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卍-불법을만나고/卍-불교자료실

불타(佛陀)와 불전(佛傳)-붓다의 젊은 시절

by 회심사 2017. 5. 2.


-붓다의 젊은 시절-
    1. 태자의 어린 시절

    태자가 탄생한 후 7일 만에 그의 생모(生母)였던 마야(Maya) 왕비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마야 왕비의 사망에 관한 여러 학설들이 있지만, 너무 미화시킨 것이라 믿기 어렵습니다. 마야 왕비가 일찍 사망한 원인은 아마 산후 몸조리를 잘못했기 때문일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왜냐하면 출산을 위해 친정인 데바다하(Devadaha, 天臂城)로 가던 중, 룸비니(Lumbini) 동산에서 태자를 낳았습니다. 야외에서 출산한 뒤 충분히 휴식을 취하지 못한 채 곧바로 이동하여 왕궁으로 되돌아왔기 때문일 것입니다. 한편 태자가 자라면서 어머니께서 일찍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것이고, 그러한 사실은 태자의 인격과 성격 형성에도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고 봅니다.

    그 후 태자는 그의 이모(姨母)인 마하빠자빠띠 고따미(Mahapajapati Gotami, 大愛道瞿曇彌)에 의해 양육되었다고 합니다. 그녀는 언니인 마야 왕비의 뒤를 이어 숫도다나(Suddhodana, 淨飯王)의 부인이 되었으며, 나중에 난다(Nanda, 難陀)라는 아들을 낳았다고 합니다. 그녀는 나중에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출가하여 붓다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역사적으로 비구니 교단(敎團)은 그녀의 출가로 인해 형성되었던 것입니다.

    붓다의 어린 시절과 청년 시절에 관해서는 자세한 기록들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다만 단편적인 기록들이 전해지고 있을 뿐입니다. 이러한 자료들에 의하여 붓다의 어린 시절을 종합 정리해 보면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 붓다는 어려서부터 감수성이 예민하여 뭇 생명에 대한 연민의 정을 느끼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실례로 어느 날 농부가 일구어 놓은 땅 속에서 벌레가 기어 나오자 새가 날아와 그 벌레를 물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것을 본 태자는 생물은 서로 해친다는 것을 통감했다고 합니다.

    둘째, 붓다는 천성적으로 명상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고 합니다. 태자가 어렸을 때부터 매우 명상(冥想)을 좋아하는 형의 소년이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들이 많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어느 날 석가족의 왕인 그의 아버지는 국가적인 행사인 농경제(農耕祭)에 참가했습니다. 이때 어린 왕자도 함께 데리고 가게 되었습니다. 농경제가 진행되는 동안 어린 왕자는 사람들이 있는 곳을 피해 나무 밑에서 좌선을 하여 초선(初禪)의 경지에 들었다고 합니다.

    <중아함경(中阿含經)> 제29권의 <유연경(柔軟經)>에 따르면, 붓다께서는 출가 전에 이미 초선(初禪)의 경지를 체험한 것으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경전의 내용을 읽어보겠습니다.

    "나는 또 옛날을 생각하면, 농부가 밭 위에서 쉬는 것을 보고 염부(閻浮)나무 그늘에 가서 가부를 맺고 앉아 욕심을 떠나고 악하고 선하지 않은 것을 떠나, 각(覺)이 있고 관(觀)이 있어, 욕계(欲界)의 악을 떠남에서 생기는 기쁨과 즐거움이 있어, 초선(初禪)을 얻어 성취하여 노닐었다."

    이 때가 농경제(農耕祭)에 참가했을 때인지 아니면 다른 때인지는 정확히 구분할 수는 없지만, 태자가 홀로 나무 밑 그늘진 곳에 앉아 명상에 잠기고 있었습니다. 시간이 쾌 지나간 모양이었습니다. 다른 나무들의 그늘은 해가 돌아감에 따라 모두 그 그림자 자리를 옮겨갔는데, 태자가 앉은 나무의 그늘만은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고 합니다. 인도의 오래된 조각(彫刻)들에는 그 광경이 그려져 있는데 이것은 시간도 태자의 명상을 깨뜨리지 못한다는 미래의 붓다의 위력을 잘 설명해 주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우리는 설사 이것이 후대의 추측인 첨가라 할지라도 충분히 사실에 가까운 일이 아니었을까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한편 후대에 성립한 <방광대장엄경(方廣大莊嚴經)>의 제4권에서는 앞에서 언급한 태자의 선정에 대해 보다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태자가 염부수(閻浮樹) 아래에서 사선(四禪)을 체험하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붓다께서 출가하여 성도(成道)를 향한 고행을 마치고, 과거 소년시절 체험했던 명상의 시간을 회상하여 그와 같은 방법으로 좌선하게 되는 것으로 연결됩니다.

    셋째, 붓다의 젊은 시절은 물질적으로 풍요로웠던 것 같습니다. 붓다께서 만년에 자신의 젊은 시절을 회상하여 제자들에게 들려준 이야기가 앞에서 인용했던 <중아함경> 제29권 유연경에 설해져 있습니다. 이 경전에 의하면, 자신을 위해 겨울·여름·봄 세 계절에 어울리는 세 가지 종류의 궁전(三時殿)이 지어졌다는 등 유복하고 호화로운 생활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내가 부왕(父王) 숫도다나(悅頭檀) 집에 있을 때에는 나를 위해 여러 가지 궁전, 곧 봄 궁전과 여름 궁전 및 겨울 궁전을 지었으니, 나를 잘 노닐게 하기 위해서였다. 궁전에서 멀지 않은 곳에 다시 푸른 연꽃 연못·붉은 연꽃 연못·빨간 연꽃 연못·흰 연꽃 연못 등 여러 가지 연꽃 연못을 만들고, 그 연꽃 가운데에는 온갖 물꽃, 곧 푸른 연꽃·붉은 연꽃·빨간 연꽃·흰 연꽃을 심어서 언제나 물이 있고 언제나 꽃이 있었으며, 사람을 시켜 수호하여 일체 통행하지 못하게 하였으니, 나를 잘 노닐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네 사람을 시켜 나를 목욕시키고는 붉은 전단향( 檀香)을 내 몸에 바르고 새 비단옷을 입혔으니, 위아래나 안팎이나 겉과 속이 다 새 것이었다. 그리고 밤낮으로 언제나 일산(日傘)을 내게 씌웠으니, 나로 하여금 밤에는 이슬에 젖지 않고 낮에는 볕에 그을지 않게 하기 때문이었다. ……

    내가 옛날의 아버지 숫도다나 집을 생각하면 여름 4개월 동안은 정전(正殿) 위에 올라가 있었는데, 남자는 없고 오직 기생만 있어서, 스스로 즐기면서 당초에 내려오지 않았다. 내가 동산으로 나가려고 할 때에는 삼십명의 제일 훌륭한 기병(騎兵)을 뽑아 의장(儀仗)이 앞뒤에서 시종하고 인도하게 하였으니, 그 나머지는 말할 것도 없었다. 나는 이런 여의족(如意足)이 있었으니, 이것이 가장 유연(柔軟)한 것이었다."

    팔리어로 씌어진 맛지마 니까야(Majjhima-nikaya, 中部)에도 동일한 내용이 기술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이 태자는 또래의 다른 아이들 보다 좋은 조건과 풍족한 환경 속에서 성장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넷째, 붓다는 세속적 삶에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일반적으로 보통 사람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을 즐기며 지내는 것이 상례(常例)입니다. 하지만 이 젊은 왕자는 온갖 안락과 사치를 누리며 예기(藝妓)들의 시중을 받는 궁궐생활에 오히려 싫증을 느꼈습니다. 그는 육체적인 쾌락이나 세속적 야망에 만족하기에는 감수성이 너무나 예민했던 것입니다. 초기 팔리어 사료들을 보면 그는 자신이 늙음과 병듦과 죽음의 슬픔을 겪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괴로워하며 환멸을 느끼는 존재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추한 노인을 보고 혐오감을 느끼지만, 어느 누구도 병의 고통이나 병자의 추잡스러움을 바라지 않지만, 병에 걸리는 것 역시 피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하고 죽기를 바라지 않지만, 그 누구에게도 죽음은 반드시 닥쳐옵니다. 젊은 날의 붓다는 이 생로병사(生老病死)의 두려움에 대해 골몰하고 있을 때, 젊음이 넘치는 그의 신체로부터 기쁨이 사라져 버렸다고 합니다.

    이러한 세속적 쾌락에 대한 혐오감과 인생이 단지 끝없는 고통이라는 생각은 이 젊은 왕자를 크게 자극했습니다. 결국 그는 가정생활을 포기하고 종교적 삶을 통해서 평화와 고요를 추구하고자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2. 태자의 교육

    태자는 당시 왕족의 교양으로서 필요한 모든 학문·기예(技藝)를 배웠으며, 비범한 재간을 발휘했다는 사실이 후대의 불전(佛傳)에 나옵니다. 물론 그것도 사실일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면 그 교육이란 어떠한 내용의 것을 어떻게 배우는 것이었을까?

    태자가 취학(就學)을 한 것은 일곱 때일 것입니다. 그것은 당시 인도의 습관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인도의 관습에 의하면 보통 브라만 계급의 사람들은 여덟 살부터 12년 동안, 크샤트리아 계급의 사람들은 열 한 살부터 12년 동안, 바이샤 계급의 사람들은 열두 살부터 12년 동안, 스승 밑에서 인도인이 가장 존중하는 고전(古典)인 <베다>를 배우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특히 학문에 뛰어난 재간이 있는 사람은 일곱 살부터 스승을 맞이하여 공부할 수 있게 되어 있었습니다.

    태자가 이와 같은 부류의 소년이었을 것은 의심할 바가 없습니다. 그리고 태자는 <베다>는 물론 <베다>의 보조학(補助學)도 학습하였다고 합니다. 불교의 경전에는 세 개의 <베다>와 자휘학(字彙學), 어원학(語源學), 사전(史傳), 문법학(文法學), 순세파학(順世派學), 대인상학(大人相學)으로 되어있고, 이것들에 통하는 것이 브라만으로서의 자격을 구비하는 것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또 한편 자이나교 측에서는 네 개의 <베다>와 사전(史傳), 문법학(文法學) 등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요컨대 당시의 수재들은 <베다>의 본문 암송(暗誦), 그것에 의한 문법, 어원(語源)에 관한 학문, 사전(史傳) 등을 중심으로 하여, 그 밖에 당시의 일반 과학지식을 습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기록들에는 인도 사상 중 가장 깊이 있는 내용을 가진 <우파니샤드>에 관한 이야기는 나와있지 않지만, 붓다 당시 <우파니샤드>의 사상은 이미 주지(周知)되어 온 사실이기 때문에 태자가 학습한 과목 중의 하나를 이루고 있었을 것은 명백합니다. 불교의 원시경전 중 가장 오래된 층의 것들 속에 우파니샤드적 표현이 많은 것은 석존의 태자 시대의 <우파니샤드>에 대한 교양을 말하고 있음을 의심할 바가 없습니다.

    또한 태자가 크샤트리야족 출신이었기 때문에, 문(文)의 면만이 아니라, 무(武)의 면도 같이 연수를 게을리 하지 않았을 것은 두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는 무사계급(武士階級)인 크샤트리야족 출신으로서 필요한 무술(武術)을 배우고 닦았을 것은 틀림없습니다. 후대의 불전에는 태자가 특히 궁술(弓術)에 뛰어나 있었다고 했고, 그가 야소다라비(妃)와 혼인하게 되었던 것도 그가 궁중에서 열린 무술대회에서 발군(拔群)의 성적을 올린 까닭이었다고 하고 있습니다.

    태자는 인도의 언어와 고전 문학 등의 일반적인 학습만을 한 것이 아니라 도보경주, 원반 던지기와 창 던지기 등의 육체적인 단련도 했다고 합니다. 또한 귀족에게 필수적인 네 가지 기예, 즉 말타기, 코끼리 타기, 전차 몰기 그리고 군대의 배치법을 배웠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전기나 당시의 정황으로 미루어 보아 태자는 왕족으로서의 교양을 쌓는데 필요한 온갖 학문과 기예를 습득했고, 비범한 재능을 발휘했다는 것은 신빙성이 있습니다.

    3. 태자의 결혼

    태자가 결혼을 한 것은 사실이었을 것으로 믿어집니다. 그리고 그 태자비(太子妃)가 라훌라(Rahula, 羅候羅)란 아들을 난 것도 사실일 것입니다. 모든 불전(佛傳)이 다 그것을 전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혼의 시기는 16세, 17세, 19세 20 등 여러 가지 설이 있습니다. 남방의 전승에 따르면 16세에 결혼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현재는 16세에 결혼한 것을 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태자비의 이름은 남방성전(南方聖典)에는 거의 전해지지 않고 있으나, 북방성전(北方聖典)에는 여러 가지 이름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남방의 전승에서는 라훌라마따(Rahulamata, '라훌라의 어머니'의 뜻)라든가 밧다깟짜(Bhaddhakacca) 혹은 밧다깟짜나(Bhaddhakaccana, 跋陀迦旃延)로 불려지고 있지만 북방의 전승에서는 범어로 야소다라(Yasodhara, 耶輸陀羅, '영예를 지닌 여성'의 뜻)란 이름이 잘 알려져 있습니다. 뒷날 팔리어 성전의 주석서에서도 '야소다라'라는 이름이 나옵니다. 그러나 어떤 전승에 따라서는 또 다른 이름도 정하고 있어 동일인인지 아닌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남방의 팔리어 전기(傳記)에서는 다만 '라훌라의 어머니'(羅候羅母)라고만 불려지고 있는데, 이런 호칭은 우리나라에서도 통용되는 호칭법으로 옛날 인도에서는 그렇게 부르는 일이 흔했던 것 같습니다. 붓다의 제자나, 신자들 중에도 아들 이름을 붙여 그 어머니를 호칭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북방의 성전에서는 태자의 비를 야소다라(耶輸陀羅)라고 부르고 있는 경우가 제일 많습니다. 그런데 이 야소다라에 관한 이야기는 붓다께서 성도한 뒤 옛 왕성(王城)을 방문했을 때, 출영(出迎)한 것과 그 후에 이모 마하빠자빠띠 고따미와 더불어 열심히 출가를 원해서 허락을 받고 니승(尼僧)이 되었다는 두 가지 사실밖에는 기록된 것이 없습니다. 그 후에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습니다.

    붓다의 젊은 시절은 한마디로 말해서 인생의 지식을 폭넓게 습득하면서 끊임없이 자신을 반성하고 삶의 문제를 통찰하는 생활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결혼 이후에도 그러한 자세를 잃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이후 얻게 된 그의 깨달음은 그의 단순한 천재성이나 직관력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어린 시절부터 청년 시절까지 지속된 내성적 성숙과 노력의 결과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