卍-현실의 관찰-卍
불교는 신이나 우주의 원리와 같은 초월적인 진리에서부터 설해 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이 인식할 수 있는 구체적인 현실 세계의 관찰에서부터 시작한다는 것은 앞서 소개한 바와 같다. 그렇다면 그 구체적인 현실 세계란 과연 어떤 구조와 성질을 가진 것인가. 1). 십이처설 한때 생문이라는 바라문이 석가모니를 찾아와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한 일이 있다. "일체라고 하는 그 일체란 도대체 어떤 것입니까?"<잡아함 권 13> 당시의 인도에서 일체(sarvam)라는 말은 '모든 것(everything)'을 의미하는 말로서 우리들이 살고 있는 우주 전체를 가리키는 대명사였다. 세계나 세간(loka)이라는 말과도 등치 시킬 수 있는 개념이다. 이런 일체에 대해서 각 종교는 여러 가지 해석을 내리고 있었던 모양으로, 이제 석가모니께서는 그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갖고 있는가를 알아보려는 것이다. 석가모니께서는 생문 바라문에게 다음과 같은 대답을 하고 계신다. "바라문이여, 일체는 십이처에 포섭되는 것이니, 곧 눈과 색, 귀와 소리, 코와 냄새, 혀와 맛, 몸과 촉감, 의지와 법이다. 만일 이 십이처를 떠나 다른 일체를 시설코자 한다면 그것은 다만 언설일 뿐, 물어 봐야 모르고 의혹만 더할 것이다. 왜 그러냐면 그것은 경계(境界)가 아니기 때문이다."<잡아함 권 13>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에는 일월성신을 비롯해서 미물에 이르기까지 삼라만상이 존재하고 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은 열두 가지에 거뜬히 포섭된다는 것이요, 그 열두 가지 이외의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그래서 그 열두 가지를, 모든 것이 그 속에 '들어간다'는 뜻을 취하여 처(處, ayatana)라고 부르고 이 교설을 십이처설이라고 한다. 십이처설은 불교의 가장 기본적인 세계관이며 일체만유(一切萬有)에 대한 일종의 분류법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종교적 세계관으로서는 너무나도 소박한 것이라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입장이 선언되는 사상적 배경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다. 첫째로, 우리는 십이처의 구성이 눈, 귀, 코, 혀, 몸, 의지라는 여섯 개의 인식 기관(六根)과 색, 소리, 냄새, 맛, 촉각, 법이라는 여섯 개의 인식 대상(六境)으로 되어 있다는 것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 모든 존재를 인간의 인식을 중심으로 보고있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인간에 의해 인식되지 않는 것은 일단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봐야 한다는 기본적인 입장을 강력하게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종교에서는 인간의 인식 범위를 넘어선 초월적인 실재를 설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그러한 초월적인 실재가 종교적인 수행을 통해서도 끝내 인간에게스스로 검증되지 않는 것이라면, 그런 것의 실재성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 십이처설은 그러한 문제에 대해 부정적 태도를 분명히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석가모니께서는 당시의 바라문들에게 다음과 같이 묻고 계신다. "삼명(三明)을 갖춘 바라문으로서 일찍이 한사람이라도 범천을 본 자가 있는가? 만일 본 일도 없고 볼 수도 없는 범천을 믿고 받든다면, 마치 어떤 사람이 한 여인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그의 얼굴을 본 일도 없고 이름도 거처도 모른다는 것과 무엇이 다르리요."<장아함 권 16. 삼명경> 둘째로, 십이처설에서 우리는 불교가 인간을 중심으로 한 세계관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십이처설에서 인식 주체가 되고 있는 여섯 개의 감관 즉 육근은 그대로 인간 존재를 나타내고, 인식 객체가 되고 있는 여섯 개의 대상 즉 육경은 그러한 인간의 자연 환경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더구나 주체적 인간의 특질을 '의지(manas)'로 파악하고 객체적 대상의 특질을 '법(dharma)'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사실을 크게 주목해야 한다. 의지라는 것은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와 능동적인 힘이 있는 것을 의미한다. 법은 어떤 원인이 있으면 반드시 그에 상응한 결과를 나타내는 '필연성을 지닌 것'을 가리킨다. 그러한 뜻의 의지와 법이라는 개념으로 인간과 자연의 특질을 규정하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바라문교에 의하면 세계의 중심은 창조주인 범(梵)이며 인간을 포함한 모든 존재는 그 종속적 피조물에 불과하다. 세계를 지배하고 인간에게 길흉화복을 가져오는 것도 범의 의지에 의한다. 사문측의 생활파에서도 인간은 생사의 코스를 바꿀 수 없다는 무작용론(決定論)을 펴고 있었다. 이들의 세계관을 염두에 두고 십이처설을 볼 때 우리는 일견 소박한 듯한 그 세계관이 불교의 기본적 입장을 천명한 것이며 사상사적으로 중요한 의의를 갖고 있음을 이해할 수가 있다. 2). 사대요소 물체는 몇 가지 요소로 분석되고 또 그것들을 화합하면 물체가 형성된다. 인간 또한 죽으면 몇 가지 물질적 요소로 분산되고 만다. 그렇다면 일체 존재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물질적 요소는 무엇일까? 궁극적인 물질적 요소에 대한 이러한 관심은 동서고금 어디에서나 볼 수가 있어 흥미롭다. 고대 그리스, 인도, 중국 등의 자연철학에서는 말할 필요도 없지만 현대의 자연과학에서도 원소물질(元素物質)에 대한 탐구는 줄기차게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불교가 일어날 무렵의 인도에서는 자연과 인간을 구성하는 그러한 기본적인 물질적 요소로서 지(地, prthivi), 수(水, ap), 화(火, tejas), 풍(風, vayu)의 네 가지를 주로 인정하고 있었다. 우파니샤드 철학의 전변설(轉變說)에는 "태초에 유(有)가 있어 욕심을 일으켜 풍, 화, 수, 지를 발생하였다."는 설이 있으며 사문계의 적취설(積聚說)에서도 가장 기본적인 요소로서는 역시 그러한 사대(四大)를 인정하고 있었다. 석가모니 또한 당시 인도의 그러한 사대요소설(四大要素說)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리하여 십이처 중에서 눈, 귀, 코, 혀, 몸의 오근(五根)과 색, 소리, 냄새, 맛, 촉감의 오경(五境)은 각각 사대로 분석된다고 설하고, 그러한 사대가 화합한 것이 곧 '색(色, rupa. 물질적 형체)'이라는 것이다.<잡아함 권 13> 만일 오늘날 석가모니께서 탄생하셨다면 현대 자연과학의 원소설을 채택하셨음에 틀림없다. 3). 오온설 십이처 가운데 다섯 개의 감각과 그 대상이 이렇게 사대요소로 분석되고 그것이 화합한 것이 색 즉 물질적인 형체라면, 인간과 자연은 그 존재의 근저에 이러한 색을 갖고 있다고 말할 수가 있다. 불교에서는 인간 존재의 근저를 이루고 있는 이러한 물질적인 형체를 '색온(色蘊. rupaskandha)'이라고 부른다. 색(色)은 사대가 화합한 것이고, 온(蘊, skandha)은 흔히 '쌓임(聚, heap)'이라고 번역되지만 원말은 '근간적인 부분(bran-ching part of the stem, part)'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러한 물질적인 색온만이 인간 존재의 바탕을 이루는 전부라고 말할 수가 있을까? 물질에는 스스로 사유하고 행동할 능력이 없다는 것은 상식에 속한 일이다. 인과율에 따라 필연적인 반응을 보일뿐이다. 그러한 색온을 가지고 인간 실존의 바탕을 이루는 전부라고 한다면 우리 인간이 개체를 유지하기 위해 사유와 행동을 줄기차게 전개시키고 있는 빗물질적 기능의 존재성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 이 문제에 대한 당시 인도 사상가들의 해명은 다양하였다. 우파니샤드 철학에서는 사대요소가 화합한 복합물(devata)에 범(梵)이 명아(命我. jiva-atman)의 상태로 들어갔다고 하였으니, 모든 물질 속에는 생명이 들어 있다는 범신론(汎神論)이 된다. 인간의 생명은 사대의 분산과 함께 단절된다는 순세파의 주장은 생명도 일종의 물질적 화합 현상으로 보는 입장이고, 생활파에서는 생명을 아예 물질적 요소로 간주해 버렸다. 한편 이계파에서는 인간은 생명과 물질이 대립적으로 결합된 상태라고 설하였다. 인간의 생명이나 정신이라는 것이 물질의 화합에서 발생하는 물리 화학적 현상에 불과한 것이냐, 그렇지 않고 정신의 독자적 존재성이 있는 것이냐의 문제는 오늘날 현대 생물학에서도 줄곧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전자를 기계론이라고 부르고 후자를 생기론(生氣論)이라고 부르는데, 현 학계는 기계론적으로 기울어지고 있다고 한다. 이는 자연과학 시대의 추세라고 말할 수가 있다. 그렇다면 석가모니는 이 문제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하고 계신가. 물질적인 색온 외에 다시 수(受, vedana), 상(想, sam-jna), 행(行, samskara), 식(識, vijnana)이라는 정신적인 사온(四蘊)을 추가한 오온설을 제시하고 계신다.<잡아함 권 3> 수, 상, 행, 식의 사온은 물질적인 색온을 바탕으로 개체를 지속적으로 존속시키려고 느끼고(受) 생각하고(想) 작용하고(行) 식별하는(識) 정신적인 기능을 각각 표현한 것이다. 인간존재를 물질과 정신의 두 부분으로 구성되었다고 볼 경우, 그 정신적인 부분을 생명 활동이라는 측면에서 세분한 것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십이처가 일체 존재를 포괄하는 일종의 분류법이라면, 오온 또한 새로운 차원에서의 일체 존재에 대한 분류법이 될 수도 있다. 인간 존재에 대한 근간적 구성 부분일 뿐만 아니라 외계 존재도 그러한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볼 수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불교에서는 십이처와 함께 오온 또한 일체 존재를 가리키는 술어로 사용되고 있다. 그리하여 오온이라는 술어를 갖고 인간 존재를 특히 한정적으로 지시하고자 할 때는 '오취온(五取蘊, upadana-skandha)'이라는 말을 별도로 사용한다. 오온이 하나의 개체로 '취착(取着)되고'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오온과 오취온은 똑같은 것이라고도 못하고 다른 것이 라고도 할 수 없다. 오온에 욕탐이 있는 것이 곧 오취온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잡아함 권 2> 불교의 오취온설은 정신과 육체를 싸고도는 당시 사상계의 문제성을 잘 지양하고 있다. 우파니샤드의 범신론적 견해는 생물과 무생물이 우리 현실계에서 엄연한 속성의 차이를 보여주고 있는 현상에 부합되지 않는다. 순세파의 유물론적 견해는 현대생물학의 기계론과 입장을 같이하고 있지만, 이것 또한 위의 현상에 맞지 않는다. 영혼과 육체를 완전히 별개의 것으로 보는 생활파의 견해는 심신의 밀접한 상호 관련성을 설명할 수가 없으며, 영혼과 육체는 대립하다는 이계파의 이원론 또한 그 두 부분이 불일불이(不一不異)의 관계로 상관하고 있는 현상을 설명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불교의 오취온설은 물질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정신의 독자성을 분명히 하고 있으며, 물질보다는 정신 쪽에 중점을 두고 있다. 뿐만 아니라 육체와 정신의 관계를 생명 활동의 측면에서 관찰하고 있어 현실 세계의 현상을 정확하게 포착한 것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2. 삼법인설 이상 소개한 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일체에 대한 중요한 교설 들인데, 이제 이러한 십이처나 사대, 오온과 같은 것들이 어떤 속성을 갖고 있는가를 보자. 그러한 일체는 모두가 무상하고 괴롭고 무아인 것이라고 석가모니께서는 단정하신다. "색은 무상하고 무상한 것은 괴로움이고 괴로운 것은 무아(無我)이다. 수, 상, 행, 식 또한 그와 같다."<잡아함 권 1> 일체의 속성에 대한 이 세 가지 명제를 불교에서는 삼법인(三法印)이라고 부른다. 법의 특성(dharma-laksana)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후대에는 불교의 특징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기에 이른다. 불교 이외의 다른 종교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입장이기 때문이다. 삼법인 중에서 '일체는 괴로움'이라는 항목을 빼고 '열반은 고요함(寂靜)'이라는 항목을 보태 삼법인으로 할 때가 있다. "모든 행은 무상하고(諸行無常), 모든 법은 무아요(諸法無我), 열반은 적정하다(涅槃寂靜)."는 설이 곧 그것이다.<잡아함 권 10> 또는 여기에 '일체는 괴로움'이라는 것을 다시 합하여 사법인(四法印)으로 할 때도 있다.<증일하함 권 18> 그러나 불교의 초기 경전에 줄기차게 설해지고 있는 것은 "일체는 무상하고 일체는 괴로움이고 일체는 무아"라는 맨 처음의 형태이다. 이제 이 삼법인의 각 항을 고찰해 보자. |
卍-불법을만나고/卍-불교자료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