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卍-불법을만나고/卍-법문의도량

어떻게 살다가 어떤 모습 남기려나

by 회심사 2017. 8. 1.

    "두 개가 서로 의지하여 비로소 사람 인자를 이루네. 입속에는 날카로운 이빨과 부드러운 침이 있어서 백가지 잡된 것을 모조리 부수어 먹고 한 구멍으로 황금을 배출함이로다." 어느 누가 "인생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쉽게 대답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확실히 인생을 알려면 부처님처럼 6년 고행, 참선을 통해서 자각(自覺)해야만 합니다. 역대 성인이나 조사스님께서도 인생을 알기 위해 생명을 걸고 노력한 결과 깨달은 뒤에야 확실히 알았던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12인연법을 깨달았고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의 인연이 모여 하나의 육신을 이루었는데 이 육신을 받쳐주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사람이라고 합니다. 사람과 짐승이 다른 것은 지혜가 있고 없음에 있습니다. 사람이 짐승보다 좀 높은 차원에 있지만 본성을 깨닫지 못하여 어리석고 어둡기 때문에 중생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중생은 무엇 때문에 사는지를 물으면 왜 사는지를 잘 모르고 대답을 하지 못합니다. 승가의 출가자도 자각하고 개선해야 할 점이 너무 많습니다. 속가의 신도들은 욕망을 이루기 위해 부처님께 요구하는 기복적인 신행이 너무 많고 승단의 출가자들은 부귀와 공명을 헌신짝처럼 버려라 했거늘 재물과 권력 명예에 치중함이 농후합니다. 이 산승은 어려서 출가하여 대처-비구 정화당시에 일부 참여했지만 정화의 이념은 도태되고 말았습니다. 눈을 다시 뜨고 뼈를 깎는 마음으로 자신을 정화해야 합니다. 중생은 살기 위해 살지만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어떠한 모양을 보여주고 가느냐가 중요합니다. 사찰성지에 하루 수십만 관람객이 들어와도 제대로 포교하나 하지 않고 그냥 지나갑니다. 너무 아쉽습니다. 종단 내분과 갈등이 끝이 없으니 언제 적나라(赤裸裸)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 오련 지 아득함을 느낍니다. 부처님과 역대 조사께서는 우리에게 어떠한 삶의 모습을 보여주셨는가? 부처님께서는 우리 인생을 알기 위해 육년 고행 끝에 깨달으시고 최초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기이하다. 일체중생이 부처님과 똑같은 지혜의 덕상을 갖추고 있건만 다만 망상에 집착해서 능히 깨달아 증득하지 못했을 뿐이다.” 부처님께서는 또 인생은 색수상행식의 인연에 의한 존재라고 설파하셨습니다. 화엄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나라는 것도 없고 중생도 없고 죽는 것도 또한 없나니 만일 이렇게 그 모양을 알면 그는 곧 위없는 사람이 되리. 지혜의 광명으로 모든 마음 다 비추고 두려움 다 없애고 깊은 법 연설하네. 시방(十方)의 한량없는 일체 중생들 모든 바른 법의 문(門)에서 모두 편안히 머물게 하네.” 부처님께서는 이와 같은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도 모든 옷을 훌훌 벗어 버리고 새로운 참모습을 보여 주어야 되겠습니다. 속담에 어른이 입맛을 다시면 아이들이 자꾸 무엇을 먹느냐고 물어서 아이들 보는 데서는 입맛 다시기조차 어렵다고 했습니다. 참으로 일리 있는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요새는 세상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물질이 풍요해짐에 따라 모든 사람들의 의식 또한 전보다 많이 해박해진 것입니다. 산승 역시 선방 좌복을 지키고 있을 때는 세상이 바로 가는 건지 모로 가는 건지 전혀 알 수 없습니다. 혼자 화두 선정삼매(禪定三昧)에 몰입 안주하면 정말 편안합니다. 그러나 십자거리에 나와 많은 사람을 만나고 대담을 해보면 정말 생각도 못해본 희귀한 일도 많고 형형색색으로 각자 다른 많은 모양을 보게 되는데, 개중에는 가슴이 아프고 눈물이 쏟아질 때도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잠잘 때 꿈을 꾸면서도 그것이 꿈인 줄 모르고 계속 꿈속에서 여러 가지 고통을 겪습니다. 그러나 꿈 인줄을 바로 알면 잠에서 즉시 깨어나게 될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꿈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연속된 고통을 받고 살아가는 반면에 개중에는 제법 부처님 말씀과 조사스님의 공안을 흉내 내는 사람도 있습니다. 오히려 웬만한 스님보다도 부처님 말씀을 더 많이 알고 있고 또 주먹을 들고 할(喝)을 하는 등 여러 가지로 흉내를 내는 분도 많이 보아왔습니다. 산승이 “망상이라고도 하지 말고, 진아(眞我)라고도 말고, 말이 끊어지고 마음 길이 없어진 곳에 이르러 어떠한 것이 그대의 본래 얼굴인가” 하고 물으면 할을 하고 주먹을 들어 보이거나, “하늘은 높고 땅은 두텁다”라는 등 여러 가지 답변을 합니다. 이럴 때 산승은 “꿈에도 보지 못했다”라고 꾸짖어 경책(警策)합니다. 이것은 다 고인(古人)이 입맛 다신 것을 흉내 내는 짓거리이며 그림자를 따먹는 것에 불과합니다. 부처님과 조사가 입맛을 다신 그 의지를 바로 본다면 그렇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때 산승이 경책하면 수긍하고 감사의 뜻을 표하고 다시 공부해야겠다고 결심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공부에 인연이 있는 사람입니다. 반면, 듣지 않고 자기 뜻대로 고집을 피우는 사람들도 있는데 안타까울 뿐입니다. 이 산승도 공연히 법문이라고 신문에 내는 것이 도리어 큰 누를 끼치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입맛을 다신 곳에 공연히 시비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서입니다. 그래서 입맛을 다시기가 어렵습니다. 오랫동안 선방에서 공부하거나 염불, 독경, 주력 등 여러 가지 나름대로 수행하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 마음을 훌륭하게 쓰는 사람은 드문 형편입니다. 오랫동안 공부를 해도 실제로 옹졸한 마음을 쓴다면 이 얼마나 비생산적입니까. 그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묵은 과일보다 새로 나온 과일이 더 신선한 것처럼 잘못된 것은 과감히 청산하고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본래 청정한 마음이니 가히 닦아서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다만 본래 청정한 마음을 밖으로 잘 쓰면 이것이 본래의 참 부처(本來淸淨心 不可而修證 但用善此心 卽是 如來佛)”이라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마음을 바로 보면 마음의 속성을 알게 됩니다. 바로 깨달아 증득하면 다시는 속지 않는 사람이 되며 마치 공을 굴리는 사람처럼 하며 맹수를 잘 다루는 조련사처럼 살아갈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이 세상을 유지해가고 마음이 세상을 이끌고 있습니다. 그 마음이 한 법이 되어 세상을 능히 제어합니다. 맑은 바람이 언제 아름답고 추한 것을 가려서 불어주던가요. 밝은 달이 언제 선악을 가려서 비추어 주던가요. 맑은 물 역시 그러합니다. 깨끗해 티가 없고 탈속한 사람은 꾸미지 않아도 훤칠하게 드러납니다. 밖으로 마음 쓰는 것이 마치 청풍명월(淸風明月)과 같이 차별 없이 하늘과 땅을 덮습니다. 이렇게 해야 현실적으로 생산적이고 살아있는 대용(大用)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너무 많이 입맛을 다신 것 같습니다. 오히려 산중에서 지게 목발 두드리며 노래하는 나무꾼과 시장 십자거리에서 엿가락 치며 가위 들고 춤추는 엿장수가 더 멋집니다. 누가 나에게 불법의 큰 뜻을 묻는다면 산승은 "오색구름이 상서롭다"고 답하겠습니다. "어떠한 것이 산봉우리와 십자거리의 소식인고." 라고 묻는 다면 "앞을 봐도 색이 없고 뒤를 봐도 뿌리가 없으며 산봉우리의 청풍(淸風)이 바다와 연해 있다"고 할 것입니다. -대원스님(학림사 오등선원 조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