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세음보살의 10 가지 명호-
십대명호 (十大名號)
나무관세음보살마하살(南無觀世音菩薩摩河薩)
나무대세지보살마하살 (南無大勢至菩薩摩河薩)
나무천수보살마하살 (南無千手菩薩摩河薩)
나무여의륜보살마하살 (南無如意輪菩薩摩河薩)
나무대륜보살마하살 (南無大輪菩薩摩河薩)
나무관자재보살마하살 (南無觀自在菩薩摩河薩)
나무정취보살마하살 (南無正趣菩薩摩河薩)
나무만월보살마하살 (南無滿月菩薩摩河薩)
나무수월보살마하살 (南武水月摩河薩)
나무군다리보살마하살 (南無軍茶利菩薩摩河薩)
나무십일면보살마하살 (南無十一面菩薩摩河薩)
나무제대보살마하살 (南無諸大菩薩摩河薩)
나무본사아미타불 ( 南無本師阿彌陀佛 )
《해설》
관세음보살 큰 보살님께 귀의합니다. 대제지보살 큰 보살님께 귀의합니다.
천수보살 큰 보살님께 귀의합니다. 여의륜보살 큰 보살님께 귀의합니다.
대륜보살 큰 보살님께 귀의합니다. 정취보살 큰 보살님께 귀의합니다.
만원보살, 수월보살, 군다리보살, 십일면보살, 제대보살, 아미타불, 큰 보살님께 귀의합니다.
관세음보살을 한분의 관세음보살로서 함축하여 표현하면 그만 터인데 왜 이렇게 많은 관세음을 열거하여
혼돈되리. 만큼 칭명 (稱名)이 많은가?
삼세여래 일체동 (三世如來一體同)이란 말이 있다.
곧 삼세에 걸쳐 출현하신 모든 부처님이 알고 보면 같다는 말이다.
그래서 십관음이일체동 (十觀音而一體同)이란 말이 성립된다.
관세음보살님의 열 가지 다른 이름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관세음보살님은 무량하고도 불가측한 존재이십니다.
대자대비의 화신이며 상징입니다. 대세지보살님이나,
천수보살님은 관세음보살님의 또 다른 별호(別號)이며 별명들입니다.
관세음보살님의 무량한 위신력 가운데 하나의 부분을 따서 이름을 붙이게 된 것으로
모두 다 관세음보살님이라고 불러도 좋을 보살님입니다.
하나하나 그 보살님들이 무엇을 특징으로 하고 있는가 하는 점을 생각해 봅니다.
나무관세음보살마하살의 보살마하살이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 버금가는 위신력을 가지고 무량중생들을
이끌어 가는 이미 부처님의 경계에 들어간 그런 보살님들을 말합니다.
절에 오는 여자 신도 분을 보고 평소 우리들은 보살님 하고 부릅니다.
그렇지만 보살마하살이라고 부르지는 않습니다.
이것은 아직 부처님과 같은 여법한 역량과 그런 능력을 구족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부처님에 버금하는 그런 능력을 구족하게 되면 아무 아무개 보살마하살이라고 부를 것입니다.
관음경보문품 (觀音經菩門品)에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전약 善男子야 若有國土衆生이 應以佛身으로 得度者면 觀世音菩薩이 卽現佛身하여 而爲說法하며
應以壁支佛身으로 得度者면 卽現壁支佛身하여 而爲說法하며 應以聲聞身으로 得度者면
卽現壁聞身하여 而爲說法하며 이하중약.
선남자여,
만약 어떤 국토 중생이「부처」의 몸으로 응하여 제도시킬 자이면 관세음보살이
곧「부처」의 몸을 나타내어 설법하여 주며 「벽지불」의 몸으로 응하여 제도시킬 자이면「벽지불」의
몸을 나타내어 설법하여 주며 「성문」의 몸으로 제도시킬 자이면 성문의 몸을 나타내어서 설법하여 주며 …」
이렇게 관음보살님은 때로는 자모 (慈母)로 때로는 친구로 때로는 보살님으로 화현
(化現)하여 중생들을 구제하고 제도 하는 것이다.
자모 (慈母)로 화현한 관세음보살
옛날 오대산속 작은 암자에 스님 한 분이 홀로 수도하고 있었다.
절이 하도 규모가 작고 초라하여 공양주 (供養主, 절에서 밥 짓는 사람)도 없이 살았다.
스님에게는 형님이 있었는데 장가들어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인생의 행, 불행은 예측할 수 없는 것,
어느 해 여름 스님의 형님 부부는 들에 나갔다가 홍수에 말려 비명횡사를 하고 말았다.
그런데 어린 조카가 하루아침에 천애의 고아가 되어 돌볼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스님은 어린 조카를 안고 와서 절에서 길렀다.
이제 겨우 네 살 난 아이였다.
겨울이 되었다. 가도 가도 끝없이 이어지는 오대산 삼림(森林)의 겨울은 길었다. 아이를 업고 갈 수도 없는
입장이라 어린 것을 떼어놓고 가면서 일러주었다.
「 빨리 갔다 올 테니 저기 관세음보살을 의지 하여라. 두려운 생각이 날 때에도 배가 고플 때에도
오직 일심으로 관세음보살을 불러라 」 스님은 잠시나마 떼어 놓는 어린 조카가 안쓰러워 관세음보살을
가리키며 그렇게 일러 주었던 것이다.
작은 암자에서 마을까지 상당히 거리가 멀었다.
스님이 마을에 내려오자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스님이 여기저기에서 식량을 마련하는 동안 폭설은 천지를 하얗게 덮었다.
이윽고 길이 막히고 캄캄한 밤이 되고 말았다.
아이 걱정이 되어 발을 동동 굴렀으나 나는 재주가 없는 바에는 갈 수가 없었다.
눈은 밤새도록 퍼부었다. 몇날며칠을 두고 폭설은 내렸다.
어느 집 행랑채에서 눈이 멎기를 기다리던 스님은 아이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났다.
눈은 멎었으나 키를 넘는 눈 속을 갈 수가 없어 일주일을 또 보냈다.
스님이 눈을 헤치고 절간으로 돌아왔을 때는 보름을 훨씬 더 지난 후 이었다.
아이의 시신이라도 거두어 주겠다는 심정으로 절 마당에 들어서자 아이가 방문을 열고 웃으면서 삼촌 (스님)을
맞았다. 스님은 하도 기이하여 물어보았다.
무얼 먹고 살았느냐? 엄마가 와서 밥을 지어주고 밤마다 재워 주었어. 」
엄마라니? 엄마가 어디 있어? 아이는 말없이 관세음보살의 화상 (畵像)을 가리켰다.
스님은 감읍하여 관세음 보살상 앞에 꿇어 엎드려 눈물을 흘렸다.
보살님으로 화현한 관세음보살
남해관음사에 부목이 한 사람 있었다.
부목은 특별한 신심 (信心)이 있어 절일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을에 있을 때 놀음 좋아하고 술 좋아하고
허송세월 보내다가 오갈 데가 마땅찮아 전전긍긍 하던 끝에 관음사 스님을 만나 이곳에 허드렛일을 하고
머물게 되었던 것이다.
부목은 절에 있어도 마음은 언제나 술과 계집을 못 잊어 번민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미모의 보살 (여기에서 말하는 보살이란 신도를 지칭함) 한 사람이 불공을 올리러 왔다.
그런데 때마침 스님이 출타중이라 불공 의식을 올리지 못하고 약식으로 불공을 올렸다.
이것저것 심부름을 하던 부목은 이 미모의 보살님에게 불같은 열정이 끓어올라 견딜 수가 없었다.
부목은 기회를 엿보다가 보살을 끌고 한쪽으로 가서 고약한 행동을 하려고 덤벼들었다.
이 무지막지한 부목이 부처님 도량에는 팔부신장 (八部神將)을 옹호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리 없었고,
그런 것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러나 막상 고약한 행동을 하려고 하니 저 쪽에 걸려있는 관음보살의 탱화가
아무래도 눈에 걸렸다. 부목은 잠시 그 행동을 미루고 탱화를 돌려 걸었다.
그 순간 이었다. 보살님이 사정없이 부목의 뺨을 후려쳤다.
「 네 이놈! 죽은 보살(탱화)은 눈에 보이고 살아 있는 보살은 볼 줄 모르느냐? 」
부목은 눈이 빠지도록 맞고 정신을 차려보니 보살은 온데간데없었다.
그 후 부목은 마음을 고쳐먹고 출가위승 (出家爲僧)하여 열심히 수도에만 전념하여 대도 성불을 이루었다.
바로 관세음보살의 화신이었다.
영 (靈)적으로 계시 하시는 관세음보살님
신라의 고승 의상대사는 당나라에 7년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곧 바로 낙산사를 찾았다.
해동관세음보살이 머무는 이곳에서 의상대사는 관세음보살의 진용 (眞容)을 친견 (親見)하고
지금의 낙산사 절터를 계시 받았다.
그러나 해골바가지 물을 마시고 당 (唐)으로의 유학을 포기했던 원효대사는 낙산사를 찾아가 푸대접을 받았다.
벼를 달라고 하니 열매 맺지 않았다며 거절하고 물을 달라고 하니 속곳을 빨던 물을 떠주던 관음 (觀音)이었다.
왜 그랬을까.
그만큼 원효대사의 도 (道)가 덜 익었던 것이리라.
해수관음상 (海水觀音像)으로 유명한 낙산사에도 사실 (史實)적인 설화가 있으니 듣는 이의 가슴을 찌른다.
출가위승 (出家爲僧)한 사미승 (沙彌僧) 조신 (調信)은 (일설에는 즉 관리 하던 사람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이는 스님이라기 가 곤란하여 그렇게 기록한 것으로 사료됨)
어느 날 불공드리러 온 태수 (오늘날 군수쯤 되는 벼슬)의 딸을 보고 그만 상사병에 걸리고 말았다.
젊은 조신은 사모하는 정을 억누를 길이 없어 관세음보살에게 그 여자와 인연을 맺어 달라고 빌었지만
야속한 관세음보살은 조신의 소원을 들어 주지 않았다.
드디어 조신은 식음 (食飮)을 전폐하고 드러눕고 말았다.
하루 이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보다 못해 스승이신 주지스님이 손수 미음을 들고 와서 조신을 위로했다.
어디가 아프냐? 말 못할 사연이라도 있느냐? 털어 놓고 얘길 해봐.」
주지스님은 마치 조신의 마음을 꿰뚫어 보기나 하는 것 같았다.
조신은 기왕에 죽을 몸 얘기나 한번 속 시원히 해 보자 하고 말을 하였다.
스님! 실은 제가 감히 이 고을의 태수의 딸을 사모한 나머지…」
그까짓 걸 가지고 그래 어서 미음이나 들고 나 시키는 대로 해 보렴」조신은 용기가 나서 벌떡 일어나
미음을 먹었다.
그리고는 주지스님이 시키는 대로 법당에 가서 밤낮으로 기도를 올렸다.
관세음보살을 목이 터지도록 부르던 조신은 법당 앞에서 잠이 들고 말았다.
꿈속에서 조신은 태수의 딸과 결혼하여 다섯 자녀를 두게 됐다.
그러나 달콤한 사랑은 잠시뿐 둘의 결혼 생활은 궁핍과 고난의 연속이었다.
먹고 입을 것은 물론이고 잠자리마저 구할 수 없어 차츰 거지로 전락했다.
큰아이가 굶어 죽고 열 살 난 계집아이가 밥 동냥을 갔다가 개에 물리는 비참한 광경이 이어졌다.
젊고 아름다운 시절에는 사랑으로 맺어 왔지만 굶주림과 고통 또한 그 속에서 잉태돼 온갖 것을 깨달은 둘은
결국 갈라서고 말았다.
짧았던 즐거움 빈궁한 생활, 참담한 이별의 아픔에 울부짖으며 돌아설 때 문득 잠을 깨었다.
막 밤이 새려는 새벽녘이었다.
조신은 탐욕의 어리석음과 세속적 욕망을 모두 뛰어넘어 다시는 덧없는 속진 (俗塵)에 얽매이지 않고 수도에
전념할 수 있었다.
관세음보살은 이렇게 하여 중생 구제와 제도를 하시는 것이니
이제 독자 (불자님)께서는 관세음보살의 명호에 대하여 다소 이해가 되리라 믿는다.
관세음보살은 오늘도 삼계육도에 고루 화현하여 중생의 근기에 따라 음성에 따라 성관음도 되고
천수관음도 되는 것이다.
화현 하시는 관세음보살님은 33응신 (應身) 혹은 33관음이라고도 한다.
이러한 연고는 회화나 조각에 나타난 응화신 (應化身)도 33종류와 관음상이다.
그 33관음상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양유 (楊柳)관음은 봄바람 버들가지 아래 앉아 계시는 관음,
오른 손에 버들가지를 들고 왼손을 젖가슴 위로 올려 대자대비의 모습을 갖추고 있는 관음.
2) 용두 (龍頭)관음은 구름 속에서 용을 타고 있는 모습의 관음.
3) 기경관음은 성문의 현상으로 바위위에 앉아서 경책을 가지고 있는 관음.
4) 월광관음은 몸 뒤에 둥근 배광 (背光)이 있는 관음.
5) 유희관음은 구름을 타고 왼손을 한쪽 무릎에 놓고 법계를 마음대로 유희하는 관음.
6) 백의관음은 항상 흰 옷을 입고 선정의 인 (定印)을 맺고 흰 연잎 위에 앉아 있는 관음.
7) 연화관음은 하얀 연꽃 위에 앉아 있는 관음.
8) 용현관음은 폭포를 보면서 바위를 기대로 있는 관음.
9) 시약관음은 약을 가지고 중생의 병을 낫게 하는 관음.
10) 어람관음은 물고기가 든 바구니를 들고 있는 관음.
11) 덕왕관은 가부좌를 맺고 왼손을 무릎 위에 놓고 오른 손에는 버들가지를 들고 바위 위에 앉아 있는 모습.
12) 수월관음은 달이 비친 바다 위에 한 잎의 연꽃을 타고 오른손에는 시무외 (施無畏)의 인 (印)을 하고 있는 모습.
13) 일엽관음은 물에 뜬 한 잎 연꽃에 앉아 있는 모습
14) 청경관음은 버들가지가 꽂혀 있는 병을 옆에 놓고 바위에 기대어 앉아 있는 관음.
15) 위덕관음은 왼손에는 금강저를 가지고 오른손에는 연꽃을 가지고 있는 관음.
16) 연명관음은 물 가운데 있는 바위에 기대고 있는 관음.
17) 중보관음은 약간 왼쪽을 바라보면서 앉아 있는 장자신 (長者身)의 관음.
18) 암호관음은 암굴 속에 있는 관음.
19) 능정관음은 바위에 기대고 바다를 향해 고요히 앉아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는 관음.
20) 아뇩관음은 바위에 앉아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는 관음.
21) 아마제관음은 무애의 선비처럼 바위에 앉아 있는 관음.
22) 엽의관음은 풀을 깔고 바위에 앉아 있는 관음.
23) 유리관음은 한 송이 연꽃을 타고 물 위에 편히 두 손으로 향로를 받들고 있는 관음.
24) 다라존관음은 구름 위에서 손에 푸른 연을 가지고 있는 관음.
25) 합의관음은 조개껍질 가운데 서 있는 관음.
26) 육신관음은 패다라 나뭇잎에 새긴 경본을 가지고 있는 관음.
27) 보라관음은 옷이 바람에 휘날리고 있는 자태의 관음.
28) 마랑부관음은 부녀의 모습을 하고 있는 관음.
29) 합장관음은 합장하고 서 있는 관음.
30) 일엽관음은 구름 속을 날아가는 관음.
31) 불이관음은 두 손을 앞에 포개고 연잎을 타고 물위에 떠 있는 관음.
32) 지연곤음은 연봉위에 서서 두 손으로 한줄기의 연꽃을 쥐고 있는 관음.
33) 쇄수관음은 왼손엔 발우를 들고 오른손에는 버들가지를 쥐고 땅위에 서 있는 관음.
이 외에도 밀교에서는 25관음, 28관음, 48관음을 설하고 있다.
여기 천수경에서 일컫는 10대 관음은 이들 모든 관음을 대표한 관음이다.
또 「 나무천수보살, 만월보살 」할 때 보살 (菩薩)이란 범어 보데삿다바 (Boddhi Sattva)이다.
보리 (Boddhi)는 「 깨달음 」이고 샅바다 (혹은 살타)(Sattva)는 「 중생 」이다.
그래서 보살은 미완성의 대명사로 볼 때는 「 깨달을 중생 」 완성의 대명사로 볼 때는 깨달은 중생 」이라고
한다. 따라서 이는 상구보리 (上求菩提 : 위로는 불지 (불도)를 구하고) 하화중생 (下化衆生 : 아래로는 중생을
교화하고 구한다.)하는 사람으로 해설한다.
마하살 (摩河薩)을 붙이면 마하 (Maha)는 범어로 「 크다 」는 뜻으로 합하여 「 큰 보살 」,「 위대한 스승 」,
「 마음을 크게 쓰는 중생 」,「 소아 (小我)를 버리고 대아 (大我)에 사는 위대한 성자 」등의 뜻이 된다.
관세음보살은 이와 같이 큰마음을 내어서 한량없는 중생을 제도하는 성자가 되어 있으니 보살마하살이라
부르는 것이다. 혹자는 오늘날에는 부처님도 영험이 없으니 하지마는 그것은 부처님께서는 시방에 상주하고
계시지만 사악한 중생들이 사리사욕에 눈이 멀어 작은 것을 베풀고 당장에 큰 이익을 바라니
어느 부처님이 그런 사람에게 영험을 주며 어느 부처님이 가피를 주리오.
이 외에도 「 성관자재보살일백팔명경 」에는
관세음보살마하살의 다른 이름이 일백여덟 분이나 나오지만 여기서는 생략한다.
나무본사아미타불 ( 南無本師阿彌陀佛)
아미타 부처님은 관세음보살의 스승이시다.
극락세계를 장엄하신 아미타여래불 (佛)의 보처 (補處)가 바로 관세음보살님이시다.
아미타불은 극락세계의 주불 (主佛)이시다.
옛날 옛적 불가설 아승지겁에 세자재왕 (世自在王)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나오셨을 때
그는 한 국토의 임금으로 있었는데 발심출가 (發心出家)하여 법장 (法藏)비구가 된 뒤에는
마흔 여덟 가지 원을 세워 이를 성취하므로 서 아미타불이 되어 극락세계의 주인이 되신 것이다.
극락세계 (極樂世界)!
그 세상을 인간 세상처럼 고 (苦)가 없고 밤과 낮이 없고 의·식·주에 대한 걱정이 없으며
무량한 지혜와 복덕으로 조성되어 근심걱정이 없으므로 극락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아미타 (Amitadha)라는 말을 번역하면 무량수 (無量壽), 무량광 (無量光)이다.
수명이 한 령이 없는 것이 무량수이고 지혜가 한량이 없는 것이 무량광이다.
건강과 지혜, 이것은 모든 사람들의 공통된 발원인데 아미타불은 이 무량한 법성 (法性)을 중득 함으로서
무량한 보신국토 (報身國土)를 장엄하여 한량없는 중생들을 이끌어 주고 있다.
그러므로 그 거룩한 부처님께 귀의한다 하여
「 나무본사 아미타불 」이라한 것이다.
그런데 「 천수천안대비심다라니 」에서는 십도삼향 (十度三向)의 원향 (願向)을 마음속 깊이 다짐하고
이어서 관세음보살의 근본 스승이신 「 아미타불 」께 거듭거듭 귀의한 다음에 주문을 외우라 하였다.
그래서 나무본사아미타불 」을 거듭 세 번 외우게 된 것이다.
극락 (極樂)이 과연 있느냐? 있다면 그곳이 어디냐?
이것은 아무리 신심이 돈독하고 도 (道)가 높은 고승 대덕이라 할지라도 한번쯤 짚고 넘어갈 문제이다.
왜냐하면 불교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 이런 질문을 한다면 어떻게 대답할 수 있겠는가.
이 문제는 기독교도 마찬가지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천국 (天國)이나 영생 (永生)이 불교의 극락이나 윤회 (輪廻)관과 별로 차이가 없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의 원죄 (原罪) 또한 불교의 숙업 (宿業)과 일맥통상 한다.
천국이나 윤회나 영생이나 인간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종교로서 성립이 가능한지도 모를 일이다.
이런 맥락에서 따지고 보면 원시적 토속신앙 (샤머니즘)도 조상숭배도 우상이라고 몰아 부칠 수도 없다.
믿음 이라는 그 본바탕은 같기 때문이다.
어느 종교를 막론하고 그런 줄 알고 믿으라는 점은 동일 한다.
이를테면 윤회를 모르면서 윤회를 믿고 영생을 모르면서 영생을 믿는다.
어느 부분에서는 믿음을 강조하다 못해 공갈 협박도 서슴지 않는다.
성경에서는 최우의 심판의 날 (Lastjudgement)이 되면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를 구분하여 믿지 않는
자는 유황불 구덩이에 던져질 것이다. 했다.
물론 여기에는 여러 가지 단서가 붙겠으나,
이 구절만 놓고 평한다면 이것은 공갈이요 협박이다.
불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생·노·병·사의 만고불변의 대원칙을 놓고 얼마나 많은 엄포를 놓고 사기를 치고 있는가?
그러나 이 어마어마한 문제가 그 해답은 이외로 간단하다.
종교는 과학이 아니다. 그러면 극락이 어디 있느냐?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풀 수 없는 유토피아와 같은 이 난제 (難題)도 그 대답은 매우 간단하다.
어떤 사람이 부처님을 만나려고 집을 나섰다.
산을 넘고 강을 건너 심산유곡의 절에도 가 보았고 광막한 벌판을 방황하기도 하였다.
한 달을 찾고 1년을 찾고 10년을 찾아도 부처님은 끝내 만나지 못했다.
집으로 돌아온 나그네는 허탈한 마음으로 조용히 입정 (入定)에 들었다
나그네는 선정 (禪定)속에서 나를 보았고 드디어 부처를 보았다.
부처님이 저 먼 곳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속에 있다는 사실을.-
또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가 화살을 맞았다. 이 어리석은 사람이 화살부터 뽐을 생각은 않고
「누가 나에게 활을 쏘았느냐? 왜 활을 쏘았느냐. 나하고 어떤 원수지간이냐? 」하고 있다면
그러는 동안 활 맞은 사람은 화살촉에 묻은 독이 온몸에 퍼져서 죽고 말 것이다.
급한 문제는 활 쏜 사람이 누구냐 하는 것이 아니라 화살을 뽑고 몸에 독기가 퍼지기 전에 치료부터 해야 한다.
우선은 살아야만 활 쏜 이유도 알게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도 극락이 어디인가를 알려고 하는 동안 인간의 수명을 다 하고 만다.
달마대사가 동토 (東土)에 와서 불심천자 (佛心天子)로 알려진 양무제 (梁武帝)를 만났다.
무제는 인도에서 고승이 왔다는 말에 대뜸 묻기를 대사 내가 절을 천개 짓고 탑을 천개 쌓았소.
그 공덕 (功德)이 얼마나 되오?
달마대사가 답하기를, 「소무공덕 (所無功德)이오」조그마한 공덕도 없습니다. 라고 대답 하였다 한다.
그것은 무제가 공덕을 바라는데 공덕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모두 자신을 과시 하는 데에서 비롯한 인천 (人天)의 인과 (因果)이기 때문이다.
잘 보낸 하루가 저녁때에 편안한 수면을 주고 잘 보낸 일생 (죄 없는 일생)은 편안한 안식처를 준다.
저 명부(冥府)의 세계는 명부에 가서만 해결할 수 있는 것이다.
콩을 심어놓고 팥이 나오라고 한다면 그것처럼 우매한 일이 또 있겠는가.
극락은 마음속에 있다 닦으라. 마음이 청정하면 저 영원의 세계 극락이 훤하게 보일 것이다.
-사이버 용주사 보성스님 올리신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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