卍-신라의 석불-卍
그 창건연대가 540년이니 불교조각의 시작은 아무래도 공인이후인 6세기 중반부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신라가 삼국통일 이전에 조성한 석조불상으로는 현재 경주박물관에 있는 미륵반가상과 남산의 삼화령 삼존석불, 경주 배리의 삼체석불 등을 들 수 있다. 한편 분황사 석탑의 초층 옥신 4면에 세워진 인왕상(仁王像) 조각도 석조물로서는 주목되는 유품이라 할 것이다. 신라인들은 모방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다. 전래한 석불이나 다른 나라에서 배운 기술을 살려서 신라인이 그리는 石佛을 만들어 낸 것이다. 그 완성품이 석굴암의 석불일ㄹ란 것을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가. 경주 송화산 미륵반가상(미륵반가상) 현재 경주박물관에 소장되고 있는 이 돌부처는 높이 1.25m로 화강석으로 조각한 것이다. 본래 경주시 충효동 송화산 동쪽 기슭에 있는 한 경작지에서 출토되어 박물관에 옮겨 온 것이다. 양쪽 팔과 목부분이 결손된 것이며, 원형대좌위에 앉아 있는데, 옷자락이 흘러 그 위를 덮고 있다. 전체적으로 균형잡힌 조각수법을 보여준다. 조성연대는 7세기 초반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현존 고신라기(古新羅期)의 석불로서는 가장 오래된 유품으로 생각되는 것이다. 나. 경주 배리의 석불입상(石佛立像) 경북 경주시 배동(경북 월성군 내남면 배리)에 소재하며 보물 제63호로 지정된 것이다. 본존상의 높이는 2.6m, 좌우 협시상의 높이는 2.3m로 화강석에 조각한 것이며, 새 분의 입상이므로 속칭 삼체불(三體佛)이라 하나, 가운데 여래입상과 두 보살상은 각각 부근에 도괴(倒壞)되어 있던 것을 한곳에 모시게 된 것이다. 중앙의 여래입상은 나발(螺髮=곱슬머리)의 머리위에 특이한 이중 육계가 있다. 둥근 얼굴은 풍만하고,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다. 목은 매우 짧아서 얼굴과 어깨가 붙은 듯이 보인다. 양쪽 어깨에 걸쳐진 法衣는 전면에 U字形의 衣紋을 이루었고, 두꺼우며 간략하게 표현되었다. 오른 손은 어깨 높이까지 든 시무외인(施無畏印)을 하고, 왼 손은 아래로 늘어뜨려서 여원인(與願印)을 하고 있다. 두광은 깨어졌으며, 대좌 역시 본래의 것은 파손되었고, 현재는 자연석위에 세워져 있다. 왼쪽 보살은 머리위에 三山冠을 쓰고 풍만한 얼굴에 미소를 짓고 있다. 왼족 손에는 寶甁(감로병)을 들었으며, 오른손은 가슴에 들었다. 衣紋은 마멸되어 흐리고, 허리띠가 보인다. 장엄구는 간략하여 목걸이 뿐이며, 팔목에서 天衣를 길 게 늘어뜨렸다. 頭光은 원형이다. 대좌 역시 마멸되었다. 이에 비하여 오른쪽 보살은 머리에 보관을 쓰고, 목걸이 팔찌를 비롯하여 전면에는 굵은 영락 등을 갖추고 있다. 학자들은 이 석불이 삼국기 말기인 7세기 전반에 조성된 불상에 속한다고 보고 있다. 古新羅期 佛像의 특징은 몸에 비하여 머리가 비교적 작다는 점이다. 다. 삼화령삼존석불(三花嶺三尊石佛) 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중앙 본존의 높이는 1.61m, 좌우 협시보살은 98cm로 화강석으로 조성한 것이다. 이 삼존불은 경주 남산 장창곡(長倉谷)에서 옯겨 온 것으로 본존여래상은 의자에 걸터 앉은 듯한 형태를 이루고 있어 특히 주목된다. 타원형 연화좌 위에 두 다리를 느려뜨리고 앉은 본존은 소발의 머리위에 조그만한 육계가 있으며, 두 귀는 기어서 어깨위까지 늘어졌다. 풍만한 얼굴에는 미소가 보이고, 목에는 삼도가 보이지 않는다. 法衣는 양쪽어깨 위에 걸쳐져서 전신을 덮고 있는데, 양쪽 무릅 부분에서 동심원형의 옷주름을 보이며 그 아래 군의의 매듭이 살짝 보인다. 두 손은 매우 큰데 오른 손은 무릅 위로 들고 왼손은 무릅위에 놓고 옷자락을 잡고 있다. 광배는 원형의 두광만 갖추었다. 보살입상은 역시 원형 두광이있고, 대좌는 원래 없었다. 머리에는 삼산관을 썼으며, 얼굴에는미소를 띄우고 있다. 목걸이를 하였고, 팔에도 완천을 하였다. 天衣는 양족 어깨를에서 흘러내려 가슴아래와 다리부분에서 U자형을 이루었다. 오른쪽 보살입상은 두손으로 蓮줄기를 잡고 있으며, 왼쪽 보살은 왼 손은 어깨부근에서 蓮엽형을 오른손은 가슴부분에서 무엇인가를 잡고 있는 모습니다. 이 불상은 몸에 비하여 얼굴이 너무 크고 얼굴의 미소에서 고식을 찾아 볼 수 있으므로 삼국말기의 생의사(生義寺)의 돌미륵인 남산 삼화령의 미륵세존으로 추정되고 있다. * 2. 統一新羅時代의 石佛. 통일신라시대라 함은 古新羅가 百濟와 高句麗를 멸하고 故土를 차지한 때부터 이후 高麗王朝에 멸망될 때 까지(935)의 약 270년간을 말한다. 통일신라시대에 들어서서 新羅佛像은 우선 前代로부터의 傳承的인 樣式을 나타내고 있음을 볼 수 있는데, 완전히 신라적인 佛像으로 변하게 되는 시기를 8세기 중엽인 통일성대~통일중대로 보아 그 대표작을 경주 토함산의 石窟庵을 들 수 있겠으며, 이 걸작을 우리나라 불교미술의 정화(精華)라 일컫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8세기말에 이르러 신라의 불교조각은 전통위의 답보(踏步)에서 조성규모가 축소되고, 형식화되기 시작하였다. 조상자체의 優美와 장식, 섬약에만 치우치게 되었던 것이다. 石佛像으로는 "계유명삼존천불비상(癸酉銘三尊千佛碑像)", 癸酉銘全氏 아미타불 삼존입상 등의 특이한 비상(碑像)을 비롯하여 "군위 삼존석굴내의 삼존불", 甘山寺石造彌勒菩薩立像", 동화사 비로암 석조비로자나불 등을 들 수 있다. 가. 계유명삼존천불비상은 연기지방(燕岐地方)에서 발견된 비상(碑像) 가운데 가장 오래고 큰 작품이다. 낮은 기단(基壇)위에 직사각형의 비신( 碑身)이 세워져 있고, 비신 위에는 지붕돌이 올려져 있는 전형적인 비상 형태이다. 비신부는 4면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앞면 하단부 중앙에 큼직한 삼존좌불상< 三尊坐佛像 >을 새겼으며, 협시보살(脇侍菩薩) 좌우로 비상을 조성한 조성기(造成記)>를 새겼고, 머리 위로는 작은 불좌상들을 9단에 나누어 촘촘히 나타내었다. 이 작은 불상들은 좌우측면과 뒷면 그리고 지붕돌에까지 표현되었는데 깨어진 지붕돌의 수까지 계산한다면 900여구가 넘는 불상이어서 천불< 千佛 >을 나타낸 것으로 생각된다. 앞면의 삼존불좌상은 비상의 주존불(主尊佛)인데 본존불은 결가부좌(結跏趺坐)로 앉아 있으며, 좌우보살상은 입상으로 삼각형구도를 보여 준다. 모두 연꽃대좌와 보주형광배(寶珠形光背)를 나타내었다. 이 불상은 삼국시대 백제불양식(百濟佛樣式)이 짙게 남아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명문(銘文)에 보이듯이 신라 문무왕(文武王 ) 13년(673)에 백제유민( 百濟流民)들이 그들의 선조를 위하여 조성하였다는 사실과 더불어 이 비상의 역사적 의의를 잘 설명하고 있다. 나. 계유명 전씨 아미타불삼존입상 1960년 9월, 忠南 燕岐郡 全東面 多方里 碑巖寺에서 발견되었다. 장방형 4면석 각면에 불상과 명문(銘文)을 조각한 비상(碑像) 형식이다. 정면 양쪽에 둥근 기둥을 세워 감형< 龕形 >을 이룬 가운데에 테를 두어 명문을 새기고. 그 안에 아미타(阿彌陀) 삼존상(三尊像)이 양각되어 있다. 본존은 얼굴이 다 부서졌으나, 홀잎 복련(複蓮)의 수미좌(須彌座) 위에 결가부좌(結跏趺坐)한 상이다. 통견< 通肩 >의 법의< 法衣 >를 비롯하여 습의< 褶衣 > 사이에 연주가 곁들여져 있다. 본존 대좌 밑 좌우에는 안을 향하여 사자(獅子)를 배치하였는데, 바로 그 등 위치에 복련(複蓮) 위에 시립(侍立)한 협시보살이 있다. 보살상 역시 얼굴은 모두 부서져 알아볼 수 없으나, 연화(蓮華)가 있는 원광(圓光)이 있고, 목에는 가슴까지 늘어진 짧은 목걸이와 무릎까지 내려오는 긴 영락(瓔珞)이 걸쳐져 있다. 본존과 협시(협侍)의 어깨 사이에는 원광(圓光)이 있는 나한상(羅漢像)이 얼굴만 내밀고 있는데, 손상이 심하다. 또 협시상 좌우에는 인왕상(仁王像)이 연대(蓮臺) 위에 시립(侍立)해 있으며, 이 여러 상들 밑에는 단판(單瓣)의 큰 연잎 9엽(葉)이 새겨저 있는데, 화불(化佛)이 있고, 밖에는 9구의 비천상(飛天像)이 있다. 두 측면에는 아래위 2단에 각각 2구씩 연경(蓮莖)으로 이어진 복련(複蓮) 위에 악기를 연주하는 낙천좌상(樂天坐像)이 있고, 하단에는 앞쪽을 향한 용두(龍頭)>가 조각되었으며, 사이에 명문(銘文)이 각자(刻字)되어 있다. 뒷면은 4단을 이루고, 단마다 5구(軀)씩의 작은 좌불이 안치되었으며, 간지(間地)에는 人名이 새겨져 있다. 바닥에 장방형의 촉이 있는 것을 보면, 따로 대석이 마련되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 상의 조각은 정교 세치(細緻)하며 장엄을 다하였고, 세부양식에 있어서도 옛 형식을 남기고 있는 점이 계유명삼존천불비상(국보 제108호)과 비슷하다. 이러한 양식과 명문(銘文)에 의하여, 조성연대는 신라통일 직후 문무왕(文武王) 13년(673)으로 추정되고 있다. 다. 군위 제2석굴암 미타삼존불. 국보 제 109호, 경북 군위군 부계면 남산동 소재하며, 굴의 높이는 4.25m 본존불 높이 2.88m, 좌우보살상 높이 1.92-1.80m이며, 화강석으로 조성되었다. 동남향의 거대한 자연 암벽에 경영된 석굴로서 입구는 원형에 가까우나 평면은 거의 방형을 이루고 있다. 본존은 불신과 대좌가 두 돌로 조성되었는데 방형대좌 위에 결가부좌하였다. 소발의 머리에는 큼직한 육계가 있고 둥근편이며, 두귀는 길다. 광배는 따로 만들지 않고 벽면에 화염문을 선각하였다. 좌우의 협시보살은 허리를 약간 비틀어 본존을 향하고 있는 자세이다. 머리에는 삼면관을 쓰고 몹발은 어깨위로 늘어졌으며, 목에는 목걸이 팔에는 완천을 하였고, 천의는 두 손에 걸쳐저서 앞에서 U자형을 그리고 있다. 삼존상의 배치는 삼국시대 이래의 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자연석굴내에 불상을 봉안한 점은 중국석굴양식과 같은 점으로 미뤄서 경주 석굴암에 이르는 계보를 규명하는데 중요한 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성연대는 입지조건으로 보아 700년을 전후한 시기로 추정되고 있다. 라. 동화사 비로암 석조비로자나불 - 보물 제244호, 대구광역시 동구 도학동 동화사 비로암내 비로전에 안치되어 있다. 좌상높이 1.29m, 광배-1.97m, 대좌높이 89cm이며, 화강석으로 조성되었다. 통일신라시대 下 代에 성행한 대좌와 광배를 구비한 전형적인 비로자나불의 일레라 한다. 나발의 머리위에 육게가 있고, 상호는 둥글고 풍만하며, 미간 백호와 눈 코 입등이 정제되었으나, 전체에 비하여 작은 느낌을 준다. 手印은 智拳印을 하였으며, 尊名이 비로자나불임을 곧 알 수 있다. 조성연대는 신라 경문왕대인 9세기 중반이라 추정되고 있다. 光背는 만곡된 舟形거신광인 바, 원형의 두광에는 중심부에 연꽃모야으 그 주위에는 보상화문을 새겼다.정상부의 보주형(寶珠形) 밑에는 삼존의 化佛을 새겼으며, 신광을 표현한 선조(線條)상에는 좌우 대칭으로 도합 8구의 화불이 배치되었다. 마. 관봉 석조여래좌상 갓바위 부처 ( 冠峰石造如來坐像-보물 제 431 호 )는 대구의 진산 팔공산 (八公山 : 1,193m ) 남동쪽 산허리에 솟은 갓바위 ( 冠峰·850 m ) 정상에 있다. 신라 선덕여왕 때 의현대사가 조성했다고 하며, 산정의 거암을 그대로 다듬어 불상과 좌대가 한 덩어리로 붙어 있다. 좌대를 포함한 불상의 높이는 5.6m로서, 머리에는 지름이 1.8m쯤 되는 넓적한 돌을 이고 있어 갓바위부처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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