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심법문-청화스님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 모두가 바로 고생의 바다요 불구덩이나 똑같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법회장 분위기는 우리 불자님들의 지극한 자비심으로 넘쳐흐르고 있습니다. 산승도 마치 고향 같은 아늑한 환희심과 행복에 넘치고 있습니다. 《부처님의 안심법문》 우리가 대체로 다 아시는 바와 같이 부처님 법문은 안심법문(安心法門)입니다. 우리 중생이 마음도 편안하고, 몸도 편안하고, 사회도 편안하고 모두를 다 편안하게 하는 그러한 안심법문입니다. 고생의 바다, 이 불구덩이를 어떻게 우리가 편안하게 살아갈 것인가? 이것이 부처님 법문의 가장 중요한 핵심인 것입니다. 우리가 안심하려고 해서 안심이 되는 것이 아니고, 안심을 하려면 어떻게 어느 길로 가야 할 것인가? 다시 말하면 우리 목적지는 어디인가? 또 목적지까지 가는 길의 순로는 어떠한 것이고, 어떻게 길을 걸어가야 빠를 것인가? 그런 것을 몰라서는 마음이 안심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 법문은 우리 중생의 안심을 위해서, 중생의 근본이 무엇인가, 또 우리가 떠나온 고향은 어딘가, 우리가 지향해야 할 고향은 어디인가, 이런 것을 아주 극명하게 밝히신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부처님 가르침의 대요를 살펴보면, 먼저 상식적인 차원, 세간의 인간들이 보통 느끼는 그런 차원으로는 나도 있고, 너도 있고, 이것도 있고, 저것도 있고, 모든 현상계가 우리 중생이 보는 그대로 존재한다는 가르침입니다. 즉 부교 술어로 말하면 이것을 유교(有敎)라. 우리 중생이 보는 것을 그대로 긍정하는 이러한 유교입니다. 그러나 중생이 보는 차원, 이런 유교만 가지고서는 우리가 제대로 근본 뿌리를 알 수가 없습니다. 현대 유물주의 사회, 이 물질 지상주의 사회, 이런 사회는 모두가 이른바 "있다, 없다" 하는 그런 것에 근거된 사회가 되지 않습니까? 자본주의도 마찬가지고 사회주의 공산주의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가 물질은 물질 그대로 존재한다. 나는 나고 너는 너다. 이런 차원입니다. 그러한 현상 세계만 전부고 우리 중생의 눈에 안 보이는 세계는 없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만 생각할 때는 있는 것만 가지고 서로 많이 가지려고 하고, 또 눈에 보이는 것이 화려하면 좋은 것이고, 눈에 보이는 것이 빈약하면 나쁜 것이고, 이렇게 됩니다. 따라서 이런 차원에서는 방금 제가 말씀드린 모든 것은 우리 중생들이 보는 그대로 존재한다. 이런 유교(有敎) 차원에서는 인생의 참다운 행복은 있을 수 없습니다. 욕계(欲界)도 고생뿐이고, 또 더 올라가서 색계(色界)도 고생뿐이고, 무색계(無色界)도 고생뿐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중생들이 눈에 보이는 세계, 눈에 보이는 그러한 존재, 이런 것이 전부다. 그런 견해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필연적으로 우리 중생들이 있는 것에 집착하는 한 고생을 면할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일체종지(一切種智)라, 모든 존재의 근본 뿌리를 훤히 알으십니다. 따라서 눈에 보이는 이것은 연기법(緣起法)으로 해서 인연법(因緣法)으로 해서 잠시간 나온 것에 불과하다. 이렇게 설하셨습니다. 우리 불자님들은 대체로 아시겠습니다만 아함경(阿含經)같은 부처님 근본 불교의 초기 법문에서 연기를 보는 사람은 법을 보고 법을 보는 사람은 부처를 본다고 설하셨습니다. 불교에서 법(法)이라 할 때는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우주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이라 하는 그런 법과 만법이라 하는 제법의 법, 그런 두 가지 개념(槪念)이 있습니다만 부처님의 가르침을 알려고 생각할 때는 "먼저 연기를 보아라, 그리고 연기를 보는 자는 법을 보고, 우주의 근본 도리를 보고, 법을 보는 자는 부처를 본다." 즉 석가모니, 세존인 나를 본다. 이런 말씀입니다. 따라서 사실은 연기를 모르면 우주의 도리, 법도 모르는 것이고 또 부처님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연기는 어떠한 것인가? 불교를 믿는 여러분들은 인연법, 연기를 모르시는 분은 없으시겠지요. 그러나 가만히 보면 연기를 낮은 차원의 연기는 제법 아시는 분들이 많지만 본질적인 연기법에 대해서는 잘 모르시는 분들도 많이 있습니다. 이런 기회에 꼭 그런 본질적인 연기법을 알으셔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또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 이런 식의 연기법은 보통 차원의 연기법이 아닙니까. 이런 식의 연기법으로 우리 인생고를 인생의 본질적인 병을 고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부처님의 연기법의 도리 가운데도 이런 연기법은 소승적인 연기법인 것이고, 부처님께서 꼭 말씀하시고자 하는 대승적인 본래 연기법의 뜻은 아닙니다. 현대 과학적으로 말하면 소승적인 연기법은 마치 상대성 원리 같은 그런 범주를 미처 못 벗어납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근본 도리에서 이뤄지는 연기법은 이것은 진여연기(眞如緣起)라. 또는 법계연기(法界緣起)라. 우리 중생의 때 묻은 마음에서는 미처 모른다 하더라도 삼천대천세계, 우주에는 진여불성(眞如佛性)이라 하는 우주의 참다운 생명(生命)이 충만해 있는 것입니다. 《우주는 무한한 생명자체다.》 우리는 먼저 부처님 법에 대해서 신(信:믿음)을 갖지 않으면 부처님 법을 닦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 경험도 못하고 우리의 때 묻은 눈으로 안 보인다 하더라도 우주의 청정법계(淸淨法界)에는 진여불성이라 하는 우주의 참다운 생명 자체가 충만해 있습니다. 어디에는 있고 어디에는 없는 것이 아니며, 우리 개체적인 인간도 머리카락 끝부터 발끝까지 진여불성이 충만해 있습니다. 여기 계시는 우리 불자님들도 다 그렇습니다. 모두가 진여불성이라 하는 순수 생명, 현대적인 말로 하면 순수 에너지 이것이 충만해 있습니다. 그리고 진여불성이라 하는 그 자리는 다른 말로 바꿔서 말하면 법성(法性)이고, 불성(佛性), 참 나(眞我)고, 본래면목(本來面目)이고, 열반(涅槃)이고, 또 도(道)고, 진리(眞理)입니다. 표현은 다르나 모두가 진리의 별명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한 진여불성은 경(經)에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불생불멸(不生不滅) 본래 낳지 않고 죽지 않고, 불구부정(不垢不淨) 더러운 것도 없고 청정할 것도 없는, 부증불감(不增不減) 더하지도 않고 덜하지도 않는 자리입니다. 하여튼 어떠한 차원으로 보나, 즉 능력으로 보나 지혜로 보나 자비심으로 보나, 또는 행복으로 보나, 어떤 면으로 보나 완벽한 자리, 충만한 생명 자체가 바로 진여불성입니다. 이 자리에서 인연 따라서 이루어지는 것이 산이고 냇이고 인간이고 또는 삼천대천세계의 별이고 달이고 해이며 이들 모두가 다 우주에 본래로 충만한 진여불성으로부터 인연 따라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알아야 그래야 대승적인 연기법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법계연기(法界緣起)라. 또는 진여연기(眞如緣起)라.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청화 스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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