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수가 가족이 되어
/ 지허 스님
조선시대 후기,
충청도의 한 고갯마루에서 자식도 없는 내외가
조그마한 주막을 차려 근근히 살림을 꾸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큰 기와집과 논밭을 사들여
마을 안의 제일 부자로 둔갑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없던 자식도 해마다 낳아 슬하에 세 아들을 두게 되었습니다.
그들 부부는 금이야 옥이야 하면서 아들들을 키웠고
글공부도 많이 시켰습니다.
세 아들은 하나같이 글을 잘 깨쳤고 문장도 좋아
과거에 응시하자 모두가 한꺼번에 급제하였습니다.
두 내외의 기쁨은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과거에 급제한 세 아들이 한양에서 돌아오는 날,
내외는 잔칫상을 차려놓고
마을 사람들과 풍악을 울리며 기다렸습니다.
마침내 세 아들은 마을 어귀로 들어섰고
부모와 마을 사람들은 환호하며 영접하였습니다.
아들들은 부모님께 절을 올리기 위해 말에서 내리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셋 모두가 발을 헛디뎌 땅바닥에 굴러 떨어졌고,
그 자리에서 아들 셋이 모두 죽고 말았습니다.
순식간에 잔칫집은 초상집으로 바뀌었고,
너무나 억울하고 분하였던 두 내외는
고을 원님을 찾아가 호소하였습니다.
“원님, 저희 아들의 원수를 갚아주십시오.
과거에 급제한 세 아들의 목숨을 빼앗아 간
그 못된 귀신을 붙잡아 처벌하여 주십시오.”
원님은 귀신을 붙잡아 처벌해 달라는 요구에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자식 셋을 한꺼번에 잃은 부모의 심정을 헤아려 타일렀습니다.
“나는 이 고을 마을 사람들이나 다스릴 뿐,
염라대왕이나 귀신은 다스리지 못한다네.
사람의 목숨은 하늘이 정하는 것이니, 슬프지만 어떻게 하겠나?”
두 내외는 힘없이 원님 앞에서 물러나왔고,
원님은 참으로 측은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귀신을 불러 물어보리라 생각하고 이방을 불렀습니다.
“이방은 쌀을 일곱 번 쓸고 일곱 번 씻어 밥을 지은 다음,
밥상을 차려 방죽 옆의 다리 위에 차려 놓아라.”
이어서 원님은 편지를 한 장 써서
담이 아주 큰 사령에게 주며 말했습니다.
“오늘 밤 자정에 방죽 옆의 다리로 가면
밥상을 받고 있는 늙은이가 있을 것이니,
그분들에게 이 편지를 전해드려라.”
자정이 되어 사령이 다리로 나가자,
과연 노인장 세 분이 밥상 앞에 앉아 있었습니다.
사령이 원님의 편지를 전하자,
노인장들은 편지를 읽고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습니다.
“시장하던 차에 대접도 잘 받았고
이 고을에 왔으니 원님을 만나보고 가는 것도 좋겠군!”
그리고는 담이 큰 사령을 따라왔습니다.
원님은 그들을 방안으로 모신 다음 따졌습니다.
“아무리 사람의 목숨을 다루는 염라대왕의 사자라고는 하지만,
이제 막 과거에 급제한 꽃다운 목숨을 셋씩이나
한꺼번에 앗아가다니!
그렇게 사람의 목숨을 함부로 다루어도 됩니까?”
“이보시오, 원님. 우리가 저승사자이기는 하지만
제 명이 다하지 않은 사람은 절대로 데려갈 수 없소이다.”
“그럼 그 세 아들도 명이 다하였다는 말씀이오?”
“그렇다마다요.”
“어떻게 앞길이 구만리 같은 젊은이 셋이
똑같이 명이 다할 수가 있습니까?
그것도 과거에 급제하고 집으로 돌아와 말에서 내리다가?”
“허허, 원님. 사실은 세 젊은이가
전생의 원수인 부모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죽은 것이외다.”
“도대체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일러주리다.
20여 년 전의 일입니다.
유기장수 세 사람이 고갯마루의 주막에서 하룻밤을 묵었을 때
주인 내외가 한밤중에 그들을 죽여 돈을 빼앗고
시체는 마구간 밑에 묻었지요.
주막집 내외는 부자가 되었고
원통하게 죽은 세 유기장사는
원수를 갚기 위해 주막집 내외의 아들로 태어났던 것이지요.”
“그렇다면 원수인 부모를 죽음으로 몰아넣어야지
왜 자신들이 죽었습니까?”
“말 잘 듣고 착하고 귀엽기 짝이 없는 자식으로 자라
과거까지 합격하여 최고의 기쁨을 주다가 갑자기
죽음으로써 두 내외 가슴에 가장 아픈 슬픔의 칼을 꽂은 것이지요.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이 어찌 예사로운 자식이었겠소?
세상일이란 다 인연 따라 오고가는 것이지요.”
이 말을 마치고 세 늙은이는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원님은 날이 밝기가 무섭게 사령들을 파견하여
고갯마루 주막집의 마구간 밑을 파헤쳐 보도록 하였습니다.
과연 염라대왕 사자들이 말한 대로 마구간 밑에는
시체 세 구가 썩지도 않은 채있었습니다.
원님은 곧 두 내외를 잡아들여 죄를 자백 받고 그들을 처벌하였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원수’가 남남 사이에서 맺어지는 것으로 착각을 합니다.
하지만 원수는 남남 사이에서만 등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이야기에서처럼, 오히려 큰 원수는
부부나 부모 ․ 자식 ․ 연인 등 결코 무시할 수도 없고
무시당할 수도 없는 사이에 깃들게 됩니다.
그야말로 원수가 가족이 되어
복수를 하는 경우도 심심찮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원수가 아닐지라도 가족이 되려면
다생다겁의 인연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참으로 묘하게도 심령과학자들이 연구한 바에 따르면,
여러 생 동안 가족관계를 맺었던 사람들이
이 생에서도 가족이 되어 있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현재의 가족들과 전생에 어떠한 인연을 맺었을까요?
그 많은 시간을 함께 하면서 ‘사랑’ 이란 이름으로
좋은 업도 많이 지었겠지만
서로를 힘들게 하는 업도 짓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마음 가득히 사랑이 넘치는 사이!
그렇다고 하여 서로를 힘들게 한
그 업의 과보를 피해가기란 용이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현생에 무척이나
좋은 인연의 가족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이라 할지라도
서로를 힘들게 하는 일은 거듭거듭 생겨나기 마련인 것입니다.
다시금 생각을 해보십시오.
만일 우리의 가족들이 좋은 인연으로만 만났다면
가족 때문에 속이 상하지 말아야 하고,
짜증이 나지 않아야 하고,
화가 나지 않아야 하고,
불필요한 근심걱정이 일어나지 않아야 합니다.
만약 가족 중의 그 누구로 인해 화가 나고
신경이 쓰이고 짜증이 나고 속이 상하는 일이 거듭된다면
무엇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그 사람과의 사이에 좋지 않은 인연이 얽혀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좋은 인연만으로 만났으면
언제나 반갑고 즐겁고 흐뭇해야 할 것인데,
좋지 못한 인연도 가지고 만났으니
얄밉고 야속하고 괘씸한 생각도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묘한 것은 그 업연이 우리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다가선다는 것입니다.
누구나가 좋은 인연 속에서 살기를 바라지만,
홀연히 나쁜 업이 우리 앞을 가로막습니다.
보다 정확히 이야기하면 우리가 이미 맺은 깊은 인연은 반드시
우리와 함께 하게끔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의 인연을 언제나 가꾸며 살아야 합니다.
지금의 가족을 좋은 인연으로 만났든
나쁜 인연으로 만났든
그 인연을 가꾸며 살아야 합니다.
좋은 인연이라고 하여 서로에게 결코 함부로 하여서는 안 됩니다.
가족일수록 서로가 말을 조심하고 생각을 잘 단속해야 합니다.
가까울수록 서로서로 조심하고 아껴서
응어리를 맺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가장 큰 장애가 되는 것은
서로간의 보이지 않는 매듭이요, 내 마음 속의 응어리 입니다.
그 매듭을 풀고 그 응어리를 풀면
장애는 사라지고 행복은 저절로 깃들게 됩니다.
그렇다면 맺힌 매듭을 풀고
마음 속 깊이 도사리고 있는 응어리를 푸는 방법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참회입니다.
‘잘못했다’고 하는 참회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