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卍-불법을만나고/卍-법문의도량

왜 살아있는 것들은 모두 죽는가?

by 회심사 2017. 8. 1.

    왜 살아있는 것들은 모두 죽는가? 병들어서도 죽고 사고가 나서도 죽고 살아있는 것들은 모두 죽습니다. 왜 늙고 병들며 죽느냐? 태어났으니 늙고 병들고 혹은 사고가 나는 것입니다. 내가 없었다면 늙고 병들고 사고 날 일이 없습니다. 결국 모든 살아있는 것들은 죽더라는 겁니다. 태난습화생으로 생이 있으면 결국 모두 죽는다. 이겁니다. 살아있는 것은 다 죽는 것입니다. 태어났기 때문에 죽는다는 거예요. 항하의 모래알 같이 많은 별들도 태어나는 것이 있고 죽는 것이 있습니다. 인간이 반드시 죽는 다는 것을 하루에 한 번이라도 생각하면 불안한 생각이 없어집니다. 공포의 마음은 자기가 죽는 줄을 모르는 데에 있습니다. 자기만 안 죽는다고 생각을 해요. 허허~ 위험한 일이 자기 주위에 닥치면 사람들은 아주 불안해집니다. 깨달은 사람이나 부처님은 모든 공포가 없어진 분들입니다. "심무가애 무가애고 무유공포..." 마음에 걸림이 없고 마음에 걸림이 없으므로 마음에 무서움과 두려움이 없다...." 지혜(=법칙)는 깨달음과 같습니다. 밝음이요 이것은 변함이 없습니다. 변하는 것은 법칙이 아니지요. 인간의 법은 변하는 인간(국회)이 만들기 때문에 헌법이라 하여도 결국은 뜯어고치게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법은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의 절대 변하지 않는 법칙은 "살아있는 모든 것은 다 죽는다" 이겁니다. 백퍼센트 다 죽어요. 예외는 없습니다. 이것이 철칙이에요. 지혜요 이치이지요. 이 생각으로 가득 차면 허무하지 않습니다. 나는 항상 살아있다고 생각하지요? 삶에 대한 집착이 강할수록 본능 속에서 불안한 것을 많이 느낍니다. 지혜로운 것은 불변이에요. 이치이기 때문입니다. 불변하는 것은 결코 불안하지 않습니다. 변하지 않는 것이 많이 가득 들어있어야 편안합니다. 마음이 아주 불안한 것은 온갖 변하는 데 집착을 강하게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생명체가 태어나려면 무언가 있었겠지요? 태어나기 전에 무언가 있었습니다. 뭔가 각자가 가지고 있는 것이 있었단 말입니다. 그래서 각자가 모습도 다르고 다 다릅니다. 왜 있는 것이 생겨날까? 뭔가 나에게 있다는 것은 뭔가 취(取)했기 때문이지요. 손으로 가져왔던지 마음으로 가져와서 취(取)했기 때문에 있는 것이 생긴 것입니다. 왜 취(取)하느냐?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하고 싶다는 것...갈구하는 것 좋아하기 때문이지요. 모든 생명들은 이 세상에 생겨나기 전에 먼저 사랑(갈애(渴愛))이 있었지요. 그리고 취(取)한 것입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만이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싫어하는 것도 사랑하는 것이에요. 사랑하고 싶은 것도 내가 취하는 것이요 싫어하는 것도 내가 갖는 것입니다. 좋아해도 가지게 되고 싫어해도 가지게 되니 그래서 내가 다 이것저것 갖는 것입니다. 뭔가 있다는 것은 사랑도 미움도 행복도 불행도 존재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사랑도 미움도 행복도 불행도 나를 괴롭게 하는 것이라 하셨지요. 그것은 나를 태어나게 합니다. 늙고 병들고 죽게 합니다. 일체개고(一切皆苦), 일체가 다 고(苦)입니다. 결국은 다 죽으니까요. 생로병사를 당연하게 생각할 줄만 알면 괴로움을 멀리 할 수 있습니다. 갈구하는 마음이 왜 생겨날까요? 몸도 있고 마음도 있기 때문입니다. 공을 체득하면 불생불멸합니다. 영생이라는 말입니다. 진리적인 사랑!! 바다와 같이 넓고 하늘과 같이 높은 사랑이나 자비는 어떤 걸까요? 부처님은 자비가 충만한 분입니다. 예수님은 사랑이 충만한 분입니다. 예수님이 나신지 2000년이 지나고 부처님이 나신지 2500년이 지난 지금도 노숙자(거지), 병자, 가난한자, 불구자는 항상 있습니다. 결코 없어지지 않지요... 우리가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구하는 사랑은 집착입니다. 일체 모든 생명에게 똑같이 주고받는 것이 사랑이고 자비입니다. 바다를 생각해 보십시오. 높고 낮음을 분별하지 않고 물은 평등하게 있습니다. 그 밑은 천차만별이지만 모두에게 골고루 자비와 사랑이 갑니다. 이 세상의 모든 생명체는 자기가 한 만큼 받습니다. 부처님은 이 법칙대로 평등하게 주는 자비를 가지고 있습니다. 비유이지만 개미와 배짱이 이야기를 보면 개미가 겨울을 편안하게 사는 것이 당연하고 베짱이가 죽는 것은 당연합니다. 개미는 여름에 열심히 일을 하여 비축하였고 베짱이는 그저 나무그늘 아래서 놀았기 때문이지요. 불쌍하다고 도와주는 것은 똑같은 사람을 만들어 내는 업이 될 뿐입니다. 모든 생명에게는 각자 나름의 능력이 있습니다.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 자꾸 도와주면 능력이 퇴화(退化)되는 것입니다. 버려진 어린아이는 능력을 발휘할 때까지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젊었거나 늙었거나 다 큰 사람들은 나름대로 능력이 있습니다. 그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훈련을 시켜야 합니다. 지은 대로 받도록 하는 것도 사랑과 자비입니다. 좋은 업을 짓도록 인도하는 것도 사랑과 자비입니다. 변하지 않는 진리를 터득하고 그에 따라 살게 하는 것도 사랑과 자비입니다. 이치를 잊으면 변화되는 것에 의지합니다. 변화되는 것에는 항상 업장(業障)이 따라 옵니다. 업장이란 사는데(업) 방해되는 것(장)이므로 결국은 사는 것이 괴롭다는 것이지요. 누가 말하였던가요. 사는 줄만 알면 무상하여 허무하고 괴롭나니 죽는 것을 터득한 자 영생을 얻으리라. 허허~

    출처 :불 교 원문보기   글쓴이 : 불멸의 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