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함경 이야기 10-
그 실천. 6. 이타행(利他行) "고타마여, 우리는 바라문입니다. 우리는 스스로도 신에게 희생을 바치고 또 다른 사람들도 희생을 바치게 합니다. 고타마여,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다 함께 행복할 수 있게 하는 것 입니다. 그러나 고타마여, 당신의 제자들은 가정을 나와 사문이 됨으로써 자기의 일신을 편안히 하고, 자기 일신의 괴로움을 없애려 합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오직 자기 한 몸의 행복만을 위해 도를 닦는 것이 됩니다. 이것이 출가의 소행이라 생각되는데, 그대는 어찌 여기십니 까?" ([增支部經典] 3:60 傷가邏. 漢譯同本, [中阿含經] 143 傷가邏經) 증지부경전 상 라 한역동본 중아함경 상 라경 그 또한 붓다가 기원 정사에 계셨을 때의 일이다. 상가라바라는 바라 문이 찾아와서 질문을 했다. 바라문이란 앞에서도 말했듯이 오랜 전통 을 이어 오는 사제(司祭)들이므로, 새 사상가인 붓다와 그 제자들에 대 해서 얼마쯤 적대 의식을 지니고 있었던 것 같다. 이제 이 바라문이 붓 다에게 내놓은 질문에도 힐난하는 듯한 어조가 느껴지는 것이다. 그는 말했다. 우리는 신 앞에 제사를 지내고 희생을 드림으로써 자기 를 위해서나 남을 위해서나 복이 될 수 있는 길을 닦는다. 그런데 붓다 의 제자들이 출가하여 벌이는 행위를 보건대, 결국은 자기를 통제하고, 자기를 편안케 하고, 자기의 고통을 없애려고 마음을 기울이는것 같다. 그것은 결국 자기 한 사람만을 위하는 길이 아닌가. 이것이 앞에 인용 한 바라문의 질문 요지이다. 이렇게 말한 바라문의 마음속에는 많은 사 람을 위한 행복의 길이 한 사람을 위하는 그것보다 우월하다는 생각이 박혀 있다. 말하자면 붓다와 그 제자들의 종교를 한 사람만을 위한 것 이라고 규정해 버림으로써, 그런 태도를 비난하려는 뜻이 뚜렷하게 드 러나고 있는 것 같다. 나는 이 바라문의 힐난하는 듯한 질문에 매우 큰 흥미를 느끼게 된다. 왜냐 하면 붓다와 그 제자들의 수행 태도에 대한 이런 의문은 여기 에서 낡은 맞수인 이 바라문에 의해 제기된 데 그치지 않고, 마침내는 불교 내부에서도 큰 논쟁을 불러 일으키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 논쟁이 란 대승(Mahayana)이라고 자처하며 새로운 주장을 내세운 사람들과, 그 들에 의해 소승(Hlnayana)이라고 비난 받으며 전통의 고수를 주장한 사 람들 사이에 장기에 걸쳐서 행해진 이른바 '대승과 소승의 논쟁'이다. 그것은 후일에 이루어진 경전의 표현을 빌리자면 '상구 보리(上求菩提)' 즉 진리를 추구하는 것과 '하화 중생(下化衆生)' 곧 중생을 제도 하는 것 중에서 전자를 자리(自利), 후자를 이타(利他)라 하여, 소승은 자리에만 급급하고 후자의 대의를 망각한 무리라고 비난한데서 비롯된 논쟁이었다. 이런 논쟁은 장기간에 걸쳐서 반복되었고, 중국을 통해 과 거에 우리가 받아들였던 것은 다름 아닌 대승파의 불교 였기에, 소승이 라고하면 매우 저급한 가르침인 것처럼 착각해 왔던 것도 사실이다. 그 러나 그것은 어쨌든간에 지금 비슷한 내용의 질문이 바라문에 의해 붓 다 앞에 제시되었다는 것은 매우 흥미 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면 붓다는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대답하였던가? "바라문이여, 그러면 그것에 대해 나는 그대에게 물어 보고 싶다. 생각대로 대답하라. 바라문이여, 그대는 이것을 어찌 생각하는가? 이 세상에 여래가 나 타나서 이와 같이 설한다고 하자. '이것이 도이다. 이것이 실천이다. 나는 이 길을 가고 이 실천을 완성함으로써 번뇌가 소멸되고 해탈을 얻을 수 있었다. 너희도 이리 와서 함께 이 길을 가고 이것을 실천함으로써 번뇌를 없애고 해탈을 얻도록 하라.' 이와 같이 여래가 법을 설한 결과,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수행하여 해탈을 얻은 이가 수백, 수천, 수만에 이르렀다. 하면, 바라문이여, 그대는 이것을 어떻다고 하겠는가? 이래도 여전히 출가하는 것은 한 사람을 위한 행복의 길이겠는가, 아니면 많은 사람들을 위한 행복의 길이겠는가?" 이렇게 질문받고 보니, 마침내 바라문도 "고타마여, 그렇다면 출가의 행위도 많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려 는 길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라고 대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때 옆에서 그 바라문에게 말을 건 사람이 있었다. 그는 붓다의 비 서격인 아난다(阿難)였다. 그는 바라문이 붓다의 반문을 받고 대번에 출가자의 태도가 많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 길임을 인정하고 만 것 을 보고, 좀 우쭐하는 마음이 들었는지 이렇게 바라문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바라문이여, 그러면 이 두 가지 길에서 당신은 어느 것이 뛰어나 다고 생각하는가?" 그 두 가지 길이란 물론 바라문들이 행하는 제사를 주로 하는 신앙과 붓다가 설한 출가 수행의 길이겠지만, 아난다로서는 이 기회에 그 바라 문으로 하여금 불교의 우월성을 인정케 하려고 한 것이겠다. 그러나 바 라문의 입장이 되고 보면, 그런 고백은 하고 싶지 않았으리라. 그는 다 만 "고타마와 아난다 같은 이는 참으로 내가 존경하는 바요, 찬탄하는 바요." 라고 말함으로써, 아난다의 추궁에서 몸을 사리려 들었다. 아난다는 거듭 "바라문이여, 나는 그대가 누구를 존경하고 누구를 찬탄하고 있는 가 물은 것은 아니다. 나는 이 두 길 중에서 그대가 어느 것을 우월 하다고 생각하는지 그것을 물은 것이다." 라고 추궁했으나, 바라문은 여전히 그것을 밝히려 하지 않았다. 그런 응대가 두 사람 사이에 세 번이나 되풀이되는 것을 보고, 붓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바라문이여, 오늘 왕궁에서 회합이 있은 듯하거니와 무엇이 이야 기 되었는가?" 화제가 바뀌어서 한숨을 돌린 바라문은 살아났다는 듯이 명랑한 태도 로 대답했다. "고타마여, 오늘의 회합에서는 신통의 문제가 화제에 올랐습니다. 옛날에는 사문은 적었어도 뛰어난 신통력을 발휘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는데, 지금은 사문의 수효가 엄청나게 많으면서도 신통력을 가진 사람이 적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이리하여 좌석의 분위기가 약간 풀리자, 붓다는 그 신통력에 대해 이 야기를 시작했다. 신통력이라는 말은 기적의 뜻이어서, 여느 사람으로 서는 생각조차 못할 엄청난 능력을 발휘함을 이름이거니와, 그것에는 세 종류가 있다고 붓다는 말문을 열었다. 그 첫째는 신통 신변(神通神變), 둘째는 기설(記設) 신변, 셋째는 교계(敎誡) 신변. 그리고 붓다는 그 하나하나에 대해 설명을 했다. 그것을 요약해 보면 이렇다. 먼저 신통 신변이란 문자 그대로 기적에 해당하는 것이다. 를테면 공중을 간다든지, 물 위를 걷는다든지, 허공에 앉는다든지 하는 기술을 말한다. 그것들은 결국 "환상 비슷한 것으로 여겨진다."는 것이 설명을 듣고 난 바라문의 소감이었다. 다음으로 기설 신변이라 함은 예언을 이름이다. 이를테면 점을 쳐서 미래를 예언한다든지, 신의 계시에 따라 닥쳐 올 일을 말한다든지 하는 것이다. 그런 일들도 역시 환상 같은 것이어서 그 당사자에게만 통할 뿐이라는 것이 바라문의 감상이었다. 마지막의 교계 신변이란 경전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자면 "너희는 이렇게 탐구하라. 이렇게는 탐구하지 말아라. 이렇게 사색 하라. 이렇게는 사색하지 말아라. 이것을 끊어라. 그리고 이것을 체 득하라." 는 식으로 이렇게 가르치는 것이다. 그것은 구태여 신통이니 신변이니 할 필요도 없겠고, 붓다가 평소에 그 제자나 신자를 상대로 살아 온 생 활이야말로 바로 그것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붓다는 그것을 이제 신변, 신통이라고 일컬어, 기적, 예언과 어느 쪽이 나은지를 바라문으로 하여 금 판단하게 하려고 한 것이다. 이에 대해 그 바라문은 "아 고타마여, 나는 마지막 신변을 가장 위대하다고 봅니다. 세 가 지 신통력 중에서 가장 뛰어나고 가장 묘하고 희유한 것은 그것입니 다." 라고 대답했다. 이리하여 그는 그 자리에서 삼귀의를 부르고 붓다에게 귀의했다는 것이 이 경의 결말이다. 지금까지 다루어 온 경들에 비길 때 이 경은 꽤 길어서 여기서는 다 만 그 뼈대만을 소개한 데 지나지 않지만, 그 요점을 말하자면 대략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볼 수 있겠다. 그 첫째 부분은 그 바라문의 힐난하는 듯한 질문과 그것에 대한 붓다의 대답이다. 둘째 부분은 아난 다와 바라문 사이에 벌어진 문답이며, 셋째 부분은 붓다가 세 가지 신 통력에 대해 설명함으로써 그 바라문을 귀의시킨 대목이다. 그리고 그 전체를 일관하는 주제는 결국 붓다의 가르침이 한 사람을 위하는 길인 가, 아니면 여러 사람을 위하는 길인가 하는 문제이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이 문제를 둘러싸고 후대에 불교 내부에서 이른바 '대승과 소승의 논쟁'이 벌어진 바 있다. 대승을 자처하는 사람 들은 마치 이 바라문처럼 붓다의 가르침에 따라 수도에 전념하는 비구 들의 태도를 자기만을 위하는 길이라 하여 비난하고, 이타행의 우월성 을 주장했다. 물론 그들이라 해도 붓다 당신을 논란의 대상으로 삼지는 못했다. 그들은 자기들의 비위에 맞도록 경전을 숱하게 만들어 가는 동 시에, 아라한트(arahant, pali ; arhat, SKt.)즉 아라한(阿羅漢)과 성 문(聲聞 ; savaka), 연각(緣覺 ; pacceka - buddha)을 공격했던 것이다. 아라한이란 번뇌를 끊고 진리를 깨달은 성자이며, 성문이란 붓다의 가르침에 따라 수도하는 사람, 연각이란 붓다의 가르침에 의함이 없이 스스로 깨닫는 사람을 가리키는바, 그들은 자기의 해탈에만 전념할 뿐 다른 사람들을 돌보지 않는다는 것이 대승 쪽의 주장이었다. 그러면 붓다의 태도는 어떠했는가? 그것을 놓고 생각할 때 마땅히 상 기해야 할 일은 저 보리수 밑에서 붓다가 설법을 결의하게 된 경위와, 아울러 미가다야에서 최초의 설법에 성공한 붓다가 마침내 제자들을 향 해 "비구들이여, 전도를 떠나라. 많은 사람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하 여. 세상 사람들을 가엾이 여기고, 인천(人天)의 이익과 행복과 안락 을 위하여." 라고 말한 이른바 '전도 선언'이겠다. 그 전자에 대해서는 이미 제 3 장에서 그 미묘한 경위를 상세하게 서술해 놓았거니와, 그것은 결국 상 구 보리의 길이 하화 중생의 길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보리수 밑에서 정각을 성취하기까지의 붓다는 명백히 자기 문제의 해결 을 위해 심신을 바친 사람이었다. 그러나 일단 문제의 해결에 성공하 자, 붓다는 뜻하지 않았던 불안을 맛보아야 했다. 오직 자기 혼자 그 진리를 지니고 있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빌리 자면 인간은 사회적 동물인 까닭이다. 이리하여 붓다는 마음의 한구석에서 "고생 끝에 가까스로 깨달은 것 을 어째서 다른 사람들에게 설해야 하는가?"라고 중얼거리면서도 결국 은 "나는 이제 감로(甘露)의 문을 여노라."라고 선언하고 일어설 수밖 에 없었다. 그렇게 하여 겨우 설법할 결심을 하게 된 붓다는 마침내 전 도를 위해서 제자들을 떠나 보내게 되자, 명확히 그 목표를 많은 사람 들의 이익과 행복과 안락에 두었고, 또 스스로도 45년에 걸친 긴 생애 를 그것을 위해 바쳤던 것이다. 그 덕택으로 수천 수만 명의 사람들이 진리에 눈뜨고 바르게 인생을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이며, 그 여택은 멀 리 오늘에까지 미치고 있는 것이다. 붓다가 그 바라문을 설득하여 그 길이 많은 사람의 행복과 연결되어 있다고 납득시킨 것도 그렇기 때문 이었다. 그러나 다시 거슬러 올라가, 어째서 그 바라문은 붓다의 길이 한 사 람만을 위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느냐고 한다면, 거기에도 그만한 이유가 있었음이 명백하다. 왜냐 하면 붓다의 가르침에서는 자기의 개안, 자기 의 해결, 자기의 확립이 항상 앞서는 까닭이다. 후세 대승파의 말을 빌 리자면 상구 보리가 선행하는 것이다. 앞에 나온 '전도선언'에다가 덧 붙인다면 "비구들이여, 나는 인천(人天) 세계의 모든 구속으로부터 벗어나 자유의 몸이 되었다. 너희도 또한 인천 세계의 모든 구속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몸이 되었다. 비구들이여, 그러므로 전도하기 위해 떠나라. 많은 사람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하여." 라는 논리가 되겠다. 즉 자기 자신이 선결 문제인 것이다. 자기가 자유 를 얻지 못한 주제에 어떻게 남을 자유롭게 하여 줄 수 있으랴. 만약 진리에 눈뜨지도 못한 사람이 남의 손을 잡아 길을 인도하려고 든다면 둘이 다 함정에 빠지고 말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이것이 붓다의 논리였다. "아함경이야기"의 다음이야기는 <<불해(不害)>>입니다. 아함경 이야기24 3. 그 실천. 7. 불해(不害) 사람의 생각은 어디로나 갈 수 있다. 그러나 어디로 가든 자기보다 더 소중한 것은 찾아볼 수 없다. 그와 같이 다른 사람에게도 자기는 더 없이 소중하다. 그러기에 자기의 소중함을 아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해해서는 안 된다. ([相應部經典] 3:8 末利) 상응부경전 말리 '말리'라는 경의 제목부터 설명해 두고자 한다. 그것은 중국에서 번 역 할 때 '마리카(Mallika)'라는 팔리 어의 발음을 그대로 옮긴 것이지 만, 어쩌면 일본에서 '말리(茉莉)' 또는 '말리화(茉莉花)'라고 일컫는 관상용의 작은 관목이 그것에 해당할지도 모른다고 나는 혼자서 추측하 고 있다. 이제 옆에 있는 사전을 펼쳐 보니, 말리화는 인도가 원산인 목서과의 상록수 관목이며, 잎은 타원형이고 여름 저녁에 백색 분형(盆形)의 향기 높은 다섯 개의 꽃이 핀다고 되어 있다. 어쨌거나 여기서 '말리'라고 한 것은 코사라 국 파세나디 왕의 왕비 이름을 딴 것이라고 한다. 그 왕비가 이렇게 불린 까닭은, 그녀가 날마다 그 꽃으로 화관을 만들어 썼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한역에서는 승만이라고 하며, 일찍 부터 열렬한 신자가 되었던 사람이어서 경전에도 자주 그 이름이 나온 다. 그런데 이 경의 서술은 사바티 왕궁의 높은 다락에 오른 파세나디 왕 과 그 옆에 자리한 마리카 왕비의 대화에서 시작된다. 그 다락에서 바 라보는 경치는 장관이었을 것이 틀림없다. 북쪽으로부터 동북쪽에 걸쳐 있는 눈에 뒤덮인 히말라야의 수많은 봉우리들이 아득한 원경으로 보였 을 것이다. 또 서쪽으로부터 남쪽에 걸쳐서는 코사라의 평원이 끝없이 발 밑에 펼쳐졌으리라. 그런 대자연 앞에 서게 될때, 사람이란 번거로 운 일상 생활에서 벗어나서 무엇인가 엉뚱한 생각을 하기 쉬운 법이거 니와, 그 날의 왕과 왕비의 대화에도 분명히 그런 점이 나타나 있는 것 같다. 잠시 조망을 즐기고 있던 왕이 갑자기 생각한 것은 이 넓고 넓은 세 상에서 자기에게 가장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것이 무엇일까 하는 것이었다. 경전은 그런 생각을 하게 된 자세한 경위에 대해 별로 말하고 있지 않으나, 왕의 생각은 대개 이런 경로를 더듬지 않았나 추측된다. 저 히말라야의 연봉은 참으로 장관임에 틀림없다. 그렇다고 그것을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고는 할 수 없다. 가령 너는 히말라야를 바라보 면서 하루를 살겠느냐, 아니면 히말라야가 없는 곳에서 백 년을 살겠느 냐고 할 때 어느 누가 전자를 택하겠는가. 아니 한 끼의 밥과도 안 바 꾸려고 할지도 모른다. 또 눈앞에 펼쳐지는 이 코사라의 평원! 그것은 얼른 보기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배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도 자기가 이 나라의 왕이기 때문인지도 알 수 없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아무래도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자기밖 에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 자기야말로 히말라야나 코사라 평원과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러나 나만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일까? 나는 이 나라의 왕이다. 권세와 영화를 마음껏 누리 고 있다. 그러기에 '나'라는 존재가 나에게 소중할 수밖에 없는 것일 까? 저 땀을 흘리며 일하는 농부나 상인들은 어떨까? 그들은 하루하루 를 살아가기 위해 갖은 고생을 하여야 한다. 그들은 자기에 대해 어떤 생각을 지니고 있을까? 자기 같은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대수롭지 않 게 여기고 있을까? 아무래도 그럴 것 같지는 않았다. 그들도 역시 자기 를 더 없이 소중하게 알고 있을 것 같았다. 무엇 때문에 그런 고생을 하면서 살아가느냐고 할 때, 역시 무엇보다도 자기의 몸이 소중하기 때 문이라고 생각되었다. 왕은 마침내 옆에 있는 왕비를 바라보았다. "중전, 그대에게는 자기 자신보다도 더 소중한 것, 더 사랑스러운 것이 있다고 생각하시오?" 뜻하지 않은 질문에 좀 놀랐지만, 마리카는 잠시 생각한 끝에 대답했 다. "대왕이시여, 저에게는 저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는 듯 생각됩니 다. 대왕이시여, 대왕께서는 어떠십니까?" "나도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묻는 말이오." 왕도 이렇게 말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리하여 인간에게 가장 소 중한 것은 자기 자신이라는 점에 두 사람은 완전히 동의하였다. 이런 그들의 결론은 정당하다고 보아야 되겠다. 저 고대에 왕과 왕비 의 대화가 이런 결론을 이끌어 냈다는 것은 매우 있기 어려운 일이라고 하여야 될는지도 모른다. 이 결론은 현대의 우리에게까지 호소하는 힘 을 가지고 있다. 거기에는 에고(ego ; 자아)의 진상이 있으며, 이 에고 이즘(egoism ; 자아 중심)을 무시한 사상이란 결국 인간 관계의 원리로 서는 어떤 힘도 발휘하지 못하고 말 것이다. 그런데 왕과 왕비는 그들 의 결론에 대해 약간 불안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붓다가 평 소에 그들에게 가르친 것과 차이가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파세나디 왕은 급히 마차를 달려 기원 정사로 붓다를 찾아갔다. 무엇인 가 모르는 것이 있을 때는 붓다에게 묻는 것이 이 왕의 버릇이었다. 급히 달려온 왕이 이야기하는 것을 흥미 있게 듣고 난 붓다는 머리를 끄덕이면서 그들이 도달한 결론을 그대로 긍정했다. 그리고 그들을 위 해 설해준 게가 이 장(章)의 첫머리에 인용한 일절의 운문이다. 그 내용은 그들의 결론을 일단 인정하고,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 가야 함을 설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누구라도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거니와, 구태여 해설을 붙이자면 대개 이런 뜻이 될 것이다. 사람의 생각이란 참으로 자유 자재한 것이어서 어디라도 달려갈수가 있다. 여기 앉은 채 멀리 유럽이나 미국으로 날아갈 수도 있겠고, 달이 니 금성이니 하는 것을 상상할 수도 있다. 백만 장자가 되기를 꿈꾸고, 제왕의 영화를 부러워하는 것도 다 생각의 작용이다. 그러나 생각이 어 디로 달리든간에 자기보다 더 소중한 것이란 아무 데도 존재하지 않는 다. 아니 우리가 이리저리 생각을 달리어 많은 재물과 제왕같은 권력을 꿈꾸는 것도 결국은 자기라는 존재가 더 없이 소중한 까닭이다. 자기가 소중한 까닭에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먹을까를 생각하고, 더 큰 권력 과 명예를 획득함으로써 자기를 남보다 우월한 위치에 놓고 싶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붓다는 그 왕이나 왕비보다도 더 명확하게 그 사실을 긍정 했던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다시 한 걸음 나아가서 생 각해야 된다는 것을 그 게의 후반에서 설명하였다. 그와 같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자기는 더 없이 소중하다. 어쩌면 이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리라. 사실 누구라도 마 음속에서 생각할 수 있는 일임에 틀림없다. 우리는 매우 슬펐던 어떤 체험을 통해 같은 처지에 놓인 사람의 심정을 공감해 줄 수 있다. 공감 뿐이 아니라 함께 울 수도 있다. 이런 것은 다소간 누구에게나 있기에 동병 상련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이제 파세나디 왕과 그 왕비가 자기처럼 소중한 것은 다시 없다고 생 각한 데 대해, 붓다는 그것은 그렇다고 인정해 주고 나서 그런 생각을 남에게까지 확장시키라고 충고했다. 이것은 사실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임에 틀림없다. 왜냐 하면 인간의 마음속에는 원래 그런 능력이 있는 까닭이다. 그것을 나는 '이성의 법칙'이라고 부르고 싶다. 이성(理性)이라는 말은 웬지 차가운 데가 있다. 그것을 우리는 잘 알 고 있으며 능히 느낄 수 있다. 그리하여 이성의 그러한 점에 대해 혐오 의 느낌조차 지니기 마련이다. 그러면 이성에 따르는 그 차가움이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그것은 이성 속에 무엇인가 우리를 떼밀어 버리는 성질이 있기 때문인 듯하다. 우리의 일상 생활이란 애욕과 증오의 소용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소 용돌이를 떠나 제 3 자의 입장에서 자기 자신을 응시하는 눈은 필연적 으로 지성적인 맑음을 지닐 수밖에 없기에, 그 눈초리(이성)에서 받는 인상은 차가울 것이다. 또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우리의 일상 생활이 란 자타(自他)의 대립 속에 파묻혀 있는바, 그런 대립 속에서는 앞에서 말한 에고(自我)가 저마다 자기를 주장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성은 그 대립을 떼밀어 젖히고 냉정히 자아를 바라보는 것이기에 그 눈초리 는 차가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차갑다고 해서 반드시 나쁘다고는 하지 못하리라. 열에 들떠 있는 소용돌이 속에서 인류를 건지는 것이 있다 면, 그건 차갑고 맑은 이성의 작용일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감히 말하거니와, 불교는 어딘지 차가운 데가 있다. 붓다 그 분 의 말씀을 놓고 보아도 그런 차가움이 곳곳에서 느껴진다. 이 인생이란 결국 괴로움이다. 너희는 먼저 이 사실을 확고히 인식해 야 한다. 그렇게 가르치는 붓다의 말씀에는 우리로 하여금 섬뜩하게 만 드는 무엇이 있다. 만약 그런 붓다의 말씀을 읽고도 아무렇지 않다면, 그것은 그 사람이 글자의 표면만을 스치고 지나갔기 때문일 것이다. 또 붓다는 탐욕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것은 마치 마른 풀로 만든 횃불을 들고 바람이 불어 오는 방향으로 달리는 것과 같으며, 만약에 빨리 그 횃불을 던져 버리지 않는다면, 그 불은 그의 손과 그의 온몸을 태우고 말리라고. 적어도 진지하게 이 말씀을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누 가 가슴이 섬뜩해 오지 않겠는가. 또 [법구경]의 한 게는 붓다의 가르침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제가 악을 행하여 스스로 더러워지고, 제가 악을 떠나서 스스로 청정해진다. 저마다 스스로 청정해지고 부정해지나니, 사람은 남을 청정하게 하지는 못하리." 인과 필연(因果必然), 응보 무정(應報無情) ! 그 도리에 틀림은 없다 고 해도, 그렇게까지 차갑게 말하지 않아도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으리라. 그러나 두루 사람들에게 위안을 줄 수 있도록 말을 꾸민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의 구원은 될 수 없는 것이겠다. 적당히 얼 버무리는 말을 좋아하는 이에게는 오직 전락의 길이 있을 뿐이다. 또는 가공(架空)에 취하고 환상을 뒤쫓는다면, 구제의 문은 영원히 열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붓다는 신(神)을 내세우지 않는다. 그러므로 붓다는 어떤 천국, 어떤 극락도 약속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붓다는 자기만 의지하면 어떤 죄라도 소멸한다는 그런 계약 을 남발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붓다는 영생을 제공함으로써 인간의 본능적 욕구를 만족시 켜 주려고도 하지 않는다. 붓다는 그런 환상과 오류와 비합리적인 것을 일체 부정하고 타파하였 다. 그러고 나서 비정하리 만큼 냉철한 눈을 가지고 존재와 인간의 진 상을 관찰하고 투시하였다. 그리고 그 위에 참다운 구제의 길을 세웠다. 그런 뜻에서 보면 붓다가 간 길은 어디까지나 이성의 길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인간 구제의 대업을 신에게 의탁하지도 않았고 기적 에 맡기지도 않았다. 인간 누구에게나 있는 이성, 그것에 의해 구제의 길을 발견하고 확립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 번 붓다가 왕에게 설한 게의 문구를 상기해 볼 필요가 있겠다. 붓다는 그 왕과 왕비가 말하는 에고를 그대로 인정 하고 나서, 그와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들에게도 자기는 더 없이 소중하 다고 가르쳤다. 그것은 누구라도 할 수 있는 말처럼 생각될지 모르나, 불교를 가능케 하는 '이성의 법칙'의 하나가 그것을 통해 설명되고 있 음을 알아야 한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붓다가 구사한 이성의 영위에는 주로 두 가지 측면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 하나는 애욕과 증오의 소용돌이 속에서 허덕이고 있는 자기를 제 3 자의 처지에 서서 냉철하게 관찰하는 일이 다. 무상, 고, 무아의 원리는 이런 작용 속에서 발견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 하나는 자타의 대립 속에 서 있는 자기를 떠나 그와 나의 입장을 바꾸어 놓고 생각하는 일이다. 다시 말하면 나에게 내가 소중하듯이 그 에게도 그가 소중할 것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일이다. 만약 인간이 이러한 이성을 무시하고 오로지 자기 애(愛)의 주장에만 귀를 기울인다면, 아마도 인간의 세계는 "모든 사람이 모든 사람에 대 해 이리"가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붓다는 우리의 세계가 그런 수라장이 안 되게 하기 위해서는 저마다 이성의 길을 걸어가야 한 다고 가르친 것이다. "그러기에 자기의 소중함을 아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해해서는 안 된다." 파세나디 왕에게 설해 준 게의 결구는 바로 그것을 말한다고 보여진다. 즉 모든 사람이 서로 이해를 따라 아귀다툼하는 상태를 종식시키 고, 이 세계를 진정한 평화의 고장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이 '이성의 법 칙'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거기에서 아힘사(ahimsa) 즉 불해(不害) 의 덕목이 생겨나는 것이며, 자비의 덕목이 생겨나는 것이다. 왕에게 다른사람을 해해서는 안 된다고 하신 말씀은 바로 이 아힘사(불해)의 덕목을 가리킨 것임을 알수있다. 아힘사는 '불해'라고 번역된다. 또는 '불살생(不殺生)'이니 '불상해 (不傷害)'라고도 번역되는 수가 있다. 그 원어 역시 "해한다" 또는 "죽 인다"의 뜻인 himsa에 a라는 부정사가 붙은 말이다. 그러기에 아마도 이 덕목을 어딘지 소극적인 것인 양 생각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으리라 고 믿는다. 이렇게 말하는 나 역시 전에 이 말로부터 그런 인상을 받은 적이 있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면 그것은 큰 오류임을 누구나 이해하 게 될 것이다. 도리어 모든 덕목 중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 불해임 을 알게 될 줄 믿는다. 어째서 그런가? 지금껏 누누이 말해 온 바와 같이 이 덕목은 자타의 입장을 이성에 의해 조화시킬 때 생겨난다. 내가 나에게 가장 소중하듯이 남들도 저마 다 자기가 소중할 것이라는 생각에서 이 덕목은 생겨나기 마련이다. 그 렇다면 사람마다 자기에게 가장 요망되는 것은 무엇인가? 이름을 드날리고도 싶으리라. 생활이 풍족했으면 하는 욕망도 있으리라. 또 자기와 가족의 건강도 당연히 바라리라. 그러나 그 어느 소원도 자기의 생존과는 바꾸지 못하는 것이 인간이 다. 살고 싶다는 것이 인간의 기본적이요 가장 강렬한 소망이며, 죽고 싶지 않다는 것이 인간 최대의 비원임이 분명하다. 이런 자기의 비원을 남에게까지 확장시킨 것, 그것이 아힘사의 정신이다. 거기에서 사랑과 자비도 생겨나는 것이며, 평화와 번영도 그 위에 구축되지 않으면 안된다. 오늘 핵무기의 위험으로부터 인류를 지키고자 하는 움직임도 이 이 성의 소리라고 할 수 있다. "아함경 이야기"의 다음이야기는 아함경이야기의 마지막장인 <<자비(慈悲)>>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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