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卍-불법을만나고/卍-불교자료실

보리심

by 회심사 2017. 4. 26.


卍-보리심-卍
    보리심이란 한마디로 부처님의 지혜인 무상정등정각을 이루고자 하는 마음이다.
    무상정등정각이란 범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한역어로, 위없는 평등한 바른 깨달음이라는 말로 부처님의 지혜를 일컫는다.

    즉, 부처가 되겠다는 서원을 세우는 것이 발보리심이다.
    보리심에 의해 수행이 시작되므로 보리심을 부처의 어머니라고 한다.
    따라서 불자 된 자는 마땅히 세속적 욕망과 쾌락의 노예가 되지 말고 불법승 삼보를 진리로 확신하고 거기에 의지하여 자신의 삶을 중생에서 부처로, 범부에서 성인으로 바꾸고자 하는 서원을 세워야 할 것이니 이것이 바로 발보리심이다.

    보리심이란 수행을 해서 무엇을 할 것인지가 결정되는 근거이며, 증득할 수 있는 경지가 미리 정해지는 중대한 문제이다.

    왜냐하면 산에 오를 때 정상까지 가야겠다는 목적의식이 분명해야 정상까지 갈 수 있다.
    만일 그런 목적의식이 없다면 중턱이나 얕은 봉오리에 올라가서 아래를 내려다보고는 그 경취에 반해서 그만 거기에 머무르고 말 것이다.

    신통을 얻기 위해, 병을 낳기 위해, 편안함을 얻기 위해 등의 목적을 가지고 수행하면 나름대로의 목적은 성취할 수 있어도 무상정등정각을 이루신 부처의 자리에 나아갈 수는 없다.

    따라서 불자들은 수행의 첫 관문에서부터 수행의 목표를 분명히 세워야 한다.
    무엇이 바른 원(願)인가.

    중생을 다 건지오리다.
    번뇌를 다 끊으오리다.
    법문을 다 배우오리다.
    불도를 다 이루오리다.

    이것은 모든 수행자가 서원하여 부처를 이루는 본원인 사홍서원이다.
    불교 수행의 목적은 바로 이 사홍서원에 있다.
    즉 보리심은 자신만을 위한 깨달음이 아니라 일체중생을 함께 성불케 하고 함께 안락케 하는 마음이다.

    나아가 원효스님은 <대승기신론별기>에서 직심, 신심, 대비심의 세 가지 마음을 갖춘 발심을 무상보리심이라고 하였다.

    직심이라고 한 것은 굽지 않았다는 뜻이다.
    만약 진여를 생각하면 곧 마음이 평등하게 되어 다시 다른 갈래가 없을 것이니 무슨 일그러지고 굽음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진여법을 생각하기 때문'이라 말하였으니, 이는 곧 자리와 이타의 근본인 것이다.
    심심이라고 한 것은 근원을 궁구한다는 뜻이다.
    만약 하나의 선이라도 갖추어지지 않으면 근원에 돌아갈 수 없는 것이니, 원에 돌아가는 것이 이루어지려면 반드시 만행을 갖추어야 한다.

    따라서 '일체의 모든 선행을 즐겨 이루기 때문'이라고 말한 것이며, 이는 곧 자리행의 근본이다. 대비심이란 널리 제도한다는 뜻이니 '중생의 고통을 덜어 주고자 하기 때문'이라 말하였으며, 이는 곧 이타행의 근본이다.



    이 세 가지 마음을 내면 어떤 악이든 여의지 않음이 없고 어떤 선이든 닦지 않음이 없으며 한 중생도 제도되지 않는 것이 없으니, 이를 無上菩提心이라고 한다.

    곧은 마음이란 진여를 생각하는 것이니 왜 진여를 생각하면 마음이 평등해질까?
    진여란 만물의 참모습으로 그 모습에는 나와 네가 없고, 못났다거나 잘났다거나, 더럽다거나 깨끗하다거나, 추하다거나 아름답다거나 하는 일체의 분별이 없다.

    따라서 사물이 현상적으로는 각기 다른 모습을 하고 있지만 본래는 모두 진여의 법성 그 자체임을 생각하면 차별심이 없어지고 따라서 분별과 대립이 사라지며 자리와 이타가 하나임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또한 이것을 알게 되면 아무리 사소한 선행이라도 즐겨 닦고자 하며, 중생의 고통을 덜어 주고자 하는 자리이타의 행이 저절로 나온다.

    이러한 서원이라야 모든 중생을 다 건질 수 있는 무상보리를 얻을 수 있으므로 무상보리심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자는 처음 발심할 때 이러한 마음을 뚜렷하게 세우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러한 서원을 세우고 수행을 하면 이것이 바로 원력에 의지한 삶이다.

    세속의 사람들은 욕망에 의해 산다.
    욕망에 기초하여 여러 가지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며 산다.

    그러나 욕망에 기초한 모든 것은 그 과정에 있어서나 결과에 있어서나 모두 괴롭다. 이루지 못할 때는 이루지 못해서 괴롭고 이룬 뒤에는 그것을 지키기 위해 괴롭다.

    그러나 원력에 의한 삶은 그 결과가 즐거운 것은 물론이거니와 과정이 또한 즐겁다.
    만일 처음과 중간과 끝이 모두 즐거운 것이 아니라면 바른 수행이라 할 수 없다.
    흔히 수행하면 고행을 떠올릴지 모른다.
    그러나 수행은 성불이라는 궁극에 가기 전에도 첫 마음을 낸 순간부터 이내 즐거움을 준다.

    물론 수행 중에 장애도 있고 고통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끝없이 반복되는 세속의 고통과 다르다.
    수행 중의 고통은 고통을 마감하기위한 고통이므로 끝이 있는 고통이다.
    즉 앞으로 나아감을 위한 과정이므로 은근한 인내를 가지고 극복해 나가다 보면 모든 고통의 본질을 꿰뚫고 그 자리에서 지혜를 싹 틔운다.

    따라서 수행자는 마음이 편안하고 타인에 대한 이해와 사랑이 깊어진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속에 탐, 진, 치가 독이 힘을 발휘하지 못하도록 잘 조복 받는다.
    또한 경계에 부딪치더라도 두려워하거나 괴로워하지 않고 이를 수행의 재료삼아 더욱 정진한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깨달음을 이룬 후 뿐만 아니라 발보심을 낸 바로 그 순간 이미 안락을 얻는다.

    발심과 마지막은 차별이 없지만 이런 두 마음에 앞 마음이 어렵네.
    자기 제도는 못했으나 먼저 남을 건지나니 그러므로 초발심에 나는 경례하노라. <무량수경종요>

    초발심의 마음과 깨달은 후의 마음이 둘이 아니기 때문에 앞 마음과 뒤 마음은 차별이 없다.
    그러나 초발심이 없었던들 어떻게 부처가 있을 수 있겠는가.
    이렇듯 초발심이 중요하다.

    계율수행에 있어서도 보리심을 버리지 않으면 비록 계를 어겼다고 하더라도 잃은 것은 아니라 하였고, 염불수행에 있어서도 정토에 왕생하기 위해서는 보리심이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렇듯 보리심은 모든 수행의 근본이자 성불과 왕생극락의 씨앗이며, 공덕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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