卍-백제의 석불-卍
백제는 삼국유사에 의하면, 제15대 침류왕 원년(AD. 384년)에 호승(胡僧) 말라난타(Malananta)가 진(晉)나라로부터 건너와서 불교를 전한 것이라 하며, 그를 궁중으로 맞아들여 예우하고. 그 이듬해에 한산주(漢山州)에 절을 창건하고, 승려 열 사람을 입문시켰다 한다. 백제불교는 중앙 호족(豪族)의 불교였다고 한다. 660년에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주로 사원(寺院)이 세워진 곳은 공주 , 부여, 익산 등, 큰 도시에 머물고, 지방에는 크게 미치지 못했다. - 멸망한 나라의 문화는 남지 않는다. - 는 말은 맞는 말인 것 같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백제의 석불 역시 손가락으로 헤아릴정도로 적은 숫자에 불과하다. 백제의 도읍지였던 부여(扶餘)를 찾으면, 백제탑과 나란히 있는 석불좌상을 볼 수가 있는데, 1. 정림사지 석불좌상 - 마치 부여의 주인인 듯 편안히 앉아 있다. 정림사지(定林寺址)에 있음으로 해서 정림사지 석불좌상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하지만 마멸(磨滅)이 심하여 그 원형을 찾아보기는 어렵고 두부(頭部)는 훗날에 덧 붙힌 듯 하며, 面相은 소박한 조각솜씨이나, 마멸된 체부(體部)의 느낌과는 전혀 다르다. 현지에서는 백제석불이라 알려저 있지만, 고려시대의 석불이라고 보는 학자들이 많다. 바로 가까이에 있는 백제탑인 정림사지 석탑과는 분위기가 너무나 대조적이다. 백제의 석불은 아무래도 서산마애삼존불(瑞山磨崖三尊佛)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사진 1 - 국보 제 84호) 2. 서산마애삼존불은 충남 서산군 운산면 용현리, 용현계곡 속칭 강댕이골 인바위(印岩)에 있다. 인근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1959년 4월에야 세상에 널리 알려진 석불이다. 거대한 화강석에 양각(陽刻)된 이 삼존불은 중앙의 여래입상은 3미터 가량되는 비교적 큰 불상이며, 만면에 미소를 짓고 동방을 바라보고 있다. 협시보살(協侍菩薩)은 조금 뒤로 물러서 있는 듯하게 소극적인 새김새는 본존불이 지금이라도 곧 바위속에서 앞으로 뛰쳐나올 듯한 동적인 느낌을 준다. 이것은 그냥 삼존을 배열한 것이 아니라, 본존을 중심으로 묘하게 균형이 잡힌 구도이다. 그 환한 미소와 함께 이 균형미도 빠트릴 수 없을 것이다. 원만한 미소는 진짜 백제의 미소(微笑)이다! 신라의 석불에서 볼 수 있는 미소와는 다르다. 의식적이 아닌 자연스럽게 울어나오는 미소를 조용히 표출하고 있는 것이다. 본존인 여래입상의 화염문(火焰紋) 광배는 힘차다. 조각적으로도 훌륭한 솜씨를 보여주고 있으며 좌우로 힘차게 솟아오르는 화염문 위에 3체의 화불(化佛) 비슷한 것이 보인다. 향하여 왼쪽으로 보살입상 역시 마치 처녀의 수줍움 같은 미소를 보여준다. 위치를 바꾸고 각도를 달리 해 보아도 수줍음을 품은 미소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곳에 백제의 성녀(聖女)를 본다. 二重圓의 頭光은 여래상과 같고, 연화문을 새겼으며, 頭光의 선단에는 화염문을 새겨놓았다. 두부를 보면 장식한 보관(寶冠)의 중심에는 원통형이 새겨저 있으나, 그것이 무엇을 상징하는지는 모른다. 보관의 좌우에서 양귀를 살짝 덮는 듯이 보대(寶帶)를 디리우고, 양어깨는 보발(寶髮)에 덮혀 아름답다. 반나(半裸)의 상반신에 화려한 영락은 없고 가슴에 보주(寶珠)를 들고 있는 손이 아름답다. 다른 부분과는 달리 입체적인 깊이를 느끼게 한다. 양팔에 걸친 天衣는 복부 아래에서 U자형을 그리며 양끝은 연화데 위에 내려저 있다. 향하여 우로는 오른 손으로 볼을 받친 듯이 하고, 허리를 약간 비틀 듯 한 반가사유상(半跏思惟菩薩像)은 천진무구한 소년처럼 티없이 맑은 미소를 품고 있다. 삼존 모두 원형을 그런대로 잘 보존하고 있어서 백제미술 연구에 뺄 수 없는 귀중한 존재가 되고 있다. 태안(泰安)의 마애불과 같은 시대인 백제 말 600년경의 작품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중국 남북조, 북위(北魏)양식에 영향 받은 것이라 한다. 3. 태안 마애삼존불(泰安磨崖三尊佛) 충남 서산군 태안면 동문리 소재, 보물 제 432호, 중앙불상 높이 1.3m, 좌우 불상 높이 약 2m 가량, 재질은 화강암이다. 거대한 암석의 동향한 면에 중앙에 작으 보살입상을 중심으로 좌우에 여래입상을 배치한 특이한 형식의 삼존상이다. 마치 아이를 가운데 둔 부모상과 같은 느낌을 준다. 왼쪽 여래상이 오른쪽보담 약간 크고 모두 마멸(磨滅)이 심하다. 보살입상은 좌우로 큰 여래입상에 끼어 있으므로 매우 작고 빈약하게 보이는데, 머리에는 높은 삼산관(三山冠)을 쓰고 있으며 얼굴은 거의 파괴되어서 세부를 식별하기 어려우나 입가에 미소가 보이며, 천의(天衣)는 무겁게 처리되었고 다리에서 X자로 교차되었다. 왼족 불상은 소발의 머리위에 작은 육계가 있으며, 얼굴은 장방형이나 풍만한 편이고 두 귀는 비교적 길어 어깨위에 까지 늘어졌다. 양쪽 어깨에 걸쳐진 법의는 육중하게 처리하였는데 앞에는 U자형, 옆으로는 지그자그형의 옷주름을 보여준다. 왼손에는 약합을 들고 오른손은 시무외인을 하고 있다. 오른쪽의 여래입상은 왼쪽의 여래입상과 거의 비슷한 형태를 이루고 있으나, 두 손이 여원인과 시무외인을 짓고 있다. 삼존불은 모두 연화좌위에 서 있는데, 사각형의 얕은 감실안에 봉안되었다. 그 형식이 특이하고, 백제마애불의 초기작으로서 사료적 가치가 크며, 조각사에 있어서도 매우 귀중한 자료로 취급되고 있다. 이 불상은 각부의 양식이 중국 당나라 초기불상과 통하는 점이 많으므로 조성시기를 600년을 전후한 시기로 추정되고 있다. 4. 군수리 석조여래좌상(軍守里石造如來坐像) 이 불상은 1936년에 부여 군수리에 있는 백제시대 절터를 발굴할 때에 목조탑 심초석(心礎石) 위인 지표하 1.5m지점에서 발견되었다. 乳白色의 납석(蠟石)으로 조성되었고, 장방형의 대좌 위에 결가부좌한 여래상이다. 소발의 머리위에는 육계가 도드라져 있으며, 둥근 얼굴은 자비로우며 전면에 미소가 어려 있다. 양쪽 어깨에 모두 걸쳐진 법의(通肩)는 가슴앞에서부터 V자형의 옷주름을 이루고 아랫부분의 옷자락은 주름을 나타내며 대좌를 덮어 좌우가 서로 대칭하는 상현좌를 이루고 있으며, 노출된 가슴에는 萬字가 음각되었다. 이 불상은 다른 불상에 비하여 어깨가 좁으며 백제의 불상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는데, 풍만하고 입가에 미소를 띄운 지비로운 얼굴은 백제인의 온유한 특색을 잘 보여주는 예라 할 것이다. 조성연대는 대개 6세기 말엽경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불상은 특히 방형의 대좌와 옷주름, 그리고 수인(手印)을 주목해야 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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