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卍-불법을만나고/卍-불교자료실

민족의 거룩한 성자 백용성 조사(組師)

by 회심사 2019. 5. 3.

    민족의 거룩한 성자 백용성 조사(組師)

                                                                                  법륜 스님

     

    백용성 조사님이 어떤 분인가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여러분들 중에 이 분을 아시는 분도 있겠지만, 이 분이 실제 기여하신 바와 우리가 알고 있는 것 사이에는 너무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불교라고 하는 종교의 테두리 안에서 보면, 현재 대한민국 스님의 절반이 용성 스님의 제자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조계종에서 종정을 역임하신 분 중 서너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용성 문하 사람들입니다그만큼 불교계 내에서 중요한 위치를 갖고 있습니다.

     

    이 분의 많은 제자들이 화엄사, 범어사, 해인사, 쌍계사, 신흥사 등에서 정진을 하고 있습니다.

    불교계에 잘 알려진 성철스님 같은 분도 이 분의 손상좌(제자의 제자)이지만, 용성 스님보다는 성철 스님이 더 알려져 있습니다.

     

    이렇게 용성 조사님이 세상에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그 제자들이 제대로 알리지 못한 측면도 있지만, 이 분이 살았던 시대가 소위 일제 강점기라고 하는 암울한 시대였기 때문입니다. 이 분이 독립운동을 하지 않고 불교 활동만 했으면 한국의 부처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유명했을 겁니다.

     

    하지만, 이 분은 독립운동을 굉장히 적극적으로 했습니다.

    독립운동이 바로 이 분의 업적이 덜 알려지게 된 원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일본은 이 분이 하시던 일이라면 전부 강제 해산시키고 압수했습니다.

    돌아가실 때 누울 방 하나 구하기 어려울 정도로 일제가 탄압을 했습니다.

     

    일본의 혹독한 탄압을 받으니까, 주변에 있는 사람들도 많은 피해를 입었고, 스님의 많은 제자들도 이 분을 멀리했습니다. 당시 제자들의 대부분이 일제에 굴복했는데 지금 용성 스님의 독립운동을 자꾸 떠받들면 당신은 그때 뭐했습니까. 하는 질문이 돌아오니까, 가능하면 용성 스님의 독립운동 경력을 안 드러내게 되었어요. 이런 점들이 이 분의 업적이 세상에 덜 알려진 이유입니다.

     

    그리고 용성 스님은 독립운동을 비밀리에 많이 했습니다.

    승려로써 독립운동을 했기 때문에 총칼을 들 수는 없지 않습니까.

    대부분 숨어서 독립운동 자금을 모았고, 모아진 독립운동 자금은 비밀리에 상해 임시정부와 독립군 단체에 보냈습니다. 또 독립 운동가를 양성해서 몰래 보내주는 일도 하셨어요.

    3.1독립선언서에 불교계를 대표해서 서명을 했기 때문에, 어디를 가도 일제가 늘 옆에 따라다녔습니다.

     

    옛날에 전라도에 만석꾼 부자가 많았다는 거 다 아시죠?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 모금도 했지만, 주로 만석꾼들의 지원을 받아서 독립운동을 했습니다. 특히 전라도 운봉에 사는 만석꾼 임동수 선생의 후원을 받아서 상해 임시정부에 계속 자금을 보냈습니다. 소문이 나서 발각되지 않게 하려고 금광을 운영한다면서 돈을 투자하는 척했다가 나중에 망했다고 하면서 자금을 마련한 적도 있었습니다.

     

    또 용성스님은 고종 황제를 면담하고 그분의 밀지를 받아 해인사 대장경 불사를 하면서 상궁을 통해 황실의 내탕금도 지원받았습니다. 상궁은 요즘으로 말하면 청와대 비서관들이라고 볼 수 있어요. 이 돈을 갖고 북간도 명월촌에 700백 정보 되는 땅을 두 군데 샀습니다. 7백 정보면 대략 210만평 정도 됩니다. 그곳에서 독립군의 가족들이 농사짓고 살면서 모은 돈으로 다시 독립군을 지원했습니다.

     

    이런 활동들을 모두 몰래몰래 했기 때문에 역사적 기록이 거의 남아있지 않습니다.

    만약 용성 스님이 해방 후에 돌아가셨다면 내가 어떤 일을 했다라고 말할 수 있었을 텐데, 해방되기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또 제자들은 다 독립운동 때문에 스승을 멀리했기 때문에 용성 스님의 행적이 완전히 묻혀 버렸어요.


    용성 조사와 가까이 지내신 분들도 해방 후에 그 사실들을 드러내기 어려웠습니다. 용성 조사는 상해 임시정부에도 자금을 지원을 했지만, 중국에서 무장 투쟁을 하는 분들에게도 자금을 지원했는데, 이들은 대부분 중국 공산당과 관계가 있었어요. 해방 후 남북이 갈라져서 이념 대립을 하게 되었기 때문에 이런 사실들을 또 숨겨야 했습니다. 이런 과정을 겪으면서 용성 조사님의 행적은 점점 묻히게 되었습니다.

     

    이곳 죽림정사 불사를 하신 저희 스승이신 불심 도문 큰스님께서 용성 조사님을 알리는 운동을 정말 외롭게 하신 덕분에 그나마 이 정도라도 우리가 알 수 있게 된 겁니다. 도문 큰스님은 용성 조사님의 손상좌입니다. 그 스승인 동헌 스님은 용성 조사를 모시고 끝까지 독립운동을 하신 제자 분이고요. 이렇게 3대에 걸쳐 용성 조사님의 독립운동 정신을 계승하신 분이 도문 큰스님입니다.

     

    또한 도문 큰스님은 임동수 선생의 증손자입니다. 운봉 만석꾼인 임동수 선생은 용성 스님과 각별한 친구이면서 재가 신자였고, 후원자이면서 독립운동 동지였습니다. 임동수 선생은 독립운동 지원과 활동으로 인해 결국 만석이 다 없어지고 집안이 망해버렸습니다. 역사를 보면 이런 불행한 일이 참 많습니다. 전라도에 임동수 선생이 있었다면 경상도에는 경주 최부자가 있었습니다.

     

    이런 시대를 거치면서 용성 조사께서 하셨던 위대한 업적은 대부분 묻혀있는 상태입니다. 3.1운동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불교계 대표로 서명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으나, 그분이 하신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저희들이 이번에 3.1운동 100주년을 기해서 227일 서울에서 용성 스님의 묻혀진 진실을 백 년 만에 드러내는 발표를 합니다. 용성 스님의 행적은 앞으로 역사적 고증도 필요하고 연구가 굉장히 되어야 합니다. 만약 그 진실이 다 밝혀진다면, 용성 조사님은 국부로 추앙받을 만한 분이에요.

     

    용성 조사께서는 대한제국 부흥 운동이 아니라 대한민국을 수립 운동을 해야 한다라고 하시면서 오늘날의 대한민국 국호를 주장하신 분입니다. 3.1운동 때 태극기를 들면 일본이 잡아가니까 반도기를 들자는 주장이 나왔었는데, 용성 조사께서는 태극기의 의미를 설명하시면서 태극기를 들어야 한다고 주장하셨습니다. 또 윤봉길 의사를 김구 선생에게 보내서 세상을 놀라게 하고 빛나게 하시기도 하셨습니다.

     

    용성 조사님을 그냥 불교계 승려라고만 생각하지 마세요.

    오늘날 대한민국을 있게 한 뿌리라고 할 만큼 중요한 분이시니 여러분도 자랑스럽게 생각하시면 좋겠습니다.

     

    백용성 조사는 지금 대한민국을 존재하게 한 거룩한 성자(聖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