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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산록-위산경책(潙山警策)

by 회심사 2022. 3. 11.


위산록-위산경책(潙山警策)


    업(業)으로 받은 몸은 형체에 매임을 면치 못하여, 부모가 남겨주신 몸을 받고 여러 인연을 빌려 이루어진 것이다.

    4대(四大)로 지탱해 가나 그것들은 항상 서로 등지니, 덧없는 생로병사가 우리에게 예고 없이 다가와 아침엔 살았다가도, 저녁에 죽어 찰나에 다른 세상이 된다.

    마치 봄 서리나 새벽이슬 같아서 잠깐 사이에 말라버리며, 벼랑 위의 나무나 우물 속의 등 넝쿨과도 같은데 그것이 오래갈 수 있겠는가. 생각생각 빨리 지나 한 찰나에 숨이 떨어지면 그대로가 내생인데 어찌 편안하게 허송세월하랴.

    그대들은 좋은 음식으로 부모를 봉양하지도 않고 6친(六親)을 이별하였다.
    나라를 다스리지도 않고 가업(家業)의 상속을 모두 버렸으며, 속세를 멀리 떠나 머리 깎고 스승에게 계(戒)를 받았다. 그렇다면, 안으로는 망념 이기는 공부를 부지런히 하고 밖으로는 다투지 않는 덕을 키워서 티끌 같은 세상에서 아득히 벗어나기를 기약해야 한다.

    그런데 계를 받자마자 "나는 비구(比丘)로다" 하며 신도들이 시주한 상주물(常住物)을 먹고 쓰면서도 그것이 어디서 왔는가를 생각할 줄 모른다. 그리고는 으레 "공양을 받을 만하다"고 하면서 먹고 나서는 머리를 맞대고 세상잡사만을 시끄럽게 떠드니, 이것이야말로 그저 한때의 즐거움만을 찾는 것일 뿐, 그 즐거움이 결국에는 괴로움의 원인이 되는 줄을 모르는 것이다.

    헤아릴 수 없는 세월 속에서 6진(六塵)에 휘둘려 한 번도 돌이켜보지 못하는구나.
    세월이 갈수록 받아쓰는 것이 늘어나 시주의 은혜가 두터워지며 움찔했다 하면 해가 지나는데 버릴 생각은 하지 않고 더욱 모아 허망한 육신만 붙드는구나.

    부처님께서는 비구들에게 "도를 닦고 몸을 단속하는 데에는 옷과 밥과 수면, 이 세 가지를 넉넉하게 하지 말라"고 경계하며 법도를 지어주셨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것을 쉬지 않고 탐내느라 세월을 보내 어느덧 흰머리가 된다. 방향을 잡지 못한 후학이라면 반드시 선지식에게 널리 물어야 하는데도 "출가한 이는 옷과 밥을 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만 생각한다.

    부처님께서는 먼저 계율을 정하여 발심한 이를 인도해 주시고 몽매함을 열어 주셨는데 그 법도가 빙설처럼 청정하다. 우선 선을 실천하고 악을 예방하는 것으로 발심을 단속케 하시며, 나아가 자세한 조목으로 모든 폐단을 개혁하시어 계율 도량을 이루셨다. 그런데도 학인들은 전혀 공부할 생각을 하지 않으니 궁극적인 이치로 가는 최상 법문〔了義上乘〕을 어떻게 알 수 있으랴. 애석하다. 일생을 부질없이 지내면 후회한들 돌이킬 수 없다.

    교리에는 원래 뜻을 두지 않았으므로 현묘한 도를 깨달을 씨앗이 없다.
    그러고도 나이 먹고 법랍이 많아지면 속은 빈 채 아만을 부리며, 어진 벗과 친하려 하지 않고 오직 거만할 줄만 알 뿐이다. 법도와 계율을 몰라 전혀 조심성이 없어서, 말끝마다 점잖지 못하게 큰소리치며 위 아래 사람을 공경하지 않으니, 바라문(婆羅門)의 떼거리와 다를 바가 없다.

    공양을 할 때는 바릿대 소리를 시끄럽게 내다가, 공양을 마치고 나서는 먼저 일어나 거슬리고 괴팍스럽게 행동하니 사문의 체통이라곤 전혀 없다. 불쑥불쑥 섰다 앉았다 하여 남들을 놀라게 하니 자그마한 법도와 소소한 몸가짐도 되어 있지 않은데 무엇을 가지고 단속하겠는가. 그래가지고는 새로 배우는 후배들이 본받을 것이 전혀 없다.

    그러다가 남을 훈계하게 되면 `나는 산승이로다'하나 불교적인 수행은 들어 본 적도 없고 오직 티끌 같은 경계에만 생각을 둔다. 이같은 소견은 모두 발심부터가 졸렬하고 게을러 도철(:욕심이 많아서 자신을 망치는 짐승)처럼 세속에서 세월을 그럭저럭 보내다가 드디어는 황폐해진 것이니, 어느 결에 걷지 못할 정도로 늙게 되면 하는 일마다 담장을 마주한 듯 캄캄하다.

    후학이 물어도 지도할 말이 없고, 설사 있다 해도 경전의 말씀과는 관계없는 말이다. 혹 업신여기는 말을 듣기라도 하면 즉시 예의가 없다고 화를 내면서 꾸짖는다. 그러다가 하루아침에 병상에 눕게 되어 뭇 고통이 조여 오면 아침저녁으로 생각해 보아도 속으로 두려워서 어디로 가야 할지 앞길이 아득하다.

    이러고 나서야 허물을 후회하나 마치 당장 목이 타는데 우물을 파는 격이니 어찌 하겠는가! 일찌감치 수행하지 않고 나이 들어 여러 가지로 허물이 많음을 스스로 한스러워하다가 죽는 마당에 가서는 손을 허우적거리며 두려움에 떤다.

    그다음에는 막아 놓았던 비단뚜껑을 뚫고 병 안의 새가 날아가듯, 식심(識心)이 업(業)을 따라가는데, 마치 여러 사람에게 빚진 사람이 힘센 빛장이에게 먼저 끌려가는 것과 같아서, 마음도 여러 갈래지만 업이 무거운 쪽으로 떨어진다.

    죽음을 재촉하는 귀신이 생각생각에 정지하지 않으니, 수명은 더 이상 연장하지 못하며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아서 인천(人天)의 3계에 태어남을 면하지 못한다. 이렇게 받아온 몸은 얼마나 오래 되었는지 겁수(劫數)를 따져볼 수도 없다. 회환과 탄식으로 가슴이 저려오니 어찌 입을 봉하고 경책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다만 한스러운 것은 상법(像法), 말법(末法) 시대에 태어나 부처님 세월이 아득하다는 점이다. 불법은 생소하고 사람들은 게으름을 많이 피우므로 간략히나마 좁은 소견을 펴서 뒷사람들을 일깨우려 하니, 만일 뽐내는 마음을 버리지 않는다면 생사윤회에서 도망하기 어려울 것이다.

    출가한 사람이라면 발을 들어 세속을 뛰어넘어 몸과 마음을 그들과 달리 해야 한다. 부처의 종자를 이어 융성하게 하고 마군을 항복받아서 4은(四恩:부모·스승·국가·시주의 은혜)에 보답하고 3계 중생을 제도해야 하니,

    만약 그렇지 못하면 외람되게 사문의 대열에 끼어들었을 뿐이다.
    그리하여 언행이 거칠고 신도의 시주물만 헛되게 받으며 옛사람들의 삶과는 조금도 닮아가지 않고 정신없이 일생을 보내니 장차 무엇을 의지하겠는가.

    그러나 이제는 당당한 사문의 모습이 봐줄만 하니, 지난 세상에 선근(善根)을 심어 이렇게 남다른 과보를 받은 것인데, 여기서 그저 팔짱을 끼고서 시간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부지런히 닦지 않으면 과보를 성취해 낼 원인이 없으니 어찌 일생을 부질없이 지내랴. 이렇게 하면 내생의 업에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어버이를 하직하고 결연한 마음으로 먹물 옷을 입은 것은 무엇을 뛰어넘으려 했던 것인가. 아침저녁으로 생각하면 어찌 마음 편하게 세월을 보내랴. 마음속으로 불법의 대들보가 될 것을 다짐하여 뒷날 본보기가 되게 하라. 설사 항상 이와 같이 한다 해도 조금밖에 상응하지 못한다.

    말을 꺼냈다 하면 반드시 경전에 들어맞고, 이야기를 주고받을 때도 옛것을 상고해야 하며, 우뚝한 몸가짐과 고고한 기상을 가져야 한다.

    먼 길을 갈 적에는 좋은 도반과 동행하여 자주자주 눈과 귀를 맑게 하고, 머무를 때에도 반드시 도반을 가려 때때로 아직 듣지 못한 것을 들어야 한다. 그러므로 속서(俗書)에도 이르기를 "나를 낳아준 사람은 부모이고 나를 완성시켜 준 사람은 벗이다"라고 하였던 것이다. 착한 사람을 가까이 하는 사람은 마치 안개와 이슬 속을 가는 것 같아서,

    비록 당장에 옷이 젖지는 않아도 점점 촉촉하게 적셔진다.

    한편 악한 사람과 친하게 지내는 사람은 나쁜 지견(知見)을 길러서 아침저녁으로 악한 짓을 하는데, 가까이는 목전에서 과보를 받고 멀게는 죽은 뒤에 윤회에 들게 된다. 한번 사람의 몸을 잃으면 영원히 다시 인간으로 태어나기 어렵다. 충성스러운 말이 귀에는 거슬리나 어찌 마음에 새겨두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마음을 씻고 덕을 길러 자취와 명성을 숨기고, 정신을 깨끗하게 길러서 마음에 시끄러운 경계를 끊어야 한다. 만일 참선(參禪)으로 도를 익혀 방편(方便)을 단박에 초월하려 하면, 마음을 현묘한 나루터에 두고서 정밀하고 묘함을 끝까지 파고들어야 한다. 심오한 뜻을 결택하여 참 근원을 깨닫도록 해야 하며, 선지식에게 널리 묻고 좋은 도반을 가까이 해야 한다.

    이 참선은 그 묘한 도리를 깨닫기 어려우니 정말로 빈틈없이 마음을 써야 한다.
    만일 그러던 중에 본심〔正因〕을 단박에 깨달으면 그대로 티끌세상과 수행점차〔階級漸次〕를 벗어나니, 이것이 곧 3계 25유(二十五有)를 타파하는 것이다.

    안팎의 모든 법이 실제가 아니라 마음을 따라 변하여 일어난 것으로, 모두가 거짓 명칭임을 알아서 절대로 마음을 그쪽으로 끄달리지 말라. 감정이 사물에 끄달리지만 않는다면 사물이 어찌 사람을 장애하랴. 법성(法性)이 흐르는 대로 맡겨둘 뿐, 끊으려 하지도 말고 이으려 하지도 말라. 소리를 듣고 물건을 볼 적에도 일상대로 하며, 이쪽과 저쪽에 응용하되 조금도 모자라게 하지 말라.

    이렇게 살아가면 실로 속절없이 법복(法服)만을 입은 것은 아닐 것이다.
    나아가 4은(四恩)에 보답하고 3계 중생을 구제하며, 세세생생토록 도에서 물러나지 않으면 끝내는 성불을 기약하리라. 3계의 손님으로 왕래하면서 나고 죽는 이들의 본보기가 될 것이다. 이 참선이 가장 오묘하니, 하겠다는 마음만 내라. 반드시 그대를 속이는 말은 아닐 것이다.

    단박에 생사를 초월하지 못할 중간부류라면 우선 교학에 마음을 두어 경전을 반복해서 익혀야 한다. 이론을 치밀하게 연구하여 전해 주고 널리 펴서 뒷사람을 지도하여 부처님의 은덕에 보답해야지 그저 세월만 보내서는 안 된다.

    반드시 이와 같이 해나갈 것 같으면 모든 일상이 승려 가운데서 법기(法器)가 될 만하다. 보지도 못하였느냐? 소나무에 감긴 칡넝쿨이 천길이나 솟아오르는 것을. 훌륭한 바탕에 의지해야만 널리 이익될 것이다.

    재(齋)와 계(戒)를 성실히 닦아서 부질없이 부족하거나 넘치게 하지 말라. 출가 인이 된 것은 세세생생토록 닦아온 수승한 인연 때문이니, 헛되이 날을 보내고 멍청하게 시간을 보내서는 안 된다. 세월이 아까운데도 더 닦으려 하지 않고 부질없이 시방(十方) 신도의 시주물만 소비하고 나아가 4은(四恩)을 저버린다.

    쌓인 업은 더더욱 깊어가고 마음의 티끌은 막히기 쉬워 부딪치는 곳마다 걸리니, 사람들에게 업신여김과 기만을 당한다. 옛사람은 말하기를 "그가 장부였다면 나도 대장부니 결코 자신을 가볍게 여기고 퇴굴해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다. 만일 이렇지 못하면 부질없이 절집에 있으면서 일생을 그럭저럭 보낼 뿐, 조금도 이익이 없을 것이다.

    간절히 바라노니 맹렬한 뜻과 각별한 마음을 내어, 상근기를 바라보고 처신할지언정 함부로 용렬하고 비속한 이들을 따르지 말라. 금생에 모름지기 결단하라. 생각해 보면 깨달음이란 다른 사람을 통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알음알이를 쉬고 반연을 잊어 모든 번뇌와 마주하지 말라. 마음은 빈 것이고 경계도 고요하건만 단지 오래 막혔기 때문에 통하지 못할 뿐이다.

    이 글을 잘 읽고 수시로 경책하여 굳세게 주관을 세워 인정을 따르지 말라. 업과(業果)에 끌리면 진실로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목소리가 온화하면 메아리가 순조롭고, 모습이 반듯하면 그림자가 단정하다.
    이처럼 인과가 분명한데 어찌 근심하고 두려워하지 않으랴.
    그러므로 경전에서 말하기를 "가령, 영원한 세월이 지난다 해도 지은 업은 없어지지 않고 인연이 회합해 만날 때 자기 과보를 다시 받는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3계라는 형벌이 사람을 얽어맨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열심히 닦고 부질없이 날을 보내지 말아라.
    5욕생사가 허물과 병통임을 깊이 알아 비로소 수행할 것을 권하노니, 백천겁토록 어디서나 다 같이 도반이 되기를 바란다.

    명(銘)으로 말하리라.

    허깨비 몸 꿈속의 집이여 허공 꽃이어라
    앞길도 다함없는데 뒷길이라고 짧겠는가.
    여기서 나와서 저기에서 사라지니 떴다 잠겼다 지칠 대로 지쳤도다.
    3계 윤회 면치 못했는데 어느 때에 쉬어지랴.
    세간을 탐내고 그리워하여 5음·12연으로 이 몸뚱이 이루니
    태어나서 늙어지도록 하나도 얻은 것 없도다.
    근본무명이 그 때문에 미혹이 되고 말았으니 시간이 아깝구나.
    찰나도 헤아리기 어렵거늘 금생을 부질없이 보내면 내세에도 꽉 막히리라.
    미혹에서 미혹에 이르는 것 모두 6적(六己)이 씨앗 되어
    6도(六道)에 오락가락 3계에 기어 다니네

    일찌감치 눈 밝은 스승 찾고 덕 높은 도반을 가까이 하여
    몸과 마음을 결택하고 애욕의 가시덤불일랑 모두 버려라.
    세상은 본디 들뜨고 비었는데 뭇 인연이 어찌 사람을 핍박하랴
    법의 이치 연구하려면 깨닫겠다는 목표를 세우라.
    마음과 경계 함께 버리고 새겨두거나 기억하지 말라
    6근(六根)이 고요하면 하는 일마다 고요하고
    한 마음 나지 않으면 모든 법 저절로 쉬어지리라.

    위산 [潙山, 771~853]
    이름 영우(靈祐). 시호 대원선사(大圓禪師). 푸저우[福州] 출생. 후난성[湖南省] 영향현(寧鄕縣)에 있는 위산에서 7년 동안 법을 닦아 위산이라는 법호를 얻었다.

    15세 때 출가하여 한산(寒山) ·습득(拾得)과 만났으며, 나중에 백장 회해(百丈懷海)의 법을 이었다. 걷는 모습이 불법(佛法)에 들어맞았다 하여 위산에 있도록 하였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위산은 인적이 드문 깊은 산속이었으나 그의 덕을 흠모하여 많은 수행승(修行僧)이 찾아와 선풍(禪風)을 크게 떨쳤다. 《위산영우어록(潙山靈祐語錄)》 《위산경책(潙山警策)》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 《송고승전(宋高僧傳)》 등에 그의 전기(傳記)와 행장(行狀)이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