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살이 되는 삶
인간은 누구나 고통을 싫어하고 기쁨과 안락을 바랍니다. 부유한 사람이나 가난한 사람이나, 권력을 가진 사람이나 없는 사람이나, 건강하고 장수하기를 원하고 마음에 평안을 가지고 안락하게 살 수 있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현실의 인간사는 꼭 이렇게 인간의 염원대로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때론 모진 병에 걸려 죽기도 하고 불이의 사고로 죽음을 당하기도 합니다. 온갖 노력 끝에 이루어 놓은 기반이 하루아침에 무너져 버리기도 하고, 사랑하는 가족과 헤어지는 아픔을 겪기도 하는 둥, 원하지도 생각지도 않던 불행이 닥쳐오기도 합니다. 이럴 때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크나큰 이 시련 앞에서, 자신의 존재가 너무나 보잘 것 없고 왜소함을 발견하고, 무기력해져 절망을 하게 됩니다. 무엇인가 의지하고 기대고 싶은 이런 절박한 순간에 닥치면, 인간은 이 위기를 극복시켜줄 그 어떤 힘을 행사할 수 있다고 믿는 대상에게 의지하고 기원을 하게 됩니다. 신앙의 출발은 어떤 고상한 이상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인간의 일상생활 속의 고통과 번민으로 시작되는 것입니다. 불교의 가르침의 참 뜻은 순연보다는 역연 속에서 몸부림치는 중생의 구원에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부처님의 위대한 가르침이 나오는 장소는 결코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가까이에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어떤 가르침이 먼저 있기에 우리가 그것을 따라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현실 속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의 본래 뜻으로 부처님의 심오한 가르침에 접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문제를 아무런 비약도 없이 있는 그대로의 현실로 받아들임으로써, 근본에 도달하게 될 때 올바른 믿음을 길러지게 됩니다. [관무령수경] 이라는 경전이 '왕사성의 비극' 이라는, 인간세의 현실적 사건을 발단으로 하여 설해진 것도 이 때입니다. 신앙인은 기도를 즐겨 해야 합니다. 기도하는 신앙이야말로 더렵혀진 마음을 가장 잘 정화하는 부분입니다. 옛날 우리의 선조들은 장독대에 물 한 그릇을 떠 놓고라도 지성으로 기도했기 때문에, 그 마음이 순박하고 그 영혼이 청정했습니다. 그러므로 그 삶에 여유가 있고 이웃 간에 화목했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학자가 많고 지식인도 많지만, 이웃 간에 시기와 질투가 만연합니다. 교리교육을 잘 시키는데,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날까요? 그것은 아마 기도하는 신앙인이 적기 때문일 것입니다. 기도는 우리의 마음을 순수하게 해줍니다. 기도는 바로 내 생활의 고난을 기탄없이 드러내는데서 출발합니다. 그리고 그 고난을 부처님의 자비광명으로 비추어 봄으로써, 하나씩 하나씩 해결해 나갑니다. 내가 절망에 빠졌을 때 부처님이 항상 함께 계신다는 이 믿음이야말로, 고통 속에서도 기쁨을 잃지 않는 삶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위제희 부인이 이 심궁 골방에서도 부천님과 함께 있을 수 있었던 그 믿음이야 말로, 가장 순수하고 깊은 신앙입니다. 일상의 일을 갖고 불전에 기도하는 것을 주저해서는 안 됩니다. 고통스런 현실이 없다면, 부천님의 중생구제는 있을 수 없습니다. 정토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부천님의 구원의 손길이 끊이지 않는 이 사바세계야말로 바로 정토라고 할 수 있습니다. (2)참회하는 생활 (이기적인 나를 버립시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뉘우치기보다는 남을 원망하기가 싶습니다. 스스로의 잘못으로 초래된 불행마저도 남을 먼저 원망하려고 합니다. 한 어린 아이가 부모가 집을 비운 사이 부모가 들어가지 말라고 광 속에 들어갔다가, 그만 문이 잠겨 나올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 어린 아이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두려움에 떱니다. 여기저기 빠져 나갈 곳을 찾다가 자신의 힘으로는 불가능 하다고 여겨지자, 그만 절망을 하게 되고 울면서 부모를 찾았습니다. 부모가 오기만 하면 용서를 빌리라고 생각하면서 빨리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몇 시간이 지나도 오지 않자 부모를 원망하기 시작합니다. 어디에 갔으며 무엇을 하는지? 왜 광문을 열어 두었는지 부모에 대해서 불평불만이 점점 쌓여 갑니다. 이때 부모가 나타나 광문을 열어 주면, 어린 아이는 부모 품에 안겨 엉엉 울면서 부모를 원망합니다. 마음 한 구석에는 반가우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왜 나를 이 지경으로 만들어 두었느냐고 원망의 마음을 갖습니다. 반가움과 설움이 동시에 울음으로 나타나는 것이지요. 우리는 자신의 뜻대로 안되면 남을 원망하고 불만을 터뜨리고는, 인생의 괴로움이란 마치 자기 혼자 다 짊어진 양 슬픔을 표시합니다. 이런 사람일수록 자신이 뜻하는 대로 될 때는, 울고불고 하던 일을 까맣게 잊고서는 교만하게 웃을 것입니다. 이런 사람에게서는 아무런 주체성도 일관성도 발견할 수가 없고, 오직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이리저리 살아갈 것입니다. 우리가 근본적인 괴로움을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는, 바로 진정한 참회를 할 줄 모르는 그런 자신에게 있지 않겠습니까? '왕사성의 비극'을 둘러싼 모든 사람들은 바로 우리 인생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원망의 마음을 버리고 자신을 돌아보며 참회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어야 합니다. "참회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도 아니다."라는 부처님의 말씀처럼, 참회하지 않고서는 그 어떤 기도의 응답도, 구원도 불가능합니다. 구원의 길이 부처님께 모든 것을 내어 맡기는 믿음에서 이루어진다면, 이런 믿음은 스스로를 참회하는 지성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아집에 가득 차고 탐욕과 분노에 가득 찬 마음으로 오직 욕망의 충족을 위해서 부처님께 기도한다면, 그 얼마나 커다란 위선이며 기만이겠습니까? 기도는 아집을 버릴 때, 이기심을 버릴 때, 원망의 마음을 버릴 때, 즉 나를 버릴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신라의 자장율사는 당대의 고승이었습니다. 그분이 문수보살을 친견하기 위하여 시자 한 사람만 데리고, 태백산의 작은 암자에서 기도 삼매에 들었습니다. 그때 이 암자 밖에 초라한 행색을 한 거지가 한 사람 와서는, 자장율사를 만나기를 원했습니다. 시자가 보니까 행색이 초라할 뿐만 아니라 둘러멘 망태기에는 죽은 개를 담아 가지고 있고, 또 건방져 보였습니다. 그래서 돌려보내려고 하니, 꼭 만나야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스님께 가서 자초지종을 말씀드렸더니, "미친 사람인 모양이로구나. 돌려보내라!"고 하기에, 밖에 와서 그대로 전했더니, 이 거지가 하는 말이 "올아 가리로다. 아상이 있는 자가 어찌 나를 보겠는가?"고 하니, 망태기의 개가 갑자기 사자좌로 변하여, 그 위에 앉아 동쪽 하늘로 날아가는데 바로 문수보살이었습니다. 이 소리를 듣고 자장율사가 뛰어나왔으나, 이미 보살은 저 멀리 동쪽 하늘로 날아간 뒤 였습니다. 이에 자장율사는 동쪽을 향해 수없이 절을 하다가 입적을 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삼국유사』중에서 이렇게 훌륭한 고승도 한 순간의 아상 때문에 보살을 친견할 수가 없었습니다. 보살은 휘황찬란한 모습으로 저 높은 곳에서 오시는 것이 아니라, 항상 초라한 모습으로 우리의 이웃에 와서 우리와 함께 살아갑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아상에 눈이 가리워 높은 곳만 쳐다보기 때문에 보살을 친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아상의 철문을 부수면, 내 곁에서 살아가는 이웃 속에서 수많은 불보살들을 친견할 수가 있습니다. 이제 우리들이 삶이 참회하는 마음으로 자신을 낮출 때, 초라해 보이던 내 이웃들이 찬란한 보살로 내 곁에 왕림하게 됩니다. 기도란 그 진실한 마음에 있는 것이지, 특별한 형식만을 고집해서는 안 됩니다. 기도를 하는 중에 아집과 형식을 고집하면 문밖에 화현한 불보살을 쫓아내는 어리석음을 범할지도 모릅니다. 이웃에 대한 사랑의 눈길을 내가 보낼 때, 불보살님도 내게 자비의 광명을 나투시게 됩니다. 부처님은 나의 기도에 응답해서 내 앞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은 항상 나와 함께 계시는데, 내가 눈이 어두워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아상을 버리고 마음의 문을 활짝 열면, 내 앞에 계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두 이기심을 버리고 지성으로 기도해 보시기를 바라겠습니다. 보살이 되는 삶 (3) 과부의 심정은 과부만 안다. 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남의 고통을 이해하고 위로하기 위해서는, 그 고통을 직접 겪어보지 않고는 불가능하다는 말이겠지요. 그래서 '자기의 배가 부르면 종도 배부른 줄 안다' 속담이 생겨났습니다. 세간의 많은 삶의 고통 속에서 인생을 격어보지 않고서는, 부처님의 구제의 가르침을 가슴 깊이 받아들이기 에는 많은 한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대부분의 경우와 같이, 이기심을 버리지 못하는 신앙심이라면 자신만 구제되면 되었지, 이웃을 돌아볼 생각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목련존자의 어머니처럼 자신을 따라 구원받으려는 지옥의 이웃 중생을 차 던지는 마음을 일으키기가 쉽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고통에서 믿음이 출발하여 이기심을 버리고 참회하게 될 때, 바로 이웃에 대한 사랑이 용솟음칩니다. 이 이웃에 대한 사랑은 그들을 염려하는 연민에서 시작됩니다. 이렇게 서원을 발하게 되자, 한갓 구원의 대상이었던 작은 존재에서 뭇 중생을 구원하는 보살로 전환이 됩니다. 보살의 서원은 무슨 큰 권력이나 재력이나 능력을 가져야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이웃에 대한걱정을 함께 하는데서 출발합니다. 법장비구의 48대원도 중생에 대한 연민에서 출발하였고, 약사여래의 12대원도 병든 중생에 대한 연민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 마음이 커져서 아미타불이 되고, 약사유리광여래가 된 것입니다. 오늘 이 법회에 참석한 월천사 보살님들이야말로, 연민의 정을 이웃에까지 돌릴 수 있다면, 진정한 보살이 되기에 가장 합당합니다. 관세음보살의 구원력도 바로 이런 대비심에서 나옵니다. 눈먼 딸을 데리고 분황사의 관음상 앞에선 희명은 기도를 했습니다. "관세음보살님, 당신은 눈이 천 개나 되는데, 그것 하나 내 딸에게 주는 것이 당신에게는 쉬운 일이고, 내게는 얼마나 큰일인고! 그러니 자비를 베푸소서!" 하는 내용입니다. 자비는 바로 이렇게 고통 받은 사람에게 가까이 있어야 하고, 직접 베풀어 져야 합니다. 그러기에 보살은 천 개의 손과 천 개의 눈을 가지고 신음의 소리를 듣고 달려가 어루만져 줍니다. 그렇다면 이런 일은 누가 하겠습니까? 우리들이 이웃에 따뜻한 눈길을 보낼 때, 바로 우리들이 할 수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 모두는 보살의 분신이며 화신이 됩니다. 서원은 스스로를 지킴과 이웃을 향해 열려진 마음입니다. 탐심과 치심을 경계하고, 항상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 지키며, 참회하고 수행하는 구도의 자세가 곧 지킴입니다. 자신을 낮추고 이웃에 대한 연민의 정을 가질 때, 아상을 버리고 이웃과 하나가 될 수 있는 열려진 마음을 가지는 것이 곧 원을 발하는 것이 됩니다. 이것이 곧 상구보리 하화중생의 보살정신입니다. 불교를 먼 곳으로부터 찾지 말았으면 합니다. 고통의 일상성 속에 부처님의 심오한 가르침은 항상 가득 차 있습니다. 고통과 번민이 없는 곳에 어찌 구원의 가르침이 있겠으며, 고통 받는 중생이 없는 곳에 어찌 보살의 정토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매일 만나는 내 이웃이 모두 부처님이며, 매일 하는 일들이 다 불공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리고 끝없는 자기의 번뇌를 끊고, 한없는 법문을 배우는 일보다, 먼저 한없는 중생을 건지겠다는 비장한 서원이 앞장서겠다는. 또 자신은 열반에 들지 않아도 먼저 고난 받은 중생을 구제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들도 위대하고 거룩한 대심(大心) 중생이 되어 수행정진해 보시기 바라며. 오늘 법회에 동참하신 보살님께 감사드리며. 이웃과 함께하는 월천사 보살님 화목하고 평안한 가정으로 이끄시길 부처님전에 기원 드립니다. 출처:-월천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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