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보리심,
보리심이란 한마디로 부처님의 지혜인 무상정등정각을 이루고자 하는 마음이다. 무상정등정각이란 범어 아뇩다라 삼먁삼보리의 한역어로, 위없는 평등한 바른 깨달음이라는 말로 부처님의 지혜를 일컫는다. 즉, 부처가 되겠다는 서원을 세우는 것이 발보리심이다. 보리심에 의해 수행이 시작되므로 보리심을 부처의 어머니라고 한다. 따라서 불자 된 자는 마땅히 세속적 욕망과 쾌락의 노예가 되지 말고 불법승 삼보를 진리로 확신하고 거기에 의지하여 자신의 삶을 중생에서 부처로, 범부에서 성인으로 바꾸고자 하는 서원을 세워야 할 것이니 이것이 바로 발보리심이다. 보리심이란 수행을 해서 무엇을 할 것인지가 결정되는 근거이며, 증득할 수 있는 경지가 미리 정해지는 중대한 문제이다. 왜냐하면 산에 오를 때 정상까지 가야겠다는 목적의식이 분명해야 정상까지 갈 수 있다. 만일 그런 목적의식이 없다면 중턱이나 얕은 봉오리에 올라가서 아래를 내려다보고는 그 경취에 반해서 그만 거기에 머무르고 말 것이다. 신통을 얻기 위해, 병을 낳기 위해, 편안함을 얻기 위해 등의 목적을 가지고 수행하면 나름대로의 목적은 성취할 수 있어도 무상정등정각을 이루신 부처의 자리에 나아갈 수는 없다. 따라서 불자들은 수행의 첫 관문에서부터 수행의 목표를 분명히 세워야 한다. 무엇이 바른 원(願)인가. 중생을 다 건지오리다. 번뇌를 다 끊으오리다. 법문을 다 배우오리다. 불도를 다 이루오리다. 이것은 모든 수행자가 서원하여 부처를 이루는 본원인 사홍서원이다. 불교 수행의 목적은 바로 이 사홍서원에 있다. 즉 보리심은 자신만을 위한 깨달음이 아니라 일체중생을 함께 성불케 하고 함께 안락케 하는 마음이다. 나아가 원효스님은 <대승기신론별기>에서 직심, 신심, 대비심의 세 가지 마음을 갖춘 발심을 모상보리심이라고 하였다. 직심이라고 한 것은 굽지 않았다는 뜻이다. 만약 진여를 생각하면 곧 마음이 평등하게 되어 다시 다른 갈래가 없을 것이니 무슨 일그러지고 굽음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진여법을 생각하기 때문'이라 말하였으니, 이는 곧 자리와 이타의 근본인 것이다. 심심이라고 한 것은 근원을 궁구한다는 뜻이다. 만약 하나의 선이라도 갖추어지지 않으면 근원에 돌아갈 수 없는 것이니, 근원에 돌아가는 것이 이루어지려면 반드시 만행을 갖추어야 한다. 따라서 '일체의 모든 선행을 즐겨 이루기 때문'이라고 말한 것이며, 이는 곧 자리행의 근본이다. 대비심이란 널리 제도한다는 뜻이니 '중생의 고통을 덜어 주고자 하기 때문'이라 말하였으며, 이는 곧 이타행의 근본이다. 이 세 가지 마음을 내면 어떤 악이든 여의지 않음이 없고 어떤 선이든 닦지 않음이 없으며 한 중생도 제도되지 않는 것이 없으니, 이를 無上菩提心이라고 한다. 곧은 마음이란 진여를 생각하는 것이니 왜 진여를 생각하면 마음이 평등해질까? 진여란 만물의 참모습으로 그 모습에는 나와 네가 없고, 못났다거나 잘났다거나, 더럽다거나 깨끗하다거나, 추하다거나 아름답다거나 하는 일체의 분별이 없다. 따라서 사물이 현상적으로는 각기 다른 모습을 하고 있지만 본래는 모두 진여의 법성 그 자체임을 생각하면 차별심이 없어지고 따라서 분별과 대립이 사라지며 자리와 이타가 하나임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또한 이것을 알게 되면 아무리 사소한 선행이라도 즐겨 닦고자 하며, 중생의 고통을 덜어 주고자 하는 자리이타의 행이 저절로 나온다. 이러한 서원이라야 모든 중생을 다 건질 수 있는 무상보리를 얻을 수 있으므로 무상보리심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자는 처음 발심할 때 이러한 마음을 뚜렷하게 세우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러한 서원을 세우고 수행을 하면 이것이 바로 원력에 의지한 삶이다. 세속의 사람들은 욕망에 의해 산다. 욕망에 기초하여 여러 가지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며 산다. 그러나 욕망에 기초한 모든 것은 그 과정에 있어나 결과에 있어서나 모두 괴롭다. 이루지 못할 때는 이루지 못해서 괴롭고 이룬 뒤에는 그것을 지키기 위해 괴롭다. 그러나 원력에 의한 삶은 그 결과가 즐거운 것은 물론이거니와 과정이 또한 즐겁다. 만일 처음과 중간과 끝이 모두 즐거운 것이 아니라면 바른 수행이라 할 수 없다. 흔히 수행하면 고행을 떠올릴지 모른다. 그러나 수행은 성불이라는 궁극에 가기 전에도 첫 마음을 낸 순간부터 이내 즐거움을 준다. 물론 수행 중에 장애도 있고 고통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끝없이 반복되는 세속의 고통과 다르다. 수행 중의 고통은 고통을 마감하기 위한 고통이므로 끝이 있는 고통이다. 즉 앞으로 나아감을 위한 과정이므로 은근한 인내를 가지고 극복해 나가다보면 모든 고통의 본질을 꿰뚫고 그 자리에서 지혜를 싹틔운다. 따라서 수행자는 마음이 편안하고 타인에 대한 이해와 사랑이 깊어진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속에 탐 진 치가 독이 힘을 발휘하지 못하도록 잘 조복 받는다. 또한 경계에 부치더라도 두려워하거나 괴로워하지 않고 이를 수행의 재료삼아 더욱 정진한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깨달음을 이룬 후 뿐만 아니라 발보심을 낸 바로 그 순간 이미 안락을 얻는다. 발심과 마지막은 차별이 없지만 이런 두 마음에 앞 마음이 어렵네. 자기 제도는 못했으나 먼저 남을 건지나니 그러므로 초발심에 나는 경례하노라. <무량수경종요> 초발심의 마음과 깨달은 후의 마음이 둘이 아니기 때문에 앞 마음과 뒷 마음은 차별이 없다. 그러나 초발심이 없었던들 어떻게 부처가 있을 수 있겠는가. 이렇듯 초발심이 중요하다. 계율수행에 있어서도 보리심을 버리지 않으면 비록 계를 어겼다고 하더라도 잃은 것은 아니라 하였고, 염불수행에 있어서도 정토에 왕생하기 위해서는 보리심이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렇듯 보리심은 모든 수행의 근본이자 성불과 왕생극락의 씨앗이며, 공덕장이다. 어떻게 발보리심 하는가, 보리심은 어떻게 해서 생기는 것일까. 이것은 결코 외부에서 강제로 주입시킬 수 없는 내면의 의지임이 분명한데, 보리심을 발하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세상의 고통을 볼 수 있는 지혜와 그것을 아파할 수 있는 자비심에서 비롯된다. 세상이 지극히 안락하고 아무런 근심 걱정도 없다면 가슴 아플 일도 없고 따라서 수행해서 부처가 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옛날에 석가모니 부처님이 수행자 시절에 연등부처님으로부터 수기를 받으실 때에도 "이 땅에는 고통 받는 중생이 너무나 많으니 내 부처되어 마지막 한 생명까지 건지오리다."는 서원을 세웠다. 이 외에도 모든 부처님과 보살님이 자비심을 바탕으로 본원과 별원을 세우고 이를 성취하여 중생을 제도하니 자비심으로 말미암아 보리심이 일어남을 알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범부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먼저 여실히 알아야 한다. 먼저 경전에서 범부의 삶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살펴보자. 저 중생들은 어리석어 미혹해 있는 까닭에 온갖 여색에 취함이 백의가 물들기 쉬운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들이 애욕에 빠짐은 구더기가 똥을 좋아하는 것 같고, 죄인이 갖가지 구속을 받게 되는 것 같고, 소경이 장님을 이끌어 함께 깊은 구덩이에 떨어지는 것과 같아서, 선근을 해치며, 온갖 법보를 손상하며, 계향을 제거하며 혜명을 요절케 만든다. 중생들은 어리석은 까닭에 애욕의 맹인이 되고 애욕의 고용인, 애욕의 迷人, 애욕의 종이 되고 있는 것이다 <화엄경> 세상 사람들은 이 극악 극고한 속에서 자신의 가업에 힘써 살아가고 있는 터이므로, 귀천. 빈부. 소장의 남녀들이 한결같이 걱정하고 있는 것은 재물이어서 누구나 이것에 생각을 거듭함으로써 마음에 부림당해 잠시도 편히 쉴 때가 없으니, 밭이 있기에 밭 걱정, 집이 있기에 집 걱정, 우마 따위의 육축과 노비. 錢財. 衣食. 什物 (세간. 가구)도 걱정거리 아님이 없는 것이다. 귀인이나 부호라 할지라도 이런 근심은 있게 마련이어서, 그것이 마음에 맺혀 뜻대로 살지 못한다. 또 빈궁해서 못난 사람들은 늘 가난에 쪼들린 나머지 밭이 없으면 밭이 있었으면 하고 걱정, 집이 없으면 집이 있었으며 하고 걱정, 우마 따위의 육축과 노비. 錢財. 衣食. 什物(세간. 가구)이 없으면 그것들이 있었으면 하고 걱정하는 바, 마침 하나가 있으면 다른 하나가 결여하고,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결여하여, 이같이 아등바등하면서 쉴 때가 없게 마련이다. 이렇게 살아가므로 도를 통달하지 못하고 진노에 빠져들어 재. 색을 탐하고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고취에 들어가 그 속을 휘돌아서 수천억겁이 지나도 벗어날 때가 없는 것이니, 정말 딱한 일이다. 이제 너희들에게 이르노니, 세상 일 중 좋은 것을 택해 부지런히 이를 실천하도록 하라. 애욕이나 영화는 영구히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언젠가는 떠나게 되어 있다. 이 세상에는 정말로 즐길만한 것이란 없나니, 부처님이 계실 때를 놓치지 말고 마땅히 정진하여 극락세계에 태어나도록 원해야 할 것이다.<대아미타경> 애욕과 부귀의 노예가 되어 허덕이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 예나 지금이나 한 치도 다름이 없다. 어리석음과 욕망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쾌락을 향해 달리고 있으나 결국은 괴로움을 향해 가고 있으니 지혜로운 이가 이것을 보면 부나비가 불을 찾아 뛰어 드는 것 같이, 구더기가 똥구덩이를 향해 가는 것 같이 안타까운 일일 수 밖에 없다. 욕심에 근거하여 세운 목표는 모두 고통을 동반한다. 있으면 있어서 괴롭고 없으면 없어서 괴로우니 왜 그런가. 구할 때는 얻지 못하여 괴롭다. 이루고 나면 다시 그것을 잃어버릴까 염려한다. 그러다가 그것을 잃어버리면 다시 더 큰 괴로움을 얻게 된다. 무언가를 이루었을 때 큰 기쁨을 얻지만 그 기쁨도 오래가지 못한다. 또 다시 부족한 무언가를 찾아내고 말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은 너나없이 이러한 욕망에 의해 아등바등하며 살고 있으나 결코 어느 것도 안전하게 영원히 유지되는 것은 없다. 부귀와 명예, 사랑하는 이 등 모든 것은 불안정한 존재로서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것을 붙들고 있으니 결국 괴로움을 향해 달려가고 있을 뿐이다. 이렇게 알아야 이러한 삶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발심을 하게 된다. 따라서 자신도 이롭고 남도 이로운 삶이 어떤 것인지를 찾게 된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모든 생겨난 것은 반드시 멸한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고 집착함으로써 고통을 당한다. 그러면서도 고통의 원인이 욕망과 집착 때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더욱 곤란한 것은 고통 그 자체를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데 있다. 사람들은 세속의 가치에 깊이 물들어 있으면서 그것에 대해 의심하려들지 않는다. 그러나 어럽풋이 나마 자신의 삶에 대해 성찰해 본 사람은 그런 삶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를 알게 된다. 이러한 성찰이 보리심을 내게 해준다. 지금의 행복이 영원하지 않으며, 매우 불안정한 것이어서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것들이라는 것을 아는 것에서 문제의식이 싹튼다. 그리고 자기 자신이 이러한 세속적 가치에 매우 깊이 물들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무수한 인간관계 속에서 집착으로 인한 애증(愛憎)으로 얼마나 얽매어 있는지 않다. 그러나 이런 사실을 알았다 해도 그것이 원래 그런 것이고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라면 수행을 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부처님은 인간의 모든 속박으로부터 벗어났으며, 그 길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계시고 지금 그것을 위해 앞서가고 있는 사람들이 있음을 안다면 수행할 마음이 생길 것이다. 따라서 삼보에 대한 신심이 강할수록 수행도 힘 있게 해 나갈 수 있다. 따라서 보리심은 신심과 깊은 관계가 있다. 왜냐하면 보리심이 있느냐 없느냐는 곧 신심이 있느냐 없느냐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신심이 있다면 곧 보리심을 발할 것이요 보리심을 발했다면 신심이 깊을 수 밖에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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