로운 정치 사회적 환경과 더불어 새롭고 혁신적인 종교 철학 사상들이 등장하게 됩니다.

    이들 신흥 종교사상가들은 대부분 전통적인 브라만교의 권위를 부정하고 새로운 세계관을 가진 자유로운 사상가들이었습니다. 새로운 철학 사조를 이루었던 이들 사상가의 출신 계급 또한 기존의 제사장 계급중심에서 탈피해서 무사계급, 평민, 심지어 노예계급까지 등장해서 자유로운 사상을 펼쳤습니다.

    기존의 브라만교에서는 인간과 세계 만류는 브라만으로부터 나왔다는 전변설(轉變說)을 주장한 반면 이들 혁신 사문들은 우주의 궁극적 실재를 물질적 요소로 파악하고 그러한 요소들이 취합하여 자연과 인간을 비롯한 모든 것이 성립됐다는 적취설(積聚說)을 주창했습니다.

    또 기존의 브라만교가 신과 같은 형이상학적인 문제에 천착한 반면 이들 사문들은 현실생활 속에서 인생의 의의를 찾으려는 형이하학에 더욱 관심을 보였습니다. 이처럼 브라만교의 전통과 권위에 정면으로 맞서서 자유로운 사상들을 펼쳤습니다. 이들의 이 같은 활약으로 인해 오랫동안 인도사회를 지배해 왔던 브라만적 전통이 쇠약해지고 그에 따라서 불교가 인도사회에서 보다 쉽게 뿌리를 내릴 수 있는 사회적, 문화적 토양을 만들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당시의 이런 종교사상가들을 사문(沙門, Sramana)이라고 불렀는데 그 뜻은 '정진하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이런 다양한 종교 사상가들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62見이라고 분류되는 사상가들이며 이들을 더 압축해서 육사외도(六師外道)라고 하는 종교가들입니다. 즉 여섯 명의 이교도(異敎徒)라는 뜻인데 이 명칭은 불교에서 이들을 경계해서 붙인 이름입니다.

    이들 육사외도들은 역사적 관점에서 볼 때 이들 사문들의 새로운 사상과 활동은 기존의 브라만적 전통을 극복하고 다양하고 새로운 종교사상을 펼 수 있는 자유로운 사상풍토를 만드는데 많은 역할을 했습니다. 하지만 극단적인 도적 부정론 같은 주장을 편다거나 극단적인 유물론 등을 펴서 나쁜 영향을 끼친 것도 또한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경전에 보면 외도(外道)의 잘못된 견해에 따르지 말라고 경계하고 있습니다. 다음에 나열하는 것은 육사외도에 대한 간단한 각론입니다.

    육사외도(六師外道)

    1. 푸라나 카삿파(Purana kassapa)
    푸라나 카삿파의 사상은 한마디로 도덕 부정론입니다.
    노예출신이기도 한 푸라나 카삿파는 부처님과도 관련이 있는데, 그가 부처님과 신통력을 겨루어서 진 경험이 있다고 합니다.

    그의 사상은 선악(善惡)의 구별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이 멋대로 정의한 것이며 실제로 선악(善惡)이란 없는 것이라고 봤습니다. 그래서 살생이나 도둑질이나 사음 등의 악행(惡行)을 저질러도 그것이 인간들이 임의로 정의한 개념이기 때문에 실제로 악행(惡行)을 범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반대로 보시와 방생 같은 선행(善行)을 행한다 해도 역시 그것은 인간의 관념이 낳은 것이지 절대적인 선행(善行)이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이 같은 그의 견해는 자연히 업(業)이란 없는 것이며 업(業)에 대한 응보(應報)도 없는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그래서 불교를 비롯해서 정통적인 종교에서 인정한 업보(業報) 사상을 전면적으로 부정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길흉화복은 어떻게 결정될까요? 푸라나는 그것이 인과(因果)나 운명에 의해서가 아니라 단순히 우연에 의해서 좌우된다고 주장했습니다.

    2. 파쿠다 캇차야나(Pakudha Kaccayana)

    파쿠다는 인간을 구성하는 것을 일곱 가지의 요소(要素)로 보았습니다.
    즉 지(地), 수(水), 화(火), 풍(風), 고락(苦樂), 생명(生命), 영혼(靈魂)의 7요소로 파악했습니다.
    그리고 이 일곱 가지 요소들을 항상 존재하는 것으로 파악했습니다.
    즉 생명(生命)이라는 것도 영원히 존재하는 하나의 요소이기 때문에 생명은 나지도 죽지도 않는 불생불멸(不生不滅)로 인식했습니다.

    예를 들어 살인이란 문제를 놓고 볼 때 그는 죽이는 자도 없고, 살해되는 자도 없다는 주장을 폅니다. 즉 칼로 인간의 목을 자른다 하더라도 이것은 인간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일곱 가지 요소 사이로 칼이 지나 갈 뿐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일곱 개의 요소는 상주(常住)하는 것이며 생명도 영원히 상주하는 하나의 요소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3. 막칼리 고살라(Makkhali Gosala)

    숙명론(宿命論)자인 막칼리는 불교에서 말하는 이른바 사명외도(邪命外道)의 개조(開祖)입니다.
    아지비카(Ajivika)라는 교단의 교조이기도 한 막칼리는 육사외도 가운데 자이나교와 유사한 교설을 펼쳤는데 교세에 있어서도 자이나교의 니간타 나타풋타 다음가는 유력한 종교지도자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교설은 후에 자이나교에 흡수 통합되기도 했습니다.

    막칼리는 일체의 구성요소로서 12원 소설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 12개의 원소 가운데는 영혼도 포함되는데 인간의 영혼도 하나의 원소로 파악했던 극단적인 유물론자입니다.

    또 막칼리 고살라는 인간 운명에 대해서 극단적인 결정론을 주장합니다.
    생사(生死) 윤회(輪廻)하는 것은 불교의 경우에는 모두 인과(因果) 업보(業報)에 의한 것으로 보지만 막칼리 고살라는 아무런 원인도 없고 또 어떤 결과도 초래하지 않는다고 하는 무인(無因) 무연(無緣)론을 펼칩니다. 인간의 의지작용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것이며, 모든 것은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결정론자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행을 통해서 해탈(解脫)한다는 것도 불가능하다고 보았습니다.

    모든 인간은 8백 40만 겁을 윤회하는 동안 고(苦)가 저절로 없어져서 스스로 해탈한다는 주장을 폈습니다. 이처럼 막칼리는 인간이 자기 운명을 개척한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 것으로 파악했습니다. 그래서 막칼리 고살라는 의지(意志)의 작용을 부정한 최초의 사상가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4. 아지타 케사캄발린(Ajita Kesakambalin)

    아지타는 단멸(斷滅)론자이자 유물론(唯物論)자입니다.
    불교와 같이 물질적 구성의 최소 단위를 지, 수, 화, 풍(地水火風)의 사대로 보았습니다.
    그는 이 사대(四大)만이 참된 실재이며 독립 상주(常住)하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삶은 지수화풍의 사대원소가 결합한 것이며 죽음이라는 것은 이 사대원소가 각기 자기 자리로 흩어지는 것이므로 무(無)로 돌아간다고 보았습니다.

    즉 사후(死後) 세계나 영혼 같은 것은 완전히 부정했습니다.
    그러므로 현세도 없고 미래세도 없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윤회(輪廻)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며, 선악(善惡)에 대한 과보(果報)도 없는 것으로 파악했습니다.

    그러니 자연히 도덕은 부정되는 것이겠지요.
    이 현세의 삶이 최초이자 최후이므로 인간은 그저 즐기고 살아야 한다는 쾌락주의 자이자 철저한 유물론자였습니다. 이러한 철학 사조를 인도철학에서는 순세파(順世派, Carvaka)라고 합니다.

    5. 산자야 벨라티풋타(Sanjaya Belatthiputta)

    산자야는 인식의 객관적인 타당성이란 있을 수 없다는 주장을 편 회의론(懷疑論)자입니다.
    진리를 있는 그대로 인식하고 서술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불가지론(不可知論)의 대표적인 사상가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산자야는 인도 철학사 가운데 최초의 회의론자로 불리고 있습니다.

    그는 사후의 존재나 선악(善惡)의 과보(果報)와 같은 형이상학적인 질문에 대해서는 애매모호한 답변으로 대답을 회피했는데 그의 이런 논법을 '뱀장어처럼 미끄러워 잡기 어려운 논의'라고 불렀습니다. 아무튼 이처럼 형이상학적 문제에 대해서 확정적인 지식을 주지 않으므로 그는 불가지론(不可知論)자로 불려집니다.

    그래서 그는 인도 철학사상 처음으로 형이상학적 문제에 관해 어떤 일정한 판단을 내릴 수 없다는 판단중지(epokhe)의 사상가라고 보고 있습니다.

    이 산자야는 석가모니 부처님과 아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산자야의 문하에는 두 명의 뛰어난 제자가 있었는데 바로 그 유명한 부처님의 10대 제자 가운데 사리불과 목건련입니다.

    이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는 250명의 제자들과 함께 부처님께 귀의했습니다. 산자야는 이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아서 그만 피를 토하며 죽었다고 합니다. 물론 이 두 제자는 불교 교단으로 들어와서 10대 제자로 활동하며 많은 활동을 했습니다.

    6. 니간타 나타풋타(Nigantha Nataputta)

    자이나교의 교주입니다. 자이나교는 당시 불교와 함께 흥성했던 종교입니다.
    니간타 나타풋타는 깨달음을 얻은 뒤 '위대한 영웅'이라는 뜻의 마하비라(Mahavira)로 불렸으며 자이나교의 교주로서 자이나교를 크게 발전시켰습니다.

    니간타 나타풋타는 산자야의 회의론을 극복하기 위해 상대주의(相對主義)적 인식론(認識論)을 수립하고 여기에 입각해서 이원적(二元的) 우주론을 제시했습니다.

    자이나교에서는 영혼(Jiva, 命)은 물질(Pudgala)의 업(業)에 속박되어서 현실과 같은 비참한 상태에 빠졌다고 파악합니다.

    그러므로 순결한 영혼인 지바를 끈적끈적한 물질로부터 해방시켜야 하는데 그 방법을 고행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자이나교에서는 극심한 고행이 행해졌습니다. 심지어 고행을 하다가 죽게 되면 성자로까지 추앙받았다고 합니다.

    이들의 종교생활은 불살생(不殺生), 불도(不盜), 불음(不淫)과 같은 철저한 계율을 지키는 한편 철저한 무소유(無所有)의 삶을 실천했습니다. 그들은 살생을 엄격히 금했기 때문에 농사마저 짓지 않았습니다. 농사를 짓다보면 작은 곤충들을 죽이기도 하기 때문에 이들은 주로 상업에 종사했습니다. 실제로 이들로 인해서 인도의 상업이 발달했다는 학설도 있습니다. 유명한 사회학자인 막스 베버는 그렇게 주장했습니다.

    이들은 무소유를 철저히 실천하다 보니 몸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는 알몸으로 고행을 하기도 했는데 이들을 나형외도(裸形外道)라고 불렀습니다. 후대에 와서는 흰옷을 입어도 된다는 백의파가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아무튼 이 자이나교는 아직까지 인도에 신봉자들이 남아 있을 정도로 불교와 함께 크게 흥성했던 종교입니다.

    이상이 육사외도 각각에 대한 대략적인 설명입니다.
    이들은 모두 불교와 동시대에 활동했던 사상가들인데 아마 서로 교리논쟁을 하고 경쟁하면서 더욱 체계적인 사상으로 발전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물론 불교도 예외는 아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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