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卍-불법을만나고/卍-불교자료실

불타(佛陀)와 불전(佛傳)-교화지역과 佛敎中國

by 회심사 2017. 5. 1.


-교화지역과 佛敎中國-
    1) 마가다국에서의 교화활동

    붓다께서 깟싸빠(Kassapa) 삼 형제를 교화하고 천 명의 제자들과 함께 마가다국의 수도 라자가하(Rājagaha, 王舍城)를 방문했을 때, 세니야 빔비사라(Seniya Bimbisāra, 頻婆娑羅) 왕이 붓다께 귀의하여 재가 신자가 되었습니다. 빔비사라 왕의 귀의로 말미암아 붓다의 교화활동은 마가다국에서 커다란 성공을 거둘 수 있게 되었습니다. 왕은 라자가하 교외에 벨루와나(Veluvana, 竹林精舍)를 지어 승단에 기증하였습니다. 이러한 빔비사라 왕의 후원은 초기불교 교단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붓다는 라자가하에서 많은 제자들을 얻었습니다. 붓다의 두 상수 제자였던 사리뿟따(Sāriputta)와 목갈라나(Moggallāna)의 개종도 이 때 이루어졌으며, 마하 깟싸빠(Mahā Kassapa)가 붓다의 제자가 된 것도 이 무렵이었습니다. 마하 깟싸빠와 붓다의 첫 만남은 아주 자연스럽게 이루어졌습니다. 붓다께서 벨루와나의 간다꾸띠(Gandhakutī, 香室, 붓다의 거실)에 앉아 계실 때, 붓다는 지진이 일어날 조짐을 미리 아시고 밖으로 나오신 뒤, 라자가하와 나란다 사이의 뿌리가 많이 달린 니그로다 나무 밑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 때 붓다의 몸에서는 후광이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 때 마침 마하 깟싸빠가 이러한 붓다의 모습을 뵙자마자 단번에 이 분이야말로 자신의 스승이라고 생각하고, 붓다 앞에 엎드렸습니다. 붓다는 그를 자리에 앉히고 세 가지 설교를 한 뒤 구족계를 주었습니다. 그 후 둘은 함께 라자가하로 돌아왔는데, 마하 깟싸빠는 이미 붓다의 32호상 가운데 일곱 가지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인연으로 붓다께 귀의한 마하 깟싸빠는 8일 후 아라한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일생 동안 수행자의 자세를 잃지 않았으며, 붓다의 입멸 후에는 제1회 결집을 주도하였습니다. 그 밖에도 마가다 출신의 유명한 제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당시 마가다국의 수도 라자가하에는 벨루와나 외에도 의사 지바까(Jīvaka, 耆婆)가 기부한 망고 숲(Jīvakambavana)을 비롯한 정사(精舍)들이 여러 곳에 건립되었습니다. 붓다는 라자가하 근처의 깃짜꾸따(Gijjhakūtā, 靈鷲山 혹은 耆闍崛山, ‘독수리 봉우리’의 뜻), 삿따빠니구하(Sattapanniguhā, 七葉窟), 랏티와나(Latthivana, 杖林) 등에 머물면서 교화활동을 펼쳤습니다.

    붓다의 만년에는 돈독한 신자였던 빔비사라 왕이 그의 아들 아자따삿뚜(Ajātasattu, 阿闍世)에게 왕위를 찬탈당하는 비극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이 새로운 왕 역시 얼마 후 잘못을 뉘우치고 붓다에게 귀의하였다고 전합니다.

    2) 꼬살라국에서의 교화활동

    붓다 당시 가장 번성했던 도시는 마가다국의 수도 라자가하와 꼬살라(Kosala)국의 수도 사왓티(Sāvatthī, 舍衛城)였습니다. 학자들은 지금의 사헤트 마헤트(Sāhet-Māhet)가 사왓티의 유지(遺址)라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사왓티라는 도시 이름은 그곳에 사왓타(Savattha)라는 성자가 살고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다른 전통에서는 그곳에 대상(隊商)들의 숙박소가 있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거기서 만나 각자 “무슨 물품이 있는가?(Kim bhandam atthi?)”라고 물으면, “모든 것이 있다(Sabbam atthi.)”라고 대답했는데, 이 ‘삿방아티’라는 대답이 곧 도시의 이름이 되었다고 합니다.4) 어느 설이 정확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 도시가 붓다 당시에는 상업과 교통의 중심지였음은 분명합니다.

    꼬살라국에서의 붓다의 교화활동은 처음에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지방에는 바라문의 세력이 강하였고, 자이나교, 아지비카교 등도 왕성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붓다가 꼬살라국에 예속된 석가족 출신이었다는 사실도 장애가 되었을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러나 아나타삔디까(Anāthapindika, 給孤獨, ‘고독한 사람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주는 자’의 뜻)라 불렸던 사왓티의 장자 수닷따(Sudatta, 須達)의 귀의를 계기로 비로소 이 나라에서의 교화의 거점이 확보되었습니다. 그때는 붓다께서 성도한 지 4년이 지난 후였습니다.

    수닷따가 붓다를 만나 재가신자가 된 전후 사정에 대해서는 팔리『율장』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에 의하면, 아나타삔디까는 사업차 라자가하에 갔다가 ‘깨달으신 분’ 즉 붓다(Buddha, 覺者)께서 세상에 출현하셨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는 조금이라고 빨리 붓다를 친견하고 싶은 마음에 밤이 새는 것을 기다리지 못하고 캄캄한 밤중에 성문(城門)을 나와 새벽녘에 시따와나(Sītavana, 寒林)로 가서 붓다를 친견하였습니다. 그는 붓다의 설법을 듣고 무척 기뻐하여 일생 동안 재가자로서 붓다의 가르침을 받들기로 맹세하였습니다.

    아나타삔디까는 이튿날 붓다와 제자들을 초청하여 공양을 베풀고, 사왓티에서 우기(雨期)를 보내도록 붓다를 초청했는데, 붓다는 그것을 승낙하였습니다. 사왓티로 돌아온 그는 붓다께서 머물 수 있는 적합한 장소를 물색했습니다. 그런데 제따(Jeta, 祗陀) 왕자의 공원이야말로 모든 조건을 갖춘 곳임을 확인하고, 왕자를 찾아가 양도를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제따 왕자는 양도할 의사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엄청난 금액을 요구했습니다. 아나타삔디까는 그 금액을 지불하기로 하고, 황금을 수레에 싣고 와서 공원을 덮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마련한 동산에 아나타삔디까는 건물들을 세웠습니다. 그는 회랑을 설계하고, 문들을 만들었으며, 대기실을 짓고, 화실(火室), 창고, 화장실을 지었습니다. 또한 산책길을 다듬고, 우물을 마련하고, 공중목욕탕를 짓고, 욕실을 준비했으며, 연못을 파고, 천막들을 세웠습니다.

    이와 같이 원래 이 땅은 제따 태자가 소유하였던 원림(園林)이었기 때문에 ‘제따와나-아나타삔디까라마(Jetavana-Anāthapindikārāmā)'라고 이름 지었습니다. 이 말은 ‘제따 태자의 원림에 아나타삔디까 장자가 세운 정사’라는 뜻입니다. 한역에서는 ‘기수급고독원(祇樹給孤獨園)’이라 하였으며, 줄여서 ‘기원정사(祇園精舍)’라고 부릅니다. 아나타삔디까는 ‘보시 제일’이라는 호칭과 함께 80명의 으뜸가는 제자들의 명단에 나타납니다.

    사왓티에서 비사카(Visākhā, 毘舍佉)라는 여인도 아나타삔디까와 마찬가지로 ‘보시 제일’이라는 칭호를 받았던 신심 돈독한 재가 여신도였습니다. 그녀는 붓다와 상가를 위해 헌신했던 사람입니다. 비사카는 원래 앙가(Anga, 鴦伽)국의 도시 밧디야(Bhaddiya)의 대부호의 딸이었습니다. 그녀는 젊어서 붓다께 귀의했습니다. 그녀의 아버지 다난자야(Dhanañjaya)는 빔비사라 왕에 의해 꼬살라국으로 이주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꼬살라국의 빠세나디(Pasenadi, 波斯匿) 왕이 자신의 왕국에 재산이 많은 사람을 보내 달라고 마가다국의 빔비사라 왕에게 요청했기 때문입니다. 다난자야는 사왓티로 오는 도중 21마일 떨어진 한 장소에 머물렀습니다. 그는 자신이 발견한 그곳에 정착하고 싶다고 빠세나디 왕에게 간청했습니다. 왕의 허락을 받아 그곳에 정착하게 되었는데, 저녁에 첫 주민이 살게 되었다고 해서 ‘저녁’이라는 의미의 사께따(Sāketa, 娑鷄多)가 그곳의 지명(地名)이 되었습니다.

    비사카는 사왓티의 부자 미가라(Migāra)의 아들 뿐냐왓다나(Punnavaddhana, 分那婆陀那)와 결혼했습니다. 시아버지 미가라는 나체 고행자들의 추종자였습니다. 그들은 비사카가 붓다의 제자라는 것을 알고 붓다의 가르침을 따르지 못하게 하라고 미가라에게 충고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 후에 어떤 모함으로 그녀를 고발했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그들의 그릇됨을 증명하는 데 성공했을 때, 불교 승려들에게 봉사하도록 허락하지 않으면 더 이상 머물지 않겠다고 거부했습니다. 붓다께서 그의 집을 직접 방문했을 때, 미가라는 개종했습니다. 그는 며느리를 통해 예류과(預流果)를 얻었기 때문에 자기의 어머니에게 하는 것처럼 비사카에게 깍듯이 예를 표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그녀에게 ‘미가라의 어머니(Migāramātā, 鹿母)’라는 호칭이 붙게 되었습니다.

    『법구경주(法句經註)』에 의하면, 비사카는 시집올 때 값비싼 옷을 입고 왔는데, 그 옷을 희사하여 정사를 건립하겠다고 붓다께 요청했습니다. 붓다의 승낙을 받고 목갈라나가 감독하여 9개월이 걸려 사왓티 동쪽에 2층 건물을 완성하였습니다. 그 건물은 위, 아래 각각 500실을 갖춘 큰 규모였습니다. 이 승원의 이름은 뿟바라마(Pubbārāma, 東園)이지만, ‘미가라마뚜-빠싸다(Migāramātu- pāsāda, 鹿母講堂)로 더 널리 알려졌습니다.

    꼬살라 국왕 파세나디(Pasenadi, 波斯匿)도 나중에 왕비 말리카(Mallika, 末利) 부인의 인도로 붓다께 귀의하였습니다. 그리고 빠세나디 왕은 제따와나(기원정사) 반대편에 ‘라자까라마(Rājakārāma, 王園)' 즉 왕실 사원을 건립하였습니다. 사왓티에서 붓다의 으뜸가는 후원자는 아나타삔디까, 비사카, 숫빠와사(Suppavāsa), 빠세나디였습니다.

    붓다는 성도 후 20년이 지난 후부터 입멸하기 한 해 전까지 25년간의 안거(安居)를 사왓티에서 보냈습니다. 기원정사에서 19번, 녹모강당에서 6번의 안거를 보냈습니다. 이것은 붓다가 사왓티를 중심으로 교화생활의 후반을 보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후 붓다께 출가하여 승단에 들어오는 자가 급속히 늘어나면서 사왓티 출신의 유명한 불제자도 많이 출현하였습니다. 경전에 나타난 제자들의 이름을 보면 사왓티 출신의 비구가 80명이나 되며, 비구니가 14명, 우빠사까(Upāsaka, 信男)가 19명, 우빠시까(Upāsika, 信女)가 10명이나 됩니다. 그리고 그 제자들 중에는 당시의 카스트 제도를 무시하고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망라되어 있습니다. 그야말로 위로는 왕가(王家)의 주요 인물들로부터 아래로는 도로청소부에 이르기까지 사왓티 일대의 주민 대부분이 붓다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3) 그 밖의 중요한 교화지역

    붓다의 고향인 까삘라밧투에서의 교화도 두드러진 자취를 남겼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서 자세히 설명했기 때문에 여기서는 생략합니다. 한편 밧지(Vajji)국의 릿차비(Licchavi, 離車)족 수도 베살리(Vesālī, 毘舍離城)에는 비교적 일찍부터 교화가 미쳤던 것 같습니다. 이 땅은 자이나교가 성행했던 곳이었는데, 그 신봉자인 삿짜까(Saccaka, 薩遮)나 시하(Sīha, 獅子) 등은 붓다를 만나 불교로 전향하였다고 합니다. 이곳의 재가신자로서 유명한 이는 욱가(Ugga, 郁伽) 장자입니다. 또한 암바빨리(Ambapālī, 菴婆婆利)도 원림(園林)을 기부하였으며, 뒷날 출가하여 여성 수행자가 되었습니다.

    한편 붓다는 밤사(Vamsa)국의 수도 꼬삼비(Kosambi, 憍賞彌城)에도 종종 유행하였는데, 전설에 의하면 성도 후 9년째 되던 해의 안거를 여기서 보냈다고 합니다. 고시따(Ghosita, 瞿師羅) 장자가 기부한 승원, 즉 고시따라마(Ghositārāma, 瞿師羅園)는 잘 알려져 있으며, 국왕 우데나(Udena, 優塡)는 뒷날 삔도라 바라드바자(Pindola Bhāradvāja, 賓頭盧頗羅墮)와 왕비 한 명과 함께 붓다께 귀의하였다고 합니다.

    붓다는 성도 후 입멸에 이르기까지 45년간 인도 각 지방을 유행하며 교화하였습니다. 붓다의 교화가 인도 어느 지역까지 미쳤는가 하는 문제는 초기성전에 나타나는 붓다의 유행 경로나 설법 장소로서 대충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또 후대의 자료이기는 하지만 붓다가 성도한 후 안거하였던 곳을 기록한 것이 있는데 이것도 추정의 실마리가 됩니다. 이러한 자료에 의하면 붓다의 교화지역은 앙가, 마가다, 밧지, 말라, 꼬살라, 까시, 밤사 등의 여러 나라를 중심으로 멀리는 꾸루, 빤짤라까지 이르렀던 흔적이 있습니다. 설법이 많이 행해졌던 장소는 사왓티(꼬살라의 수도), 라자가하(마가다의 수도), 베살리(밧지의 수도), 까삘라밧투(석가족의 수도), 꼬삼비(밤사의 수도) 순이며, 그 중에서도 사왓티와 라자가하 두 도시가 압도적으로 많았습니다. 붓다의 유행도 이 두 도시의 왕복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안거 역시 이 두 도시에서 많이 시행되었다고 전합니다.

    붓다의 교화지역은 ‘불교중국(佛敎中國)’과 거의 일치합니다. 불교중국(Majjima-janapada 또는 Majjhima-desa)이란 원래 ‘수계(受戒)할 때 필요한 10명의 스승을 얻을 수 있는 중앙지역’을 의미합니다. 이른바 불교문화의 중심지를 가리킨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불교중국의 범위에 대해서는 많은 종류의『율장』에서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붓다의 교화활동은 불교중국 곳곳에 미쳐 그의 발자취가 닿지 않은 곳이 없었습니다. 붓다는 몸소 교화에 노력했을 뿐만 아니라 전도 선언 이래 출가 제자들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전도활동을 권장하였습니다. 제자들 가운데에는 서쪽 아반띠(Avanti)국 출신의 마하캇짜나(Mahākaccāna, 大迦旃延)나 그 서남쪽의 스나빠란따(Snāparanta, 현재의 뭄바이 서북방에 해당함) 출신 뿐나(Punna, 富樓那)와 같은 탁월한 교화력을 지닌 자도 적지 않았습니다. 붓다의 직제자(直弟子)들의 출신지나 교화지역을 조사해 보면 그 교화범위는 불교중국을 훨씬 넘어 동으로는 갠지스 강 유역, 서북으로는 탁샤실라(Taksaśilā) 부근까지 미치고 있었습니다. 붓다 재세시(在世時) 이미 불교는 크게 발전할 수 있는 토대를 갖추고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