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卍-불법을만나고/卍-법문의도량

행복은 얻고 고통은 피한다.-달라이라마

by 회심사 2022. 1. 1.


행복은 얻고 고통은 피한다.-달라이라마


    이제 본격적으로 불교의 사성제(四聖)에 관해서 생각해 봅시다.
    우선 불교에서는 왜 사성제를 그토록 근본적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리고 도대체 부처님은 왜 사성제를 가르쳤는가하는 질문이 나올 법합니다.

    ​ 그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 먼저 우리 자신의 경험들을 사성제와 관련시켜 봅시다.
    우리 모두는 행복을 찾고 고통을 피하고 싶어 하는 욕구를 갖고 있습니다.
    이는 본능적인 것이라서 증명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행복을 얻고 싶어 하며, 그 열망을 충족시킬 권리를 갖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 모두는 고통을 피하고 싶어 하며, 고통을 피할 권리도 갖고 있습니다.
    이렇게 행복을 얻고 고통을 피하려는 열망이 당연한 것이라면, 문제는 과연 어떻게 그 열망을 충족시킬 것인가 입니다.

    ​ 그런 문제는 바로 사성제에 관해 생각하게 만듭니다.
    사성제는 두 쌍의 인과 관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먼저 한 쌍의 인과관계는, 우리가 당하는 고통은 아무 것도 없는 무(無)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그 고통을 가져온 원인들과 여러 조건들이 결합해서 만든 결과라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한 쌍의 인과관계는, 우리가 즐기는 행복 역시 그 행복을 가져온 원인들과 여러 조건들이 결합해서 만든 결과라는 것입니다.

    ​ 불교에서는 행복을 느낌에만 한정시키지 않습니다.
    고통이 완전히 중지된 상태를 뜻하는 ‘멸(滅)’은 느낌의 상태가 아닙니다.
    그러나 ‘멸’의 정의는 ‘고통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멸’은 다른 말로 ‘지고한 형태의 행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멸’ 즉, ‘진정한 행복’은 무(無)에서 생기거나 원인 없이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이 점은 매우 미묘합니다.
    불교의 관점에서 보면, ‘멸’은 조건 지어진 사건이 아니기 때문에, ‘멸’이 어떤 원인에 의해서 만들어진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수행과 노력에 의해서 ‘멸’을 얻습니다.
    노력 없이는 ‘멸’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멸’로 인도하는 수행(道)을 ‘멸’의 원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앞서 말했듯이 사성제는 두 쌍의 인과관계를 구분하고 있습니다.
    고통의 인과관계와 행복을 얻고 고통을 피하도록 하는 것이 바로 사성제를 가르치는 목적입니다.

    ​ 고통의 본질을 알고 그 원인을 제거한다.

    ​ 그런데 왜 고통의 원인은 고통스런 결과를 가져오고, 행복의 원인은 행복한 결과를 가져올까요?
    왜 사성제는 ‘고통’, ‘고통의 원인’, ‘고통의 소멸’, ‘행복’이라는 순서로 놓일까요?
    사성제를 설명한 순서는 실제로 사물이 생겨나는 순서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성제의 순서는 수행을 시작해서 깨달음을 얻게 되는 방법과 관련된 것입니다.

    ​ '보성론寶性論'에서 미륵보살이 말씀하길, 병을 치료하는 방법에는 네 단계가 있다고 했습니다.

    병을 진찰하고, 병의 원인을 제거해서, 건강한 상태가 되면 치료가 완수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고통을 알고, 그 원인을 제거해서 고통이 사라진 상태가 되면, 수행이 완성된 것이다.

    ​ 미륵보살은 이렇게 환자를 치료하는 과정에 비유하면서 사성제에 의거해서 깨달음을 얻는 방법을 설명했습니다.
    즉 환자가 건강해지려면, 첫 단계로 자신이 아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병을 치료하려는 욕구가 생기지 않습니다.
    일단 아프다는 것을 인정하면, 왜 아프게 되었는지, 병을 악화시키는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려고 할 것입니다.
    그 다음엔, 그 병을 치료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알게 되고, 병을 치료하고 싶어 합니다.
    단지 희망으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병의 원인을 알면 치료하고 싶은 욕구가 더 강해지고, 병의 원인을 알기 때문에 치료할 수 있다는 신뢰와 확신이 생기고 그런 확신이 있기 때문에 약을 먹고 치료를 받고 싶어지기 때문입니다.
    고통 받는 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한, 고통에서 벗어나려는 열망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수행하는 불교도의 첫걸음은 지금 상태가 고통스럽고, 좌절을 느끼며, 불만족스럽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 그런 다음에야, 고통을 일으킨 원인들과 조건들을 찾아내고 싶어집니다.
    우리가 고통스런 상태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라고 불교에서 강조하는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 그것을 모르면 불교를 오해하고 불교가 병적이거나, 비관주의이거나, 고통에 대한 강박관념을 갖고 있다고 생각할 위험이 있습니다.
    고통의 본질을 통찰하라고 부처님께서 그렇게 강조하신 까닭은, 고통에서 벗어날 탈출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통의 본질을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고통의 본질을 깊이 통찰 할수록 고통에서 벗어나려는 열망도 강해집니다.
    불교에서는 고통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다는 관점에서 고통의 본질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해탈이라는 개념이 없다면, 고통에 대해서 숙고하며 아무리 오랜 시간을 보낸들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 무지의 연속체가 중지되면 그런 행동을 하게 하는 의식이 중지 됩니다.
    그것이 중지되면 그런 행동을 하게 하는 의식이 중지됩니다.
    어떤 의미로는 두 쌍의 인과관계를 설명한 사성제를 자세히 설명한 것이 바로 '십이연기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앞서 말한 두 쌍의 인과관계 중에서, 한 쌍은 깨닫지 못한 중생들이 겪는 과정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고통의 원인과 고통의 인과관계를 말합니다.
    나머지 한 쌍은 깨달은 사람들이 겪는 과정으로서, 수행과 진정한 멸의 인과관계를 말합니다.
    부처님께서 이 두 가지 과정을 설명하실 때, 십이연기법(十二緣起法, 열두 고리의 상호 의존적 발생의 원리)을 가르치셨습니다.

    ​ ‘십이연기’는 윤회 속에서 일어나는 열두 고리의 연쇄적인 발생인데, 무명으로 시작해서 의지, 의식, 등의 순서로 진행됩니다.
    깨달음을 얻지 못한 중생들은 원인과 조건이 결합해서 만드는 이런 연쇄과정을 겪습니다.
    그런 중생일지라도 수행을 하면, 그 과정을 반대로 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된 연쇄과정은 깨달음으로 이끄는 과정입니다.

    ​ 예를 들어, 무지의 연속체가 중지되면 그런 행동을 하게 하는 의식이 중지 됩니다.
    그것이 중지되면 그런 행동을 하게 하는 의식이 중지됩니다.
    어떤 의미로는 두 쌍의 인과관계를 설명한 사성제를 자세히 설명한 것이 바로 ‘십이연기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달라이라마-

    출처:- 월간붓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