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卍-불법을만나고/卍-법문의도량

일체 모든 존재는 무상하다

by 회심사 2017. 8. 1.

    까마득하게 느껴지던 무더위도 물러가고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계절입니다. 이렇게 뜨거운 태양의 열기가 식어지고 결실의 가을을 만날 수 있는 것은 바로 자연 질서의 무상(無常)함 때문입니다. 우주의 모든 존재는 인간의 감각으로 볼 때 정지해 있거나 영원해 보이지만 그것들은 끊임없이 움직이고 변화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삼라만상의 변화와 흐름을 불교에서는 무상이라고 합니다. 그 어떤 존재도 이 무상의 진리로부터 벗어나 있지 않기 때문에 제행무상(諸行無常) 또는 일체무상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모든 존재의 특성을 설명하는 삼법인(三法印)의 첫 번째 가르침입니다. 증일 아함경에서는 "비구여, 아주 작은 색(色)이라도 상주(常住)하고 항존(恒存)하고 변화하는 일이 없는 것, 영원히 정말로 존재하는 그런 것은 없다."라고 설하고 있습니다. 영원히 존재하거나 변화하지 않는 사물이란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 제법의 실상이라는 것입니다. 현대의 자연과학에서도 모든 존재는 변화하고 운동하는 것이며 정지는 상대적인 것이라고 합니다. 작게는 전자의 운동에서 크게는 우주의 팽창에 이르기까지 무상은 전체 우주를 관통하는 진리라는 것은 과학적 연구에서도 증명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무상(無常)이란 곧 모든 존재의 실상을 올바르게 직관한 통찰로써 존재의 운동성, 존재의 속성을 설명하는 진리입니다. 따라서 이 같은 존재의 본질을 올바르게 꿰뚫어 보는 것이 바로 정견(正見)이며 바른 안목(眼目)입니다. 잡아함경은 인간의 눈·귀·코·혀·몸·의식이라는 여섯 가지 감각기관과 그 대상이 되는 빛·소리·향기·맛·촉감· 법이라는 여섯 가지 감각의 대상이 모두 무상하다고 설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여섯 가지 감각기관에 근거한 주관과 그 주관에 의해 인식되는 객관의 세계가 모두 무상하다는 것입니다. {금강경} 역시 "일체의 모든 유위법(有爲法)은 마치 꿈·환영·물거품·그림자와 같고 풀잎에 맺힌 이슬과 같으며 번개와 같으니 마땅히 이와 같이 꿰뚫어 보라"고 설합니다.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육근(六根)과 육경(六境)은 일체 모든 존재를 의미함으로 결국 {금강경}의 문학적 수사와 아함의 일체 무상설은 동일한 내용입니다. 이렇게 일체의 모든 존재가 무상함을 꿰뚫어보아야 하는 이유에 대해 부처님은 "나의 가르침을 들은 성스러운 제자들은 눈에 대해 그것을 염리(厭離)하며 탐욕에서 떠난다. 탐욕을 떠나면 해탈한다."라고 설하고 있습니다. 인간존재를 구성하는 다섯 가지 요소인 오온(五蘊)이 모두 무상하며 인간의 여섯 가지 감각기관과 그 감각기관으로 인식되는 여섯 가지 대상이 무상하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자신의 감각을 구성하는 물질이 무상함으로 자신의 감각적 성향이 영원하다고 고집할 수 없으며, 무상한 감각에 근거한 자신의 인식이나 가치관이 영원하다고 고집할 수도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욕망의 대상이 영원하지도 않으며 자신이 그 대상을 언제까지나 좋아하리라는 보장도 없습니다. 그것들은 모두 풀잎에 맺힌 이슬과 같고 번개처럼 사라져버리는 허망한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그 무상한 존재를 영원한 실체로 바라보고 집착하지만 부처님은 무상의 가르침을 통해 그 집착을 내려놓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상한 존재를 영원하고 고정된 실체로 고집하는 데에서 집착과 고통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무상을 올바로 체득하게 되면 욕망의 대상에 대한 애착을 버리게 되어 탐욕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탐욕에서 벗어날 때 그것이 곧 바로 영원한 자유이며 해탈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부처님께서 무상을 설하고 무상을 철저히 자각하라고 하신 것은 사물의 속성에 대한 철학적 통찰이나 과학적 사실에 대한 진실뿐만이 아니라 집착으로 고통 받는 인간의 정신적 해탈을 위해 설하신 마음가짐에 대한 가르침임을 알 수 있습니다. 흔히 무상하면 젊음이 늙어가고 낙엽이 떨어지는 경우와 같이 부정적인 세계관으로만 이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무상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세상은 무상하기 때문에 아기가 성장하여 어른이 되며 무상하기 때문에 씨앗이 변화하여 알곡으로 영글게 되며 무상하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이 노력해서 부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무상은 꼭 탄생에서 죽음으로 가는 것만이 아니라 모든 사물의 변화와 운동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무상하기 때문에 중생은 영원히 중생의 모습에 머물지 않고 해탈하여 열반의 세계로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서재영의 불교 강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