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사상의 이해
선(禪)은 마음을 통하여 잡념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며, 진정한 참 모습으로 돌아가는 실천과정이다. 선(禪)은 불가(佛家)의 고매한 수행방법 중의 하나이다. 석가모니께서 보리수 아래에서 대각(大覺)을 이루신 것도 선이 주종이었고, 영산회상에서 《법화경》법문을 듣던 마하가섭이 연꽃을 드신 부처님께 미소를 보인 것도 선의 공안(公案)이다. 선은 산스크리트 '드야나(dhyana-禪那)'를 음역한 것이다. 이는 정려(精慮), 즉 고요히 생각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불교를 종교적으로 존재케 하는 궁극적 수행방법인 선사상이 하나의 종파로 형성이 된 것은 중국에서의 일이다. 선이 한 종파로 굳어지고 동양의 삼국을 풍미하게 된 것은 중국으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선종이 어떠한 역사적 배경 속에서, 어떠한 교리와 체계를 지니고 있으며, 이것이 우리의 생활 속에서 어떤 방법으로 실천되고 있는가를 함께 알아보도록 한다. 선 사상(禪思想) 일반적으로 알려진 선(禪)이란 말은 고대 인도의 사유 명상법인 요가에서 비롯된 것인데, 붓다의 깊은 사유와 정각을 통해 불교의 실천 수행인 선정(禪定)으로 체계화된 말이다. 요가의 기원은 기원전 3000년 경 인더스강 유역을 중심으로 발전된 고대 인더스 문명의 유적에서 발견된 요가 수행자의 모습이 새겨진 인장(印章)이나 성자의 흉상 등의 발굴로 입증된 것처럼 기원전 1500년 경 아리아인들이 인도를 침입하기 이전에 이미 고대 인도의 원주민들에 의해 실행된 요가 명상의 사유의 문화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요가는 약 5000년 내지 그 이상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요가란 각자의 산란한 마음을 안정시키고 정신을 통일시키는 수행방법을 말한다. 요가(yoga)란 말은 ‘연결시키다’라는 의미로서 yji(연결하다)라는 어근에서 만들어진 말이다. 그런데 이러한 요가라는 말이 사유 하다, 명상하다라는 의미로 문헌상에 최초로 기록되고 있는 곳은 기원전 6세기경에 성립된 <카타우파니샤드>이다. 여기서는 ‘명상사유를 통하여 다섯 가지 감각을 제어하고, 산란된 마음을 정지시키는 것이며, 이와 같이 모든 감각기관이 정지되어 움직이지 않고 잘 유지해 가는 것을 요가라고 한다’고 요가의 정의를 내리고 있다. 선(禪)이라는 말은 인도 원어를 한어로 음사한 것이므로 한자 자체에는 본래의 의미가 없다. 한자의 선에는 耀)땅을 깨끗하게 하여 천지의 신을 제지낸다, 하늘을 제지낸다, 산천을 제지낸다, 考)토지를 개척한다, 耆)천위(天位)를 양도해 준다, ?)조용함 등의 의미가 있다. 이 의미들 가운데 인도 원어에 해당하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면 조용함 뿐일 것이다. 그러나 중국선의 역사를 살펴보면 선의 형태에 약간의 변화가 생기게 된다. 중국선에는 한 스승에서 한 제자에게로 직접 불법(佛法)을 전수하는 ‘사자상전(師資相傳)’의 수수(授受) 형태가 보여지는데 이것은 인도불교에서는 볼 수 없던 것이다. 선이란 원래 범어의 dhyana, 팔리어의 jhana의 음사이다. 원어는 마음을 통일하는 것, 마음을 특정한 것에 집중하는 것을 의미한다. 의역해서 정려(靜慮), 의미를 첨가해서 선정(禪定)이라고도 한다. 이것은 유가(瑜伽; 요가), 삼매(三昧) 등과 함께 고래로 인도에서 중시된 명상의 실천을 나타내는 말의 하나이다. 중국선의 전개 중국에서의 선의 역사도 이와 같은 선의 본질적 성격을 고려하면 불교가 처음 전래함과 동시에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후한대의 안세고나 지루 가참이 번역한 초기의 소승, 대승의 여러 경전 가운데는 직접 선 내지는 삼매의 실천을 선양한 곳이 몇 군데 보인다. 이러한 점들에 비추어 볼 때, 선은 불교가 처음 전래된 이후에 곧 중국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었으며, 그 가운데 특히 선의 실천에 열심인 불교인 즉 선자(禪者)가 점차 생겨났을 것이다. 그런데 중국에는 불교가 전래하기 이전부터 선과 유사한 종교적 실천방법이 있었다. 예를 들면 <장자>에서 설한 진인(眞人)의 호흡법이나 이것에 영향을 받아 후에 태식법(胎息法)으로서 완성된 신선방술의 호흡법이 그것인데 그러한 실천을 통해서 얻어진 경지의 표현도 불교의 선의 경지의 그것과 대응하는 면이 적지 않다. 그러므로 중국선이 노장사상이나 신선도와 종종 교섭하면서 전개되어가는 것은 오히려 필연적이라고 할 수 있다. 여러 가지 양상을 가진 선의 실천은 선자들을 배출하면서 각지로 전해져 갔다. 그러나 북위시대가 되면 다시금 새로운 선이 중국에 전해지게 된다. 이것이 이후 중국선의 개창자가 되는 보리달마(菩提達摩)의 선이다. <낙양가람기>에 의하면 보리달마는 페르시아 출신이다. 중국으로 건너와 양녕사 구층탑의 금반(金盤)이 태양빛을 받아 빛나고 종소리가 바람을 머금고 울려퍼지는 것을 듣고 “나는 150살이 되는 지금까지 여러 나라를 두루 돌아다녔지만 이처럼 아름다운 사원은 보지 못했다”라고 하면서 입으로 나무(南無)를 외우고 매일매일 합장했다고 한다. 또한 담림의 기록에 의하면 보리달마는 인도 국왕의 셋째 아들로서 대승의 도에 마음이 끌려서 출가하여 세상에서 뛰어난 덕을 갖추었으나 멀리 산과 바다를 건너 중국으로 건너 왔다고 한다. 보리달마의 출신에 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으며 건너온 경로에 대해서도 분명하지는 않지만 서역을 경유했을 가능성이 높다. 달마의 가르침은 이입사행(二入四行)으로 총괄되는 것으로 즉 이입(二入)과 사행(四行)으로 구별되는 행입(行入)이다. 먼저 이(理)에 들어가는 이입(理入)이란 마음을 편안히 하는 실천으로서 그것은 경전의 취지를 깨달아서 중생의 동일한 진성(眞性)을 깊이 믿고 벽관(壁觀)에 확고히 머물러서 차별, 상대의 입장을 떠나 진리와 일체가 되는 것이다. 다음에 행에 들어가는 행입(行入)에는 보원행, 수연행, 무소구행, 칭법행의 네 가지가 있다. 보원행(報寃行)이란 어떠한 괴로움이 닥쳐도 그것을 자기의 악업의 결과라고 생각하여 달게 받아 들이며, 어떠한 경우에도 아무 소득도 없는 죄라고 호소하지 않는 것이다. 수연행(隨緣行)이란 고락, 득실은 모두 연에 의한 것이라고 관하여 마음이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스스로 도에 따르는 실천이다. 무소구행(無所求行)이란 만유는 공이며, 현실의 세계는 편안함이 없다는 것을 깨달아서 아무 것도 구하거나 원하지 않는 실천이다. 칭법행(稱法行)이란 본래 청정한 진리에 들어맞는 실천을 말하며, 직접적으로는 더러움이나 망상을 제거하기 위해서 공관(空觀)에 입각해서 행해지는 육바라밀을 말한다. 이상에서 보리달마의 선은 명확히 공관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또한 구체적, 현실적이라는 것, 그리고 벽관을 그 핵심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후 보리달마의 선은 혜가(慧可)에게로 전승되었다. 혜가는 6년간 달마에게 배우고 일승을 깊이 연구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그의 선사상에 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으며, 다만 확실한 것은 그에게서부터 능가종(楞伽宗)이 발전하였다는 것이다. 능가종은 <능가경>을 소의로 연구하며 그 정신을 추구하였는데 <속고승전>에는 달마가 이것을 혜가에게 전하고, 혜가가 처음으로 그 요지를 체득한 것으로 이후의 계보에 기재되어 있다. 후세의 전등설에 따르면 선종의 제3조는 승찬(僧璨)이다. 승찬의 사적은 현재 거의 알 수 없으며 <속고승전>에 혜가문하의 한 사람으로 ‘찬선사’라고 기재되어 있는 것이 바로 그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일설에는 사공산에 숨어서 좌선에 전념하고 12년간 그를 섬긴 도신에게 법을 전했다고 하지만 이것도 정확한 것은 아니다. 제4조 도신(道信)의 사적에 관해서는 많이 알려져 있다. 그는 12살이 지나자 서주 완공산에 들어가 두 스님에게서 10여년간 선을 배웠으며 601년 경에 출가하여 길주사에 머물렀다. 그 후 형산으로 향하는 도중 주위의 만류로 노산의 대림사에 10년간 머물렀으며 초대를 받아 쌍봉산에 들어가 문도 500명 이상의 대교단을 형성하였다. 저서에 <보살계본>, <입도안심요방편법문>이 있었다고 하지만 현존하지 않는다. 도신의 사상적 입장은 명백하지 않다. 그러나 <능가사자기> 등에 의하면 그가 천태 지의와 마찬가지로 <문수설반야경>의 일행삼매(一行三昧)를 중시하고 그것을 통해서 불성을 자각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도신의 선은 문하의 홍인(弘忍)에게 계승된다. 그는 황매현 출신으로 7세 때 도신에게 사사하고 마침내 그 법을 이었다. 수행시 낮에는 노역에 종사하고 밤에는 열심히 좌선했다고 한다. 황매현의 동쪽에 거주하면서 열심히 선을 알렸으므로 그의 선법을 동산법문(東山法門)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동산법문의 사상적 내용을 분명히 알기는 어렵다. 홍인 이후 선종은 크게 북종(北宗)과 남종(南宗)의 두 파로 나뉜다. 이 가운데 처음에 우세했던 것은 북종선으로 숭산, 장안을 중심으로 북지(北地)에 널리 전해진 선계통이며 그 대표적 인물은 신수(神秀)이다. 신수는 젊어서 노장, 유학에 정통하고 652년 낙양의 천궁사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50세 가까이 되어 홍인의 문하에 들어갔으며 6년간 사사했다. 홍인의 법을 이은 후 의봉(儀鳳)년간에 형주 옥천사의 승적에 속하여 그 근처에서 도문사를 열었으며 그의 주변에는 많은 수행자가 모였다고 한다. 701년에 측천무후의 부름을 받아 가마를 타고 어전에 들어갔으며 그 때 그는 가신(家臣)의 예를 취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양경(兩京)의 주주(注主), 삼제(三帝)의 국사라고 불리운다. 저서에 <관심론> 1권, <화엄경소> 30권, <묘리원성관> 등이 있다고 하지만 현재는 후대의 서적 인용 가운데서 그 일부를 엿볼 수 있을 뿐이다. 신수 다음 대까지는 보적(普寂)이나 의복(義福) 등의 활약으로 북종선이 융성했지만 그 후로는 점차로 쇠약해져서 주류의 자리를 완전히 남종선에게 양보하게 된다. 남종선의 시조는 혜능(慧能)이다. 혜능의 선조는 대대로 범양에 살았지만 아버지의 좌천으로 인하여 신주(新州)민이 되었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자 남해로 이주했으며 집이 가난하여 땔나무를 팔아서 어머니와의 생활을 꾸려나갔다고 한다. 이윽고 어느 날 마을의 손님 한 사람이 숙사로 돌아가 <금강경>을 독송하는 것을 듣고 깨달은 바가 있어 홍인의 문하에 들어갔으며 8개월간 방아지기로 생활하면서 법을 이었다. 이 때 혜능의 나이 24세 때의 일이라고 전한다. 그 후 676년에 <열반경>의 학자로서 이름난 인종(印宗)에게서 구족계를 받았으며 이후 소주의 조계 보림사에 거주하면서 많은 선자를 키우고 선풍을 날렸다. 남종선은 도생(道生)에 의해서 시작되는 돈오(頓悟)사상의 전통 위에 서서 본래 자기의 청정성, 완전성의 철저한 자각을 지향하고 있다. 혜능의 문하 가운데서 남종선의 정통성을 가장 강하게 주장하고 또한 그 입장을 분명히 한 이가 신회(神會)이다. 신회는 양양 출신으로 오경, 노장을 배운 후 출가하여 혜능의 만년에 그 평판을 듣고 문하가 되어 수년간 배웠다. 720년 칙명에 의해서 남양의 용흥사에 머물고 732년에는 융성을 자랑하는 북종에 대해서 종론(宗論)에 도전했다. 745년 경에는 낙양의 하택사에 들어가 크게 남종선을 선양했으나 753년 북종의 입장에 선 관리에 의해서 유배되어 불우한 나날을 보냈다. 그러나 2년 후 안록산의 반란을 계기로 다시 낙양에 초대되어 국가정책의 협력을 통해서 양경(兩京)의 부흥에 공헌하고 숙종으로부터 뜨거운 환대를 받았다. 신회의 만년은 그 자체가 북종의 몰락과 남종의 흥기를 상징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혜능의 선을 계승한 것 가운데서 점차로 발전해간 것은 홍주종(洪州宗) 즉 남악 회양(懷讓), 마조 도일(道一)의 계통이다. 그 주된 이유의 하나는 마조 도일이 선사상의 혁신을 이룩하고 선을 중국에 토착화시켰기 때문이다. 도일은 한주 출신으로 속성은 마씨이다. 어려서 홍인의 법을 이운 지선의 제자인 처적(處寂)에게 배우고 구족계를 받았다. 이윽고 회양의 문하에 들어가 심인(心印)을 전해 받은 후 강서의 임천, 홍주 등에서 크게 선을 알렸다. 본격적인 선의 융성은 강서(江西)의 마조와 혜능의 문하의 청원 행사(行思)의 법을 호남(湖南)의 석두(石頭)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마조의 선은 80여 명의 제자들에 의해서 장안을 위시하여 각지로 전파되었는데 그 가운데서 특히 백장 회해(懷海)가 유명하다. 회해는 선종 사상사에서 다음의 두 가지 점에서 크게 공헌하였다. 첫째는 당시까지 대부분 율사에 속해 있던 선원을 독립시키고 대소승의 계율을 집약, 절충해서 교단의 규칙을 정한 것이다. 이것은 선종의 사회적 독립의 기초가 확고해진 것을 의미함과 동시에 마조의 선이 자유로운 생활의 절대긍정에 빠질 위험에서 구제된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둘째는 마조의 정신을 토대로 당시 이미 어느 정도 일상화되어 있던 승려의 노동을 명확히 긍정하여 ‘하루 노동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라는 사상을 확립한 것이다. 이것은 물론 직접적으로는 선종사원의 경제적 자립을 지지하는 사상적 기반이 되었지만 동시에 출가자의 생산노동, 경제행위를 엄격히 부정하는 불교의 전통적인 노동관을 뒤엎는 것이기도 했다. 이는 중국불교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당말의 회창의 폐불사건은 이미 쇠퇴하고 있던 불교계를 사정없이 습격하였다. 그 때 파괴된 사원이 약 4만5천이며 환속된 승려는 26만여명에 달한다고 한다. 사원을 의지처로 했던 불교는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거의 멸망의 위기에 빠져들었지만 오직 선종만은 그렇지 않았다. 선종은 오히려 그것을 기회로 단숨에 상승기류를 타고 당말에서 오대에 걸쳐 눈부신 오가(五家)의 선시대를 출현시킨다. 오가(五家)란 선풍의 상위함에 따라 붙여진 이름으로서 위앙종, 임제종(臨齊宗), 조동종(曹洞宗), 운문종(雲門宗), 법안종(法眼宗)을 말한다. 여기서 다시금 송대에 임제종에서 분리된 황룡(黃龍), 양기(楊崎)의 2종을 합쳐서 오가칠종(五家七宗)이라고 한다. 이 오가칠종은 어느 것이다. 혜능의 남종선에 근거를 두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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