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卍-불법을만나고/卍-불교자료실

능엄경의 바른 이해-넷째. 初心者의 緊要한 일. 1. 七趣를 말하다.7) 天趣

by 회심사 2019. 5. 8.



-넷째. 初心者의 緊要한 일. 1. 七趣를 말하다.7) 天趣-
    아난아, 세간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참다운 모습인 영원함에 머무르려 하지 아니하므로 아직 분별하는 마음 때문에 처첩의 사랑을 버리지는 못하였으나, 삿된 음탕함속에 드는 것을 마음이 즐거워하지는 아니하고 마음이 맑고 깨끗하여져서 반야(역주: 明)가 자라게 되면 목숨을 마친 뒤에 해와 달이 뜨는 곳 가까이에 머무르게 되나니, 이러한 무리들이 머물러 사는 곳을 사천왕천(四天王天)이라 부르느니라.

    집에 있는 자신의 아내에게도 작게나마 음욕이 남아있어서, 참선하는 곳에 머물러 수행에 들더라도 완전히 삼매의 맛을 볼 수 없는 이는 인간의 머리위에 머물러서 사바세계를 다스리는 곳을 벗어나게 되나니, 목숨을 마친 뒤에 이러한 무리들이 머물러 사는 곳을 ‘도리천(忉利天)’ 이라 부르느니라.

    인간 세상에 머물 적에도 바삐 돌아다니지 아니하고 대부분을 고요함 속에 머무르며 욕정이 일어나면 잠깐 어울리고 지나고 나면 생각이 사라지므로 허공(虛空) 가운데에 찬란한 빛으로 머무르게 되나니, 목숨을 마친 뒤에 이러한 사람들은 스스로 빛을 뿜어내어 해와 달빛이 감히 견줄 수 없으니, 이러한 무리들이 머물러 사는 곳을 ‘수염마천(須焰摩天)’ 이라 부르느니라.

    언제나 참선을 즐겨 고요함속에 머무르기는 하나 아직 살 거죽을 맞대야할 사람이 남아있으므로, 마음이 아주 정갈하고 섬세하여 져서 목숨을 마친 뒤에 사람과 하늘의 경계에 가까이 하지 아니하여서 겁이 다할 때에도 물·불·바람(역주 : 水-感情, 火-磁性, 風-思念 흔히 말하는 三災가 이것인데, 감정에서 사랑과 증오, 자성에서 매혹과 무기력, 사념에서 갈등이 야기됨)의 세 가지 재앙이 미치지 못하나니, 이러한 무리들이 머물러 사는 곳을 ‘도솔타천(兜率陀天)’ 이라 부르느니라.

    스스로는 전혀 욕심이 없고 배우자의 바람으로 일을 치르나니 음사(淫事)를 할 때에도 그 맛이 양초를 씹는 것과 같아서 몸 마음이 바뀌고 달라져서 고요함 속에 머무르면 언제나 즐거움이 일어나나니, 목숨을 마친 뒤에 이러한 무리들이 머물러 사는 곳을 ‘락변화천(樂變化天)’ 이라 부르느니라.

    세간에 머물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으면서도 언제나 세간의 일에 어울려 함께 치루며 서로 어울려 하여야 할 일들을 마친 뒤에는 언제나 고요함 속에 머무르고 사물의 모양이나 성질이 쉼 없이 바뀌는 것에서부터 그 분별하는 마음을 모두 벗어나게 되나니, 목숨을 마친 뒤에 이러한 무리들이 머물러 사는 곳을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 이라 부르느니라.

    아난아, 이와 같이 여섯 개의 하늘이 스스로 음욕이 일어나는 것으로부터는 벗어났으나, 아직도 상대방과 어울려 자취를 남겨야 하면서도 스스로는 고요함 속에 언제나 머물러 있나니, ‘욕계(欲界)’ 라 부르느니라.

    9권 “아난아, 세간의 모든 마음 닦는 사람들이 참선(禪那)에 의지하지 아니하여서 결코 참다운 반야가 일어나지는 않았으나 스스로 음욕을 저지르지 아니하여 몸을 맑고 깨끗하게 가꾸어 바삐 움직일 때나 고요히 머무를 때에 전혀 상념(想念 역주: 想-의도하지 아니하여도 스스로 떠오르는 생각, 念-의문 나는 것을 골똘히 기울여 생각함)이 일어나지 아니하면, 사랑에 물들지 아니하고 음욕이 일어나지 아니하니 욕계에 머무를 수 없어서, 이러한 사람은 생각에 따라 몸이 움직이므로 아주 깨끗한 하늘나라와 벗하게 되나니, 이러한 무리들이 머물러 사는 곳을 ‘범중천(梵眾天)’이라 부르느니라.

    애욕의 버릇은 이미 사라지고 애욕을 여읜 그 마음이 나타나게 되어 여러 맑고 깨끗하게 지켜야 할 도리를 사랑하고 즐거워하여 받들어 따르고 해야 할 일을 스스로 알아서 알맞은 때에 하는 이러한 사람들은 아주 깨끗한 하늘의 덕을 지니게 되나니, 이러한 무리들이 머물러 사는 곳을 ‘범보천(梵輔天)’이라 부르느니라.

    몸 마음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빼어난 반야의 빛으로 가득하여 도리에 맞는 몸가짐이 어느 한 가지 부족한 데가 없어 반야의 힘으로 깨닫게 되어 맑고 깨끗함을 굳건히 지키어 해야 할 일을 스스로 알아서 알맞은 때에 하는 이러한 사람들은 ‘대범왕’이 되어 ‘범중천’의 사람들을 다스리게 되나니, 이러한 무리들이 머물러 사는 곳을 ‘대범천(大梵天)’이라 부르느니라.

    아난아, 이러한 세 종류의 빼어난 무리들은 비록 올바르게 닦아 맛보게 되는 참다운 삼매는 아니지만 마음속의 번거롭고 답답하여 괴롭게 하는 모든 것들로부터 벗어나게 되나니, 맑고 깨끗한 마음속에 조금의 번뇌가 남아 있기는 하나 결코 마음이 흔들리지 아니하나니, 초선(初禪 역주: 첫 번째 三昧, 歡喜心을 얻음)을 이루었다고 부르느니라.

    아난아, 그 다음에 아주 깨끗한 하늘나라의 사람들은 덕스럽고 너그럽게 다스리므로 마음이 깨끗하여 번뇌에 흔들림이 없어 지극히 고요하고 맑아 빛을 발하게 되나니, 이러한 무리들이 머물러 사는 곳을 ‘소광천(少光天)’이라 부르느니라.

    반야의 빛이 뿜어져 나와 서로 비추임이 그지없어 온 누리를 유리와 같이 반짝거리게 이루나니, 이러한 무리들이 머물러 사는 곳을 ‘무량광천(無量光天)’이라 부르느니라.

    온 누리에 가득한 반야의 빛을 머금게 되어 아주 깨끗한 하늘나라의 사람들을 가르치는 몸을 이루게 되어 반야를 빛으로 뿜어내어 그 나라에 사는 중생들이 맑고 깨끗하게 따라 움직이도록 하는 것이 그지없나니, 이러한 무리들이 머물러 사는 곳을 ‘광음천(光音天)’이라 부르느니라.

    아난아, 이러한 세 종류의 빼어난 무리들은 비록 올바르게 닦아 맛보게 되는 참다운 삼매는 아니지만 마음속의 근심들로부터 벗어나게 되나니, 맑고 깨끗한 마음속에 불쑥 불쑥 시도 때도 없이 튀어나오는 번뇌를 이미 항복받았나니, 이선(二禪 역주 : 두 번째 三昧, 二咎地)을 이루었다고 부르느니라.

    아난아, 이러한 하늘 사람들은 온 누리에 가득한 반야의 빛을 소리로 만들어 이루 말할 수 없이 빼어난 음성으로 그 도리를 아주 섬세하게 드러내어 열반의 즐거움으로 들어가게 하나니, 이러한 무리들이 머물러 사는 곳을 ‘소정천(少淨天)’이라 부르느니라.

    번뇌가 완전히 사라져 마음이 맑고 깨끗하여 반야의 힘으로 진실한 공(空)의 모습이 눈앞에 한없이 펼쳐지게 되니 열반의 즐거움으로 가득 차게 되어 몸 마음이 그지없이 가뿐하게 되나니, 이러한 무리들이 머물러 사는 곳을 ‘무량정천(無量淨天)’이라 부르느니라.

    눈앞에 펼쳐지는 세상과 몸 마음이 맑고 깨끗하여 모두 반야의 빛으로 하나가 되고 그 반야의 힘으로 맑고 깨끗하여져서 덕을 이루고 그 덕으로 열반의 즐거움에 기대어 맡기게 하는 빼어나고 아름다운 모습이 눈앞에 펼쳐지게 되나니, 이러한 무리들이 머물러 사는 곳을 ‘변정천(遍淨天)’이라 부르느니라.

    아난아, 이러한 세 종류의 빼어난 무리들은 지켜야 할 도리를 결코 어긋나지 않고 지극히 따르게 되어 이루어 진 것이어서 마음이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즐거움을 얻어 편안함에 깃들게 되고 편안함에 깃들은 마음속에 반야가 드러나게 되어 기쁨과 즐거움이 함께 하나니, 삼선(三禪 역주 : 세 번째 三昧, 發光地)을 이루었다고 부르느니라.

    아난아, 또 다음의 하늘사람들은 마음속의 괴로움이 모두 사라져서 몸 마음에 거리낌이 없게 되나니, 즐거움이라는 것이 언제까지나 변하지 않고 있는 것이 아니어서 반드시 사라지게 됨으로 마음속의 괴로움과 즐거움을 순식간에 버리어 괴로움과 즐거움이라는 두 모습이 사라져서 맑고 깨끗한 반야인 복(福)의 참다운 모습이 우러나오게 되나니, 이러한 무리들이 머물러 사는 곳을 ‘복생천(福生天)’이라 부르느니라.

    괴로움과 즐거움이 사라져 마음이 참다운 도리와 하나로 통하여 아무 걸림이 없어서 빼어난 깨달음을 얻어 맑고 깨끗하여져서 오는 세상이 다 하도록 이루 말할 수 없이 빼어난 지켜야 할 도리를 결코 어긋나지 않고 지극히 따르게 되어 얻게 된 그 복이 닳아짐이 없나니, 이러한 무리들이 머물러 사는 곳을 ‘복애천(福愛天)’이라 부르느니라.

    아난아, 이 아주 깨끗한 하늘에도 두 갈래의 길이 있나니, 만일 먼저 마음속에 한량없이 맑고 깨끗한 반야인 빛으로 된 복(福)과 덕(德)이 반야로 이루어진 처음자리임을 닦고 깨달아 그 자리에 머무르게 되나니, 이러한 무리들이 머물러 사는 곳을 ‘광과천(廣果天)’이라 부르느니라.

    만일 먼저 마음속에 괴로움과 즐거움을 싫어하게 되어서 마음이 사라지는 것을 자세하고 깊이 생각하길 멈추지 아니하고 계속하여 마음 버리는 이치를 지극히 이루어 몸 마음이 사라지게 되면, 마음이 화로속의 재와 같이 되어 오백 겁을 보내게 되나니, 이 사람이 나고 사라지는 것을 비롯하였기에 그 분별하는 마음 때문에 나고 사라지지 아니 하는 참다운 모습은 결코 드러나지 아니하여서 처음 반 겁은 사라지게 되고, 뒤에 반 겁은 살게 되나니, 이러한 무리들이 머물러 사는 곳을 ‘무상천(無想天)’이라 부르느니라.

    아난아, 이러한 네 종류의 빼어난 무리들이 모든 세간의 여러 괴로움과 즐거움의 모습들에 비록 분별하는 마음이 사라진 참다운 자리인 십지(十地 역주 : 不動地, 열 번째 차원의 意識)에 이른 것은 아니지만 결코 분별하는 마음을 내지 아니하여, 그 맑고 깨끗한 마음이 순수함으로 가득 차게 되어서 번뇌가 일어나면 반야의 불꽃이 그 번뇌를 태우게 되어 마음에 깨달은 바가 있으니, 사선(四禪 역주 : 네 번째 三昧, 焰慧地)을 이루었다고 부르느니라.

    아난아, 이 가운데 다섯 종류의 윤회 속에 잠기지 않는 아주 깨끗한 하늘이 있나니, 아홉 종류(九品 역주 : 地獄, 餓鬼, 畜生, 天, 人, 阿修羅, 聲聞, 緣覺, 菩薩)의 몸으로 아래 세상에 머물 때 지니고 있던 남은 버릇들이 한꺼번에 모두 다 사라지게 되면 괴로움과 즐거움이 모두 다 사라지게 됨으로, 아래 세상에 머물러야 할 곳이 없게 된 것은 괴로움과 즐거움이 마음속에서 모두 사라졌기 때문이니, 중생들이 비록 같은 장소에 머물러 있으며 각기 다른 모습으로 삶을 이어가는 속에서도 번뇌에 결코 물들지 아니하여 언제나 고요함 속에 머물게 되느니라

    . 아난아, 괴로움과 즐거움이 모두 사라지게 되면 마음속에서 갈등이 일어나지 아니하게 되나니, 이러한 무리들이 머물러 사는 곳을 ‘무번천(無煩天)’이라 부르느니라. 몸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분별작용이 무심함으로 녹아들어가게 되면 갈등이 일어날 자리가 전혀 없게 되나니, 이러한 무리들이 머물러 사는 곳을 ‘무열천(無熱天)’이라 부르느니라.

    온 누리의 모든 나라가 이루 말할 수 없이 맑고 깨끗하여 반야로 가득 차 있음을 알게 되어서 두 번 다시는 어이없고 미덥지 못한 모습에 물들지 않게 되나니, 이러한 무리들이 머물러 사는 곳을 ‘선견천(善見天)’이라 부르느니라.

    깨달음의 반야를 얻게 되어 눈앞의 모든 것을 여실히 알게 되면 갈피를 못 잡고 헤매는 것과 번뇌로부터 벗어나게 되어 깨달음을 얻게 되어(陶鑄) 걸림이 없게 되나니, 이러한 무리들이 머물러 사는 곳을 ‘선현천(善現天)’이라 부르느니라.

    모든 사물의 변하는 모양과 성질을 여실히 깨닫게 되어 모든 물질의 참다운 자리인 진실한 모습을 남김없이 알게 되면 존재의 태두리 밖으로 나아가게 되나니(역주 : 眞空의 자리에 처음으로 들어섬,) 이러한 무리들이 머물러 사는 곳을 ‘색구경천(色究竟天)’이라 부르느니라.

    아난아, 이러한 ‘불환천(不還天)’은 저 여러 네 종류의 삼매를 깨달아 그 자리에 오른 천왕들조차도 오로지 듣고 부러워만 할 뿐 결코 헤아려 보거나 알 수 없나니, 마치 이 세상의 너른 벌판과 깊은 산골에 있는 성스러운 도량에 모든 아라한들이 머물러 있을 지라도 세간의 거친 사람들이 결코 볼 수 없는 것과 같으니라.

    아난아, 이러한 열여덟 개의 아주 깨끗한 하늘에 사는 사람들은 배우자와 어울리지 않고 홀로 살지마는 아직 스스로의 모습을 지니고 있게 되어 스스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이곳으로 돌아오게 되었나니, ‘색계(色界)’라 부르느니라. 다시 아난아, 우주의 끝에 이르러 존재(存在 역주: 有爲)와 비재(非在 역주: 無)의 가장자리에 이르게 되면 거기에 다시 두 종류의 갈림길이 있나니, 만일 번뇌가 사라진 마음으로 반야를 환히 드러나게 하면, 그 반야의 빛으로 막힘이 없이 다 알게 되어서 다시 허망한 생각에 의해 이루어진 ‘색계’를 벗어나게 되어 아라한을 이루게 되고, 모든 중생들을 부처님께 인도하여 구제하려는 보살의 수레에 다다르게 되느니라.

    이러한 곳에 머무르는 무리들을 ‘회심대아라한(迴心大阿羅漢)’이라 부르느니라. 만일 번뇌가 사라진 마음으로 그 번뇌가 사라진 마음조차도 싫어하게 되면 그 몸이 걸림이 된다는 것을 깨우치게 되고 걸림이 사라지게 되면 진공에 다다르게 되느니라.
    이러한 무리들이 머무르는 곳을 ‘공무변처천(空無邊處天)’이라 부르느니라.

    모든 걸림이 이미 사라져서 걸릴 것도 사라질 것도 없게 되면 그 마음속에 확실하게 아뢰야식(역주 : 여덟 번째의 意識, 存在를 만드는 모든 想念이 여기에서 産出됨)이 자리를 잡게 되나, 그 절반은 아주 미세한 말나식(역주 : 일곱 번째의 意識, 헤아려 살펴보는 것으로 判斷의 主體가 되는 것)으로 이루어지느니라.

    이러한 무리들이 머무르는 곳을 ‘식무변처천(識無邊處天)’이라 부르느니라.
    공간과 모습이 모두 사라지고 헤아리는 그 마음조차도 사라지게 되면 온 누리의 모든 나라가 그윽하여 오고 갈 데가 없이 아득하여지나니, 이러한 무리들이 머무르는 곳을 ‘무소유처천(無所有處天)’ 이라 부르느니라.

    헤아려보는 참다운 모습이 분별이 사라져 흔들리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남김이 없이 사라지도록 노력하기를 그지없이 계속하여 마침내 참다운 모습이 드러나게 되면, 마치 그 모습이 있는 것도 같고 없는 것 같기도 하고 그지없는 것 같기도 하고 그렇지 아니한 것같이도 여겨지나니, 이러한 무리들이 머무르는 곳을 ‘비상비비상처천(非想非非想處天)’이라 부르느니라.

    이러한 무리들 중에 공(空)에 대하여 분석하고 관찰하되 공(空)의 이치를 완전히 깨닫지는 못하여서 ‘불환천(不還天)’에 이르러 성스러운 도리를 분석하고 관찰하는 것을 끝마치게 되었나니, 이러한 곳에 머무르는 무리들을 ‘불회심둔아라한(不迴心鈍阿羅漢)’이라 부르느니라(역주 : 不迴心鈍阿羅漢-스스로만 그윽한 편안함을 얻고 중생들을 구제하려 들지 않으니 이를 일컬음).

    만일 모든 외도(外道)들이 주장하는 마음 버리는 이치를 지극히 이루어 몸 마음이 사라지게 되면 이것은 마음속에 괴로움과 즐거움을 싫어하여 따르는 것이어서 진실한 공을 분석하고 관찰한 것이 아니므로 진실한 공에 다다를 수 없나니, 갈피를 잡지 못하고 번뇌 속을 헤매며 결코 참다운 도리를 듣지 못하게 되며, 다시 나고 죽는 되풀이를 끊임없이 되풀이하게 되느니라.

    아난아, 이 모든 하늘에 사는 각각의 하늘사람들은 사바세계의 맑고 깨끗하게 산 사람들이 스스로가 지은 맑고 깨끗한 행위에 대한 보답으로 돌려받은 것이어서 되갚음이 다하고 나면 다시 나고 죽는 되풀이를 하게 되거니와 저 하늘의 왕들은 보살이 닦는 삼매를 점점 더 깊이 닦게 되어 수행의 길에 들어서게 되면 그것이 바로 스스로 닦은 착함의 공덕을 모든 중생들에게 돌려 중생을 구제하고 스스로는 성인의 과위(果位)에 들어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이니라. 아난아, 이러한 네 종류의 참다운 공의 하늘(역주 : 空無邊處天, 識無邊處天, 無所有處天, 非想非非想處天)은 몸 마음이 모두 사라진 곳이므로 삼매에 들어 참다운 모습인 반야와 하나가 되면, 지음에 대한 되갚음으로 만들어지는 모든 모습들이 사라지게 되나니, 이처럼 마지막에 다다르는 곳을 ‘무색계(無色界)’라 부르느니라.

    이러한 것들은 모두 다 이루 말할 수 없이 빼어난 반야와 하나를 이룸이 참된 마음 인줄을 알지 못하여서 어이없고 미덥지 못한 생각을 쉼 없이 내어 그 어이없고 미덥지 못함으로 삼계가 이루어지게 되었나니, 그 사이에서 어이없고 미덥지 못한 생각을 따름으로 스스로의 마음에 들어 하는 일곱 곳을 찾아 들어가 나고 죽는 되풀이를 끊임없이 하는 괴로움의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되고 나고 죽는 것을 끊임없이 되풀이 하는 바로 중생심이 스스로의 마음에 들어 하는(趣) 일곱 개의 장소를 각기 따르게 되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