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세 인생(現世 人生)에 대하여.(1.2)만공선사
이 허망하기 짝이 없는 그 동안 인들 일분의 자유가 있었던가? 밥을 먹다가 라도 불의(不意)의 죽음이 닥치면 씹던 밥도 못 삼키고 죽어야 하고, 집을 아무리 많은 돈을 들여 찬란하게 짓다가도, 느닷없이 화재(火災)라도 만나면 방 안에 한 번 앉아 보지도 못하고 허망하게 되지 않는가? 직접 내 자신의 일에도 이렇게 늘 자유를 잃어버리는데, 인생의 집단인 사회와 국가를 세운다는 일이 얼마나 서글픈 일인가? 자유의 바탕을 얻어야 근본적 자유를 얻게 될 것이 아닌가. 자유가 어디에서 얻어지는지도 모르는 인간들이 자유를 부르짖는 것은, 쌀도 없이 밥을 지어 배부르게 먹는 이야기만으로 떠드는 셈이니라. 인생은 자기업신(自己業身)의 반영(反映)인 이 몽환(夢幻) 세계를 실상(實相)으로 알고, 울고 웃고 하는 것은 마치 은행나무가 물에 비치는 제 그림자를, 이성(異性)으로 감응(感應)하여 열매를 맺는 것과 같으니라. 인간이 산다는 것은 생의 연속이 아니라, 생멸(生滅)의 연속으로 인간이 죽는 순간도 죽기 전후 생활도 다 잊어버리고, 입태(入胎), 출태(出胎)의 고(苦)도 기억하지 못하고, 다만 현실적 육식(六識)으로 판단할 수 있는 이 생활만 느끼고 사는데, 천당에 갔다가 지옥에 갔다가 사람이 되었다가 짐승으로 떨어졌다가 하는 그러한 생이 금세 지나가고, 또 한 생이 금세 닥쳐오는 것이 마치 활동사진의 영상(影像)이 연속해 교환 이동되어 빠른 찰나에 다른 장면으로 나타나는 것과 같으니라. 인생은 과거를 부를 수도 없고, 미래를 보증할 수도 없는 것이다. 현재가 현재이기 때문에 현재를 완전히 파악하게 되어야 과거, 현재, 미래의 생활을 일단화(一單化)한 생활을 할 수 있나니라. 인생은 과거에 사는 것도 아니요. 미래에 사는 것도 아니요. 다만 현재에만 살고 있는데, 현재란 잠시도 머무름이 없이 과거에서 미래로 이동하는 순간이니, 그 순간에 느끼는 불안정한 삶을 어찌 실(實)답다 할 수 있으랴! 과거와 현재가 합치된 현실이 있나니 현재는 과거의 후신(後身)이요, 미래의 전신(前身)으로 과거, 현재, 미래가 하나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는 세계를 중심으로 하여 위로 상상할 수 없는 최고 문화세계가 헤아릴 수 없이 벌어져 있고, 아래로 저열극악(低劣極惡)한 그 양과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지옥의 세계가 다 함께 몽환 세계(夢幻世界)인 것이니, 과연 어떤 것이 실세계(實世界)인지 그것을 알아 얻는 것이 곧 진아 세계(眞我世界)를 체달(體達)하게 되는 것이니라. 나의 현재 생활이 일체(一切) 세계라, 현재 생활에서 자족(自足)을 못 얻으면 다시 얻을 도리가 없나니라. 인간들은 모두 자기에게는 좋은 것이 와야 할 희망을 갖고 생을 이어 가지만 좋은 것을 취하는 것이 곧 언짢은 것을 얻는 원인인 줄을 알지 못 하나니라. 인간 생활의 주체(主體)가 되는 생로병사(生老病死)와 희노애락(喜怒愛樂)까지도 다생(多生)으로 익혀 온 망령된 습관의 취집(聚集)이요 결과임을 확실히 깨달아야 생사를 벗어나게 되나니라. 이 우주에는 무한 극수적(無限極數的) 이류 중생(異類衆生)이 꽉 차서 각각 자기 습성에 맞는 생활권을 건립하고 있지만, 우리 육식(六識)은 다생(多生)의 습기(習氣)로 점점 고정화(固定化)하여 우리 사바세계 인간으로는 어느 한도를 넘어서는 도저히 볼 수 없고, 느낄 수도 없나니, 천인(天人)이니 지옥이니 신(神)이니 귀(鬼)니 하는 것도 결국 우리 육식으로는 판단할 수도 없는 이류 중생의 명상(名相)이니라. 습관은 천성이라 천재(天才)니 소질(素質)이니 하는 것도 다생으로 많이 익혀서 고정화하여 이루어진 것인데, 이것이 바로 업(業)이라는 것이다. 물체는 결합(結合), 해소(解消)의 이중 작용(二重作用)을 하기 때문에 영겁을 두고 우주는 건괴(建壞)되고, 인생은 생사를 반복하고 있나니라. 중생이라 하는 것은 한 개체에 국한된 소아적(小我的)인 생활을 하는 사람, 짐승, 벌레 등으로 일체 자유를 잃어버리게 되어 다만 업풍(業風)에 불려서 사생 육취(四生六趣)에 헤매게 되는 것이요, 불(佛)이라 하는 것은 일체 우주를 자신화(自身化)하여 일체 중생이 다 내 한 몸이요, 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가 다 내 한 집이라, 어느 집이나 어느 몸이나 취하고 버리는 것을 내 임의로 하나니라. 완인(完人)은 만유(萬有)를 자체화(自體化)하였기 때문에 만유의 형상을 임의로 지으며, 만유의 도리를 자유로 쓰게 되나니라. 천당은 갈 곳이요, 지옥은 못 갈 곳이라면 우주가 내 한 몸이요, 천당과 지옥이 내 한 집인데, 중생은 한 세계를 두 세계로 갈라놓고, 한 몸을 분신(分身)시켜 천당, 지옥으로 나누어 보내는데, 이것은 중생의 업연으로 됨이니라. 인격(人格)이 환경에 휘둘리는 사람은 영원한 평안(平安)을 얻을 길이 없나니라. 세상 사람들은 똥과 피의 주머니로 몸을 삼아 춥고 덥고 목마르고 배고픈 것만 귀중히 여기기 때문에 길이 윤회(輪廻)의 고취(苦趣)를 면치 못하나니라. 우리가 느끼는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 의(意)의 육식은 장소에 따라 변하고, 때에 따라 흩어지나니, 이렇게 시시각각으로 천류(遷流)하는 육식으로 어찌 인생이 근본정신을 파악할 수 있겠는가? 현세 인생(現世 人生)에 대하여.(2)/만공선사 세인(世人)들의 아무리 진보된 이론이나 심원(深遠)한 학설(學說)이라 할지라도 그것으로는 인생 문제를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것이니 이는 명상(名相)에 집착되었기 때문이니라. 이론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것을 명확하게 깨우쳐 주는 이론이라면, 그 이론은 곧 도의 입문으로 인도하는 대도사(大導師)가 되는 것이니라. 형이상학(形而上學)이나 유심론(唯心論)을 말하는 자 스스로 물질적 영역을 벗어나지 못한 것을 모르나니라. 세상에는 바른 말 하는 사람도 없는 동시에 그른 말을 하는 사람도 있지 않은 것이니라. 신(神)은 아무리 신통 자재(神通自在)한 최고신으로 인류 화복(人類禍福)을 주재(主宰)한다 하더라도 육체를 갖추지 못한 사(邪)이니라. 신의 존재를 부인하는 사람은 무지(無知)를 면치 못하고, 신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 사람은 어리석음을 면치 못하나니라. 현대 과학이 아무리 만능(萬能)을 자랑하지만 자타(自他)를 위하여 순용(順用)되지 않고, 역용(逆用)되는 이상 그것은 인류에게 실리(實利)를 주는 것보다 해독(害毒)을 더 많이 주는 것이니, 다만 세계가 자타의 아상(我相)이 없는 생활로 물질과 정신의 합치(合致)인 참된 과학 시대가 와야 전 인류는 합리적인 제도하에서 안정된 생활을 하게 될 것이니, 인간의 근본을 밝히는 정신문명(精神文明)이 사람마다 마음속에 건설하여야 잘 살 수 있는 진정한 평화가 되나니라. 물질과학의 힘으로서는 자연의 일부는 정복할지언정 자연의 전체를 정복할 수는 없는 것이요, 설사 다 정복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다생(多生)에 익혀 온 습성을 어느 정도까지 만족시키는 데 지나지 않을 뿐으로, 정말 습성 자체는 정복하지 못한 것이니, 그 습성 자체를 정복하고, 그 근본에 체달한 후라야 비로소 자연과 습성을 모두 자가용(自家用)으로 삼게 될 것이니라. 물질과 정신이 합치된 과학자는 영원의 만능을 발휘할 수 있나니라. 현대 사람은 자만심(自慢心)을 본위로 한 신경만 예민하여,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법문(法門)을 들을 때에 신중히 생각하지도 아니하고, 부인할 아무 근거도 없이 무조건 반박해 버리는 것으로 쾌사(快事)를 삼는 일이 많으니, 그것은 암흑의 길을 자취(自取)하는 것이니라. 아집(我執)은 배타적(排他的) 정신이라, 남이 곧 나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까닭에 나를 점점 더 축소시키는 무지이니라. 중생들은 잘하고 착해야 될 줄을 알면서도, 잘하고 착하게 하는 사람, 곧 나를 찾는 공부는 할 생각을 못하나니라. 중생들은 인간이 만물(萬物) 가운데 가장 귀한 것이 사색(思索)하는 데 있다하면서 사색하는 그 자체를 알아 볼 생각은 하지 못하나니라. 중생들은 자기 자신이 무엇인지도 까맣게 모르면서 학자인양 종교가인양 하여 제법 인생 문제를 논하는 것은 생명을 잘라 놓고 생명을 살리려는 것과 다를 바 없나니라. 이론이 끊어지고, 학론(學論)이 다한 곳에서도 한 걸음 더 나아가야 나를 발견하는데, 내가 나를 찾기 전에는 인생 문제의 해결은 결코 불가능하나니라. 인생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은 인연이나 희망이 아니요, 진아(眞我)를 체달하여 이사(理事)에 임의로 처리하게 되어야 하나니라. 중생들은 알 줄만 알고, 모를 줄은 모르나니라. 알지 못함을 알면 철저히 아는 것이니, 정말 아는 법은 알지 못할 줄을 능히 알 때에 비로소 진아에 체달되나니라. 지구(地球)라는 한 모태(母胎)에서 같이 출생한 동포가 서로 총칼을 겨누게 되니, 어느 형(兄)을 찌르려고 칼을 갈며, 어느 아우를 죽이려고 총을 만드는지 비참한 일이니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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