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卍-불법을만나고/卍-불교자료실

불타(佛陀)와 불전(佛傳)-붓다의 마지막 여로(2)

by 회심사 2017. 5. 1.


-붓다의 마지막 여로(2)-
    1) 꼬띠가마와 나디까 마을

    갠지스 강을 건너신 붓다께서는 많은 비구들과 함께 꼬띠가마(Kotigāma, 꼬띠 마을이라는 뜻)에 도착하였습니다. 그곳에서 붓다께서는 비구들에게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 즉 사성제(四聖諦)에 관해 설하셨습니다.

    “비구들이여!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四聖諦]’의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그 깊은 뜻에 도달하지 못하면,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한없이 미망된 생존을 반복하여 머물 곳이 없느니라. 그럼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란 무엇이겠는가?

    비구들이여! 이 세상은 ‘괴로움이라는 성스러운 진리[苦聖諦]’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 깊은 뜻에 도달하지 못하면, 사람은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한없이 미망된 생존을 반복하여 머물 곳이 없느니라.

    다음에 비구들이여! ‘괴로움의 원인이라는 성스러운 진리[苦集聖諦]’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것의 깊은 뜻에 도달하지 못하면, 사람은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한없이 미망된 생존을 반복하여 머물 곳이 없느니라.

    마찬가지로 비구들이여! ‘괴로움의 원인의 소멸이라는 성스러운 진리[苦滅聖諦]’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성스러운 진리[苦滅道聖諦]’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그것의 깊은 뜻에 도달하지 못하면, 사람은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한없이 미망된 생존을 반복하여 머물 곳이 없느니라.

    반대로 비구들이여! ‘괴로움이라는 성스러운 진리’를 잘 이해하고 그것의 깊은 의미에 도달한 사람 혹은 ‘괴로움의 원인이라는 성스러운 진리’, ‘괴로움의 소멸이라는 성스러운 진리’,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길이라는 성스러운 진리’를 각각 잘 이해하고, 그것의 깊은 뜻에 도달하는 사람은 생존에 대한 갈애, 생존의 원인이 되는 것을 단절하고, 다시 미망된 태어남을 받지 않느니라.”

    이와 같이 붓다께서는 꼬띠 마을에 머물면서 여러 비구들에게 사성제(四聖諦)의 법문을 설하셨습니다. 사성제는 불교의 가장 핵심 되는 교리입니다. 붓다께서는 기회 있을 때마다 사성제의 가르침을 설하셨습니다. 이 마지막 여로에서도 붓다는 또 다시 제자들에게 사성제의 가르침을 설한 것입니다. 특히 여기서는 붓다께서 사성제의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그 깊은 뜻에 도달하지 못하면,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제자들에게 일러주셨습니다. 이러한 붓다의 간곡한 법문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될 것입니다. 또한 붓다께서는 이어서 계(戒), 정(定), 혜(慧) 삼학(三學)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강조하셨습니다. 이 이후에도 붓다는 반복해서 삼학의 중요성에 대해서 설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계, 정, 혜 삼학은 불교 수행의 근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꼬띠 마을에서 충분히 머무신 다음, 붓다께서는 많은 비구들과 함께 나디까(Nādika) 마을에 도착하시어, 그곳 ‘긴자까와사타(Giñjakāvasatha, 벽돌 회관)’에 머무셨습니다.

    붓다께서 나디까 마을에 머물고 계실 때, 어느 날 아난다 존자가 이곳 나디까 마을에 살다가 죽은 사람이 어느 곳에 태어났는지에 대해 붓다께 여쭈었습니다. 붓다께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셨습니다.

    “아난다여! 이와 같이 죽은 뒤의 일에 대해 아는 것은, 여래(如來)에게 있어서는 별로 불가사의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사람이 죽은 후 일일이 여래의 처소에 와 묻는 것은 번쇄하고 번거롭다. 그러므로 아난다여! 이제부터 나는 ‘진리의 거울[法鏡, dhamma-ādāsa]’이라는 가르침을 설하리라. 이 가르침을 잘 이해한다면, 성스러운 제자들은 ‘나에게는 지옥의 경계는 다했다. 축생의 경계, 아귀의 경계, 나쁜 경계에 떨어진 조건은 모두 다했다. 나는 성자의 흐름에 든 이가 되어 깨달음의 세계에서 물러나지 아니하고, 틀림없이 바른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이가 되었다’라고, 각자 원하는 그대로 확실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붓다께서 나디까 마을의 ‘벽돌 회관’에 머물면서 비구들에게 많은 가르침을 설하셨습니다.

    2) 베살리의 암바빨리 동산

    나디까 마을에서 충분히 머무신 다음, 붓다와 제자들은 베살리(Vesāli, 毘舍離城)로 이동하였습니다. 베살리에 도착하신 붓다께서는 암바빨리(Ambapāli, 菴婆婆利)의 망고 동산에 머무셨습니다. 여기서 붓다께서는 비구들에게 사념처관(四念處觀)에 대해 자세히 설하셨습니다. 그 자세한 설법 내용은 생략합니다.

    당시 베살리에는 ‘암바빨리’라는 유명한 유녀(遊女)가 살고 있었습니다. 유녀 암바빨리는 붓다께서 베살리에 도착하시어 자신의 망고 동산에 머물고 계신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녀는 서둘러 붓다의 처소에 이르러 붓다께 문안드리고 한쪽에 앉았습니다. 그때 붓다께서는 그녀에게 여러 가지 가르침을 설하셨습니다. 붓다의 가르침을 받은 유녀 암바빨리는 기쁨에 넘쳐, 내일 자신이 세존과 비구들에게 공양을 올릴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붓다께서는 침묵으로써 수락하셨습니다.

    그때 베살리의 릿차비(Licchavī)족 사람들도 붓다께서 베살리에 도착하시어 암바빨리의 망고 동산에 머물고 계신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러자 릿차비족 사람들은 서둘러 화려하게 장식된 수레를 타고 붓다가 계시는 곳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도중에 유녀 암바빨리의 마차와 부딪쳐 릿차비족 사람들의 수레가 부셔져 버렸습니다. 릿차비족 사람들은 유녀 암바빨리를 질책했습니다. 그러자 암바빨리는 내일 세존과 비구들을 공양에 초대하기 위해 너무 서둘렀기 때문이라고 사죄했습니다. 가문에 대한 긍지가 높았던 릿차비족 사람들은 자신들이 붓다께 공양 올릴 기회를 유녀 암바빨리에게 빼앗겼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이 공양할 수 있도록 십만금(十萬金)에 권리를 양도하라고 요구하였으나 암바빨리는 그들의 요구를 거절하였습니다.

    여기서 릿차비족에 대해서 약간의 설명을 덧붙이는 것이 이 상황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릿차비족은 붓다시대에 인도의 강력한 부족이었습니다. 그들은 캇띠야(Khattiya, 刹帝利, 王族)였음이 분명합니다. 그들은 붓다 입멸 후, 자기들의 나라에 불탑을 세우기 위해 불사리(佛舍利)의 분배를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그들의 수도는 베살리였으며, 밧지스(Vajjīs)로 자주 인용되고 있는 밧지족 연방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힘은 거대한 통일체를 형성했는데, 만일 릿차비의 어떤 사람이 병에 걸리면, 모든 사람들이 문병을 갔다고 합니다. 릿차비의 집에서 실시되는 행사에는 전체 부족이 참가했다고 합니다. 또한 그들은 자신들의 도시에 방문한 사람은 누구든지 차별하지 않고 명예스럽게 모두 하나가 되기를 원했다고 합니다. 그들이 화려한 색상의 의복을 입고 밝게 색칠한 마차를 탄 모습을 매우 아름다웠다고 고 합니다. 이처럼 부족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이 대단했던 릿차비족들이 자기 마을을 방문한 붓다께 공양 올릴 기회를 유녀 암바빨리에게 빼앗겼다는 것에 몹시 자존심이 상했던 모양입니다.

    한편 릿차비족 사람들이 붓다를 친견하고 법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붓다와 제자들에게 먼저 공양 올릴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붓다는 이미 암바빨리의 공양을 받기로 약속하였으므로 릿차비족의 청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다음 날 유녀 암바빨리는 자신의 정원에 잘 요리된 딱딱하고 부드러운 갖가지 음식을 준비하여 세존과 제자들에게 공양을 올렸습니다. 공양이 끝났을 때 유녀 암바빨리는 붓다께 다음과 같이 사뢰었습니다.

    “세존이시여! 이 동산을 부처님을 상수로 하는 비구들에게 기진(寄進)하겠사옵니다. 부디 수락하여 주소서.”

    붓다께서는 그녀의 청을 수락하셨습니다. 여기서 붓다는 유녀 암바빨리에게 여러 가지 가르침을 설했으며, 그녀를 격려하여 기쁘게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암바빨리의 거처를 떠났습니다.

    3) 벨루와에서의 안거(安居)

    붓다께서 암바빨리의 망고 동산에서 마음껏 머무신 다음, 많은 비구들과 함께 벨루와(Beluva, Venu, 竹林) 마을로 이동하였습니다. 그때는 우기(雨期)가 시작될 무렵이었습니다. 그래서 붓다는 비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자, 비구들이여! 너희들은 벗이나 지인(知人) 혹은 지기(知己)를 의지하여 베살리로 가는 것이 좋으리라. 그리고 그곳에서 우기를 지내도록 하여라. 나는 이 벨루와 마을에 남아 우기를 보내리라.”

    그리하여 비구들은 베살리의 각 지방에 흩어져 그곳에서 우기를 맞이하였습니다. 그러나 붓다만은 혼자 이곳 벨루와 마을에 머물면서 우기를 맞이하였습니다. 그런데 우기에 접어든 지 얼마 되지 않아, 붓다께서는 중병(重病)에 걸렸습니다. 심한 고통이 엄습하여 죽어 버릴 것만 같았지만, 붓다께서는 바르게 사념하시고, 바르게 의식을 보존하시어 마음이 번잡하지 않게 고통을 참았습니다. 이러한 정진을 통해 붓다께서는 유수행(留壽行, 생명을 연장하는 행위)을 확립하여 병을 극복하였습니다. 그때 아난다가 붓다께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편찮으신 동안 저에게는 티끌만한 걱정도 없었사옵니다. 그래서 저는 ‘한 숨 돌리는 정도의 시간이다’라고 믿어 의심하지 않았사옵니다. ‘세존께서는 비구들에게 어떤 지시를 주지 않는 동안에는 결코 열반에 드시는 일은 없다’라고.”

    “아난다여! 비구들은 나에게 무엇을 기대하고 있느냐? 아난다여! 나는 안과 밖이 다르지 않은 가르침을 설하였느니라. 아난다여! 여래의 가르침에는 중요한 것은 비밀로 한다는 ‘스승의 주먹(師拳)’이라는 것은 없느니라. 또 아난다여! 만약 어떤 사람이 ‘비구의 모임을 내가 지도하고 있다’든가, 혹은 ‘비구의 모임은 나의 지시를 따르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비구의 모임에 대해 어떤 지시를 내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난다여! 여래는 ‘비구의 모임은 내가 지도하고 있다’든가, 혹은 ‘비구의 모임은 나의 지시를 따르고 있다’고 생각한 일은 결코 없느니라. 따라서 아난다여! 여래가 비구의 모임에 대해 어떤 지시를 한다는 것이 있을 수 있겠느냐? 그러나 아난다여! 이제 나도 늙었다. 나이를 먹어 고령이 되었느니라. 장년기를 지나 노년에 이르렀다. 나도 이제 나이 여든이 되었다.

    아난다여! 마치 낡은 수레를 가죽 끈으로 묶어 겨우 움직이는 것처럼 나의 몸도 가죽 끈으로 묶어 겨우 조금 움직이고 있는 것과 같느니라.”

    이 대목은 불교 교단의 성격을 이해함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자료입니다. 즉 여래의 법에는 스승이 특별한 제자에게만 전하는 은밀한 비전(秘傳)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붓다는 교단을 통솔한다거나, 교단은 붓다께 의지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4) 자귀의 법귀의와 사념처

    이어서 붓다는 아난다에게 다음과 같이 설했습니다.

    “그러므로 아난다여! 너희 비구들도 자기의 섬[自洲]에 머물고 자기에게 귀의[自歸依]하라. 다른 것[他]에 귀의하지 말라. 법의 섬[法洲]에 머물고 법에 귀의[法歸依]하라. 다른 것[他]에 귀의하지 말라.”

    “아난다여! 이 가르침 안에서, 비구는 몸(身)에 대해 몸을 따라가며 보면서(隨觀) 머문다. 열렬함과 삼빠자나(知)와 사띠(念)를 지녀, 세간에 관련한 탐욕과 근심을 벗어나 [머문다] … 느낌(受)에 대해 … 마음(意)에 대해 … 법(法)에 대해 법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열렬함과 삼빠자나와 사띠를 지녀, 세간에 관련한 탐욕과 근심을 벗어나 [머문다]. 아난다여! 이것을 일컬어, 비구가 자신을 섬으로 삼아[自洲] 머물고 자신에 의지하여 머물고[自歸依] 다른 이에게 의지하지 않는 것이라 하느니라. 또한 법을 섬으로 삼아[法洲] 머물고 법에 의지하여 머물고[法歸依] 다른 이에게 의지하지 않는 것이라 하느니라. 아난다여! 내가 [입멸한] 후에, 자신을 섬으로 삼아 머물고 자신에 의지하여 머물고 다른 이에게 의지하지 않는 이가 있다면, 또한 법을 섬으로 삼아 머물고 법에 의지하여 머물고 다른 것에 의지하지 않는 이가 있다면, 그는 곧 나의 제자들 중에서 최고의 비구가 될 것이다.”

    위 인용문에서 앞의 것은 ‘자등명(自燈明) 법등명(法燈明)’으로 널리 알려진 것입니다. 그리고 뒤의 것은 ‘자귀의 법귀의’ 내용이 곧 사념처관(四念處觀)임을 설한 대목입니다. 이것은 붓다께서 입멸하기 직전에 사념처 수행의 중요성을 강조한 매우 귀중한 법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