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卍-불법을만나고/卍-불교자료실

불타(佛陀)와 불전(佛傳)-붓다의 탄생(誕生)

by 회심사 2017. 5. 2.


-붓다의 탄생(誕生)-
    1. 탄생에 관한 전설

    붓다의 생애 가운데 탄생과 관련된 신화와 전설이 가장 많습니다. 붓다의 탄생에 관한 유명한 전설의 골자는 이미 초기성전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석존은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에 투시타(Tusita, 兜率天)에 있다가, 거기서 여섯 개의 이빨을 가진 코끼리를 타고 내려와 마야 부인의 태(胎) 안으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그래서 한역에서는 석존의 탄생을 일반적으로 '강탄(降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강탄 설화가 만들어지게 된 것은 한 인간이 그 짧은 기간에 그토록 완벽한 인격을 완성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석가모니가 부처 되기 이전에 무수한 생애를 거쳐오는 동안 끝없이 자기 희생의 공덕을 쌓았고, 그 결과 도솔천에 올라가 거기에서 신들을 교화하면서 지상에 내려올 시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입니다.2) 그래서 보살의 수많은 전생 설화가 만들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전생 설화들은 대부분 여러 생애를 통해 선행의 공덕을 쌓았다는 내용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 결과 도솔천에 머물고 있으면서 인간 세상에 내려가 교화할 시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도솔천 하강설입니다.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도솔천은 보살(菩薩)이 다음 생애에는 지상에 태어나 부처가 될 것이므로 그 준비를 위해 그곳에 잠시 머문다고 합니다. 이때 보살은 하생의 시기와 대륙과 나라와 집안에 대해 살핀다고 합니다. 시기라 함은, 인간 사회가 너무 이상적인 상태에 있으면 종교심이 일어나지 않고, 그렇다고 너무 타락한 세상에서는 종교를 돌아볼 여유가 없으므로 그 중간의 알맞은 시기를 가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대륙[洲]이라 함은, 고대 인도의 세계관에 의한 네 개의 주 가운데 하나를 가리킵니다. 그 중에서 잠부드비파(閻浮提)라는 곳은 인도를 중심으로 한 우리들의 인간 사회를 말한 것인데 부처님의 출현에는 거기가 제일 적당하다고 여겨집니다. 또한 같은 인도 중에서도 변경(邊境)이 아닌 중앙부가 좋다고 선택됩니다. 인도 사회의 계급은 세습 종교가인 바라문과 무사 귀족의 크샤트리야(刹帝利)가 상위(上位)에 있는데, 지금과 같은 세상에서는 크샤트리야 쪽이 좋을 것 같다고 해서 보살도 그런 집안에 태어나기로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 신들은 어느 나라의 왕을 고를까를 의논하여, 열여섯 큰 나라를 하나씩 들어보지만 보살이 태어나기에 적당한 곳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신들이 다시 보살에게 그 조건을 물으니, 보살은 국토에 대해서는 예순 네 가지, 어머니가 되실 분에 대해서는 서른 두 가지 조건을 내어놓습니다. 말하자면 국토의 이상과 여성의 이상을 말한 것입니다. 어느 것이나 그 인품이 뛰어나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조건을 들은 여러 보살과 신들은 석가족의 숫도다나왕(淨飯王)과 마야비(摩耶妃)야말로 그런 분이라는 의견이 일치되었다고 합니다.

    한편 보살은 도솔천에서 신들에게 법을 설합니다. 신과 천녀들은 머지않아 보살과 작별할 것을 슬퍼합니다. 보살은 자기의 후임으로 미륵보살(彌勒菩薩)을 정했다고 합니다. 미륵보살은 도솔천에서 신들에게 법을 설하고 언젠가는 석가모니를 본받아 지상에 내려가 부처가 될 날을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후세의 전설들에 의하면 특히 한역 경전들에 의하면 태자가 탄생하자, 많은 신들이 하늘에서 내려와, 그 손으로 태자를 받들었다고 하고, 그 때에 하늘에서 두 줄기의 온수(溫水)가 쏟아져 태자의 몸을 씻어드렸고, 그러자 태자는 선뜻 대지(大地)에 일어서서 사방(四方)을 둘러보며, 북쪽으로 일곱 걸음을 내디디고서 오른 손으로는 위를 가리키고, 왼손으로는 땅을 가리키면서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 사자후(獅子吼)하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이른바 '탄생게(誕生偈)'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붓다의 탄생에 관한 설화는 일찍부터 신화화(神話化) 되었습니다. 초기경전에도 탄생과 관련된 설화가 많이 남아 있는데, 이러한 설화들은 후대로 가면 갈수록 더욱더 윤색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설화를 역사적 사실이라고 믿는 학자들은 오늘날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비록 정전에 기록된 것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분명하게 믿을 수 없는 부분을 빼버리고, 나머지 부분을 역사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다만 우리는 이러한 설화를 통해 이렇게 해서라도 상징(象徵)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인류의 스승 석가모니에 대한 후세 사람들의 흠모(欽慕)의 정을 충분히 이해해야만 할 것입니다.

    2. 역사적 붓다의 탄생

    석가족은 현재 네팔 중부의 남쪽 변경과 인도 국경 근처에 위치하였던 작은 부족으로, 까삘라밧투(Kapilavatthu, 현재 네팔의 타라이 지방의 티라우라 코트에 해당함)를 수도로 하여 일종의 공화정치 또는 귀족정치(혹은 과두정치)를 행하였습니다. 왕(rajan)이라고 하는 수장(首長)을 교대로 선출하는 독립된 자치공동체였지만 정치적으로는 꼬살라 국에 예속되어 있었습니다.

    붓다는 이러한 석가족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숫도다나(Suddhodana, 淨飯王)였고, 그의 어머니는 마야(Maya, 摩耶) 부인이었습니다. 아버지 숫도다나는 수장의 지위에 있었기 때문에 왕으로 불렸으며, 석존도 왕족 출신이었다고 합니다.9) 그러나 결코 대왕(大王)이라고 불린 적이 없습니다. 아마 이 지방의 지배자(支配者)였던 것은 틀림없으나, 대국(大國)의 왕이라고 부를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정반대왕(淨飯大王)이라고 불리게 된 것은 후세 사람들이 그를 이상화(理想化)한 데서 생긴 호칭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 마야부인도 후세에는 마하마야(Mahamaya) 왕비로 높여 불렸습니다. 그녀는 같은 석가족의 한 별계(別系)인 꼴리야(Koliyas)족의 공주였습니다.

    초기성전에서는 고따마(Gotama, Gautama, 瞿曇)라고 하는 이름이 종종 쓰이고 있는데, 이것은 '가장 좋은 소'라고 하는 의미의 족성(族姓)입니다. 그의 이름은 싯닷타(Siddhattha, Siddhartha, 悉達, '목적을 성취한 자'의 뜻)이지만 초기성전의 오래된 부분에서는 거의 사용되지 않아 후세에 와서 쓰이게 된 이름으로 보입니다.

    숫도다나(정반왕)에게는 오랫동안 아들이 없었는데, 석존을 낳은 것은 아마 당시 40을 넘었을 때의 일인 것 같습니다. 석존의 탄생이 이 가문(家門)의 얼마나 큰 경사(慶事)였는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마야 왕비는 출산이 임박해 오자 당시의 풍습에 따라 아기를 낳기 위해서 친정인 데바다하(Devadaha, 天臂城)로 향하던 중, 두 도시 사이에 위치한 아름다운 룸비니(Lumbin ) 동산에 이르자, 꽃이 만발한 무수 아래서 아들을 낳았던 것입니다.

    왕자가 태어난 지 닷새 째 되던 날, 왕은 여덟 명의 현자를 청하여 아기의 이름을 짓고 또 왕자의 앞날을 점쳐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현자들은 왕자에게 '목적을 달성한 사람'이란 뜻으로 '싯닷타(Siddhattha)'란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합니다. 그 바라문들은 심사숙고한 후 일곱 명은 두 손가락을 펴 보이면서 말했습니다. "오! 왕이시여! 이 왕자가 왕위에 오르게 되면 전 세계의 통치자인 전륜성왕(轉輪聖王: Cakravarti)이 되어 온 세계를 다스릴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세속을 떠나 출가한다면 왕자님은 정등각자(正等覺者)가 되어 사람들을 무지에서 구해낼 것입니다." "오! 왕이시여! 이 왕자는 언젠가는 진리를 찾아 떠날 것입니다. 그래서 정등각자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어머니 마야부인은 석존을 낳은 지 이레만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래서 동생인 고따미(Mahapajapati Gotami, 大愛道瞿曇彌)가 양모가 되어 석존을 양육하였습니다.

    3. 붓다의 탄생지: 룸비니

    붓다의 탄생지는 룸비니(Lumbin )라고 전해지는데, 1896년 퓨러(A. Fuhrer)가 네팔 타라이 지방의 룸민디에서 발견한 아소까 왕의 석주(石柱)에는 ?여기에서 불타 석가모니가 탄생하였다?고 하는 뜻의 글이 새겨져 있어 석존 탄생지에 대한 초기성전의 기술이 역사적 사실임을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이곳은 현재 룸민데이(Rummindei)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이 룸비니 동산은 마야비(妃)의 친정인 석가 일족의 데바다하(천비성) 근처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왕비의 친정 어머니 이름을 따서 룸비니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곳은 온갖 아름다운 꽃과 수목, 과일이 열리는 나무가 울창하고, 연못과 늪과 흐르는 시내도 있고 맑은 샘물이 솟아나는 훌륭한 동산이었던 것 같습니다.

    서기 405년 이곳을 찾은 중국인 승려 법현(法顯)은 여기에 두 용왕이 태자에게 첫 목욕물을 끼얹어주었다는 유적이 그때도 우물과 연못으로 쓰이고 있었으며, 그 근처에 살고 있던 불교 승려들의 음료수로도 사용되었다고 기록했습니다. 또 633년 이 지방을 찾아간 현장(玄 )은 연못과 샘말고도 그 고장 사람들이 유하(油河)라고 부르는 아름다운 시냇물이 동남쪽으로 흐르고 있더라고 적었습니다. 해산한 뒤 마야비가 목욕한 강이라는 것입니다.

    현장의 보고에 의하면, 그곳에 무우왕(無憂王, 아소까왕을 가리킴)이 세운 큰 돌기둥[石柱]이 있고 그 꼭대기에 마상(馬像)이 새겨져 있었는데, 뒷날 벼락으로 돌기둥이 중간에서 꺾이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룸비니 동산의 유적은 오랫동안 정글에 묻혀서 잊혀진 채 겨우 그 고장 사람이 조그만 집을 짓고 지켜왔었습니다. 그러다가 1896년, 그 당시 인도 정부의 노력으로 퓨러(A. Fuhrer)라는 사람이 네팔에 들어가, 이른바 타라이 지방의 룸민디라는 마을이 룸비니의 고적임을 확인했습니다. 특히 아소까왕이 세운 돌기둥이 발견됨으로써 결정적으로 확인된 것입니다. 현장이 기록한 바와 같이 그 돌기둥의 위쪽은 꺾여진 채 없어지고 말았지만, 아랫부분은 그대로 있어 거기에 적힌 비문의 넉 줄 반의 글자는 온전히 남아 있습니다. 이 석주에는 93자로 된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 글에는 다음과 같이 씌어져 있습니다.

    "신들의 보호를 받는 덕 높은 왕(아소까)이 왕위에 오른지 20년 되는 해에 친히 이곳에 와서 공양을 올렸다. 여기서 붓다 사캬무니가 탄생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돌담을 만들고 돌기둥을 세우게 했다. 세존께서 여기서 탄생하신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룸비니 마을은 세금을 면제받고, 또 생산의 팔 분의 일만을 지불하게 된다."

    위의 석주에는 '석가족의 성자, 붓다, 여기서 탄생하셨도다.'(hida buddhe jate Sakyamuni)라는 대목이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기록에 의해 이곳이 룸비니 동산이었음이 분명히 밝혀진 것입니다. 이 거대한 석주는 지금도 볼 수 있습니다. 서기 7세기 중엽 중국의 구법승 현장 법사가 여기에 왔을 때는 석주는 이미 벼락으로 부러져 있었지만, '어제 깎은 듯 생생하다'고 했습니다.

    4. 탄생 연대

    붓다의 탄생 연도에 대해서는 아직 분명하게 밝혀진 것이 없습니다. 여러 가지 학설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남전과 북전에는 약 100년의 차이가 있습니다. 동남아시아 제국의 불교도들은 불멸(佛滅)을 기원전 544년(또는 543년)으로 보는 학설을 받아들이고 있는데, 이것은 세일론(스리랑카) 불교의 전설에 근거한 것이어서 의심의 여지가 있으며 학문적으로 무시되고 있습니다. 학문적 입장에서 볼 때 현재 학계에서 쓰이고 있는 붓다의 재세 연대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집니다.

    첫 번째는 서력 기원전 약 560-480년 설입니다. 이것은 주로 서양의 여러 학자들이 세일론의 사서(史書) 등의 자료를 검토하여 주장하는 학설입니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불멸 연대를 서력 기원전 489년(A. Bareau), 487년(V. A. Smith), 484년(H. Jacobi), 483년(W. Geiger 등), 482년(J. Fleer) 혹은 478년(J. Filliozat), 477년(F. Max Muler 등)으로 보는 등 여기에는 여러 가지 학설이 있습니다. 이들의 학설은 이른바 중성점기(衆聖點記; 많은 聖者들이 불멸 후 <律藏>에다 매년 점을 하나씩 찍어 온 기록)에 희한 486년 설(수정설은 485)과도 거의 일치합니다.

    두 번째는 서력 기원전 약 460-380년 설로서 일본의 우이하쿠주(宇井伯壽)와 나카무라 하지메(中村元)의 학설입니다. 우이(宇井)은 아소까 왕의 즉위 연대를 기원전 271년으로 추정하고 이 즉위가 불멸 후 116년에 거행되었다고 하는 북전(北傳)의 불교 전승에서 역산(逆算)하여 불멸을 서력 기원전 386년으로 산정하였습니다. 아소까 왕의 연대는 그 후의 연구에 의해 다소 수정되어 현재 나까무라 하지메(中村元)는 268년 즉위설을 취합니다. 따라서 붓다의 연대는 서력 기원전 463-383년으로 수정됩니다.

    이상의 두 가지 학설에는 약 100년의 차이가 있지만 고대 인도에 있어 역사 관념의 결여, 연대의 불명확성이라고 하는 사실을 생각할 때 100년의 차이밖에 나지 않는다는 것에 오히려 경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붓다의 탄생일을 4월 8일로 기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남방의 불교국에서는 베사카(Vesakha, Vaisakha, 인도력의 2월로서 태양력으로는 4-5월에 해당함) 월의 만월일(滿月日)을 붓다의 탄생·성도·열반일로 기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차이는 인도와 중국의 역법(曆法)이 서로 틀리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