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卍-불법을만나고/卍-불교자료실

일체고

by 회심사 2017. 4. 25.


卍-일체고-卍
    삼법인의 둘째 항목인 '일체는 괴로움(duhkha)'이라는 단안은 첫째 항목의 판단이 성립하면 저절로 이루어진다. 그러기에 석가모니께서는 '무상한 것은 곧 괴로움(苦)'이라고 설하신다.<잡아함 권 1>

    불교의 이런 단안에 대해서 세상에는 그렇게 괴로움만 있는 것이 아니라 즐거움도 있지 않느냐고 항변할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세상에 태어나 젊고 건강하게 오래 산다는 것이 어찌 즐거움이 아니겠는가? 더구나 거기에 금상첨화로 미워하는 사람과 헤어지고 사랑하는 사람과 만나고 구하는 바를 얻을 때 그 즐거움은 말로 다 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런한 즐거움이 얼마나 오래 가느냐에 있다. 영원히 머물러 준다면 얼마나 기쁘겠는가. 영원히 머물러 주지 않는 곳에, 다시 말하면 무상한 곳에 불안과 서글픔이 있는 것이다.

    세상에 태어나 늙고 병들고 죽어 가는 사람들을 보라. 미워하는 사람과 만나고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고 구하는 바를 얻지 못하는 저 불상한 사람들을 보라. 그러한 불행이 언제 우리에게 닥쳐올지 알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괴로움뿐만 아니라 즐거움도 괴로운 것으로 봐야 한다.

    인간의 느낌(受)에는 괴로움과 즐거움과 그 중간(不苦不樂, 捨)의 세가지가 있다.

    삼법인설에서의 괴로움은 이 중에서 괴로움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즐거움과 중간의 느낌까지도 괴로움으로 봐야 한다는 입장이다. 왜 그러냐면 그들은 무상하기 때문이다.

    무상하기 때문에 즐거운 것도 괴로움으로 봐야 한다면, 이에 대해서 다시 다음과 같이 이의를 제기할 사람이 있을 것이다. 뒷일을 미리부터 그렇게 걱정하며 괴로워할 이유는 무엇인가. 이왕 죽을 목숨이라면 현재의 즐거움을 마음껏 즐김이 오히려 현명한 일이 아니겠는가. 뒤에 무상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현재에 즐거움이 느껴지고 있다면 그것은 괴로움이 아니라 즐거움이라고. 우리 주변에는 이런 낙천주의적 인생관이 크게 유행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현재의 즐거움을 그렇게 즐거움으로 볼 수가 있을까? 인간 실존의 근저를 이루고 있는 오취온을 살펴볼 때 우리는 다시금 그런 낙천주의적 인생관이 커다란 잘못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오취온의 처음에 위치하고 있는 색온은 항구 불변한 존재가 아니다.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사대요소가 이미 무상한 것이므로 그것 또한 끊임없이 변하고 분산하려는 무상성을 지니고 있다.

    수,상,생,식의 사온은 이런 색온에 입각해서 개체를 지속하려는 비물질적(정신적)인 노력이며 그러한 노력의 중심은 행(行, 결합작용)에 있다. 따라서 그것은 몹시 힘이 들 것이고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면 붕괴하고 말 것이다(死). 괴로움(duhkha)이라는 말은 원래 '힘이 든다'는 뜻을 갖고 있다.

    따라서 현재 즐거움을 느끼고 있다고 하더라도 인간 실존을 그 밑바탕에서부터 관찰할 때는 괴로움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런 견지에서 석가모니께서는 "일체는 무상하고 무상한 것은 괴로움"이라고 단정하신다. 그리하여 괴로움의 구체적인 내용을 다음과 같이 설하고 계신다.

    "세상에 생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은 괴로움이다. 미운 것과 만나고(怨憎會)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고(愛別離) 구하는 바를 얻지 못하는 것(求不得)은 괴로움이다. 한 마디로 말하면 오취온은 괴로움이다."<증일하함 권 17 四諦品> 이것을 불교에서는 여덟 가지 괴로움(八苦)이라고 한다.

    어떤 경우에는 고고(苦苦), 행고(行苦), 괴고(壞苦)의 세 가지 괴로움을 들 때가 있는데, '괴로움의 괴로움(苦苦)'은 인간의 감각적인 괴로움을 가리킨다.

    '행의 괴로움(行苦)'은 개체를 지속하기 위해 노력하는 행온(결합작용)의 괴로움을 뜻하고 '부서짐의 괴로움(壞苦)'은 그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막상 부서지게 되는 죽음의 괴로움이다.

    이 세 가지 괴로움은 오취온을 중심으로 해서 괴로움의 종류를 구별한 것임을 알 수가 있다.

    불교를 현실 부정적 염세종교로 보고자 하는 사람들은 불교의 이러한 괴로움의 교설을 보고 그러한 자신들의 견해를 더욱 강화시킬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렇게 보는 것은 그들의 자유겠지만, 그러나 불교의 입장이 무엇을 위한 것인가를 먼저 이해해야 할 것이다.

    종교는 무엇보다도 먼저 진실해야 한다. 인간의 실존이 만일 괴로움이라면 그것을 사실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그런 다음 그에 입각해서 생의 가치를 모색해야 한다. 진실을 외면하는 태도나 진실에 미치지 못한 얕은 소견을 석가모니께서는 결코 용납할 수 없었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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