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과를 초월하는 것이 도입니다.-혜암스님
이 연결은 연결이 아닌 연결이요 이 화합(모임)은 모임이 아닌 모임이더라. 연합이 멸하여 다 한 곳에 뚜렷이 밝은 한 물건은 분명하더라. 모이고 갈리고 하는 것이 본래 본문자리에서 있을 수가 있습니까. 꿈이지요, 꿈. 꿈이 아닌 소식을 알아야 바른 길을 가는 사람들이고, 산길을 가는 사람들입니다. 나고 나는 곳에 이런 짓거리를 해 가지고 수지가 맞겠습니까. 이런 일을 하지 말라는 말은 아닙니다. 반야심경에 전도몽상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거꾸로 산다. 세간과 출세간의 길이 한 길인 동시에 세상의 길은 동쪽으로 가는 길이라고 하면, 출세간의 법은 분명히 서쪽으로 가는 길입니다. 속세란 무슨 말입니까. 꿈속에 사는 사람들이고, 죽음으로 가는 사람들이 있는 곳입니다. 우리 인생은 죽음으로 가는 날짜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남는 장사 없습니다. 선악이 몽중사입니다. 선과 악이 모두 둘인 것 같지만 하나인 동시에 모두 꿈속의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착한 일을 해도 수지맞지 않아요. 착한 일이 무엇이냐. 부모에게 효도하고 국왕에게 충신 노릇하고 윗사람을 존경하고 아랫사람을 사랑하고, 여자는 남자들에게 열녀 노릇을 하는 것입니다. 이를 효순 지도라 합니다. 이만큼 착한 일이 없습니다. 우리 마음이 중요하니까. 그렇지만 이것도 꿈입니다. 어머니도 죄인, 아버지도 도둑놈, 나도 죄인입니다. 죄인이 죄인을 도와주어 봐야 수지가 맞지 않아요. 어머니를 도와주되 안 보이는 어머니를 도와주어야 효자의 책임을 다하는 것이고, 자녀를 도와주되 눈으로 볼 수 없는 자녀를 도와주어 부모의 책임을 다하는 것입니다. 눈앞의 한 가닥 길인 당처를 지시하라. 마음을 내어 달리 구하면 더욱 더 멀어진다. 분별심으로 도를 구할 수 있습니까. 분별심이 들지 않고 도를 구할 수는 없지만, 분별심으로 해결이 안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에 둘도 없는 격 밖의 소식인 것입니다. 이 세상에 공부하는 공식은 없습니다. 활구선, 참선을 하는 것이 우리가 살 길로 가는 길이며, 바로 잃어버린 나를 찾는 길입니다. 다른 것이 도가 아닙니다. 이 몸은 부모의 물건이 아닙니까. 나이면서도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내 몸뚱이도 나와 상관이 없는데 부모하고 나와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꿈을 바로 깨시오. 이 세상에 은혜 은자, 사랑 애자, 같이 뜨거운 불은 없습니다. 나고 나는 곳에 은혜 은자, 사랑 애자, 이 두 자에 속아 우리가 이런 고생을 밤낮으로 하고 살았습니다. 철저히 무심하여 마음을 모조리 버려 버리면 비로소 여여한 본체를 알아 방해롭지 않더라. 우리의 원수는 자녀들이 원수고, 부모와 일가친척이 원수 아닌 사람이 없습니다. 첫째가는 원수는 번뇌 망상입니다. 번뇌 망상이 뭡니까. 선심 아니면 악심, 악심 아니면 무기심입니다. 두 번째 원수는 이 몸, 이 도둑놈 입니다. 몸이 있으니까 괴로운 것이지. 이 몸이 복을 받으려고 가져온 몸이요. 깨치고 보면 한 몸뚱이고 한나라이고 한집안이지만, 깨치기 전에는 눈도 도둑놈, 코도 도둑놈, 귀도 나를 괴롭게 하는 도둑놈, 혓바닥도 나를 괴롭게 하는 도둑놈입니다. 어찌 한세상도 아니고 두 세상도 아니고 이런 도둑놈에게 속아서야 되겠소. 산은 위로 올라가고 물은 산꼭대기로 흐르니 수 놓은 비단 휘장 속에 진기한 구슬이 빛나고 저 높은 허공 맑은 하늘에 법의 칼이 번쩍이네. 범부와 성인이 어디에 있느냐. 범부와 성인이 어디 있겠는가. (청중 가운데에 누군가 “여기 있습니다!” 하고 소리 질러 답한다.) 거기 있다고 한들 거기가 뭐요. 여기 있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압니다.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요. 부처와 조사도 서지 못하니, 서천 28대인의 조사도 훔친 물건을 안고서 ‘낭패다’소리 치며 굴복하고, 1709만8인은 두 눈에 모래를 뿌림이로다. 글자나 말을 따라가지고 수지가 맞겠습니까. 비법은 부처님에게도, 육조스님에게도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우리 마음속에 비법이 있는 것입니다. 비밀한 부적을 불살라 없애 버리고 옛 거울을 부숴 없애 버리며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살리는 일들이 자유자재 하니 필경에 이 무슨 도린고? 산호가지 끝에 꽃이 피고 치자 숲 속에 큰 과실이 익었도다. 치자 숲 속에 큰 과실이 익을 수 있을까요? 있지. 이 참선이라는 것은 부처님의 마음이고 이 교라는 것은 부처님의 말씀이다. 그래서 교가에서는 중도 이론의 체계를 말씀했던 것이고, 선종에서는 중도의 실천 부분을 말씀했던 것입니다. 오직 불법이라는 것은 이론을 위한 이론이 아니요, 실천하기 위한 이론인 것입니다. 담 넘어 소뿔이 보이면 소 한 마리 있는 줄 알아야지, 바쁜 세상에 담을 넘어가 소를 보고서야 소가 있다고 해서야 되겠습니까. 척 알아차려야지. 중국 송나라 때의 일입니다. 명심보감에도 나오는 유명한 정의천 선생이 원행을 떠날 일이 있어, 배를 타고 집을 떠나는데, 마침 그때 누더기를 입은 보잘 것 없는 스님 한 분이 배에 올랐습니다. 그런데 함께 배를 타고 가다가 난데없이 풍랑을 만나 생사를 헤맬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아무리 수행이 깊은 정의천 선생일지라도 마음을 어이할 수 없어 태산 같은 걱정을 했고, 다른 사람들도 아우성을 치며 엎어지고 난리였습니다. 그런 중에서는 그 스님은 태연자약하게 걸망을 턱 벗어 목침을 삼고, 드러누워 코를 드르렁드르렁 골며 잠을 자고 있더랍니다. 그래서 정의천 선생이 아무리 참선을 하는 스님이라도, 목숨을 잃을 판에 어떻게 저렇듯 태연자약하게 잠을 잘 수 있는가, 감탄을 했다는 것입니다. 다행히 풍파가 멎고 목적지에 이르러, 정의천 선생이”참선하는 스님으로 인정은 하지만, 얼마나 공부가 장하면 죽는 자리에서도 그렇게 태연히 잠을 잘 수가 있습니까“ 하고 물었더랍니다. “아 그거야 아무 것도 아닌 일인데 물을 일이 뭐 있소. 나는 일찍이 바다에 나와 바다를 본 일이 없고, 바다를 보지 않은 사람이 배를 탄 일이 있겠소. 바다를 보고 배를 탄 일이 없는데 죽고 사는 일이 어디에 있겠소?”이게 그 스님의 대답입니다. 얼마나 멋진 생활입니까. 생사에 본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꿈입니다. 우리 자성에는 생사가 아무 관계도 없는 것입니다. 도가 뭡니까? 마음입니다. 잠을 자는 사람에게 꿈이 있고, 잠을 자지 않은 사람에겐 꿈이 없는 것처럼, 마음을 모르는 사람이 슬픈 생각, 무서운 생각, 미워하는 생각, 괴로운 생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내 마음을 아는 사람은 마음이 우주인데, 전체가 청정법신인데, 분별심이 모두 끊어졌는데, 너도 나도 없어지고 물질도 없어졌는데, 무슨 걱정이 있겠소. 여러분이 불쌍한 사람입니다. 이 시간만 사람인 줄 알지 마시오. 인연법에 의해서 구십 여섯 종 외설법을 모두 항복 받았습니다. 이 시간만 사람이고 이 시간만 요런 물건을 끌고 다닐 뿐이지, 나는 어머니도 아니고 처녀도 아니고 학생도 아니요, 속지 마시오. 출처:-월간 해인 1994년 10월 152호 인과를 초월하는 것이 도입니다.(하)-혜암스님 불법에 소승법도 있고 대승법도 있고 최상승법도 있지 않습니까. 대도의 법칙엔 나한님 되는 공부, 보살도를 성취하는 공부가 없습니다. 어리석은 이들을 위해서 근기에 따라 법이 나왔던 것입니다. 대근기, 옳은 사람들, 지혜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이런 법, 이런 가풍이 없습니다. 오직 마음을 깨치는 본분사로 대적을 해야 해요. 소승법을 닦아 대승법, 최상승법을 닦고 하는 것 가르치지 않습니다. 큰 장사를 하지 못하는 사람은 작은 장사라도 해야 하니까 근기 따라 가르치다 보니 이런 너절한 법이 있지, 서울, 부산을 가려면 비행기 타고 가 버리면 되지, 무엇 때문에 돈을 주고 걸어갑니까. 글쎄, 부산 가는 것이 목적이니 거꾸로 가도 부산만 가면 되는데 뭐하러 돈 주고 걸어가느냐 말입니까. 차라리 비상을 먹여 다 죽여 버려라. 소승법으로 사람을 가르칠 바에야 모두 비상을 먹여 죽여 버리는 것이 옳다는 말입니다. 살아 봐야 괴로운데 무슨 이익이 있다고 살게 합니까. 그러므로 공자님께서 “아침에 도를 들고 저녁에 죽어도 원이 없다” 하지 않았습니까. 부처님께서는 “사실 세계의 모두 다 죽을 사람을 한몫에 살리는 한이 있더라도, 눈 깜짝할 사이에 밥 먹는 놈이 이 뭣고, 여기 있는 놈이 이 뭣고, 걸어 다니는 놈이 이 뭣고 하는 것만 못하다고 하셨습니다. 하루 저녁 자고 가는 나그네가 무슨 낙이 있다고 외도를 하고 공부를 하지 않을 수가 있느냐 말이요. 공부는 내일인데 오히려 세상일은 연극배우처럼 하고, 참으로 사람으로 태어난 보람 있는 일을 하려면 내 일, 바로 나를 찾는 공부를 해야 합니다. 나를 찾는 공부 말고는 모두 외도요, 죽음으로 가는 사람들입니다. 착한 일을 할수록 죽음으로 가는 일만 많아진다고 합니다. 마음으로 한 생각 일으키면 우리가 그 업을 모두 받아야 해요. 몸으로 지은 죄만 받는 것이 아닙니다. 물질 보다 마음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착한 생각이 쑤욱 나온 이 죄를 다 받아야 해요. 이 죄는 생사 죄로 받습니다. 한 생각 내면 한번 죽어야 하고 생각을 열 번 내면 열 번 죽는 괴로움이 달려들어요. 부처님도 부모들도 내 일을 안 해 주는데 누구를 믿고 이렇게 삽니까. 사람으로 태어난 보람을 하려면, 이 도둑놈에게 속지 말고 나를 찾는 공부를 해야 합니다. 공부를 못하니까 효도해 복이나 짓자 해서 수지가 맞습니까. 다른 말로 하자면, 나고 나는 곳에 호랑이 밥이고 들판에 가면 독사 밥이 될 사람들이고, 물에 가면 물고기에게 잡혀 먹힐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부모 잡아먹고 자식 잡아먹고 다니다가 이 시간만 이렇게 깔끔하게 하고 와서 있습니다. 오늘은 법당에 앉아 있네요. 여러분이 늘 사람만 되었소. 고양이도 되고 독사도 되고 구렁이도 되었지. 잡혀 먹히는 것이 암놈은 어머니고 숫놈은 아버지였데요. 화장실보다도 더 더러운 몸을 가지고 깔끔한 척하지 말아요. 도적놈을 보려고 부끄럽게 화장까지 하고 다닙니까. 우리의 성풍을 깨닫는 것이 불교이며 대도 입니다. 대도를 깨치는 데에는 관문이 있습니다. 오매일여의 관문입니다. 자나 깨나 한결같은 일념. 여여한 우리 살림살이인 그 관문입니다. 오매일여의 관문까지는 어떤 관문이 있는가. 화두를 타 가지고 공부를 지어 가면 처음에 동정일여가 된다고 합니다. 습관이 제이의 천성이라고 일을 할 때나 하지 않을 때나 한결같이 내 마음이 통일이 되어 버려요. 동정일여의 힘을 얻은 뒤의 다음 경계는 몽중일여입니다. 꿈속에서도 내 살림살이가 한결같다고 합니다. 몽중일여가 되면 무상경을 얻은 때인데 그 때 칠십 보살이 된다고 합니다. 원효 스님이 칠십 보살이었습니다. 칠십 보살이면 꿈에도 한결같이 몽중일여가 되는데, 몽중일여가 되면 병중일여가 된다고 합니다. 병중일여는 병하고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칠십 보살만 닦아 놓으면 아무리 아파도 아픈 것과 나는 남이요. 아프기는 아프되 남이 볼 때 아픈 것이지 그 사람은 아픈 곳이 없습니다. 부처님이 돌아가실 때 머리가 아팠고 등창병이 난 그대로 돌아가셨습니다. 인과를 받되 받는 것이 없는 받는 것이 다릅니다. 말만 있지 받는 것이 없습니다. 인과를 초월하는 것이 도입니다. 도는 나고 죽는 것이나 인과하고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병중일여가 되어도 병에는 자유롭지만 공부하지 않으면 도로 미끄러져 버립니다. 오매일여는 망상번뇌를 모두 끊어 버린 경지에 들어가는 것인데 여기에 들어가면 제지보살이 된다고 합니다. 제지보살이 되면 불퇴전보살이 되는 것입니다. 극락세계에 가면 불퇴전보살이 되는 것입니다. 극락세계에 가면 중생의 윤회 고를 다 면하는 것처럼 팔지 보살까지만 올라가면 다시는 타락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여기가 귀중한 자리가 되나 부처님이나 조사들께서는 “이 대목이 아주 소중하고 묘한 경계 자리가 되지만 의심을 해 공부를 하지 않으면 이것이 큰 병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팔지 보살이 되더라도 공부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팔지 보살에도 무명의 팔지 보살, 진여의 팔지 보살이 있다고 합니다. 무명심의 팔지 보살은 견성이 아니라고 합니다. 진여의 팔지 보살에 들어간 사람들을 견성했다고 합니다. 경계가 나서 조금 속이 시원하고 알아졌다고 견성이 아닌 것입니다. 망상번뇌가 죽 끓듯이 막 끊는데, 딸 아들 생각나고 여자 생각도 나는데 무슨 놈의 견성입니까. 경계이지 견성이 아닙니다. 학철대오해서 구경각을 증득하면 밝은 유리병 속에 보배 달을 넣어 놓으면 안팎까지 밝다 밝은 유리병 속에 달을 넣어 놓으면 안팎이 밝지. 안은 어둡고 밖에만 밝겠습니까. 공부를 모두 마쳐 버리면 안에도 밝고 이차에도 걸림이 없는 조사가 되어 버립니다. 이것을 견성이라고 한답니다. 이것은 귀중한 법문입니다. 깨친 한 소식에 법문이 있습니다. 오도송이니 잘 들어 두시오. 업심을 마쳐 도 닦는데 애쓰는 이들이여 용맹정진 하여 마음을 깨닫기 위함 이네 수행하는 이들이여 깨닫기 어렵다고 말을 마소 홀연히 화두에 의심을 타파할 것 같으면 본래 면목이더라 하늘과 땅이 경계가 되더니 깨달으니 티끌마다 청정법신이라네 깨닫고 보니 다 나입니다. 하늘도 나고 땅도 나고, 하늘땅에 있는 삼라만상도 다 나더라. 원수가 따로 없어요. 구렁이도, 독사도 나입니다. 내가 나를 보고 무서워하는 폭밖에 안 됩니다. 그러니 빨리 우리 마음을 깨달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깨달음을 모두 쳐부수니 아침마다 해가 솟고 저녁엔 달이 뜨네. 이것이 부처님이 견성한 오도송이랍니다. 무슨 일이든지 시작한 사람이 깨 버립니다. 앞으로 지켜보십시오. 걱정이 되어서 내가 바른 말을 좀 하려고 합니다. 불법을 발전시키려면, 먼저 나 자신부터 정화해야 합니다. 남을 가르치기 전에 나부터 배워야 합니다. 일곱 살 어린 아이에게도 배울 것이 있으면 배워야 합니다. 보살도를 닦는 데에는, 첫째 진실해야 합니다. 두 번째는 평등한 마음을 써야 합니다. 세 번째는 상을 내지 말아야 합니다. 이 세상의 일이 꿈속이니 남을 도와주었다는 생각을 하지 마시오. 네 번째는 언행일치, 안팎이 다르지 않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한마디만 더 하겠습니다. 첫째, 교만심을 버려라. 그러면 무슨 일이든지 성공할 수 있습니다. 둘째, 불자는 세상 낙을 좋아하지 말라. 재물 모이는 낙, 여자 남자 좋아하는 낙, 먹는 재미, 편안한 낙, 이름 내는 재미, 이것 때문에 구렁이 밥 되고 지옥에 가는 겁니다. 사람 몸 받기 쉽지 않아요. 세 번째, 방일을 버려라. 게으르고 편안한 것을 버려요. 게으른 죄가 부모를 죽인 죄보다 더 크다고 합니다. 네 번째, 문벌을 믿지 말고 좋아하지 마라 나와 아버지가 무슨 상관이 있소. 손바닥을 뒤집는 것 같습니다. 가장 어려우면서 가장 쉬운 것이 도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마음이 도이지, 마음을 떠나서 부처도 도도 없습니다. 출처:-월간 해인 1994년 11월 153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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