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卍-불법을만나고/卍-불교자료실

일체무아

by 회심사 2017. 4. 25.


卍-일체무아-卍
    불교는 인간을 중심으로 세계를 본다는데, 그러한 인간을 주관적으로 말하면 '나'라고 말할 수가 있다. 그런데 우리가 보통 '나'라고 하는 그 '나'는 어떤 것을 가리킬까?

    십이처설에서 말하는 여섯 개의 감관 즉 육근을 말한다는 것이 보통일 것이다.

    그보다도 더 근원적인 나를 탐구해 들어간다면 오취온에 이른다고 말할 수가 있다.

    "사문이나 바라문이 '나'의 실체를 헤아린다면 그것은 모두가 오취온에서 그런다."<잡아함권 3>는 것은 앞서 소개한 바가 있다.

    그러나 육근이나 오취온이 그렇게 '나'라고 할 만한 것들일까. 먼저 인간의 '나'라는 것이 어떤 성질의 것이어야 하는가 에서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첫째, 나는 상일성(常一性)을 가져야 한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나의 심신은 시시각각으로 변해 가지만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이 나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육체적, 정신적 현상의 배후에 있는 본체요 생명의 본질과 같은 것이다.

    바라문의 사상가들은 일찍부터 나의 이런 불변성에 착안하여 그것을 우주의 본질적인 범(梵,Brahman)과 동일하다는 범아일여설까지 심화시켜 갔던 것은 누차 언급한 바와 같다. 이러한 '나'를 그들은 '아트만(atman,自我)'이라고 불렀다. 내가 지녀야 할 또 하나의 성질은 주재성(主宰性)이다. '남'은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없지만 내 자신은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고, 남의 소유는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없지만 나의 소유는 내가 마음대로 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에게는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주재성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들이 나라고 말하고 있는 여섯 개의 감관이나 오취온에 그러한 상일,주재성이 있을까. 그들이 모두 무상하고 괴로움이라는 것은 앞서 충분히 살펴보았다.

    무상함은 상일성이 없기 때문이고, 괴로움은 주재성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들을 결코 '나의 실체(mama atman)'라고는 못할 것이다.

    따라서 석가모니께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계신다. "눈이 만일 나라면 핍박의 괴로움을 받을 까닭이 없고, 이리저리 원하는 대로 할 수가 있으리라. 그러나 눈은 내가 아니기 때문에 핍박의 괴로움을 받고, 이리저리 원하는 대로 할 수가 없다. 귀, 코, 혀, 몸, 의지 또한 그와 같다."<잡아함 권 1>

    다음과 같은 말도 경전에 자주 반복되고 있다.

    "색은 무상하다.

    무상한 것은 괴로움이요, 괴로운 것은 나가 아니요(非我), 나의 것(我所)이 아니다."<잡아함 권 1> 석가모니께서는 그의 제자들과 다음과 같은 대화를 자주 교환하고 계신다.

    "색은 무상한가 아닌가?" "무상합니다." "무상한 것은 괴로움인가 아닌가?" "괴로움입니다."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라면 그에 대해 이것은 나의 것이요,

    이것은 나요, 이것은 나의 실체라고 말할 수가 있을까 없을까?" "말할 수가 없습니다."

    "수, 상, 행, 식 또한 그러하다."<잡아함 권 1> 우리들이 나라고 하는 것들(육근,사대,오취온)은 이렇게 나 가 아니고(非我) 나의 것이 아니다(非我所). 그런 곳에 상일, 주재성을 띤 나의 실체는 없다(無我).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범부들은 그런 것들을 나의 실체로 집착하고, 그런 아집으로 말미암아 대립과 분열 등의 괴로운 문제를 발생시키고 덧없이 자기 파멸을 초래하고 있는 것이다. 참다운 자아를 탐구한다는 바라문이나 사문들도 아직 진정한 자아에는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이 이른 경계는 오취온의 차원에 불과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석가모니께서는 범부들의 아집은 말할 필요도 없지만 바라문이나 사문들의 철저치 못한 자아관을 시정하기 위해서, 일체는 무상하고 일체는 괴로움이라는 관찰에 이어, '그러므로 일체는 무아'라는 것을 결론적으로 말하고 계시는 것이다.

    불교의 현실 판단은 이 무아설(an-atma-vada)에 이르러 일단락을 이루는데, 이것은 인도 정통파 철학 사상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아트만 사상(atma-vada)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무아설은 불교의 가장 근본적인 입장으로서 인도 철학사 가운데 이채를 띤 사상이라고 평가됨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불교의 이 무아설에 대해 나의 절대적인 부정이나 참다운 나의 탐구를 배격하는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자칫 잘못하면 그러한 오해가 발생할 수가 있으니, 석가모니의 재세시에 벌써 그런 예를 볼 수가 있다.

    "만일 일체법이 무아요 일체행이 공적(空寂)하다면 그 중에 어떤 나가 있어서 이렇게 알고 이렇게 본다고 말하고 있는가?"<잡아함 권 1> 나가 없다는 것이 불가하다는 견해이다.

    불교의 무아설은 나의 절대적인 부정에 있는 것이 아니라, 참다운 나를 찾게 하기 위한 기초 작업이라고 보아야 한다. 나 아닌 것을 나로 착각하고 있다면, 참다운 나는 그러한 착각의 부정을 통해서만이 나타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석가모니께서는 "나에 의지하고 법에 의지하라."는 말씀을 거듭 강조하고 계시며, "나의 주인은 나이며, 나를 제어하는 것은 곧 나다." <법구경>라는 말씀을 하고 계신다.

    다음과 같은 이야기에서도 우리는 석가모니의 뜻이 참다운 나를 찾는 데에 있음을 엿볼 수가 있다.

    녹야원에서 초전법륜을 마친 석가모니께서는 우루벨라를 향해 가시는 도중 나무 그늘에서 잠시 선정에 잠기신 일이 있었다.

    이때 마침 그 부근에 남녀 쌍쌍으로 행락을 나왔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중의 한 유녀가 놀고 있는 틈을 타서 귀중한 재물들을 챙겨 달아난 일이 생겼다.

    뒤늦게 그 사실을 알게 된 그들은 부근을 찾아 헤매다가 나무 그늘에 연좌한 석가모니를 보고 "혹시 그런 유녀를 보시지 않았는가?"고 물었다. 이때 석가모니께서는 다음과 같은 답변을 하고 계신다.

    "젊은이들이여, 잃어버린 자기 진심을 찾는 일과 도망친 유녀를 찾는 일 중에서 어떤 것을 더 시급하게 찾아야 한다고 보는가?" <사분율 권 32> 무아설의 목적이 이렇게 참다운 나를 찾기 위한 것이라면, 그 참다운 나란 도대체 어떤 것인가. 이 문제를 위해 우리는 불교에서 설하는 일체법에 대한 새로운 차원을 다음 장에서 다시 살피지 않으면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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