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卍-불법을만나고/卍-불교자료실

석존의 출가

by 회심사 2017. 4. 24.


卍-석존의 출가-卍
    불교는 말 그대로 '부처님(佛)의 가르침(敎)'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누구나 깨달음을 통해 부처님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부처님이란 불타(Buddha) 즉, 깨달은 사람(覺者)을 말한다.
    우리는 모두 부처님이 될 수 있는 소질과 성품이 있는데, 이를 불성(佛性)이라 한다.

    저마다 불성을 간직한 우리는 어떻게 하면 부처님이 될 수 있을까?
    첫째 부처님의 생애를 알고 그 삶대로 사는 것도 훌륭한 방법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생애는 한 인간이 진리를 깨쳐 부처님이 되는 길을 보여준다.

    우리가 불자로서 본받아야 할 삶의 모범은 바로 부처님의 생애에서 볼 수 있다.
    부처님의 생애를 배우는 것은 불교에 입문하고 나서 그 교조를 알아야 한다는 당위가 아니라, 부처님이 된 삶을 따르기 위한 것이다.

    중생이 부처님이 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생각과 말과 행동에서부터 우리도 부처님 같이 노력하다보면 언젠가는 부처님이 될 것이다.

    불교를 믿고 행한다는 것은 결국 ' 부처님을 닮아 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부처님같이 살고 싶은 이에게 부처님의 생애는 다시없는 인생의 귀중한 나침반이다.

    1. 석존의 출가(석존은 왜 모든 것을 버렸는가?)
    - 출가의 동기 -

    석존의 탄생과 일생에 관해서 우리는 비교적 신빙할 수 있는 많은 역사자료를 갖고 있습니다. 개중에는 절대적 인물로 부각시키기 위하여 신비화시킨 흔적도 엿보이지만 신화는 하나의 상징이므로, 그 상징을 통해 역사적 인물이었던 석존의 일생을 더듬어 볼 수 있습니다.

    석존의 생애를 알려 주는 직접적인 문헌자료로는 아함부 계통의 여러 경전 중 특히 [불소행찬], [석가보], [상응부 경전] 등이 있습니다. 또 석존의 일생을 증명할 수 있는 고고학적 유물도 남아있습니다. 지금도 룸비니(네팔의 다라니지방)에는 기원전 250년 경에 아쇼카왕이[여기서 붓다 석가모니가 탄생하다.]라고, 새겨서 세운 돌기둥이 남아있습니다.

    석가족은 사성계급 중의 크샤트리아(무사계급)로서 농업을 생업으로 하는 태양의 후예라는 부족집단로, 코사라라는 대국과 인접한 작은 나라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비록 대국에 속해 있었지만 민주적인 공화체제 아래 평화롭고 자유로 왔던 그 나라의 온화한 분위기 속에서 석존은 성장하였습니다.

    석가란 그 종족의 이름이고 모니는 Muni라는 말을 옮겨 쓴 것으로 성인(聖人)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석가모니]는 [석가족에서 나신 성인]이라는 뜻으로서 그 분의 본명이 아닙니다. 그 분은 고오타마 싯타르타라는 태자로서의 이름이 있었고, 대각을 이룬 후에는 [불타] 즉 [깨달은 분]이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석존께서 부처가 된 뒤 비구들에게 지난 날의 왕자 시절을 이렇게 회상하고 있습니다.

    [내가 아버지의 집에 있을 때에는 매우 행복했었다.
    정원에는 연꽃이 피어나는 연못이 있었고, 내 방에는 늘 카시국에서 나는 전단향의 향기가 그윽했었다. 내가 밖에 나갈 때나 비나 추위 그리고 더위를 막기 위해 백산(白傘)이 받쳐졌고 계절에 따라 지내는 별장이 따로 있었고...]

    이런 안온과 풍요로움 속에서 왕자로서 갖추어야 할 무예와 학문을 익혔고, 17살 때 코리족의 선각왕의 딸인 야수다라와 결혼하였으며, 라훌라라는 아들을 낳았습니다.

    석존은 이와 같이 상류 계급의 귀공자로서 축복받으며 탄생했으나 7일만에 생모와 사별하는 슬픔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지식인으로서의 소양도 갖추었고 한 여성과의 사랑을 나누는 등 인간으로서의 괴로움이나 즐거움을 모두 겪는 실인생(實人生)을 산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마음속에는 늘 일말의 우수가 깃들어 있었습니다.
    궁전 안의 화사한 환락보다는 나무 그늘에 조용히 앉아서 사색하는 것을 즐겼습니다.
    사색하는 시간은 점점 늘어났습니다.

    석존이 후일 제자들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렇듯 나의 출가 전의 생활이 행복했지만, 그것이 참된 행복, 즉 궁극적으로 고(苦)가 없는 그런 행복은 아니었다. 사람이 늙고 죽는 것은 필연적인 것이며 그것을 피할 도리를 깨닫지 못했으면서 남의 늙음. 남의 죽음을 보고도 자신의 늙음. 죽음은 생각지 않고 혐오하고 비웃는 것은 어리석음이다. 또 바람직하지 못한 생각이다.]

    그래서 싯타르타는 청춘에 대한 교만은 사라지고 병. 죽음이라는 무거운 테마를 안고 우수에 잠기게 되었습니다. 경전에는 도성의 4대문에서 각각 노인과 병자와 장례행렬 그리고 출가 사문(沙門)을 보고, 마침내 사문이 되어 고가 없는 최상의 행복을 추구하고자 출가를 결심했다고 씌어 있습니다. 그래서 싯타르타는 부모, 처자 그리고 부귀영화 등 세속적인 일상생활을 버리고, 인간의 유한성에 대한 문제, 즉 고(苦 : 生. 老. 病. 死)를 극복할 수 있는 길-진리-을 찾고자 한 것입니다.

    또 싯타르타가 출가를 결심한 데는 당시 인도의 사회 여건도 많이 작용했습니다. 당시 크샤트리아 계층 청년들의 꿈은 왕이 되어 영토를 넓혀 강력한 왕국의 대왕이 되거나 아니면 정치적 야심을 버리고 출가해서 정신세계에 군림하는 성자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싯타르타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크샤트리아의 청년들이 우러러보는 대왕이 되려면 막강한 군사를 이끌고 침략을 해야 하는데 그러기에는 석가족은 더무 무력했으며 또 그런 침략주의를 좋아하지도 않았으므로 싯타르타가 갈 길은 정신적인 성자(聖者)의 길 뿐이었습니다. 생, 로, 병, 사 와 현세의 고뇌 그리고 자신의 처지를 성찰(省察)한 싯타르타는 인간이 바라는 최고 최상의 이상 추구에 온 생애와 정열을 바치기로 마음에 굳게 다짐했습니다.

    이러한 싯타르타의 출가는 개인적인 고뇌의 해결이나 현세적인 인간 고뇌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모든 인류의 이상을 추구하기 위한 정열적인 과감한 결단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