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과 인과-정일 선사
인과(因果)는 모든 것이 원인이 있어서 결과가 나타난다는 법칙으로, 현상계를 초월하지 못한 중생들은 모두가 이 인과법의 세계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업의 법칙은 망상의 법칙입니다. 이 망상의 법칙은 누가 만들어놓은 것이 아닙니다. 중생들 스스로 지은 업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이 법칙은 누구도 어길 수가 없습니다. 알든 모르든 이 법칙은 철두철미하게 돌아가고 있어서 누구도 업의 그물망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오직 이 망상의 법칙을 깨달은 사람만이 그것을 범하지 않고 초월할 수가 있습니다. 땅에 엎어진 이가 땅을 짚고 다시 일어나듯 인과의 고해(苦海)속에 세세생생 고통 받으며 헤매는 중생들은 이 도리를 사무쳐 깨달아야 비로소 초탈할 수 있습니다. 이 법칙은 누구도 어길 수 없는 것이어서 빚을 지면 꼭 그만큼 갚아야 하고, 남에게 해로움을 주었으면 반드시 그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선한 일을 하면 선한 과보를 받고, 남에게 이로움을 주면 그만큼 자신에게 이로움이 있는 것도 역시 인과입니다. 세계의 3대 성인 가운데 한 분인 공자님도 인과의 도리는 잘 몰랐습니다. 그래서 부모를 죽인 원수는 갚아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이것은 단생(單生)만 아는 일반 범부의 상식이라고 해야 옳습니다. 그러나 윤회와 인과의 도리를 사무쳐 아는 부처님 법의 세계 안에서는 비록 부모를 죽인 원수라고 할지라도 자비롭게 용서해야 합니다. 먼저 그렇게 자비의 손길을 뻗어주면 뼈에 사무친 원결심(怨結心)이라도 눈 녹듯이 풀리고 오히려 고마움으로 변해 내생에는 서로 좋은 관계로 만날 수 있게 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도 이롭고 남도 이로운 삶을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수행력이 아니면 이렇게 하기가 어렵습니다. 중생들은 생김새도 자신이 지은 업 그대로 생겨나옵니다. 착한 일을 하면 착하게 생기고, 독한 마음을 자꾸 쓰면 독사눈을 닮아서 나오는 것입니다. 갓 난 고양이의 눈을 보면 처음에는 참 유순하고 맑아서 예쁩니다. 그런데 쥐를 몇 마리만 잡아먹으면 그 눈에 금방 살기가 잔뜩 서려 시퍼런 빛이 감돕니다. 풀만 먹고 사는 소는 성장해도 여전히 눈망울이 땡그란 것이 순해터지게 생겼습니다. 소보다 덩치가 더 큰 코끼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다른 생명을 잡아먹고 서는 맹수들의 눈에는 언제나 매서운 살기와 독기가 잔뜩 도사리고 있습니다. 이것만 봐도 자기가 행한 대로 생김새가 변화한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중생들은 까막눈이 되어서 이 환한 도리를 모르고 삽니다. 얼굴 생김새, 머리카락 구조, 뼈다귀 구조, 소리, 냄새에 이르기까지 중생들의 물질적 형상은 전부 인과의 기록 장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마음을 등지고 무수겁(無數劫)을 헤매며 돌아다닌 인과의 내력이 빠짐없이, 낱낱이, 세밀히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일반 대중들도 기본적인 관상 정도는 볼 줄 압니다. 그래서 순해터진 사람을 보면‘순하게 생겼다’고 좋아하고, 독하게 생긴 사람은 ‘쏘가리처럼 톡톡 쏘게 생겼다’며 멀리합니다. 부처님 말씀이나 선지식들의 법문을 들으며 마음을 자비롭게 쓰면 자비안(慈悲顔)으로 점차 변해갑니다. 눈매에도 독기가 빠져서 선해집니다. 심지어 골상까지 변화하기도 합니다. 10년이 지나면 강산이 변화한다고 합니다. 그처럼 10년만 열심히 수행을 하고 마음을 바르게 쓰면 상호(相好)가 변화합니다. 수행력을 통해 인과를 초월할 힘을 얻지 못했다면 적어도 악업(惡業)은 짓지 말아야 합니다. 그 과보로 인하여 자신이 무수한 세월 동안 고통을 받을뿐더러 남에게도 해로움을 주기 때문입니다. 중생들이 업의 세계에 끄달려 살면서 업을 지을 수밖에 없다면 그나마 선업(善業)을 지어야 합니다. 깨달음을 얻기 전에는 진실로 착하다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번뇌 망상에 의지한 착함이기 때문에 근본도리로서는 선(善)이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중생들의 번뇌 망상은 모두 악지악견(惡知惡見)입니다. 그러므로 거기에 의지한 중생들의 착함은‘악함 속의 착함’이라고 해야 옳지 참다운 선(善)은 아닙니다. 선업을 짓는다고 해도 번뇌 망상이라는‘악함 속의 선업’이지 자리리타(自利利他)의 근본 선은 아닌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부지런히 선업을 지어야 합니다. 그것이 복을 짓는 일입니다. 중생들의 입장에서는 암만 복을 지어도 무루복(無漏福)은 성취할 수 없고 유루복(有漏福)을 짓는 것이지만, 유루복이라도 부지런히 지어놓아야 합니다. 복력(福力)이 없으면 수행도 할 수 없고 남에게 이로움을 주는 사람이 될 수도 없습니다. 착한 일을 하면 그 과보로 복(福)의 기운이 들어옵니다. 악한 일을 하면 화(禍)의 기운이 들어옵니다. 인연을 따라 복과 화를 받게 되는데 복의 기운이 다하면 화의 기운, 즉 악업의 과보가 들이닥칩니다. 복도 호흡과 마찬가지입니다. 안으로 들이쉬는 숨이 많아야지 바깥으로 내쉬는 숨기운이 더 많으면 기(氣)가 빠져 탈진됩니다. 집안을 부강하게 만드는 것도 그렇습니다. 지출보다 수입이 많아야 합니다. 짓는 복이 까먹는 복보다 많아야 합니다. 집안 사정도 모른 채 펑펑 써대어 집안을 빚더미에 올려놓는 것처럼 감복(減福)할 짓을 하면 그 과보가 틀림없이 들이닥치게 됩니다. 염불을 하면 좋은 업을 짓는 것이기 때문에 좋은 과보를 받게 됩니다. 입으로만 소리를 내는 것은‘송불(誦佛)’이라고 합니다. 부처님을 생각하며 그 명호를 외우는 것을‘염불(念佛)’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부처님을 뵌 일이 없는데 어떤 분을 부처님이라고 생각하며 염불을 하겠습니까? 그것 역시 망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망상 염불인 셈입니다. 염불하는 것은 좋으나, 그것은‘좋은 망상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염불은 다른 잡동사니 망상을 하느니 좋은 망상을 하는 것입니다. 염불하는 것은 맑은 기운입니다. 인과는 망상이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므로 좋은 망상을 하면 좋은 과보를 받게 됩니다. 그래서 염불을 하면 복을 받습니다. 염불을 하면서 사람들은 누구나 죽으면 극락에 가기를 원하지만, 실제로는 극락도 중생의 업으로 나타난 세계입니다. 중생들은 번뇌 망상에 미쳐서 살면서 눈에 보이는 세계를 사실이라고 합니다. 귀신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의 눈에는 띄지 않는 껍데기에 집착해서 그것을 몸뚱이라고 뒤집어쓰고는 그것을 사실 세계로 믿고 살아갑니다. 천상세계도 중생들은 사실이라고 믿지만 그것도 깨달은 분상에서 보면 허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극락세계는 부처님이 번뇌 망상에 팔린 중생들을 근기에 따라 데려다가 그 세계를 졸업시켜 성불하게 만드는 곳입니다. 그래서 서방정토 극락세계는 화신(化身) 극락입니다. 도깨비가 사는 극락이라는 말입니다. 다른 말로는 화신 국토라고도 하고, 화성(化城)이라고도 합니다. 화신 극락도 업이 녹아야 갈 수 있습니다. 이 지구상에는 번뇌가 일초에 육만 삼천 번을 뛰는 중생들이 모여 살고 있습니다. 그 다음으로 조용하면 사왕천, 도리천, 야마천에 가서 납니다. 번뇌가 쉰 정도에 따라 28천(天)까지 순차적으로 올라가게 됩니다. 극락세계는 그 이상 수행이 되어야 갈 수 있는 세계입니다. 아미타불 한 번만 순수하게 부르면 누구나 극락에 갈 수 있다고 되어 있지만, 문제는 얼마만큼 순수하게 부르느냐 하는 것입니다. 아미타부처님이 극락세계의 문을 활짝 열어놓았지만 아무나 못갑니다. 또 수행을 해서 업이 녹고 그만큼 순수해진 사람이 극락세계에 가야 그곳이 좋다고 하고 머물러 살지 그렇지 않으면 도로 기어 나옵니다. 옛날에 망월사의 주지 스님이 서울 시내에 내려왔다가 다리 밑에서 깡통을 들고 구걸하는 한 아이를 데려다가 목욕을 시키고 새 옷을 갈아입혔습니다. 그러고는 먹여주고 재워주며 키웠는데, 이삼 일을 겨우 견디더니 깡통을 훔쳐서는 도로 다리 밑으로 달아났습니다. 업이 그렇게 깡통을 찰 업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극락세계도 억지로 가서는 살지를 못합니다. 극락세계 아미타부처님이 문을 활짝 열어놓고 누구나 와서 살도록 해놓으셨지만 그렇다고 해서 업이 탁한 무리들이 갈 수는 없습니다. 중생들의 삶이란 좋은 잠자리와 따뜻한 법을 버리고 추운 겨울에 벌벌 떨면서 다리 밑에서 언 밥을 먹는 거지아이와 같은 것입니다. 염라국도 극락세계와 마찬가지로 모든 중생에게 이익을 주는 교육기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순수하게 염라국에 잘 가면 좋은 이익이 있습니다. 임종 후 49일 동안 염라국의 교육을 잘 받으면 업이 녹게 됩니다. 얼마만큼 정성껏 교육을 받았느냐에 따라 업이 녹는 정도는 서로 다릅니다. 업이 녹아야 좋은 세계에 태어날 수 있습니다. 염라국에 가면 업경대(業鏡臺)라는 것이 있어서 거기에 중생의 업이 낱낱이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염라대왕과 판관에게 문초를 당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살아 있을 때 악업을 짓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중생들은 모두 자기 업에 따라 극락에도 나고 지옥에도 갑니다. 망상 기운을 가지고 변덕부리기를 좋아하면 귀신 몸을 받아 나게 됩니다. 도둑질을 좋아하면 그것은 냉장고와 같아서 자꾸 빨아들이는 기운이라 지옥에 가도 한빙(寒氷)지옥, 즉 얼음지옥에 가게 됩니다. 또 남의 여자를 좋아하고 겁탈하는 무리들은 전부 불(火)지옥에 처박힌다고 되어 있습니다. 지옥도 극락세계와 마찬가지로 업으로 인하여 건설된 세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옥도 자꾸 변천합니다. 중생들의 업이 변화하기 때문입니다. 현대병인 암이나 에이즈 같은 것도 새로운 지옥이 하나 건설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사람들의 모공 하나하나도 지옥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우주 법계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환히 보시고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한 방울의 물에도 팔만사천의 생명체들이 살고 있다고 하셨고, 모공 하나하나에 구억의 생명이 우글거린다고 하셨습니다. 중생들의 눈으로는 아무리 봐도 이것이 안 보입니다. 공자님, 예수님 같은 성인의 눈에도 안 보입니다. 모공 하나에 구억 생명체가 사니까 이것이 바로 지옥입니다. 이렇게 지옥을 자기 몸에 수천억 개를 건설해 다니면서도 중생들은 지옥이 없다고 합니다. 물론 본심자리에서 보면 지옥과 천당이 모두 본공(本空)하여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현실도 본래 공입니다. 하지만 현실이 있다고 보는 중생들의 견해를 방편적으로 인정한다면 극락과 지옥이 있다는 것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런데 번뇌에 팔려 이런 도리를 잘 모르면서 사람들은 현실은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고 지옥과 극락은 없다고 부정합니다. 극락과 지옥이 없다는 것은 본심 경계에서 쓰는 말입니다. 이때는 당연히 현실도 없습니다. 본심 경계에서 극락도 지옥도 없다는 얘기는 참으로 비어서 진공(眞空)이기 때문에 걸림도 없고 끄달리지 않아 구애됨이 없다는 얘기입니다. 즉 생사가 없다는 얘기입니다. 그런 경지를 나타내는 언구로서‘극락과 지옥이 본공하다’는 것입니다. 현실이 있다고 보는 중생들의 입장에서는 지옥이 있고 극락이 있고 천당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각자 자기 업을 따라 그 세계에 가서 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현실 경계에 끄달려 살면서 지옥이 없다고 하며 마음대로 악업을 퍼짓고 살다가는 나중에 지옥에 끌려가서 심한 고통을 받게 됩니다. 「지장경」을 보면 지옥고의 종류가 세밀히 나옵니다. 「지장경」에 나타난 지옥들은 사람이 죽은 뒤 혼이 가서 과보를 받는 세계입니다. 사람들은 집안에서 날마다 칼로 도마를 또닥거려 무수한 생명체를 죽이고, 숨 쉰다고 하여 공기 중에 있는 세균들을 잡아먹고 뱃속에 집어넣어 몸 안의 세균들과 싸움을 시키는 등, 매일 매일 지옥의 무독귀왕, 아수라 역할을 하며 삽니다. 수백 가지 역할을 번갈아 하여 지옥을 만들어내면서 사는 것입니다. 탁한 환경일수록 죄를 많이 짓게 됩니다. 이 지구상의 모든 환경은 죄를 짓지 않고는 살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숨만 쉬어도 죄이고, 밥을 먹어도 죄이고, 물만 마셔도 죄입니다. 스님들이 채식만 하면서 살면 죄를 안 지을 것 같지만 마찬가지입니다. 일반인보다 조금이라도 덜 지으려고 애쓸 뿐입니다. ‘어차피 죄 안 짓고는 살 수 없다면 마음이나 편하게 짓자’하고 마구 죄를 퍼질러댔다가는 큰일이 납니다. 그렇게 했다가는 구제 받을 도리가 없는 큰 지옥에 빠지게 됩니다. 어떻게 하면 죄를 조금이라도 적게 짓고 살 것인지, 어떻게 하면 많은 중생에게 이익을 줄 수 있을 것인지 진실하게 생각하여 실천하도록 노력하며 살아야 합니다. 천상세계로 갈수록 죄를 덜 짓고 살게끔 환경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서방정토 극락세계에 가면 죄를 짓지 않고도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중생들은 극락세계에 갈 생각은 안 하고 찰나찰나 죄만 짓게 되는 이 사바세계에서 번뇌에 놀아나며 전도된 몽상에 빠져 미진수겁(微塵數劫)을 헤매 다닙니다. 또 편안하게 살 수 있는 절집을 버리고 추운 겨울날 깡통을 들고 도로 다리 밑으로 기어들어간 철부지처럼 극락세계는 재미없다고 하면서 업을 퍼짓고 살아야 재미있다고들 합니다. 이것은 중생들이 여러 생애 동안 그런 업을 익혔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부지런히 경책을 하여 이 무거운 업을 녹여 가볍게 해야 합니다. 가벼워진 업도 더 가볍게 녹여나가야 합니다. 그래야만 전도(顚倒)된 망상이 가라앉고 제자리로 돌아와 극락세계에 가서 나겠다는 원(願), 즉 본심을 깨닫겠다는 발심을 하게 됩니다. 자신의 업을 다스리고 녹여 자신의 본마음 고향을 찾아가고자 하는 수행인들은 아무래도 업을 덜 짓게 되는데, 그 가운데에서도 오히려 무겁게 짓기 쉬운 업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고행(苦行)이 수행인 줄 알고 몸을 괴롭히는 업입니다. 수행을 한다고 자기 몸을 함부로 쓰고 다루면 그 과보가 어김없이 들이닥칩니다. 업을 모두 초월해 자재하는 힘을 얻었다면 괜찮겠지만, 그렇지 못했을 때에는 자신이 몸을 다룬 대로 인과의 도리에 의해 그 업보가 반드시 나타납니다. 고행이 바른 수행법이 아닌 것은 이미 2,500년 전에 부처님께서 당신의 몸으로 여실히 증명해 보이셨습니다. 부처님은 전정각 산에서 6년 동안 몸에 뼈만 남을 정도로 가혹한 고행을 하셨습니다. 그 후 부처님은 지나친 고행은 수행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가르치셨습니다. 몸으로 고행한다고 도(道)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덮어놓고 고행을 하지 말라고 부처님께서 직접 모범을 보이셨으므로 이르신 대로만 하면 되는데, 요즘도 수행 삼아 고행을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고행은 도가 아닙니다. 고행을 한다고 도통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몸을 너무 기름지게 해서도 안 됩니다. 몸을 지나치게 혹사시키지도 않고 너무 늘어지게 풀어주지도 않으면서 부처님이 가신 길을 잘 밟아 가면 어렵지 않게 도를 통할 수 있습니다. 정진한다고 하여 말뚝신심으로 찬 바위에 오랫동안 앉아 있으면 그 인과가 나타납니다. 그렇게 몸을 함부로 굴리다가는 나중에 풍(風)을 맞기도 합니다. 찬방에 오래 앉아 있어도 좋지 않습니다. 냉기가 항문을 통해 들어가 냉병이 생기는데, 몸이 차가워지면 수행하는 데 장애가 생깁니다. 자유자재하는 힘을 얻기 전에 몸만 망치는 것입니다. 생식을 한다느니 뭐 어쩐다느니 하며 몸을 잔뜩 억압하는데, 그렇게 고행을 하다가 눈을 겨우 뜬 이들이 있기는 합니다. 이들은 몸을 험하게 다루었기 때문에 겉모습으로 원만한 도인의 상호는 갖추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겉모양만 보고 도인을 함부로 분별할 일도 아닙니다. 초발심을 내었을 때 열심히 하는 것은 좋지만 그렇다고 몸을 심하게 쓰는 일은 조심하고 삼가야 합니다. 수행을 하다가 몸이 아프게 되면 얼른 약도 먹여주고 잘 대해주어 몸이 완쾌되도록 잘 조절해야 합니다. 몸이 아플 때 무조건 수행을 강하게 밀고 나가지 말고 일단 치유한 다음 수행을 강하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몸이 병이 나면 거기에 끄달려서 공부가 안 됩니다. 몸은 변덕이 심한 여우와 같으므로 살살 구슬려서 잘 부려먹어야 합니다. 병이 나지 않도록 조심조심 다루어 백 년을 멋지게 써먹어야 합니다. 그 이상 몸에 정성을 쏟을 것은 없습니다. 백 년이 지나면 지수화풍(地水火風) 네 마리의 뱀이 되어 스르르 가버립니다. 아무리 공을 들여도 네 마리 뱀을 기른 것밖에는 안 됩니다. 예전에는 절집도 살림이 매우 곤란해서 결제 중에도 탁발을 나가야 했는데, 요즘은 먹고사는 것이 너무 풍족해서 오히려 공부에 지장을 줄 정도입니다. 병든 몸도 공부에 해롭지만 지나치게 건강해 혈기가 왕성한 것도 공부에 도움이 안 됩니다. 그래서 비구들은 기름도 많이 먹지 말라고 되어 있습니다. 파, 마늘, 양파, 부추, 달래 등의 오신채는 양기를 돋우고 건강을 너무 좋게 해서 번뇌가 와글거리게 되므로 예부터 비구들은 그것을 경계하게끔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수행에 많은 도움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생에 스님 노릇을 하던 이는 어려서부터 파, 마늘을 무척 싫어합니다. 전생에 먹지 않던 습관을 그대로 가지고 태어난 것입니다. 채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전생부터 육식을 하지 않던 이들은 새로 몸을 받아 나서도 채식만 하려고 합니다. 몸은 마치 여우와 같아서 잘 먹여주면 더 잘 먹여달라고 졸라댑니다. 눈은 꼭 참새 같고 콧구멍은 구렁이 같고 입은 물고기 같아서 뭘 자꾸 먹겠다고 합니다. 그런 경계에 너무 팔리지 말아야 합니다. 몸을 지혜롭게 다루어 잘 부려먹은 이는 극락을 갈 것이고 어리석게 다룬 이는 지옥에 처박히게 될 것입니다. 다른 외도들은 중생들의 업으로 나타나는 인과의 도리를 전혀 모릅니다. 부처님 법과 비교하면 깜깜 장님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몸으로도 요란스럽게 수행을 하여 업을 더 심하게 짓고, 번뇌 망상에 의지하여 수행을 한답시고 요술에 빠지는 도를 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불자들은 이렇게 밝은 이치를 만나게 되었으니 얼마나 다행입니까. 하지만 불자들은 부처님의 법을 만난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얼마나 은혜로운 일인지 실제로는 잘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과의 도리를 설해주어도 여전히 같은 업을 퍼지으며 세세생생 고통 속에 빠져 윤회합니다. 이렇게 귀한 법을 만났으면 아주 간절하게 노력을 해야 합니다. 자꾸 수행을 해야만 간절한 마음이 조금씩 우러납니다. 부지런히 수행을 하고 애를 써서 간절한 마음이 참으로 사무치게 하여 밝은 이치를 사실대로 깨닫고 업의 세계와 인과의 도리를 초탈하는 대자유인이 되어야 합니다. -정일선사 법어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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