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卍-불법을만나고/卍-불교자료실

불타(佛陀)와 불전(佛傳)-석가족 사람들의 출가

by 회심사 2017. 5. 1.


-석가족 사람들의 출가-
    붓다는 성도 후 몇 차례 고향인 까삘라밧투(Kapilavatthu, 迦毘羅衛城)를 방문하였습니다. 붓다는 첫 고향 방문 때, 당시 결혼을 앞두고 있던 배다른 동생 난다(Nanda, 難陀)를 제일 먼저 출가시켰습니다. 이어서 아들 라훌라(Rāhula, 羅睺羅)도 출가시켰습니다. 그 이후 붓다의 교화를 받고 많은 샤카(Sakya, 釋迦)족의 청년들이 출가하였습니다. 당시 출가한 샤카족 청년은 사촌 동생인 아난다(Ānanda, 阿難)와 데와닷따(Devadatta, 提婆達多)를 비롯하여 아누룻다(Anuruddha, 阿那律), 밧디야(Bhaddiya, 跋提伽, 婆提), 바구(Bhagu, 跋俱), 낌빌라(Kimbila, 金毘羅) 등이었습니다.

    샤카족 청년들의 출가 인연과 전후 사정에 대해서는 팔리 『율장』「소품」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기록에 따르면, 이들 샤카족 청년 여섯 명이 출가할 때 이발사였던 우빨리(Upāli, 優波離)도 함께 출가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기록에는 아난다와 데와닷따가 먼저 출가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팔리 율장에 묘사된 샤카족 청년들의 출가 인연은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한때 붓다께서 말라(Malla)의 작은 도시 아누삐야(Anupiyā, 阿奴比耶)에 머물고 계셨습니다. 그때 많은 샤카족의 특별한 청년들이 출가한 붓다를 모방하여 출가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샤카족에는 마하나마(Mahānāma, 摩訶那摩, 摩訶男)와 아누룻다(Anuruddha, 阿那律)라는 두 형제가 있었습니다. 샤카족의 아누룻다는 고상하게 양육되었습니다. 그는 세 개의 궁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하나마는 그 동생을 보고 “우리 종족에서 부처님이 나셔서 많은 사람들이 그를 쫓아 출가를 하였으니, 우리들도 출가하는 것이 어떠냐?”고 물었습니다. 그 말에 아누룻다는 느낀 바가 있어 출가할 결심을 세우고 그 뜻을 어머니에게 전했습니다. 그러나 그 어머니는 좀처럼 승낙을 하지 않고 “만약 밧디야(Bhaddiya)가 출가한다면 너도 출가해도 좋다.”고 대답을 회피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아니룻다의 어머니는 밧디야 왕이 왕위를 버리고 출가할 까닭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누룻다는 밧디야에게로 가서 그로 하여금 출가할 마음을 하게끔 하고 더 나아가 아난다, 바구, 낌빌라, 데와닷따의 출가를 권유하고, 또 이발사 우빨리를 데리고 부처님 뒤를 쫓아갔습니다. 국경을 넘어서자 그들은 몸에 매달았던 금환보식(金環寶飾)을 다 떼버리고, 이것을 우빨리에게 주어 귀국케 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발사 우빨리는 “만약 내가 이런 금은보식(金銀寶飾)을 가지고 혼자 나라에 돌아가면 나는 공자님들을 죽인 사람처럼 오해를 받아 혹은 죽게 될지도 모릅니다. 공자님들도 출가를 하신다니 저도 출가하는 것이 좋겠습니다.”하고 귀국하기를 거절하였습니다. 그리고 우빨리는 샤카족 청년들의 뒤를 따라 붓다를 친견하고 자신의 출가를 허용해 달라고 간청했다. 율장에 의하면, 이들이 출가하여 승단에 들어갈 때 붓다께 다음과 같이 요청하였다고 합니다.

    세존이시여, 우리 샤카족 사람들은 자만심을 갖고 있습니다. 세존이시여, 여기 이발사 우빨리(Upāli, 優波離)는 오랫동안 우리들의 하인이었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를 먼저 출가시켜 주십시오. 우리들은 그를 공경하고 일어서서 맞으며, 합장하고 예경할 것입니다. 이같이 하여 우리 샤카족 사람들은 샤카족으로서의 자만심을 제거할 것입니다.

    샤카족 출신의 비구들은 샤카족으로서의 자만심 때문에 평등을 본지(本旨)로 삼는 불교교단의 질서가 어지럽혀지지 않게 할 것을 결의하고 이같이 원하자 붓다는 이를 받아들여 우빨리를 먼저 출가시켰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일곱 사람의 새 출가제자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율장에 의하면, 출가 후 이들 가운데 밧디야는 세 가지 지혜[三明]을 얻어 아라한이 되었고, 아누룻다는 이러한 지혜의 두 번째인 천안통(天眼通)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아난다는 깨달음의 첫 번째 단계인 예류과(預流果)를 얻었고, 데와닷따는 아직 개종하지 않은 사람들을 개종시킬 수 있는 신통력을 얻었습니다.5) 나중에 바구와 낌빌라는 아라한과를 얻었다고 다른 문헌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때 출가한 샤카족 청년들의 출가 이후의 행적에 대하여 대략적으로나마 살펴보겠습니다.

    1) 밧디야(Bhaddiya, 跋提伽, 婆提)

    밧디야는 깔리고다뿟따(Kāligodhāputta)로도 불렸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샤카족의 귀부인이었던 깔리고다(Kāligodhā)의 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귀족 출신의 승려 가운데 으뜸이었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그가 숫도다나 왕의 뒤를 계승한 왕이었다면, 초기불교 교단에서 가장 높은 신분의 출가자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경전에서는 그를 ‘귀성제일(貴性第一)’이라고 했습니다.

    밧디야는 출가한 그 해에 아라한과를 성취했다고 합니다. 그는 계속해서 숲속의 나무 밑이나 길가 혹은 빈 집에서 정진하였습니다. 그는 ‘아! 기쁘다, 아! 기쁘다’를 외치곤 하였습니다. 비구들은 그가 출가의 청정한 수행을 좋아하지 않고 왕이던 때의 쾌락을 회상하면서 즐기고 있는 것 같다고 붓다께 보고했습니다. 그러자 붓다는 그를 불러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는 “왕으로 있을 때는 아무리 경비가 튼튼해도 불안했고 근심스러웠는데, 지금은 그 어떤 것도 두렵거나 불안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출가한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아! 기쁘다, 아! 기쁘다’라고 탄성을 올리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의 말을 듣고 붓다는 그를 칭찬하고 시를 읊어주었습니다. 그 뒤 그는 귀족 출신 중에서도 가장 훌륭한 제자라고 붓다로부터 칭찬을 받았습니다.

    2) 아누룻다(Anuruddha, 阿那律)

    아누룻다는 붓다의 사촌동생으로서 출가 후 붓다를 도와 교단의 통솔에 진력했습니다. 비구들이 분쟁을 일으키는 일이 많았던 꼬삼비(Kosambi, 憍賞彌城)의 동쪽, 대나무 숲에서 두 동료와 사이좋게 지내는 화합의 모범을 보여, 마침 이곳을 방문한 붓다를 기쁘게 한 일도 있었습니다. 그는 붓다를 뒤따르는 일이 많았으며, 특히 꾸시나라(Kusinārā, 拘尸那羅)에서 붓다의 입멸을 머리맡에서 지켜보았던 분입니다. 그는 붓다께서 입멸했을 때 “스승은 언젠가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일지라도 반드시 헤어질 때가 있다고 설법하셨다. 슬퍼하지 말라. 통곡하지 말라.”고 하여 슬퍼하는 사람을 위로하는 한편, 아난다에게 명하여 붓다의 입멸을 꾸시나라의 말라족 사람들에게 알리게 하였습니다. 아누룻다는 또 석존의 입멸 후, 교법이 분산되어 없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개최된 불전결집(佛典結集) 때에도 중요한 역할을 맡아서 수행했다고 합니다. 그는 ‘천안제일(天眼第一)’이라고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3) 낌빌라(Kimbila, 金比羅)

    낌빌라도 샤카족 명문(名門)의 출신인 것은 틀림없으나 붓다와의 관계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출가 후 특히 아누룻다와 난디야(Nandiya, 難提)와 의좋게 지내며 수행한 분입니다. 꼬삼비에서 비구들 사이에 쟁론(爭論)이 벌어졌을 때에도 이 세 사람만은 숲속에 있어 수행에 전념(專念)하여 붓다로부터 칭찬을 받은 일이 있었습니다.

    4) 바구(Bhagu, 跋俱)

    바구는 샤카족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친척인 아누룻다, 낌빌라와 함께 출가하여 발라까로나(Bālakalona) 마을에서 머물렀습니다. 그는 어느 날 졸음을 내쫓기 위해 작은 방을 나와서 계단으로 올라가려고 하다가 그만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이를 계기로 더욱 정진한 결과 자기를 극복하고 아라한과를 성취하였습니다. 그 뒤 그가 깨달음의 희열로 생활하고 있을 때, 붓다는 그를 축하하기 위해 그가 머물고 있던 벽지로 찾아갔습니다. 그 기회에 붓다는 하루 낮 하룻밤 동안 바구에게 설법했다고 합니다.

    5) 아난다(Ānanda, 阿難)

    아난다는 붓다의 제자로서 너무나 유명한 분입니다. 아난다의 부친과 붓다의 부친이 형제 관계에 있었으므로 붓다와 아난다는 사촌형제의 관계가 되는 셈입니다. 데와닷따도 같은 관계입니다. 아난다는 마음씨가 곱고, 퍽 사람들에게 친절한 인물이었습니다. 나중에 부처님의 시자(侍者)가 되어 25년 동안 한결같이 붓다를 모셨습니다. 또 매우 기억력이 좋은 사람이었으며, 붓다 곁에서 들은 말씀들을 모조리 암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붓다 입멸 후 최초의 불전결집 때에는 마하깟사빠(Mahākassapa, 摩訶迦葉)와 더불어 교단의 중심인물로서 활약하였습니다. 그는 ‘다문제일(多聞第一)’, ‘정념제일(正念第一)’, ‘행지제일(行持第一)’, ‘근시제일(近侍第一)’이라고 불렸습니다.

    석존은 성도 후 20년간 특정한 시종을 거느리지 않고, 여러 제자들이 때와 형편에 따라서 시중을 들었습니다. 처음 20년간은 비구 나가사말라(Nāgasamāla), 나기따(Nāgita), 우빠바나(Upavāna), 수낙캇따(Sunakkhatta), 사가따(Sāgata), 라다(Rādha), 메기야(Meghiya), 쭌다(Cunda) 사미(沙彌) 등 여덟 명이었습니다. 그러나 붓다께서는 성도 후 20년이 지난 다음에는 일정한 시자를 정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자 사리뿟따와 목갈라나 등 80여 명의 대아라한들이 모두 스승을 시봉하겠다고 나섰습니다. 그러나 붓다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셨습니다. 붓다께서는 이들 아라한들이 자신을 시봉하기 보다는 인류를 위해 보다 큰 봉사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셨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러자 장로들은 줄곧 침묵만 지키고 있던 아난다 장로에게 시자로 받아주실 것을 청해 보라고 권유했습니다. 아난다 장로의 대답이 흥미롭습니다. “스승께서 나를 시자로 삼기를 원하신다면 직접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러자 붓다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난다여! 다른 사람들의 권유를 기다리지 말라. 너 혼자서 나를 시봉하도록 하여라.”

    그 후 25년간 아난다는 그림자처럼 붓다를 따라다니면서 신변의 모든 일을 뒷바라지해 드리고, 붓다께서 병석에 누우면 계를 범하면서까지 특별한 식사를 준비했다고 합니다. 또한 가르침을 구하여 찾아오는 사람에게는 가능한 한 모든 편의를 제공해 주고, 고민을 가진 동료의 상담역을 맡기도 했으며, 때로는 붓다를 대신하여 설법을 하기도 했습니다.

    아난다는 사리뿟따, 목갈라나, 마하까싸빠, 아누룻다 등과 친교가 깊었으며, 특히 사리뿟따와는 각별한 사이였던 것 같습니다. 경전에는 그가 사리뿟따를 칭찬하는 말이 나와 있습니다. 사리뿟따의 입적 소식을 듣고 아난다가 낙심하는 모습은 “고양이의 습격을 간신히 피해서 허탈감에 빠진 수탉과 같이” 매우 딱하게 보였다고 합니다.

    아난다는 아누룻다와 함께 석존의 최후를 지켜보고, 이어서 그때까지 개별적으로 전해지던 붓다의 가르침을 정리하고 경전으로 편집하기 위하여 마하까싸빠와 함께 제1결집을 열었습니다. 이 회의에서 아난다는 붓다의 최측근으로서 가장 많은 설법을 들었기 때문에 ‘경(經)’을 편집하는 일을 주관했습니다.

    아난다는 매우 오래 살았다고 전해집니다. 『테라가타』에는 비구들이 “다문(多聞)한 사람, 법을 소유한 사람, 어둠 속에서 어둠을 헤치는 사람인 아난다 장로는 보배의 근원이로다.”라고 그의 죽음을 애도한 게송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6) 데와닷따(Devadatta, 提婆達多)

    데와닷따는 한역경전에서는 대체로 아난다의 형제라고 하고 있으나 팔리 경전에서는 야쇼다라비의 오빠라고 하고 있습니다. 어느 쪽이 사실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인물로서는 상당히 위대한 사람이었던 모양입니다. 데와닷따는 엄격한 계율주의자였으나 붓다는 일방적인 계율주의를 지향하지 않았습니다.

    데와닷따는 후에 붓다의 목숨을 빼앗고 스스로 교단을 인솔하려 획책했다는 이유로, 교단의 화합을 파괴하는 반역자의 표본처럼 취급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붓다와 데와닷따 사이에 있었던 대립의 이면에는, 교단 본연의 자세와 비구의 생활 방법에 관한 의견 차이가 숨어 있었던 것 같습니다. 후세에 이르기까지 그의 추종자는 남아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7) 우빨리(Upāli, 優波離)

    우빨리는 샤카족 명문 인사들에게 봉사해 온 이발사였습니다. 불제자가 된 후 그는 늘 새로운 출가자들의 머리를 깎아주는 일에 종사하였으므로 그 때마다 부처님이 설하는 계율을 잘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제일결집 때에는 계율의 송출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불교 교단의 규율 및 규칙에 정통했으며, 또 계를 지키는데 있어서 매우 엄격했던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지율제일(持律第一)’ 혹은 ‘지계제일(持戒第一)’로 불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