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래장 사상
(1)여래장의 의미 여래장(tathagata-garbha)은 여래의 씨라는 의미이다. 누구나 지니고 있는 여래의 가능성을 말하는 것이다. 이 사상은 《법화경》과 《열반경》을 통해 생겨났다. 유식과 불성의 통합사상은 바로 여래장사상인 것이다. 즉, 모든 생명을 가능성의 존재로 보고 그 무한한 가능성을 여래장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다. 불교의 근본취지는 바로 이 가능성을 깨닫는 일이다. 특히 대승불교운동과 함께 이 문제는 매우 중요하게 부각된다. 왜냐하면 부파교단에서는 부처라는 인격을 절대적 타자(他者)로 보려는 경향이 농후했기 때문이다 . 대승불교의 후반기에 들어서면서 여래장사상은 확립된다. 또 한국불교에 있어서도 가장 중요한 교리의 하나로 인식되는 것이다. 여래장사상의 핵심적 문헌으로 《대승기신론》이 있다. 이 경전에서는 여래장을 한마음〔一心〕으로 표현하고 있다. 일심의 대표적인 표현은 합장이다. 흔히 요즈음은 악수를 하곤 하지만, 악수는 그리스시대 이전부터 서로 무기를 지니지 않았음을 확인하며 비롯된 인사법이다. 그에 비해 합장은 두 손을 공손하게 한마음임을 내보이는 인사법이다. 너와 내가 일심이므로 하나라는 상징성을 담고 있는 것이다.. 합장을 통해 서로의 두 마음이 하나로 융합된 조화로운 세계가 펼쳐진다고 하겠다 . 여래장사상의 일심은 크게 진여문(眞如門)과 생멸문(生滅門)으로 나뉜다. 진여는 '참되고 한결 같다'는 의미이다 . 사물의 본성이며 깨달은 자의 세계이다. 반면 생멸이란 '덧없는 나고 죽음의 세계'를 가리킨다. 우리들 마음도 이와 같은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만약 진여적 측면을 계발한다면 부처로서 살아간다. 그러나 생멸의 측면을 내 마음의 본성으로 착각하면 중생으로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진여문은 말을 떠난 말로써 설명할 수 없는 진리의 면이다. 생멸문은 말로써 설명이 가능하다. 그 일심을 또다른 방식으로 설명하면 삼상(三相)이 된다. 삼상이란 본질, 모습, 기능이며 혹은 삼대(三大)라고도 한다. 본질〔體〕과 드러난 현상의 모습〔相〕, 기능〔用〕으로 일심을 구분하게 된다. 여기서 여래장의 본체는 말로 설명할 수 없지만〔亂言〕, 기능과 상은 설명이 가능하다〔依言〕. 보조국사 지눌은 이러한 설명을 하였다. "일심의 작용이 무엇인가? . 밥 먹을 때 밥 먹게 하고, 담소할 때 말하게 하고, 차 마실 때 마시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중생의 경우 이것이 일심의 작용인줄 모른다. 밥 먹을 때 단지 손의 작용이라 여기고, 말할 때 단지 입이 움직여 말하는 줄로 안다. 그 모든 것은 일심의 작용 아닌 바가 없다." 중생이 일심의 존재이면서 그 일심을 벗어났다는 점에서 우리는 결국 실향민이다. 불교의 목표가 성불이라면 여래장사상은 그 고향을 일심으로 나타내고 있다. 그 점에서 여래장 사상은 대승불교의 이론적 궁극지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여래장의 내용 여래장을 보살심(菩薩心)과 범부(凡夫)· 이승심(二乘心)으로 구분해 보면 보살심에 속하는 것은 제 8식인 아뢰야식이며 범부·이승심에는 제6식,7식이 해당된다. 생멸의 상을 넷으로 나누었을 때 우리 중생들은 맨 마지막의 멸상 10가지로부터 출발한다. 살생· 도둑질· 음행· 망어· 악담· 이간질· 거짓말· 탐· 진· 치가 그것이다. 생명 있는 모든 것들은 위와 같이 그릇된 모습을 취하고 있다. 이것은 중생들이 깨닫지 못한 상태〔不覺〕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명들은 자각을 하게 된다. 각과 비슷한 상태이지만 탐· 진· 치· 만(慢)· 의(疑)· 견(見)은 아직 버리지 못한 상태, 이를 상사각(相似覺)이라고 한다. 이 상황에서는 행동으로서 열 가지 나쁜 일을 범하지는 않으나 밑바닥에는 집요하게 나〔我〕를 내세우고 있다. 이것이 잘 극복되면 수분각(隨分覺)이 된다. 수분각은 나에게 집착한 상태이다. 자신에 대해 어리석고(我慢), 자기만을 사랑하며(我愛), 자신만 잘났다고 느끼며(我慢), 자기를 내세우고(我見)있는 것이다. 주변에 얽매여 고통받는 모습을 업계고상(業繫苦相)이라 한다. 이는 기업상(起業相)에서 왔으며, 기업상은 이름과 글자에 집착하는 상(計名字相)에서 비롯되었고, 계명자상은 사물에 집착하는 상(執取相)에서 나왔다. 집취상은 이어져 내려오는 상속상(相續相)에서 왔으며, 이는 알려고 하는 지상(智相)에서 왔다. 위와 같은 육추가 얽혀져 중생이 겪는 육도윤회의 원인이 된다. 삼제는 나 이외의 객관인 경계상(境界相), 주관(能見相), 무명이 주관과 객관으로 변형되는 무명업상(無明業相)의 세 가지를 의미하는 것이다. 또한 집상응(執相應)이 있다. 자기 집착에 상응하여 그릇됨을 일으키는 것을 가리킨다. 이것은 잘못 이어져서 나쁜 결과를 낳게 된다. 분별지상응(分別智相應)은 분별력을 말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동체대비란 능소(陵所:주관과 객관)의 구별이 없어야 가능하다. 동체대비의 이론적 근거는 '색즉시공'의 관계와 동일하다. 내가 있고, 네가 있다는 양자의 합일에 있다. 능소의 구별이 있는 한은 불가능한 것이다. 일심의 사상은 심생멸, 생멸의 인연, 생멸의 상 등 세 가지로 파악하기도 한다. 심생멸의 입장에서 각을 보면 본래의 깨달음인 본각과 본각이 작용을 시도하는 시각(始覺)으로 양분하고 있다. 본각이란 본래의 깨달음이라는 말이다. 이상적으로 말하면 모든 생명은 부처이다. 그 본질적 깨달음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은 전혀 그와 반대이다 . 왜냐하면 자신에게 있는 그 가능성을 모르기 때문이다〔不覺〕. 따라서 아무리 본각이라고 할지라도 그 본각을 향한 힘찬 시동이 필요하다. 그 시동을 시각(始覺)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중생의 입장에서 볼 때 불각(不覺)은 무명인 근본불각과 업에 얽혀 헤어나지 못하는 지말(枝末)불각이 있다. 이러한 일은 현실 고에서 비일비재하다. 생멸의 인연은 마음과 뜻과 의식이라는 것, 즉 제 6, 7, 8식이 모두 포함되는 것이다. 생멸의 상은 삼세와 육추의 두 가지 상과 두 가지 종류의 훈습에 의해 설명된다. 훈습(薰習)이라는 용어는 독특한 불교용어이다. "생선을 엮어 맨 새끼줄은 생선 비린내가 난다. 안개 속을 걷는 자는 아무리 깨끗하려 하여도 안개 속에 옷이 젖는다. 이와 마찬가지이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 있어 세상의 악 속에 빠져 나올 생각을 아니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물든다." . 부처님께서 들려주신 말씀이다. 결국 훈습이란 향(香)과 같다. 향을 사르면 향내음이 온몸에 젖음과 같은 의미이다. 훈습에는 두 가지가 있다. 지극히 근본적인 선천적 훈습과 후천적 훈습의 두 가지이다. 또한 정법(淨法)훈습과 염법(染法)훈습의 두 가지로 나누기도 한다. 정법훈습이란 무명의 삶을 극복하기 위하여 나아가는 훈습이며, 염법훈습은 무명에 삶을 맡기며 퇴보함을 의미한다. 이것은 인간의 행위와 환경에 대한 이야기라고 볼 수 있다. 때에 따라서는 결정적 영향을 끼치기도 한다.. 그래서 선지식이 필요하고, 선우(善友)가 필요하다. 부처님은 중생들에게 있어서 영원한 선지식이 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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