卍-연기의 진리-卍
일체 존재는 생멸변화하고 이합집산하여 항구불변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은 앞서 살펴본 바와 같다. 그러나 모든 것이 그렇게 무상변이하고 있지만, 그런 현상이 아무렇게나 멋대로 행해지는 것은 아니다. 그들 속에는 일정한 법칙이 상주하여 그에 입각해서 그런 현상이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무상하다는 사실도 중요하지만, 무상한 것 속에 상주하는 이 법칙의 존재야말로 더욱 중요한 사실이다. 따라서 불교의 현실 관찰은 삼법인설에 이어서 다시 이 법칙성의 관찰로 전개되고 있다. 1). 인과율 먼저 불교의 가장 기본적인 세계관이라고 할 수 있는 십이처설에 입각해서 주체적 인간(六根)과 객체적 대상(六境) 사이에는 어떤 법칙이 있는가 부터 살펴보자. 십이처설에서 주체적 인간을 의지라는 말로 표현하고, 객체적 대상을 법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음은 앞서 소개한 바와 같다. 인간은 능동적 작용을 일으키는 힘을 갖고 있으며, 그런 작용이 가해지면 대상은 그에 상응한 필연적인 반응을 보이기 때문이다. 인간과 자연물 사이에는 말할 필요도 없지만, 인간과 인간 사이에도 이런 관계가 성립함을 본다. 남이 내게 잘해 주면 나도 그에게 잘해 주지 않을 수가 없고, 남이 내게 나쁘게 대하면 나도 그에게 나쁘게 대해지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따라서 주체적 인간과 객체적 대상 사이에는 인과의 법칙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의 의지적 작용이 원인(hetu)이 되어, 대상의 필연적 반응이 결과(phala)로서 따르기 때문이다. 불교에서는 인간의 그런 의지적 작용을 '업(業, karma)'이라고 부르고, 이에 대한 대상의 필연적 반응을 '보(報, vip-aka)'이라고 부른다. 인과업보(因果業報)라든지, 업인과보(業因果報)라는 성구는 이렇게 해서 성립하게 된다. 2). 인연화합 인간과 대상 사이의 역학적 인과관계는 이상과 같거니와, 다음은 생멸변화하는 사물에 있어서 그 '변화(anyatha-bhava)'라는 현상은 어떻게 해서 일어나게 되는가를 살펴보자. 이 문제를 구체적으로 관찰하기 위해 우리는 불교 경전에 자주 나타나는 우유의 변화를 예로 드는 것이 편리하다. 우유를 발효하면 낙(酪)이 되고 낙은 수가되고 수는 제호가 된다. 요즘 말로 하면, 우유가 치즈가 되고 버터가 되는 것과 같다. 이때 치즈나 버터가 되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우유에 발효 조건이 갖추어져야 할 것이다. 우유를 냉장고에 넣어 두면 치즈나 버터는 결코 만들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우유에 발효 조건을 갖추어 주는 일은 외부에서 가해지는 인위적 작용이다. 따라서 그것은 앞서 살펴본 주체적 인간의 업인에 해당된다고 볼 수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역학적 원인만으로는 치즈나 버터가 발생할 충분한 조건이 되지 못한다. 발효 조건은 있지만 우유가 없을 경우를 생각해봐야 하기 때문이다. 가령 돌이나 물에 아무리 발효 조건을 갖추어 줘도 치즈나 버터는 발생하지 않는 것과 같다. 따라서 치즈나 버터가 발생하는 데는 발효조건을 갖춰주는 동력인(動力因) 외에 다시 또 하나의 조건 즉 우유라는 질료인(質料因)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런 질료인을 불교에서는 '연(緣, pratyaya)'이라고 부른다. 우유에 '연'하여 치즈나 버터가 발생한다는 뜻이다. 사물의 변화에는 이렇게 원인과 연의 두 가지 조건이 갖추어져야 한다. 이 두 조건이 갖추어짐을 불교에서는 인과 연의 화합(samgati)이라고 부른다. 이 중에서 원인은 직접적이고 연은 간접적이라는 입장에서 '친인소연(親因疏緣)'이라는 말이 있으며, 서구학자들은 원인을 '제1차적 원인(primary cause)' 연을 '제2차적 원인(secondary cause)'으로 번역하고 있다. 불교의 이런 인연화합설은 인간의 성패를 해명하는 원리로도 적용될 수 있다. 아무리 노력하여도 외연(外緣)이 갖추어지지 않으면 뜻이 이뤄지지 않을 것이다. 반대로 아무리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어도 당사자의 자발적인 노력이 없을 때는 성공 또한 기대될 수 없음은 물론이다. 3). 상의상관성 인간이 외계에 의지적 작용을 가하면 외계는 이상과 같이 물리적 또는 화학적 반응을 보인다. 이런 뜻에서 인간의 의지는 세계의 생멸(生滅)변화를 일으키는 근본 원인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동시에 인간 의지의 절대성을 생각해 볼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좀더 깊이 관찰해 보면 이것이 지나친 생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왜 그러냐면 세계 속에 던져진 인간은 세계에 영향을 끼치지만, 동시에 세계의 영향도 받고 있음을 보기 때문이다. 이런 견지에서 불교에서는 다시 존재와 존재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를 살펴보게 된다. 그럴 경우 우리는 존재와 존재 사이에는 '상의상관성(相依相關性, idam-pratyaya-ta)'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인연 화합에 의해 어떤 결과가 발생하게 되면 그 결과는 다시 그를 발생시킨 원인을 포함한 다른 모든 존재에 대해서 직접적인 또는 간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단순히 결과로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원인이 되고 연이 되어 다른 존재에 관계하게 된다는 말이다. 상의상관성이란 말은 바로 이러한 관계를 나타내는 술어이다. 현대 불교학자들은 불교 경전에서 이런 상의상관성을 나타내는 전형적인 교설로 다음과 같은 문장을 즐겨 인용한다. "이것이 있음으로써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함으로써 저것이 생한다(此有故彼有 此生故彼生). 이것이 없음으로써 저것이 없고 이것이 멸함으로써 저것이 멸한다(此無故彼無 此滅故彼滅)." <잡아함 권 15> 그리하여 이것을 '연기(pratitya-samutpada)' 또는 상의상관성의 기본 공식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연기'라는 개념은 뒤에 십이연기설을 소개하는 곳에서 자세히 설명될 것이다. 인류의 철학적 사유에는 제일 원인에 대한 탐구가 상당히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세계현상은 무엇을 근본원인으로 해서 그렇게 나타나고 있느냐는 것이다. 당시에 바라문교에서는 그것을 범(梵)이라고 설하였다. 범은 일체의 창조주이며, 부(父)이며, 자존자(自尊者)라는 것이다.<중아함 권 19 梵天請佛經> 그러나 불교적 관점에서 보면 바라문교의 그런 주장은 현실의 정확한 포착에 비치지 못한 것이다. 모든 존재는 결과임과 동시에 원인이기도 한 상의상관성의 측면을 간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남을 떠나 홀로 존재할 수 있는 절대적인 자존자는 이세상의 어디에도 있을 수가 없다. 거대한 천체로부터 미생물에 이르기까지 모든 존재는 서로 원인이 되고 결과가 되면서 우주의 신비롭고 불가사의한 현상을 전개시키고 있는 것이다. 4). 법주법계 모든 것은 무상하지만 덮어놓고 무상한 것이 아니라 그들 사이에 이렇게 일정한 법칙이 있다. 인간과 세계 사이에는 인과 관계가, 사물의 생멸변화에는 인연 화합의 조건이, 존재와 존재 사이에는 상의상관성이 있다. 무상한 것들 속에 이렇게 일정한 법칙이 상주하고 있다는 사실은 언뜻 보기에는 아무것도 아닌 일같이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깊이 생각해 보면 놀랍고 신비로운 일이다. 멸해 버린 것과 새로 발생한 것과는 전혀 별개의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들 사이에 어떤 연결이 있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멸한 것과 생한 것은 다같이 똑같은 법칙성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이런 현상을 우리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이 문제를 우리는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가 있을 것이다. 무상한 속에 일정한 법칙이 상주하고 있어 각 존재에는 그런 법칙이 머물고 있다고. 이것을 우리는 '법주(法住, dharma-sth-iti)'라는 말로 표현할 수가 있다.<잡아함 권 12> 또 모든 존재는 법칙을 요소(dhatu)로 해서 성립해 있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물이 산소와 수소로 되어 있듯이 모든 존재는 법칙을 요소로 하고 있다는 말이다. 경전에는 이 뜻이 '법계(法界dharma-dhatu)'라는 말로 표현되어 있다.<잡아함 12> '계'는 구성 요소나 층을 나타내는 말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는 모든 존재가 본래 법칙을 그의 성품으로 삼고 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제 모든 존재는 그런 법성을 지닌 '법(dharma)' 그것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따라서 불교에서는 일체를 '제법(諸法, sarva-dh-arma)'이라는 말로 부르기도 한다. 무상하고 괴롭고 무아인 존재 속에서 우리는 마침내 상주의 법성(法性)을 발견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법성에 어떤 구체적 형상이 있는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생멸변화하는 모든 형상을 초월한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조금이라도 어떤 형상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일체 존재와 그 생멸변화에 일관하는 상주법성은 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또 그 법성을 일체 존재와 전혀 별개의 것으로 봐서도 안 된다. 전혀 다른 것이라면 일체 존재의 생멸변화에 그런 법칙성은 나타날 수가 없게 될 것이다. 따라서 법성과 존재(法)는 같다고도 할 수 없고 다르다고도 할 수 없는 불일(不一)불이(不二)의 미묘한 관계를 갖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우리는 앞서 삼법인의 무아설을 살핀 끝에, 불교의 무아설은 잘못된 아견(我見)을 시정하려는 것이지 참다운 나의 탐구를 부정하려는 것은 절대로 아니라고 지적한 일이 있다. 그렇다면 그 참다운 나의 실체 또는 본질이란 어떤 것일까? 상일, 주재의 성질을 가져야만 할 그 참다운 나란, 바로 무상한 존재속에 상주하는 이 법칙성이라고 볼 수가 있지 않을까? 이러한 법칙성의 '나'는 우파니샤드 철학의 아트만(atman)이나 이계파의 영혼(jiva)과는 다르다. 그들도 존재의 본질로서 그러한 실체를 내세웠겠지만 아직도 오취온의 경계에 머물고있어 철저한 법성에는 이르지 못한 것이기 때문이다. 2. 십이연기설 1). 십이연기설의 내용 제법의 실상에 대한 알음을 불교에서는 지혜(prajna, 般若)라고 부른다. 지금까지 살펴본 일체의 구조(십이처, 사대, 오온)와 속성(삼법인), 인과, 인연, 상의상관, 법칙성 등이 제법 실상의 내용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특히 법칙성에 대한 알음을 불교에서는 '명(明,vidya)'이라는 말로 부른다. 'vid'는 실제로 존재한다 또는 발견한다는 뜻을 가진 동사로서, 'vidya'는 실재하는 것, 발견된 것이라는 뜻을 나타낸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그것을 '명' 즉 '밝힘'이라고 번역한 것이다. 이러한 명의 유무는 인간의 존재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꿔 놓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무상한 존재 속에 상주하는 법칙성을 발견한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존재 방식이 동일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들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게 될까? 이 물음에 대한 불교의 해답을 우리는 십이연기설에서 자세히 살펴볼 수가 있다. 명과 모순되는 개념을 '무명(無明, avidya)'이라고 부르는데 이런 무명이 사람에게 있게 되면 이것을 연(緣)하여 행(行)이 있게 되고, 행을 연하여 식(識)이 있게 되고, 식을 연하여 명색(名色)이 있게 되고, 명색을 연하여 육처(六處)가 있게 되고, 육처를 연하여 촉(觸)이 있게 되고, 촉을 연하여 수(受)가 있게 되고, 수를 연하여 애(愛)가 있게 되고, 애를 연하여 취(取)가 있게 되고, 취를 연하여 유(有)가 있게 되고, 유를 연하여 생(生)이 있게 되고, 생을 연하여 노(老), 사(死), 우(憂), 비(悲), 뇌(惱), 고(苦)가 있게 된다. 그리하여 커다란 하나의 괴로운 온(蘊)의 집(集, 發生)이 있게 된다는 것이다.<잡아함 권15> 한 마디로 요약하면 명(明)이 없는 사람에게는 죽음의 괴로움이 있게 된다는 뜻이다. 그리하여 죽음이 있게 되는 형성과정을 열두 단계로 자세하게 분석해서 보여 주고 있다. 이제 그 형성 과정에 대한 약간의 설명을 시도해 보고자 한다. (1). '무명(a-vidya)'은 명이 아닌 것(非明) 또는 명이 없는 것(無明)의 두 가지로 해석되는데, 실재 아닌 것 또는 실재성이 없는 것을 자기의 실체로 착각한 망상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주어진 존재의 일시적 형체를 나로 집착한 것이라고 보아도 좋다. 또는 진리에 대한 무지라고 말할 수도 있다. (2). 이러한 무명이 있으면 그것을 연하여 '행(行, samskara)' 이 있게 된다는 것인데, 행은 '결합하는(sam) 작용(kara)'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따라서 무명에 의해 집착된 대상을 실재화 하려는 작용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현재 학자들 속에서 그 말을 형성 작용이라고 번역하는 이가 있으며, 서구에서는 'im-pulse'라고 번역함이 보통이다. 어떻든 인간 존재를 유지하고 있는 가장 근원적이고 힘든 자기 형성의 업이라고 볼 수 있다. (3). 행에 의해 개체가 형성되면, 그곳에 '식(識, vilnana)'이 발생한다고 한다. 식은 불교에 쓰이는 중요한 술어 중의 하나 인데 식별한다는 뜻을 가진 말이다. 개체가 형성되자 그곳에 분별하는 인식이 발생한 것으로 볼 수가 있다. (4). 식을 연하여 '명색(明色, nama-rupa)'이 일어나는데, 색은 물질적인 것을 가리키고 명은 비물질적인 것을 가리킨다. 오온설로 설명하면 색온은 색에, 수,상,생,식온은 명에 해당된다. 그렇다면 명색의 발생은 물질적인 것(形色)과 빗물질적인 것이 결합된 상태를 가리킨다고 볼 수가 있다. (5). 이렇게 명색이 있게 되면 그것을 연하여 '육처(六處, sa-d-ayatana)'가 일어난다. 육처는 십이처설의 여섯 개의 감관, 즉 눈, 귀, 코, 혀, 몸, 의지의 육근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개념이다. 인간 실존(六根)의 근저를 이루는 것을 오취온으로 설명하고 있으므로, 명색(五蘊)의 다음에 육처의 발생을 설하는 것은 당연한 순서라고 할 것이다. (6). 육처를 연하여 '촉(觸, samsparsa)'이 있게 되는데, 촉은 '접촉한다, 충동한다'는 뜻을 갖고 있다. 경전의 설명에 의하면 육근과 육경과 육식(눈,귀,코,혀,몸,의지에 발생한 식)이 화합하는 것이다. 단순히 육처가 육경에 접촉하는 현상이 아닌 것이다. (7). 촉에 연하여 '수(受, vedana)'가 발생한다. 수는 감수작용이라고 볼 수 있는데, 경전에서는 그 내용으로서 괴로움(苦), 즐거움(樂), 그리고 괴로움도 아니고 즐거움도 아닌(不苦不樂) 중간 느낌(捨受)의 세 가지 종류를 들고 있다. 접촉에 따른 필연적인 느낌이라고 보면 된다. (8). 수를 연하여 '애(愛, trsna)'가 발생한다. 끝없는 갈애(渴愛, thirst)를 뜻한다. 세 가지 느낌 중에서 즐거움의 대상을 추구하는 맹목적인 욕심이다. 따라서 불교에서는 애를 번뇌 중에서 가장 심한 것으로 보고, 수도에 있어서도 커다란 장애가 된다고 한다. 무명은 지혜를 가로막는 장애(所知障)요, 애는 마음을 염착(染着)시키는 번뇌장(煩惱障)의 대표적인 것이다. (9). 애를 연하여 일어나는 '취(取, upadana)'는 취득하여 병합하는 작용이다. 애에 의하여 추구된 대상을 완전히 자기 소유화하는 일이라고 볼 수가 있다. 이 취라는 술어는 오취온설에서 이미 등장했던 것인데, 거기에서도 오온을 하나의 개체로 취착하는 작용을 나타내는 말 이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10). 취를 연하여 '유(有, bhava)'가 발생한다. 유(bhava)라는 말은 'vhu'라는 동사에서 나온 명사형인데, '있다(be)','된다(bexcome)'는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한 말이다. 생사(生死)하는 존재 그 자체가 형성된 것이라고 보면 된다. 따라서 경전에서 유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욕계, 색계, 무색계(三界)의 세 가지 유가 곧 그것이라고 설명한다. 삼계는 생사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 곳이다. (11). 유에 연하여 '생(生, jati)'이 발생하는데, 생은 말 그대로 '생한다'는 뜻이다. 유라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앞에서 살폈는데, 유가 그렇게 생사(生死)하는 존재 자체의 형성을 뜻 한다면, 그것에 연하여 생이 있게 될 것은 다시 말할 필요가 없다. (12). 생이 있으므로 노(老), 사(死), 우(憂), 비(悲), 뇌(惱), 고(苦)가 있게 된다. 이것은 우리 모두가 눈앞에 보는 바로서 다시 더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단 여기서 한 가지 지적해 두고 싶은 것은 이곳의 생과 사는 육체적 생사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생사한다고 보게 된 꿈과 같은 환상과 거기에서 오는 정신적인 괴로움까지를 포함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기에 노,사 다음에 우,비,뇌,고가 따르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하나의 커다란 '고온(苦蘊)의 집(集)'이 있게 된다는 것인데, '온'이라는 술어는 오온설에 등장했던 말로서 인간 존재를 구성하는 근간적인 부분을 가리킨다. 그러한 온이 괴로움이라는 것은 삼법인의 괴로움을 소개하는 곳에서 충분한 설명이 되었다고 본다. '집(集, samudaya)'이라는 말이 새로 나오고 있는데, 이 술어는 다음 장의 사제(四諦)를 소개하는 곳에서 자세한 설명이 따를 것이다. 다만 여기에서는 '발생'을 뜻하는 불교 술어의 일종이라는 것만을 알면 된다. 요는 무명이 있으면 그로 말미암아 생사라는 중생의 괴로운 존재방식이 있게 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생사의 근본적인 극복은 무명의 멸진을 통해 가능할 것이다. 따라서 경전에는 무명에서 생사의 발생 과정을 설한 다음에는 반드시 무명의 멸에서 생사의 멸을 설하고 있다. "무명이 멸하므로 행이 멸하고 내지 하나의 커다란 고온(苦蘊)의 멸이 있게 된다."<잡아함 권 12> 이상과 같은 내용의 교설을 십이지연기설(dva-dasa-anga-pratityasamutpada) 또는 줄여서 십이연기설이라고 부른다. 십이지는 무명에서 노사에 이르는 지분(anga)이 열둘이기 때문이다. 연기라는 말은 '연하여(pratitya) 결합해서(sam) 일어난다(utpada)'는 뜻인데, 각 지분은 자기 앞의 지분에 연하여 일어나, 하나의 커다란 온으로 결합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명에서 생사의 괴로움이 연기하게 되는 과정을 유전문(流轉門)이라고 부르고, 무명의 멸에서 생사의 괴로움이 멸하게 되는 과정을 환멸문(還滅門)이라고 부른다. 이 십이연기설이 우리에게 보여 주는 가장 핵심적인 뜻은 무엇일까? 모든 종교는 인간의 궁극적인 문제, 다시 말하면 죽음의 문제, 삶의 가치 등에 관한 문제를 해결해 주는 데에 목적이 있음은 이미 언급한 바와 같다. 십이연기설은 우리에게 인간의 죽음은 진리에 대한 자신의 무지에서 연기한 것임을 뚜렷이 보여 주고 있다. 인간의 죽음이 신의 노여움에 의한 것이라든가 숙명적으로 결정된 것이라든가 또는 본래부터 그렇게 있도록 된 우연한 것이라면 인간의 실존은 얼마나 막막한 절망 속에 헤매게 될까? 스스로의 노력으로는 그것을 어쩔 수가 없기 때문이다. 신의 구원을 청해야 한다고 주장할지 모르지만, 생사의 괴로움 속에서 죄악을 지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 어떻게 신의 은총을 바랄 수가 있을까? 그러니까 더욱 신의 구원을 청해야 한다고 하겠지만, 구원의 확실성을 우리는 또 어떻게 믿을 수가 있을까? 그러나 석가모니께서는 오랜 각고의 구도 끝에 마침내 인간의 죽음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진리에 대한 자신의 무지에서 연기한 것임을 발견한 것이다. 세계의 어떤 종교가 석가모니의 이러한 깨달음보다도 더 밝은 전망을 인류에게 비춰 주고 있을까. 연기의 깨달음이야말로 인류의 종교적 사색이 도달한 최고의 성과라고 할 것이다. 따라서 불교의 초기 경전에는 이 십이연기설을 석가모니께서 이룬 깨달음(bodhi)의 내용으로 삼고 있을 정도이다. "연기의 법은 내가 지은 것도 아니요, 다른 사람이 지은 것도 아니다. 여래가 세상에 나오건 안 나오건 간에 이 법은 상주(常住)요, 법주(法住)요, 법계(法界)이니라. 여래는 다만 이 법을 자각하여 바른 깨달음을 이루어 중생들에게 설하나니, 이것이 있음으로써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함으로써 저것이 생한다. 즉 무명을 연하여 행이 있고, 내지 하나의 커다란 고온의 집(集)이있게 된다. 이것이 없음으로써 저것이 없고, 이것이 멸함으로써 저것이 멸한다. 즉 무명이 멸하므로 행이 멸하고 내지 하나의 커다란 고온의 멸이 있게 된다."<잡아함 권 12> 석가모니뿐만 아니라 비바시불(Vipasyin)을 비롯하여 과거에 출현하셨던 여러 부처님들도 모두가 보리수 아래서 십 이연기를 역순으로 관찰해서 깨달음을 이루셨다고 설해져 있다.<잡아함 권 15> 순관(順觀)은 무명에서 노사의 방향으로 관찰하는 것이고, 역관(逆觀)은 노사에서 무명의 방향으로 관찰하는 것이다. 이러한 순,역 두 관찰에서 부처님들이 깨달음을 이루는 데에는 먼저 역관에 의한다고 학자들은 보고 있다. 경전에도 그러한 견해를 뒷받침하는 자료가 있다.<잡아함 권 12> 불교의 종교적 사색은 현실(생사의 문제)의 관찰로부터 시작하여 차츰 심화되고 있어 신이나 우주의 원리로부터 설해 내려오는 권위주의적 종교와는 전혀 방향이 다르다. 역관은 불교의 이러한 추리적 사색의 방향과 일치하고 있는 것이다. 순관은 깨달음의 내용에 입각해서 생사의 발생 과정을 밝혀 주는 설명적 교설이라고 보아도 좋다. 십이연기설은 중층적으로 심화되는 불교의 교리 조직 중에서 초기 경전에 설해진 가장 심오한 법문이라고 볼 수가 있다. 부처님을 시봉하던 아난이 "제가 보기에 연기는 그렇게 심심(甚深)한 뜻이 없는 듯합니다."라고 말하였을 때, 부처님은 아난에게 다음과 같이 설하고 계신다. "아난아, 그런 말을 하지말라. 십이연기는 매우 심심한 것이니 보통 사람이 능히 깨칠 수 있는 법이 아니다."<증일아함 권 46> 십이연기설은 초기 경전에 설해진 가장 심오한 법문일 뿐만 아니라, 그곳에 설해진 여러 가지 법문을 하나로 종합하고 체계화한 형태임을 보여준다. 우선 그 지분의 조직만 보더라도 오온, 십이처, 생사 등의 여러 가지 법이 그 속에 하나로 짜여져 있으며, 연기라는 발생법에는 인과, 인연, 상의상관 등의 모든 불교적 개념이 포섭되어 있음을 엿볼 수가 있다. 2). 중도설 불교는 다른 종교와 확연히 구별되는 독특한 종교적 입장을 가지고 있다. 인도 정통파 사상의 아트만을 부정하는 무아설 이라든가, 형이상학적 희론(戱論, prapanca)을 부정하는 무기설 등은 그 대표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초기 경전에 설해진 최상 법문으로서의 십이연기설은 이러한 불교의 종교적 입장에 대해서도 가장 체계적이고 심오한 이론적 근거가 되고 있다. 먼저 무아설에서부터 살펴보자. 일체가 무아라는 판단은 앞서 삼법인설에서 소개한 바와 같이 "일체는 무상하고, 무상한 것은 괴로움이요, 괴로운 것은 무아"라는 근거에 입각한 것이다. 따라서 무상하고 괴로움이라는 것이 그 이유라고 말할 수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무아설은 완전하고 철저한 무아설에 이른 것은 아니다. 왜 그러냐면 앞서 삼법인의 무아설에서도 소개한 바와 같이 다음과 같은 문제가 발생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일체법이 무아라면 이 중에 어떤 나가 있어서 이렇게 알고 이렇게 본다고 말하고 있는가?"<잡아함 권 10> 무아라고 하지만 현재 나는 분명히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런 의혹을 일으켰던 찬타 비구에게 다음과 같은 해답이 베풀어지고 있다. "세간의 집(集, 발생)을 여실하게 바로 보면 세간이 없다는 견해가 있을 수 없고, 세간의 멸을 여실하게 바로 보면 세간이 있다는 견해가 있을 수 없다. 여래는 그 두 끝을 떠나 중도에서 설한다."<잡아함 권 10>고 한 다음, 곧 십이연기설이 설해지고 있다. 세간(loka)이라는 말은 세계가 일체라는 말과 동의어로서, 무아설의 '아'도 여기에 포함된다. 그런데 그러한 세간은 무명에서 연기한 것이므로 없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연기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결정적으로 있다고 말해서도 안 된다. 왜 그러냐면 실재성이 없는 것을 실재한다고 착각한 망념에서 연기한 것에서 실체가 있다고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러한 무명에서 연기한 것은 무명의 멸과 함께 없어지는 성질의 것이다. "세간의 멸을 여실히 바로 보면 세간이 있다는 견해가 있을 수 없다."는 말은 이 뜻을 가리키고 있다. 불교 무아설의 최승(最勝)한 뜻(parama-artha)은 바로 이런 곳에 있다고 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들이 강하게 집착하고 있는 나에게는 실재성이 없으므로 무아인 것이다. 그러나 이 무아는 망념에 입각한 나까지도 없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찬타비구가 제기했던 '알고 보고 말하는 그 나'는 바로 이러한 나(妄我)라고 볼 수가 있다. 따라서 불교의 무아설은 유와 무의 두 끝을 떠난 중도적인 교설이라고 할 수가 있는데, 그것은 곧 십이연기설에 입각한 것이다. 석가모니께서는 형이상학적인 희론(戱論)에 대해서 매우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고 계셨는데, 이것 또한 십이연기설에 최상의 이론적 근거를 두고 있다. 불교 초기 경전에 나타나는 형이상학적 희론의 조직적인 제시는 십사무기설(十四無記說)이다. 이것은 앞서 제1장에서 만동자의 질문을 통해 잠깐 언급한 일이 있지만, 다음과 같은 열네 가지 문제에 관한 것이다. 세계는 상(常)인가, 무상(無常)인가, 상도 아니고 무상도 아닌가? 세계는 유한(有限)인가, 무한(無限)인가, 유한이며 무한인가, 유한도 아니고 무한도 아닌가? 정신과 육체는 하나인가, 둘인가? 여래는 사후에 유(有)인가, 무(無)인가, 유(有)이며 무(無)인가,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닌가? 이런 문제에 대해 석가모니께서는 의례 답변을 않고 침묵을 지키셨다. '무기(無記, a-vyakarana)'는 해답이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이 열네 가지 문제를 십사무기라고 하는데, 석가모니께서는 이렇게 답변을 삼가하신 이유는 무엇일까? 불교가 본래 현실 세계의 관찰에서부터 시작하는 기본적인 입장 때문이라는 것을 그 이유의 하나로 들 수가 있다. 만동자에게는 "열반과 깨달음에 이르는 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라는 수행상의 이유가 제시되어 있다. 어떤 경우에는 "오온에대해 무지하므로"<잡아함 권 34> 그런 희론과 집착이 있게 된다고 한다. 그러나 최승한 이유는 역시 십이연기설에서 발견된다. 앞서 무아설에서도 밝힌 바와 같이 연기한 것은 유와 무의 두 끝을 떠난 중도적인 입장이다. 그와 같이 단(斷)과 상(常)<잡아함권 12>, 일(一)과 이(異)<잡아함 권 12>, 자작(自作)과 타작(他作)<잡아함 권 13> 등의 두 극단도 초월해 있다. 따라서 위와 같은 열네 가지 문제에 대해서 일방적인 단정을 내릴 수는 없는 것이다. 석가모니께서 침묵을 지키지 않을 수밖에 없었음은 이 때문이다. 만일 그러한 문제에 올바른 답변을 한다면, 두 끝을 떠난 중도적인 십이연기설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3). 십이연기설의 음미 십이연기설은 이와 같이 초기 경전에 설해진 가장 심오한 법문이며, 깨달음의 내용이며, 여러 교리를 하나로 종합, 체계화한 것이며, 독특한 불교적 입장에 대한 최승의 이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계에서 그 진가가 충분히 이해되지 못한 감이 있다. 부파불교시대(B.C. 3세기 - 1세기 경)에는 십이연기설이 삼세양중인과설(三世兩重因果說)로 해석되었다. 즉, 인간이 과거(무명, 행), 현재(식, 명색, 육처, 촉, 수, 애, 취, 유), 미래(생, 노사)의 삼세에 걸쳐 윤회하는 인과를 밝힌 교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부파불교의 이러한 삼세양중인과설에 대해 현대 불교 학자들은 그 잘못을 지적하고, 그런 해석은 본래의 뜻에서 멀어진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이러한 비판은 현대 불교학의 큰 성과라고 하겠지만, 그러나 이번에는 십이연기설을 단순히 논리적 또는 존재론적 연기관으로 해석하려는 경향을 나타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어떤 학자는 십이연기설은 교리가 차츰 정비되어 가는 과정에서 이루어졌다는 소위 후대성립설을 주장하고도 있다. 이러한 해석들을 우리가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을 것 같다. 앞에서 상당히 자세하게 십이연기설을 고찰하였는데 그런 입장에서 볼 때 십이연기설을 도저히 그렇게 만은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
卍-불법을만나고/卍-불교자료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