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모든 일을 한번 쉬어라,-혜암스님
눈으로 보아도 보는 상이 없으면 분별이 없고 귀로 듣고는 듣는 분별상 없으면 시비가 끊어진다. 시비분별을 한꺼번에 모두 놓아버리면 청산은 적적한데 밤 달만 밝도다. 目無所見無分別 聽無聲絶是非라 分別是非都放下하면 靑山寂寂夜月明이라 종심從諗 조주趙州 선사는 남전南泉스님을 처음 만났을 때, 남전스님은 마침 침상에 누워 쉬는 참이었다. 젊은이를 보고는 그냥 누운 채로 어디서 왔냐고 물었다. 그러자 조주는 서상원瑞像院이라는 절에서 왔다고 대답했다. 이에 남전스님이 다시 물었다. “서상원이라, 그래 상서로운 모습을 보기나 했나?” "상서로운 모습은 못 보고 다만 누워서 졸고 있는 여래를 보았을 따름입니다." 조주의 뜻밖의 대답에 남전스님은 벌떡 일어나 앉으며 그에게 다시 물었다. “자네에겐 스승이 있는가 없는가?” "스승을 모시고 있습니다." ”스승이 누구냐?" 조주는 대답 대신 절을 하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겨울이라 날씨가 차니 스승께선 건강을 살피십시오. "이렇게 해서 조주는 남전을 스승으로 모시게 되었다. 남전스님으로서도 뜻밖에 비범한 제자를 만나 무척 기뻤다. 한번은 조주가 스승에게 물었다. “도道가 무엇입니까? 남전스님은 이렇게 대답했다. “평상심平常心이 곧 도니라. 조주가 다시 물었다. ”어떤 방법으로 거기에 도달할 수 있습니까? 하겠다는 생각을 버린다면 어떻게 도를 알 수 있겠습니까?” “도라는 것은 알고 모르고에 달린 문제가 아니다. 단순히 혼란일 뿐이다. 만일 네가 터럭만큼의 의심도 없이 도를 깨쳐 안다면, 너의 눈은 허공처럼 모든 한계와 장애물에서 벗어나 일체를 다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말을 듣고 조주는 홀연히 깨쳤다. 그리하여 정식으로 계를 받고 스님이 되었다. 도를 닦는 데 무엇이 붙을 수가 있겠습니까? 공부하는 사람은 터럭만큼이라도 ‘이 뭣고’밖에 다른 생각이 있으면 그것은 죽은 것입니다. 일언지하에 도를 깨친다고, 전생에 모두 닦아 대근기로 된 사람들은 시간이 걸리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돈오가 불법인 것입니다. 몇 겁을 닦고, 몇 생을 닦아야 견성한다고 알고 있다면 얼마나 불쌍하고 억울한 일이겠습니까. 마음 말고는 부처가 없는데 무엇을 의심하겠습니까. 하나를 알게 되면 다른 것도 알게 됩니다. 하루는 조주가 남전에게 물었다. “유有를 깨달은 사람은 의당 어디로 가야 합니까." 그러자 남전은 엉뚱한 대답을 했다. “산에서 내려가 아랫마을 한 마리 소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조주의 반응이었다. 어리둥절해 하기는커녕 그는 스승에게 친절히 깨닫게 해 주어 감사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남전스님이 말을 받았다. “어젯밤 삼경에 달이 창문으로 비치었도다." 소를 떠나서 부처가 있는 줄 알면 견성하지 못합니다. 소가 된다고 하면 억울한 생각이 들는지 몰라도, 소 따로 부처님 따로 있는 줄 아는 사람들이 언제 성불하겠습니까. 여기의 평상심은 번뇌 망상의 평상심이 아니고 조작도 없고 시비도 없고 취사심도 무상하다는 단견短見과 불변한 상견常見도 없고 범부도 성인도 없는 청정무구한 평상심으로 알아야 합니다. 평상심이 도라고 하니까 번뇌 망상을 내는 그 마음이 도라고 알고 있는 사람이 많습니다. 망상이 도라면 무엇 하러 도를 닦습니까. 중도사상에서 보면, 도면서도 도가 아니고, 도가 아니면서도 도이지만, 번뇌 망상을 평상심으로 알면 큰일 납니다. 처음에 조주는 부엌의 화부로 일하고 있었다. 어느 날 그는 부엌문을 꼭꼭 닫고 연기가 자욱하도록 불을 지폈다. 그리고는 소리쳤다. “불이야, 불, 사람 살려라." 이 소리에 놀라 절이 발칵 뒤집히고 모두들 부엌문으로 몰려들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대들이 바른 말을 하기 전에 이 문을 열지 않겠다." 대중들이 놀라 말문이 막혔다. 이 때 남전스님이 다가와 말없이 문틈으로 열쇠를 건네주었다. 이것이 바로 조주가 심중에 두고 있던 바른 말이었으며, 그래서 그는 곧 문을 열고 나왔다. 이러한 방편은 남을 깨닫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어느 날 조주가 오대산에 있는 청량사로 떠나려고 하는데 어느 스님이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운수 행각하고 다니는 것을 눌렸다. 어느 곳 청산이 도량 아님이 없건만 구태여 지팡이 짚고 청량사를 찾다니 구름 속에 황금 털사자가 나타난다 해도 바로 보면 문수보살이 아닐 텐데 何處靑山不道場이야 何須策杖淸凉이리오 雲中縱有金毛現이라도 正眼觀時非吉祥을 그 시에 대해 이렇게 되물었다. “바로 본다는 것은 대체 무엇인가." 그러자 그 스님은 말이 막혔다. 정안을 갖춘 뒤에도 여러 해 동안 각 지방을 행각하며 선사들을 방문했다. 한 스님이 조주의 초상화를 그렸다. 그것을 선사 받자 조주는 이렇게 말했다. “이것이 진정한 나의 모습이라면 너는 나를 죽여 없앨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으니 내다 태워 버리게." 스님을 친견한다고 천길만길을 가는데, 스님을 어떻게 볼 것입니까, 눈으로 보는 것은 스님이 아닌데, 눈으로 보는 것은 허수아비 사람입니다. 이러한 이치를 알고 공부를 해야 합니다. 무명의 업이 너무 중해 도적놈에게 아침저녁으로 속아서 사니 불쌍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허수아비에게 집착하니 공부가 됩니까. 한 구절은 그만두고 낚싯밥 걸리듯 어느 반 구절에라도 걸리면 견성합니다. 팔만대장경을 모두 알아야 견성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래알 속에 시방세계의 이치가 모두 들어 있는데,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새로운 제자가 말했다. “이렇게 빈손으로 왔습니다." “그렇다면 거기 내려놓게." “아무 것도 가져 오지 않았는데 무얼 내려놓으라는 말씀입니까." “그럼, 계속해서 들고 있게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마음을 비우는 일입니다. 선정을 닦는 사람이 세상일의 옳고 그름, 착하고 악한 것에 조금이라도 집념이 있으면 공부만 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지옥벌이만 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좀 쉬어야해요. 2538년 음 5월 30일 해인사 대적광전 상당법문 세상 모든 일을 한번 쉬어라(下) / 혜암스님 한 스님이 조주스님에게 물었다. “스님의 선풍禪風은 무엇입니까.” “안으로는 아무 것도 가진 게 없고 밖으로는 구할 게 아무 것도 없다.” 본분사에 무엇이 붙겠습니까. 백 번을 말해도 다 똑같습니다. 한 스님이 물었다. “거지가 오면 우리는 무엇을 주어야 합니까.” “거지에겐 부족한 게 없네.” 아무 것도 없는, 욕심도 계획도 없는 거지에게 무슨 부족한 게 있겠습니까. 알고 듣고 보면 멋진 말입니다. 한 스님이 조주스님에게 물었다. “우주만물宇宙萬物과 벗하지 않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그는 사람이 아니다.” 분별하자면, 우리 주인공은 법신이 아닙니다. 눈으로 보이는 것은 육신입니다. 한 스님이 물었다. “부처는 어떤 분입니까.” “너는 누구냐.” 바로 가르쳐 주는 말입니다. 나를, 너를 떠나 부처가 어디에 있습니까. 언제나 속아선 안 됩니다. 절을 하더라도 속아서 하는 절은 안 됩니다. 보명불, 보광불, 도정불, 석가모니불, 아미타불, 약사여래불, 화신은 사람이 만든 말이지 부처가 아닙니다. 죽었다 깨어나도 부처는 여러분 마음 밖에 없습니다. 이를 모르니 참선이 흔들립니다. 남에게 좋다. 나쁘다는 말을 들으면 무엇 할 것입니까. 방장을 하고 종정을 하면 뭐 합니까. 참 우습습니다. 대중을 위해 거짓으로 연극하는 것이지 무슨 값이 있습니까. 실력이 없으면 방장도 종정도 화살같이 지옥에 갑니다. 공부가 최상이니, 남부러워할 것 없습니다. 이 뭣고’ 말고는 모두 연극입니다. 이 뭣고’를 제외하고 하는 일은 모두 마업을 짓는 것입니다. 마업을 짓는 사람은 생사 죄를 짓는 사람들입니다. 도를 떠나선 옳은 일도, 착한 일도 모두 죄짓는 일입니다. 착한 일을 할수록 나고 죽는 번수만 많아집니다. 하는 것 없이 해야지, 내가 착한 일을 한다는 생각, 곧 망상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먼저 지옥에 가야 합니다. 이런 생각을 분명히 알고 ‘이 뭣고’를 하면 안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원수, 도둑놈 편을 들어 주니까 화두가 안 됩니다. 제자 한 사람이 죽어 장사葬事 지내는데 조주趙州도 장례행렬葬禮行列에 끼어 가면서 이렇게 말했다. “수많은 죽은 사람이 단 하나의 산 사람을 따라가는군.” 여기 법당에도 이렇게 사람이 많은데, 눈으로 볼 때, 네가 내가 있고 여러 사람이 있는 것이지 모두 허수아비입니다. 사람을 봐도 사람이 아닌 줄을 알아야 합니다. 많으면 많은 데에 집착하여 끄달려 가지고 언제 공부하겠습니까. 분심, 분한 마음이 좀 있어야 합니다. 여러 사람이 하는 일도 아무런 값이 없습니다. 여러 사람이 떠들고 있으니 값있는 줄 알고 그것에 또 흔들립니다. 여러 사람이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꿈속의 여러 사람이지, 모두 허수아비입니다. 공부하지 않는 사람들, 이 자리에서 날마다 몇 천 명씩을 때려 죽여도 죄가 되지 않는다는 말씀을 부처님도, 도인들도 했습니다. 도 닦는 사람이 제일이요, 왕입니다. 조주趙州스님의 일상생활日常生活은 대단히 금욕적禁慾的이었다 하고, 사십년四十年동안 한 번도 새 가구家具를 들여 놓는 적이 없고, 신도信徒들에게 시주施主를 권하는 일이 없는, 아주 수완手腕이 없는 주지住持였던 것입니다. 조주스님 같은 이는 공부할 때 다른 것은 모릅니다. 다리가 모두 부러진 선상禪床을 짊어지고 다니면서도 고칠 새가 없었습니다. 지금 스님네들은 공부가 되지 않는 것은 걱정하지 않고 애써 상을 고치려고 합니다. 공부 잘하는 사람은 손톱 깎을 새가 없어요. 그렇게 공부들을 해봤습니까. 양심에 참괴심이 있어야 합니다. 도 밖에 모르니 도를 깨쳤겠지 하는 데에서 발심을 내야 하는데, 법문을 들어도 그 자리, 책을 봐도 그 자리이니 그래서야 되겠습니까. 천하 사람들이 다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다고 하지만 그것은 추醜한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착한 것을 착하다고 여기는 것은 착하지 않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덥다고 느끼는 것도 추운 것이 있기 때문이고 나쁜 것도 좋은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 나보다 못한 사람이 있으니까 내가 대접을 받고 편히 살 수 있는 일이 생기는 것입니다. 나보다 못한 사람을 얕보지 말아요. 그 사람이 아침저녁으로 이익을 주므로 내가 살 일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모든 법이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한 가지에 집착하지 마세요. 한 가지에 집착하니까 시비가 생겨나고 해결이 안 되는 것입니다. 널리 보고 사십시오. 그런 까닭에 유有와 무無가 서로를 낳고 어려운 것과 쉬운 것이 서로를 만들며 긴 것과 짧은 것이 서로 겨루고 높은 것과 낮은 것이 서로 견주며 목과 소리가 서로 어울려 조화를 이루며 앞과 뒤는 서로가 서로를 따르는 것입니다. 이렇게 대립對立되는 짝들은 모두 상대세계相對世界의 번뇌 망상煩惱妄想의 괴로운 일입니다. 시회대중時會大衆은 속히 확철대오廓撤大悟하여 원융무애圓融無碍한 중도中道에 입각立脚하여 남과의 대화對話에서도 밖으로는 현상現狀에 초연超然하며 안으로는 공空 가운데 공空을 초연超然한 것입니다. 만일 현상現狀에 집착執着하면 어리석은 생각生覺만 늘어날 것이고 공空에 집착執着하면 어둠의 구렁으로 더 깊이 빠질 것입니다. 개인도 단체도, 오늘, 지금만 좋으면 된다는 이런 허물이 많습니다. 처음이 없으면 끝이 어디 있을 것이며, 원인이 없으면 결과가 어떻게 있을 수 있습니까. 그러니 첫발이 발라야 됨을 명심해야 됩니다. 지금의 일로 생각하지 말고, 이 일이 무량겁으로 연행됨을 알아야 합니다. 성냥불이 집을 태우는 것과 같이 작은 일, 큰일을 따로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 모든 일을 한번 쉬어라 한평생 일이 꿈속이로다. 조주는 만사를 쉬고 그 때에 어리석은 사람을 찾았을 뿐 萬事無如退步休하라 百年虛幻夢中軀로다 趙州不時爭胡餠하야 要使時人劣處求를 조주스님의 말씀입니다. 세상 모든 일을 한번 쉬어라. 이때 쉬지 않으면 언제 쉴 것입니까. 번뇌 망상으로 이렇게 애를 먹는데, 이 세상, 이 몸을 가지고 쉬지 않으면 이 병통을 언제 고칠 것입니까. 남에게 모두 져 주세요. 죽은 셈 치고, 나오지 않은 폭 잡고 말입니다. 그러면 좋은 일이 있을 겁니다. 남을 이기려고 하지 말아요. 이 세상엔 옳은 일, 잘한 일 하나도 없습니다. 대중 생활을 하려니까 옳고 그른 것을 찾을 뿐이지 마음으로 집착해 시비를 찾으면 그 사람이 먼저 지옥에 가야 합니다. 남을 도와주는 일도 꿈속에서 도와주는 것입니다. 몇 푼어치 되지 않습니다. 부끄러운 줄 알아야 됩니다. 모든 일이 꿈 아닌 일이 없습니다. 허망한 일입니다. 조주스님은 ‘이 뭣고’도 망상이라고 했지만, ‘이 뭣고’는 이 방안에 들어오는 문고리를 잡는 것과 같습니다. 문만 열면 극락입니다. 화두 당처가 부처님 마음자리입니다. 손등과 손바닥이 붙어 있는 것처럼, ‘이 뭣고’ 자리가 불심 자리입니다. 이 세상에 똑똑한 사람처럼 불쌍한 일이 없습니다. 세상일을 잘하려고 하는 일은 똥을 가지고 금을 만들려고 하는 것이며, 진흙을 가지고 백옥을 만들려고 하는 것인데, 그것이 되겠습니까. 세상일엔 옳은 일이 없습니다. 부끄러운 줄 알고 살아야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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