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卍-불법을만나고/卍-법문의도량

다시 듣는 사자 후,-경허선사​

by 회심사 2022. 4. 21.

다시 듣는 사자 후,-경허선사​


    선불교의 법통을 되살려낸 한국불교의 태산북두, 경허선사(1849~1942). 31세 때 상경하던 중 천안 부근에서 악성 전염병으로 시신이 널려 있는 참상을 보고 발심, 강원을 철폐하고 용맹정진에 들어갔는데 한 사미승이 전한 "소가 되어도 고삐를 뚫을 구멍이 없다"는 한마디에 활연대오 하였다. 천장암, 수덕사, 개심사, 부석사 등지를 왕래, 대중들에게 살아있는 법문을 펼쳐 선풍을 널리 펼쳤다.

    ​ 무릇 인생에 있어 삶이 힘이 넘치는 청년기에만 머물지 않은 것은 마치 달리는 말과 같고, 풀 끝의 이슬과 같으며, 서산에 넘어가는 해와 같다 하였으니 이것은 모든 현상이 한 찰라에도 생멸 변화하여 영원하지 않은 무상한 것을 말한다. 또한 똥 무더기 같고, 꿈속 같으며, 원수와 같고, 무서운 독사와 같다고 하는 것은 허망하여 좋은 일이 없음을 표현한 것이다.

    ​ 공자가 말씀하시기를 `내가 말이 없고자 한다'하였고 또 `반드시 그렇다 할 수도 없고, 그렇지 않다고 할 수도 없다'고 하였으며, 莊子는 `천지는 진리를 가리키는 한 손가락이요, 만물은 내 마음대로 부리는 한 마리의 말이라'하였다.

    나는 부처님의 법을 배우는 사문으로 마땅히 그 근본을 참구하고, 그 정묘한 법을 닦으면 백천 가지의 삼매와 한량없이 묘한 이치를 구태여 구하지 않아도 스스로 증득하리니, 모든 부처와 조사가 그 어찌 나와 다른 사람이리오.

    이제 성현 가신지 오래서 출가한 사람이 자기의 집과 육신도 알지 못하고, 허겁지겁하다가 헛되기 일생을 보내니, 우리 부처님의 正法眼藏을 매몰하여 밝히지 못하고, 온전히 허황되고 거짓되며, 요사하고 잔악함만 익힘으로써 잘못 성품이 이루어지게 되어, 심지어는 도리어 비방까지 하니, 슬프다 가히 말로써는 다할 수 없구나. ​

    육조대사께서 말씀하시기를 `앞생각이 미혹하면 중생이요.
    뒷생각을 깨달으면 곧 부처라'하시었다.
    또 위산 선사께서 말씀하시기를 `생각으로써 생각 없음의 그 묘한 생각 근원을 돌이켜 신령스런 불꽃이 다함 없으니, 생각이 다 한 그 근원에 사무치면 성품의 본바탕이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항상 머물게 되고, 事와 理가 둘이 아니면, 참된 부처가 如如함이라' 하였으니, 그 광명을 얻으면 모든 부처님과 동등하여 한결같이 되나, 만약 그 광명을 잃어버리면 생사에 순종하여 만겁을 걸어야 한다.

    마치 비유하면 용이 뼈를 바꿔도 그 비늘은 고치지 아니하고, 범부가 마음을 돌이켜 부처가 되어도 본래면목은 고치지 않는다 하였고 무명에 가린 성품이 곧 부처의 성품이요, 환희의 공한 몸이 곧 법신이라 하였다.

    ​ 이날 도리가 다만 지극히 가까움이라. 눈을 뜨면 문득 어그러짐에 집착되고, 눈을 감을지라도 또한 스스로 집착을 이루어 나타남이니,
    어떠한 것이 부처님입니까?
    곧 너 이니라 하시니
    이와 같아 분명히 가르침에는 번거로운 것이 불가함이나, 모두가 다 범부를 고쳐 성현을 이루게 하는 지름길이 된다.

    옛사람이 이와 같아 간절한 마음으로 틀림없는 말씀을 하셨으며, 긴요하고 간절함이 노파와 같은 마음을 썼으며, 외우고 익혀 연구하며 먼저 깨친 선지식에게 묻고 깨달음의 이치를 분명히 결택하여 자세히 탁마하면 도를 성취하리니,

    어느 누가 성불할 수 없으리오. 현명한 이나 어리석은 이나 귀한 이나 천한 이나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두 성불할 수 있는 요건이 충분히 있다. 슬프다. 머리 깎고 먹물 옷을 입는 것은 마땅히 어떤 일을 하려 함인가? 눈으로 색을 끌어들이는 것은 아귀로 돌아가게 됨이요, 귀로 소리를 따르는 것은 아비지옥에 들어감이다. ​

    소리와 색에 심취하면 축생계의 깊은 수렁과 함정에 빠져 온갖 고통을 받아 생사의 깊은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니, 오늘도 이러하고 내일도 또한 이러하다가 임종시에 이르러서는 머리가 깨지고 이마가 터지고 간장이 잘라지는 듯 아프며 손가락과 다리를 잡아 빼는 듯할 때에 그 슬프고 두려움이 끓는 물에 들어간 것과 같고, 그 아픔을 참는 것은 마치 거북이의 가죽을 산 채로 벗기는 것과 같다.

    이러할 때에 정신이 혼미하여 천상에 오르건 지옥에 떨어지건 밝혀 중득함을 생각조차 하지 못하니 슬프고 애석하다. 돌이켜 생각하면 임종할 때에 앉아서 죽고 서서 죽는 것을, 활짝 열린 문을 통해 나가는 사람과 같이 쉽게 하나니, 戒禪師는 주장자를 짚고 입적하였으며, 佛印 장로는 홀연히 한번 웃고 가셨다.

    ​ 또한 어떤 도인은 젓가락질을 하다가 그대로 가셨으며, 발꿈치를 곤두세우고 입적하기도 하도, 혹 거꾸로 서서 입적하셨으니, 이런 도인들이 가시는 땅은 염라대왕뿐만 아니라 모든 하늘이나 모든 부처님까지도 알지 못한다 하였다. 이것은 모두 자기의 자성을 돌이켜 보는 공부로써 온전히 定과 慧를 배움이다.

    슬프다.
    옛사람이 어찌 지금 사람과 다르랴. 洞山 선사께서 말씀하시기를 `袈裟있는 아래에서 몸을 잃는 사람이 곧 이처럼 안타까움이라'하셨으니 가히 경계하여 가르치심이라. 위에서 슬프도다 하기 네 번 거듭하였으니 가슴을 찌르는 한이 바다와 같음을 누가 알 수 있으리오.

    ​ 출처: 불교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