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승, 모든 법의 근원
부처님께서 승만에게 말씀하셨다.
“그대가 이제 다시 모든 부처님께서 설한 바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일에 대하여 설하여라.”
승만이 부처님께 사뢰었다.
“훌륭하십니다, 세존이시여! 오직 부처님의 분부를 따르겠습니다.”
그리고 곧 부처님께 사뢰어 말씀하였다.
“세존이시여,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일은 곧 대승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대승이라는 것은 모든 성문, 연각의 세간, 출세간의 선법(善法)을 낳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아뇩대지에서 여덟 개의 큰 강의 생기는 것과 같습니다. 이와 같이 대승은 모든 성문, 연각과 세간, 출세간의 선법을 낳습니다.
세존이시여, 또한 모든 씨앗이 대지(大地)에 의거하여 자라는 것과 같이 모든 성문, 연각의 세간, 출세간의 선법도 대승에 의지하여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존이시여, 대승에 머무르며 대승을 받아들이는 것이 곧 이승(二乘)에 머물러서 이승의 세간, 출세간의 선법을 받아들이는 것이 됩니다.”
여섯 가지 요점
“마치 세존께서 설하시는 여섯 가지 요점[六處]과 같습니다.
여섯 가지 요점이란, 올바른 가르침의 유지[正法住], 올바른 가르침의 소멸[正法滅], 계본[波羅提木叉], 교단의 규범[毘尼], 출가하는 것, 구족계를 받는 것입니다.
대승을 위하기 때문에 이러한 여섯 가지 요점을 설하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올바른 가르침의 유지는 대승을 위하기 때문이니, 대승의 유지가 곧 올바른 가르침의 유지라고 설하는 것입니다. 올바른 가르침의 소멸은 대승을 위하기 때문이니, 대승의 소멸이 곧 올바른 가르침의 소멸이라고 설하는 것입니다. 계본과 교단의 규범, 이 두 가지는 뜻은 하나인데 이름만 다른 것입니다. 교단의 규범은 곧 대승의 배움입니다.
그것은 부처님에 의지하여 출가하여서 구족계를 받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대승의 계[大乘威儀戒]가 교단의 규범이며, 출가이며, 구족계를 받는 것이라 설하는 것입니다. 즉 아라한의 길에는 출가도 구족계를 받음도 없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아라한 스스로도 여래에게 의지하여 출가하고 구족계를 받기 때문입니다.”
아라한의 귀의
“아라한은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아라한은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지어진 것[行]에 대해서 두려워하는 생각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칼을 갖고 자기를 해치러 오는 어떤 사람을 만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아라한은 완전한 즐거움이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의지처는 다시 의지할 대상을 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치 의지처가 없는 중생은 그러한 두려움이 있으며, 그러한 두려움으로 말미암아 곧 귀의처를 구하는 것과 같습니다. 아라한의 경우에도 두려움이 있으며, 두려움으로 말미암아 여래에게 의지합니다.”
여래만이 얻는 열반의 세계
“세존이시여, 아라한과 벽지불은 두려움을 갖습니다. 또한 아라한과 벽지불에게는 업의 잔재가 남아 있습니다[有餘]. 윤회, 재생으로 이어지는 성질[生法]이 다하지 않았으므로 태어남이 있으며 업의 잔재가 있습니다.
청정한 행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므로 순수하지 않으며, 일이 완전하지 않으므로 마땅히 지어야 할 바가 있습니다. 피안에 이르지 못했으므로 마땅히 끊어야 할 바가 있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오직 여래, 응공, 정등각만이 완전한 열반을 얻으며 모든 공덕을 성취하기 때문이며, 아라한과 벽지불은 모든 공덕을 성취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열반을 얻는다. 는 것은 오직 부처님의 방편일 뿐이니 오직 여래만이 완전한 열반을 얻으며, 한량없는 공덕을 성취합니다. 아라한과 벽지불은 한량이 있는 공덕을 성취할 뿐입니다. ‘열반을 얻는다. 는 것은 오직 부처님의 방편일 뿐이니 오직 여래만이 완전한 열반을 얻으며, 가히 생각할 수 없는 공덕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아라한과 벽지불은 생각할 수 있는 공덕만을 성취할 뿐입니다.
‘열반을 얻는다. 는 것은 오직 부처님의 방편일 뿐이니 오직 여래만이 완전한 열반을 얻으며, 마땅히 끊어야 할 모든 허물을 모두 끊으며 가장 훌륭한 청정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아라한과 벽지불은 허물을 남겨 가장 훌륭한 청정을 성취할 수 없습니다. ‘열반을 얻는다. 는 것은 오직 부처님의 방편일 뿐이니, 오직 여래만이 완전한 열반을 얻어서 모든 중생이 존중하는바 되며 아라한, 벽지불, 보살의 경계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라한과 벽지불은 열반의 세계와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아라한과 벽지불이 해탈의 네 가지 지혜를 관찰하며 마침내 번뇌가 쉬는 경지[蘇息處]를 얻는다. 는 것 역시 여래의 방편이니, 업의 잔재를 남기는 것이고 궁극적인 뜻을 다 드러내지 못한 가르침[不了議設]일 뿐입니다.”
두 가지 죽음
“왜냐하면, 두 가지 죽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두 가지 죽음이란 이른바 육체적 죽음[分段死]과 부사 의한 변화로서의 죽음[不思議變易死]입니다. 육체적 죽음은 거짓된 중생의 죽음을 말하는 것이며, 부사 의한 변화로서의 죽음은 아라한, 벽지불, 대력(大力)보살의 의생신(意生身)이며 궁극적으로 위없는 깨달음입니다.
두 가지 죽음 가운데 육체적 죽음으로 말미암아 아라한과 벽지불의 지혜 - ‘나의 생은 이미 다했다’[我生已盡] -를 설하게 됩니다. 업의 잔재가 남게 되는 과보를 얻기 때문에 ‘청정한 행은 이미 완성했다’[梵行已立]고 설하게 됩니다.
범부와 인천(人天)의 과보를 얻을 중생은 능히 판단하지 못하고, 아라한이 되기 전 일곱 단계의 성자들은 그 이전에는 끊지 못하였던 허망한 번뇌를 끊었으므로 ‘지어야 할 바는 모두 마쳤다’[所作已辨]고 설하게 됩니다. 아라한과 벽지불이 끊은바 번뇌는 다시 미래의 윤회하는 삶[後有]을 받지 않으므로 ‘미래의 윤회하는 삶을 받지 않는다’[不受後有]고 설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모든 번뇌를 다 없앤 것도 아니며 또한 다시는 모든 생을 받는 것을 다한 것도 아니기 때문에 ‘다시는 미래의 윤회하는 삶을 받지 않는다. 고 설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번뇌가 있기 때문입니다.”
번뇌, 그 계보
“이와 같이 아라한과 벽지불이 능히 끊지 못한 번뇌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잠재적 번뇌[住持煩惱]와 현재적 번뇌[起煩惱]가 그것입니다. 다시 잠재적 번뇌에는 한 곳만을 보는 편견 속에 잠재되어 있는 번뇌[見一處住持煩惱], 욕망의 집착 속에 잠재되어 있는 번뇌[欲愛住持煩惱], 육체의 집착 속에 잠재되어 있는 번뇌[色愛住持煩惱], 윤회 생존의 집착 속에 잠재되어 있는 번뇌[有愛住持煩惱]의 네 가지가 있습니다.
이 네 가지 잠재적 번뇌가 모든 현재적 번뇌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현재적 번뇌는 찰나의 일이니 찰나의 마음에 상응하여 일어나는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마음과 서로 상응하지 않는 것이 언제 비롯되었는지 알 수 없는 무명의 잠재적 번뇌[無始無明住持煩惱]입니다. 세존이시여, 이러한 네 가지 잠재적 번뇌의 힘은 모두 부수적 번뇌[上煩惱]의 의지할 종자가 되는 것이지만, 무명의 잠재적 번뇌의 큰 힘에 비교하면 산수(算數)나 비유로도 미칠 수 없는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이와 같이 무명의 잠재적 번뇌는 욕망의 집착 속에 잠재되어 있는 번뇌나 네 가지 잠재적 번뇌보다 힘이 있습니다. 무명의 잠재적 번뇌의 힘이 가장 큰 것입니다. 마치 악마 파순(波旬)이 타화자재천보다도 모습, 힘, 수명, 도구, 자재가 뛰어난 것과 같습니다.
무명의 잠재적 번뇌의 힘이 윤회 생존의 집착 속에 잠재되어 있는 번뇌나 네 가지 잠재적 번뇌보다도 그 힘이 가장 뛰어난 것이니, 갠지스 강의 모래알만큼이나 많은 부수적 번뇌의 의지하는바 되며, 역시 네 가지 잠재적 번뇌를 오래 머물도록 하는 것입니다. 아라한과 벽지불의 지혜로도 능히 끊지 못하며 오직 여래의 깨달음의 지혜가 능히 끊을 바입니다. 이와 같이 세존이시여, 무명의 잠재적 번뇌가 가장 힘이 센 것입니다.”
부처님만이 끊을 수 있는 번뇌
“세존이시여, 또한 집착[取]이 유루(有漏)의 업인(業因)으로 말미암아 세 가지 존재[三有]를 낳는 것과 같이, 이러한 무명의 잠재적 번뇌 역시 무루업(無漏業)의 원인으로 말미암아 아라한, 벽지불, 대력(大力)의 원인으로 말미암아 아라한, 벽지불, 대력(大力)보살의 세 가지 의생신(意生身)을 낳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 가지 지위와 그러한 세 가지 의생신의 생 및 무루업의 생은 무명의 잠재적 번뇌에 의지한 것이므로 연이 있는 것이지 연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세 가지 의생신 및 무루업은 무명의 잠재적 번뇌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이와 같이 윤회 생존의 집착 속에 잠재되어 있는 번뇌의 업과 함께 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명의 잠재적 번뇌는 네 가지 잠재적 번뇌를 떠나는 것과 달라서, 불지(佛地)에서 끊는 바이며 부처님의 깨달음의 지혜로써 끊는 바입니다. 왜냐하면, 아라한과 벽지불도 네 가지 잠재적 번뇌는 끊을 수 있지만 무루업은 다 끊지 못해서 자제력을 얻지 못하며 역시 깨달음을 얻지 못합니다. 무루업을 다 끊지 못하는 것은 곧 무명의 잠재적 번뇌 때문입니다.”
불완전한 열반
“세존이시여,
아라한, 벽지불, 최후신(最後身)의 보살은 무명의 잠재적 번뇌에 덮여 있기 때문에 저러한 모든 법에 대하여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합니다. 알지 못하기 때문에 마땅히 끊어야 할 바를 끊지 못하며 구경(究竟)에 이르지 못합니다. 끊지 못하기 때문에 나머지 허물이 남아 있는 해탈[有餘過解脫]이라 이름하며, 모든 허물을 떠나 있는 해탈이 아니기 때문에 업의 잔재가 남아 있는 청정[有餘解脫]이라 이름합니다.
모든 청정이 아니기 때문에 업의 잔재가 남아 있는 공덕[有餘功德]을 성취할 뿐이라 이름합니다. 모든 공덕을 성취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업의 잔재가 남아 있는 해탈, 업의 잔재가 남아 있는 청정, 업의 잔재가 남아 있는 공덕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업의 잔재가 남아 있는 괴로움[苦]을 알며, 업의 잔재가 남아 있는 괴로움의 원인[集]을 끊으며, 업의 잔재가 남아 있는 괴로움의 소멸을 증득하며[滅], 업의 잔재가 남아 있는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道]을 닦는 것이니, 이를 불완전한 열반을 얻을 뿐이라고 이름하는 것입니다. 불완전한 열반을 얻는다 함은 열반의 세계를 향하는 것이라 이름합니다.”
열반의 맛
“누구라도 모든 괴로움을 알고 모든 괴로움을 일으키는 집착을 끊으며 모든 괴로움의 소멸을 증득하고 모든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닦는다면, 무상하게 부서지는 세간, 무상하게 병든 세간에서 항상 머무르는 열반을 얻을 것이며, 보호해 주는 이 없는 세간, 의지할 이 없는 세간에서 보호해 주는 이가 되고 의지할 이가 될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법에는 뛰어남과 열등함이 없기 때문에 열반을 얻으며, 지혜가 평등하기 때문에 열반을 얻으며, 해탈이 평등하기 때문에 열반을 얻으며, 청정이 평등하기 때문에 열반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열반은 하나의 맛[一味]이고 같은 맛[等味]이니, 이른바 해탈의 맛[解脫味]입니다.
세존이시여, 만약 무명의 잠재적 번뇌를 끊지 못하고 다 마치지 못한 사람은 하나의 맛, 같은 맛 -이른바 지혜의 맛, 해탈의 맛 -을 얻지 못합니다. 왜 그러냐 하면, 무명의 잠재적 번뇌를 끊지 못하고 다 마치지 못한 사람은 갠지스 강의 모래알보다도 더 많은 마땅히 끊어야 할 법을 다 끊지 못했으며 갠지스 강의 모래알보다도 더 많은 법을 마땅히 얻어야 하는데도 얻지 못하고 마땅히 깨달아야 하는데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명의 잠재적 번뇌가 쌓여서 모든 수도(修道)를 통해서 끊어야 할 번뇌와 부수적 번뇌를 낳으며, 그것은 마음을 장애 하는 번뇌, 지(止)를 장애 하는 번뇌, 관찰[觀]을 장애 하는 번뇌, 선정을 장애 하는 번뇌, 삼매[正受]를 장애 하는 번뇌, 방편을 장애 하는 번뇌, 지혜를 장애 하는 번뇌, 과보를 장애 하는 번뇌, 얻음을 장애 하는 번뇌, 힘[力]을 장애 하는 번뇌, 두려움 없음을 장애 하는 부수적 번뇌 등을 낳습니다.
이와 같이 갠지스 강의 모래알보다도 더 많은 부수적 번뇌는 여래의 보리, 지혜가 끊어야 할 바이니, 그 모든 것은 모두 무명의 잠재적 번뇌가 지은 바입니다. 모든 부수적 번뇌가 일어나는 것은 모두 무명의 잠재적 번뇌를 원인으로 하고 무명의 잠재적 번뇌를 조건으로 하는 것입니다.”
무명의 잠재적 번뇌를 끊어야
“세존이시여, 여기서 현재적 번뇌는 찰나의 마음을 찰나에 상응하여 일어나는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마음과 서로 상응하지 않는 것이 언제 비롯되었는지 알 수 없는 무명의 잠재적 번뇌[無始無明住持煩惱]입니다. 세존이시여, 여래의 보리, 지혜가 마땅히 끊어야 할 법이 갠지스 강의 모래알보다도 더 많더라도, 그 모든 것은 모두 무명의 잠재적 번뇌가 지니는바 되고 건립하는 바 됩니다.
비유하면, 마치 모든 씨앗이 모두 땅에 의지하여 나고 건립하고 자라는 것과 같습니다. 만약 땅이 무너지면 그 씨앗도 무너지는 것과 같아서, 이와 같이 여래의 보리, 지혜가 마땅히 끊어야 할 법이 갠지스 강의 모래알보다 더 많더라도 모두 따라서 끊어지게 됩니다.
이와 같이 해서 모든 번뇌와 부수적 번뇌를 끊고, 여래가 얻을 바 모든 법 -갠지스 강의 모래알보다도 더 많은- 에 통달하며 모든 지견에 걸림 없이 되고 모든 과악(過惡)을 떠나며 모든 공덕을 얻은 법왕, 법의 주재자로서 자재를 얻으며 모든 법의 자재로운 경지에 오를 수 있을 것입니다.
여래, 응공, 등정각께서는 “나의 생은 이미 다했으며, 청정한 행은 이미 완성했으며, 지어야 할 바는 이미 마쳤으며, 미래의 윤회하는 삶은 받지 않는다”라고 사자후(獅子吼)하십니다. 그러므로 세존께서는 궁극적인 가르침에 의지하여 총체적 설명[一向記]를 설하셨습니다.”
두 가지 지혜
“세존이시여, ‘미래의 윤회하는 삶을 받지 않는’ 지혜에 두 가지가 있습니다. 이른바 여래는 -위없는 조어(調御)로서 네 가지 마[四魔]를 항복 받고, 모든 세간을 벗어나서 모든 중생의 존경을 받는- 불가사의한 법신을 얻으며 모든 알아야 할 대상 경계에 대하여 걸림 없는 법의 자재를 얻습니다. 이 위에 다시 지어야 할 바도 없으며 얻어야 할 바도 없는 경지에서 십력(十力)이 용맹해지고 제일이며 위없는 무외(無畏)의 경지에 올라갑니다. 모든 알아야 할 대상 경계를 걸림 없는 지혜로 관찰하는 데는 다른 것에 말미암지 아니하므로 ‘미래에 윤회하는 삶을 받지 않는 지혜’라고 사자후하는 겁입니다.
세존이시여,
아라한과 벽지불은 생사의 두려움을 건너서 차례로 해탈의 기쁨을 얻어서 즐거이, ‘나는 생사의 공포를 떠났으니 생사의 괴로움을 받지 않을 것이다’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세존이시여, 아라한과 벽지불이 관찰할 때는 ‘미래의 윤회하는 삶을 받지 않게 되고’, 가장 뛰어난 안식처[蘇息處]인 열반의 경지에 처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저들이 앞에서 얻은 바 열반의 경지는 법에 어리석지 않아서, ‘다른 사람으로 말미암지 않고 스스로 불완전한[有餘] 지위를 얻었지만, 반드시 위없이 바른 깨달음을 얻으리라’고 아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성문승과 연각승은 모두 대승에 들기 때문입니다. 대승은 곧 부처님의 길[佛乘]입니다.
그러므로 세 가지 길은 곧 하나의 길이며 하나의 길을 얻는 자는 위없이 바른 깨달음을 얻는 것입니다. 위없이 바른 깨달음은 열반의 세계입니다. 열반의 세계는 곧 여래의 법신입니다. 궁극적인 법신을 얻음은 곧 궁극적인 하나의 길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법신은 여래와 다르지 않고, 여래는 법신과 다르지 않으니, 여래가 곧 법신입니다. 궁극적인 법신을 얻는다는 것은 궁극적인 하나의 길을 얻는 것입니다. 궁극적이라는 것은 가이없으며 끊어짐이 없는 것입니다.”
여래에의 귀의
“세존이시여, 여래는 한량없는 시간 동안 머뭅니다.
여래, 응공, 등정각은 미래의 끝[後際]과 나란히 머무릅니다. 여래는 한량없으며, 크게 자비로우심[大悲] 또한 한량없고, 세간을 편안케 하는 데 이러한 설을 짓는 것은 잘 설하는 것이라 이름합니다. 여래가 만약 다시 ‘다함없는 법, 상주하는 법은 모든 세간의 귀의를 받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면 역시 잘 설하는 것이라 이름합니다.
그러므로 여래는 아직 제도하지 못한 세간, 의지하지 못하는 세간에 있어서 미래의 끝과 같아져서 다함없는 귀의, 상주하는 귀의를 짓는다고 한다면, 이른바 여래, 응공, 등정각입니다. 법은 하나의 길[一乘]이고 승(僧)은 세 가지 길(三乘)의 무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귀의는 궁극적인 귀의는 아니며 불완전한 귀의라고 이름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의 길을 설하는 것은 궁극적인 법신을 얻는 것이며, 이 위에 다시 하나의 길의 법신을 설함이 없는 것입니다. 세 가지 길의 무리들은 공포가 있어서 여래에게 귀의하여 벗어남을 구하며 수학(修學)하는 것이니, 위없이 올바른 깨달음을 향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 가지 귀의는 궁극적인 귀의가 아니며 한계가 있는 귀의입니다.
만약 어떤 중생이 여래에게 조복하여 귀의하면 법의 은혜를 얻게 되고 믿고 즐기는 마음을 내게 될 것입니다. 법과 승의 두 가지 귀의는 단순히 두 가지 귀의가 아니라 여래에게 귀의하는 것입니다. 제일의(第一義)에 귀의하는 것은 여래에게 귀의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두 가지 귀의와 제일의는 궁극적으로 여래에게 귀의하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두 가지 귀의는 여래와 다르지 않고, 여래는 두 가지 귀의와 다르지 않으므로, 여래는 곧 삼귀의(三歸依)이기 때문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하나의 길을 설하는 것은 여래가 네 가지 무외를 성취하여 사자후를 설하는 것입니다.
여래가 하고자 하는 바의 방편으로 설하는 것이 곧 대승입니다. 세 가지 길이 없으며, 세 가지 길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길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나의 길이라는 것은 곧 제일의의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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