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卍-불법을만나고/卍-불교자료실

어느 학인 스님의 죽음

by 회심사 2021. 9. 23.



어느 학인 스님의 죽음.
    수십 년 전 합천 해인사에서 있었던 일이다.
    강원의 학승들이 가을 수확 철에 장경각 뒤쪽의 잣나무 숲으로 잣을 따러 갔다.

    그런데 잣나무가 워낙 높아 한 나무에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와서 다른 나무로 올라가려면 힘이 드니까, 몸이 재빠른 학인들은 가지를 타고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그냥 건너뛰는 일이 많았다.

    그날도 그렇게 잣을 따다가 한 학인이 자칫 실수하여 나무 밑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마침 그 밑에 낙엽이 수북히 쌓여 있어 몸에 상처는 입지 않았지만 완전히 숨이 끊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그 학인은 자기가 죽은 것을 알지 못했다.
    다만 순간 어머님이 보고 싶다는 생각이 일어났고, 그 생각이 일어나자 그는 이미 속가의 집에 들어서고 있었다.

    그는 배가 많이 고픈 상태에서 죽었기 때문에 집에 들어서자마자 길쌈을 하고 있는 누나의 등을 짚으며 밥을 달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어머니와 함께 길쌈을 하던 누나가 갑자기 펄펄 뛰며 머리가 아파 죽겠다는 것이었다. 누나가 아프다고 하자 면목이 없어진 그는 한쪽에 우두커니 서 있었는데, 어머니가 보리밥과 풋나물을 된장국에 풀어 바가지에 담아 와서는 시퍼런 칼을 들고 이리 저리 내두르며 벼락같이 고함을 지르는 것이었다.

    "네 이놈 객귀야, 어서 먹고 물러가라."
    그는 깜짝 놀라 뛰어나오며 투덜거렸다.
    "에잇, 빌어먹을 집. 내 생전에 다시 찾아오나 봐라!
    그래, 나도 참 별일이지. 중이 된 몸으로 집에는 무엇 하러 왔나?
    더군다나 사람대접을 이렇게 하는 집에.... 가자.
    나의 진짜 집 해인사로."

    그리고는 해인사를 향하여 열심히 가고 있는데, 길 옆 꽃밭에서 청춘 남녀가 화려한 옷을 입고 풍악을 올리며 신나게 놀고 있는 것이었다. 잠시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으니 한 젊은 여자가 다가와서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유혹하였다.

    "스님, 우리랑 함께 놀다 가세요."
    "중이 어찌 이런 곳에서 놀 수 있겠소?"
    "에잇, 그놈의 중! 간이 적어서 평생 중질밖에 못해 먹겠다."
    사양을 하고 돌아서는 그를 보고 여인은 욕을 퍼부었다.
    욕을 하든 말든 다시 해인사로 돌아오는데, 이번에는 예쁘장하게 생긴 여인이 길가에 서 있다가 붙잡고 매달리는 것이었다.

    억지로 뿌리치고 걸음을 옮기는데, 이번에는 수건을 머리에 질끈 동여맨 수십 명의 무인들이 활을 쏘아 잡은 노루를 구워 먹으면서 함께 먹을 것을 권하였다. 그들도 간신히 뿌리치고 절에 도착하니,

    재(齋)가 있는지 염불소리가 들려 왔다.
    그런데 아무래도 그 소리가 이상하였다. 가까이 다가가서 유심히 들어보니,
    목탁을 두드리는 스님은 '은행나무 바리때' 뚝딱뚝딱 '은행나무 바리때' 뚝딱뚝딱 하고 있고, 요령을 흔드는 스님은 '제경행상' 딸랑딸랑 '제경행상' 딸랑딸랑 하고 있는 것이었다.

    '참 이상한 염불도 다 한다.'고 생각하면서 열반당(涅槃堂) 간병실로 가보니
    자기와 꼭 닮은 사람이 누워 있는 것이었고, 그를 발로 툭 차는 순간 그는 다시 살아났다.

    그런데 조금 전에 집에서 보았던 누나와 어머니는 물론 여러 조객들이 자기를 앞에 놓고 슬피 울고 있는 것이었다.
    영문을 알 수가 없었던 그는 살아난 자신을 보고 기절초풍을 하는 어머니에게 여쭈었다.

    "어머니, 왜 여기 와서 울고 계십니까?"
    "네 놈이 산에 잣을 따러 갔다가 죽었지 않았느냐!
    그래서 지금 초상 치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세상은 진정 일장춘몽이었다.
    그는 다시 어머니에게 물었다.
    "어제 집에서 누나가 아픈 일이 있었습니까?"
    "그럼, 멀쩡하던 애가 갑자기 죽는다고 하여 밥을 바가지에 풀어서 버렸더니 다시 살아나더구나."

    그는 다시 자신을 위해 염불을 해주던 도반 스님에게 물었다.
    "아까 내가 들으니 너는 은행나무 바리때만 찾고 너는 제경행상만을 찾던데, 도대체 그것이 무슨 소리냐?"

    "나는 전부터 은행나무로 만든 너의 바리때를 매우 갖고 싶었어. 너의 유품 중에서 그것만은 꼭 가지고 싶다는 생각이 어찌나 강하게 나던지...... 너를 위해 염불을 하면서도 '은행나무 바리때'에 대한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어. 정말 미안하네."

    "나도 역시 그랬다네.
    네가 평소에 애지중지하던 <제경행상 諸經行相>이라는 책이 하도 탐이 나서...
    죽었다가 살아난 학인은 그 말을 듣고 문득 깨닫는 바가 있어 무인들이 노루 고기를 먹던 장소를 가 보았다.

    그런데 사람들의 자취는 없고 큰 벌집만 하나 있었다.
    꿀을 따는 벌들이 열심히 그 집을 드나들고 있을 뿐....
    다시 미모의 여인이 붙들고 매달리던 곳으로 가보니 굵직한 뱀 한 마리가 똬리를 틀고 있었으며, 청춘 남녀가 풍악을 울리며 놀던 곳에는 비단개구리들이 모여 울고 있었다.

    "휴, 내가 만일 청춘 남녀나 무사, 미녀의 유혹에 빠졌다면 분명 개구리, 뱀, 벌 중 하나로 태어났을 것이 아닌가!"

    2) 자력의 천도, 타력의 천도
    해인사에서 실제로 있었던 이 이야기는 영가에 대한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우리에게 상기시키고 있다. 그것과 연결시켜 영가 천도에 대한 이야기들을 전개시켜 보자.

    죽어서 육체를 이탈한 영(靈)은 업을 좇아 헤매이게 되고, 자기의 업과 인연이 있는 곳에 이르면 걷잡을 수 없는 유혹에 빠지게 된다.

    비단 개구리가 화려한 옷을 입고 풍악을 울리며 놀고 있는 청춘 남녀로 보인 것이나, 똬리를 튼 뱀이 어여쁜 여인으로 보인 것도 한 예이다.

    영혼은 자기가 태어나야 할 인연처에 이르면 그곳이 이 세상에서 가장 바람직한 낙원처럼 보이게 된다고 한다.
    이것이 묘한 점이다.

    까마귀로 태어날 영혼에게는 까마귀 둥지가 대궐보다 더 아름답게 보이게 되고, 그래서 그 대궐 같은 까마귀 둥지로 들어가 까마귀 새끼로 태어나고 만다.

    스스로 지은 업의 에너지가 맞는 사이클을 찾아 파고드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무명업력(無明業力)이다.
    있는 그대로를 보지 못하는 어둠이다.
    이 업의 장벽에 가리어 까마귀 둥지를 까마귀 둥지로 보지 못하고 뱀의 몸을 뱀으로 보지 못한다.

    그렇다면 이렇듯 깜깜한 무명(無明)을 제거하여 있는 그대로를 보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가?
    분명히 있다.

    그리고 그 방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하나는 살아생전에 스스로 닦아 익힌 수행의 힘이요,
    다른 하나는 49재 등의 타력적(他力的)인 천도 의식을 통한 구원이다.

    살아생전에 불경을 공부하고 참선, 염불 등의 수행을 많이 한 사람은 죽은 후에도 미혹에 휩싸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보아 스스로가 꼭 태어나야 할 곳에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열심히 수행하지 않았더라도 부처님의 한 말씀 가르침,
    예를 들어 <금강경> 사구게(四句偈) 한 구절이라도 마음에 깊이 새겨 좌우명으로 삼는 이라면 나쁜 악도(惡道)에 떨어지지 않게 된다.

    옛날, 공부한 것이라고는 <금강경> 사구게 한 구절밖에 없는 스님이 평생토록 욕심을 부리다가 죽었다.

    그 스님의 영혼은 이곳저곳을 헤매 돌아다니다가 대궐보다 더 화려해 보이는 까마귀 둥지가 너무나 좋게 보여 그곳에 들어가서 머물고자 하였다. 그때 허공에서 우뢰와 같은 소리가 들려 왔다.

    무릇 모양 있는 것은 모두가 허망한 것이다.
    만약 모든 모양 있는 것이 모양 아닌 줄을 알면 곧바로 부처님을 보리라

    凡所有相
    皆是處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네가 평소에 이것 하나만을 부지런히 외웠거늘, 어찌 까마귀 둥지를 대궐보다 더 좋게 보고 들어가려 하느냐?
    눈을 떠라.
    눈을 떠라.
    네가 그곳에 빠져들면 영원히 헤어나기 힘드느니라."

    그 소리를 듣고 스님은 까마귀 둥지를 벗어나 새롭게 발심하고 불법을 잘 닦을 수 있는 인연처를 찾아 태어났다고 한다.

    -일타스님-
    -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