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생명이 고향은 바로 부처님이다.-청화스님
부처님은 바싹 마른 어떤 도리나 이치가 아니라 하나의 생명(生命)입니다. 생명이기 때문에 그 생명을 생명으로 구하는 것이 우리 중생이 구하는 참다운 신앙심(信仰心)입니다. 우러러서 우리가 구한단 말입니다. 그냥 저기에 무엇이 좀 있으니 내가 구한다. 수학 문제를 풀고 무슨 학문적인 문제를 푸는 그런 식의 종교는 아닙니다. 우리 생명자체를 온전히 우리가 바치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바로 우리 생명의 본체인 것입니다. 만 생명, 모든 만물의 생명의 고향이기 때문에 그 자리는 바로 생명이기 때문에 생명을 생명으로 구하는 것이 부처님인 것입니다. 단순히 '부처'라고 하지 않고서 '부처님'이라, 정말로 님 가운데 님인 것이고, 우리 마음의 고향인 것입니다. 따라서 그런 마음의 고향 자리를 우리 생명의 근본 자리를 어떻게 빨리 구할 것인가? 우리는 그러한 부처님을 흠모하고 연모해서 구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부처님은 우주의 이치이므로 이치로 구한다. 이것도 구하는 방법의 하나이겠지만 부처님은 바로 생명이므로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러러서 신앙적으로 구한단 말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단순 소박합니다. 그래도 지금 18억이나 되는 인구가 믿는 것은 '오! 주여!' 하는 그 마음, 덮어놓고서 이치는 모른다 하더라도 하나님을 따르는 그 마음, 그 마음으로 해서 그래도 이만큼 이 과학문명 시대에도 18억이라는 인구가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불교인들은 부처님을 간절히 구하는 연모하고 사모하고 그리워하는 그런 마음이 너무나 부족한 것 같습니다. 저도 그때그때 부처님 이치로운 법문만 많이 하는 것이지 정말로 생명으로 구하는 그런 쪽에다 역점은 별로 못 두어서 오늘만큼은 그런 쪽에다 보다 더 관심을 두고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정말로 우리가 고향을 떠나면 고향에 대한 향수(鄕愁)가 얼마나 그립습니까? 부모님 슬하를 떠나면 부모님이 얼마나 그립고 간절히 갈망(渴望)을 합니까? 그와 똑같이 생명의 고향인 부처님에 대해서 정말로 갈앙심(渴仰心)이라, 목마를 갈(渴), 우러를 앙(仰), 병든 사람이 약을 구하듯이 어린애가 자기 어머니를 찾듯이 부처님을 그렇게 찾으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못 찾고서 그냥 그렁저렁 이기심으로 구하니까, 공부가 잘 안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의 예술 작품을 감상할 때도 감성으로 간절히 구하는 그 마음으로 감상하면 굉장히 마음이 정화가 됩니다. 훌륭한 음악이라든가 또는 훌륭한 미술이라든가 작품을 대할 때에 우리 마음 감성이 순화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해서 우리 마음이 정화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종교도 역시 우리 마음이 여러 가지 번뇌(煩惱)에 따라서 물질의 노예가 되어 있는 거치러운 마음을 정화시키려면 생명의 고향에 대한 간절한 갈앙심이 앞서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갈앙심에 대해서 깊이 생각을 하십시오. 부처님이 그렁저렁한 존재는 아니지 않습니까. 부처님이라 하는 것은 일체 공덕을 원만히 갖추고 있습니다. 내가 구하는 것이 거기에 다 들어 있습니다. 자비를 구하고 지혜를 구하고 행복을 구하고 능력을 구하고 그런 것이 부처님한테는 다 들어 있습니다. 따라서 그 부처님을 위해서 우리 하찮은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현상적으로 나투는 이 몸뚱이 100개를 바친다 하더라도 조금도 한이 없습니다. 그 자리를 구하기 위해서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과거 전생에 얼마나 많은 희생을 했습니까? 과거 전생에 부처님이 살타왕자로 태어났을 대는 굶주린 범의 새끼를 구하기 위해서 몽땅 자기 몸을 바쳤던 것입니다. 도는 나찰한테 부처님의 소중한 법문을 듣기 위해서 해탈의 법문을 듣기 위해서 조금도 주저없이 후회도 없이 자기 목을 순식간에 다 바쳤습니다. 그걸로 해서 몇 생을 넘어서 성불을 했습니다. 부처님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이 성불의 지름길 불자님들 깊이 생각을 하십시오. 그렁저렁 공부를 해서는 이 공부는 더딘 것입니다. 자기 교만심을 그대로 두고서 부처를 구한다. 억지로 앉아서 화두를 한다. 이렇게 해서는 공부가 순탄하게 나아가지를 않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을 다 바쳐서 말입니다. 우리 마음의 본 마음이 부처 아닙니까. 중생심(衆生心)을 몽땅 부정해 가지고서 참다운 불심(佛心)에다 마음을 두고서 구해야만 공부가 속 빠른 것입니다. 그것이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생명의 고향에 대한 하나의 갈앙심입니다. 정토경(淨土經)을 보면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십념왕생(十念往生)'이라.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을 열번만 부르면 그걸로 해서 극락세게에 태어나는 것입니다. 갈앙심이나 그리워하는 마음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거짓말로 생각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거짓말을 하시겠습니까. 지금 현재 내 마음, 이 마음 떠나서 부처는 없습니다. 이 마음이나 부처 마음이 같은 마음입니다. 다만 우리가 이 마음을 나다 하고 스스로 업장(業障)을 지어서 이 마음을 구속하고 있는 것이지 이 마음 바로 부처 마음입니다. 따라서 이 마음이 바로 부처고 이 마음 가운데는 조금도 번뇌나 그런 찌꺼기가 없다. 그래서 100% 부처님 마음같이 확실히 믿는다고 생각을 할 대는 이 마음 그대로 바로 극락세계를 이루는 것이고 극락세계의 공덕을 우리가 수용하는 것입니다. '일언지하(一言之下)에 확철대오(廓徹大悟)'라. 한 마디에 깨달아 버린다. 그것도 역시 과거 전생에 업장이 가벼워서 부처님 말씀을 조금도 의심없이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보통 성자나 선지식의 말씀을 듣는다 하더라도 보통은 다 그럴 것인가? 이렇게 의심을 깔고 듣습니다. 겉으로는 의심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 잠재의식에서는 그대로 받아들이지를 못합니다. 그러나 100% 수용할 때는 정말로 딱 믿어버리면 그 자리에서 깨달아 버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믿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믿음이 최상의 방편이다. 사람도 사람 사람끼리 믿어 보십시오. 그렇게 마음도 평화스럽고 그리고 믿음 그것이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다 상통이 됩니다. 남을 미워하고 의심쩍어 해 놓으면 그때는 그냥 그 마음이 건너가서 나를 안믿는단 말입니다. 특히 현대 사회는 불신의 시대라, 서로 믿지를 않는 것이 병입니다. 서로 믿지 않는 것은 자기 마음의 본성도 모르고 남의 마음의 본성도 몰라서 그러는 것입니다. 내 마음의 본성도 부처고 저 사람 마음의 본성도 부처다. 이렇게 안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가 안 믿을 수가 있습니까? 내가 너무 믿다가 저 사람이 나를 속이면 손해가 아닌가? 더러는 시행착오로 손해를 볼 수가 있겠지요. 그러나 영원적인 차원, 해탈적인 차원에서 볼 때는 설사 몇 번 속임을 당한다 하더라도 절대로 손해가 안되는 것입니다. 사람을 사귈 때 가장 좋은 방편이 무엇인가? 그것은 저 사람을 믿는 것입니다. 저 사람도 나와 똑같이 부처님이다. 이렇게 믿고서 우리가 최선을 다 한단 말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사람 사람끼리 사귀는데 있어서 가장 우수한 방법입니다. 이것이 예수가 하신 방편이고 석가모니가 하신 방편입니다. 불경(佛經)에서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부처님은 무량수불(無量壽佛) 무량광불(無量光佛)이다. 목숨이 영생불멸한 생명이고, 또는 부처님 지혜가 우주에 충만해서 모든 것을 다 알고 할 수 있는 지혜다. 부처님은 생명의 본질인 동시에 우주 만유의 본질이고 그 가운데는 만 공덕이 다 들어있다. 우리가 이렇게 듣고서 한 생각 그렇게 믿는다고 생각할 때는 80만억 나유타겁(那由他劫)이란 오랜 무수한 세월동안 계행 지키고 법문도 하고 보시도 하는 바라밀 공덕과 비교할 때 믿는 그 마음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무량무변하다. 내 생명이나 일체 부처님의 생명이 영생불멸하고 만공덕을 갖추고 있다. 이렇게 한번 딱 믿는 그것과 무량 세월 동안에 계행 지키고 보시하고 참선하고 염불하고 이런 공덕에 비해서 다시 비교할 수 없는 한도 끝도 없이 더 공덕이 많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법화경(法華經) 공덕품(功德品)에 있는 법문입니다. 법화경은 대승경(大乘經) 아닙니까. 법화경 공덕품에 가서 방금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부처님이라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은 내 생명의 본질인 동시에 우주의 본체인데 그 가운데는 무량의 공덕이 다 들어있다. 이렇게 말씀을 듣고서 그 자리를 딱 믿으면 한 번 믿는 그 마음이 몇 천년 몇 만년 동안에 보시하고 계행 지키고 참선하고 이런 공덕보다도 훨씬 더 수승하다는 그런 법문이 있습니다. 다른 공부하는 법을 무시하는 그런 법문이 아닙니다. 다만 앞서 말씀과 같이 부처님의 무량지혜(無量智慧), 무량공덕(無量功德)을 믿는 그것이 참다운 신앙(信仰)입니다. 그 자리를 믿고 염불도 하고 주문도 외이고 참선도 하고 그렇게 해야 공부가 속 빠른 것입니다. 내 마음의 본성이 그와 같이 일체 만공덕을 다 갖추고 있다. 지혜도 자비도 행복도 다 갖추고 있다. 이렇게 분명히 딱 믿고서 그 자리를 간절히 그리워하는 갈앙심으로 해서 공부가 속바른 것이고 도 피로하지도 않고 병도 생기지가 않습니다. 우리가 공부하는데 있어서 여러 가지 그런 경계가 굉장히 많지 않습니까. 더러는 부처님같은 모양으로 나오고 또는 신장이 나오고 말입니다. 별스러운 경계가 다 있으나 부처님이라 하는 것은 내가 가고자 하는 근본 목적이 부처님하고 다른 것이 아니라 방금 말씀드린 바와 같이 내 생명의 근본인 동시에 우주에 가득차 있는 모든 존재의 근본 생명이고 그 자리는 만공덕을 다 갖추고 있는 그 자리다. 하나의 생명의 실상이다. 이렇게 분명히 믿어버린다고 생각할 대는 다른 나쁜 경계가 공부할 때에 엿보지를 못합니다. 우리 마음이 시원찮고 그래저래 묽으니까 경계가 이것저것 나오는 것이지 우리 마음이 100% 가고자 하는 근본 도리, 진여불성 도리에 마음을 딱 못박고서 그 자리를 굳건히 믿는다고 생각할 때는 공부가 굉장히 속빠른 것입니다. 공부를 꼭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가고자 하는 마음의 고향 자리, 어차피 그 자리에 가야 합니다. 떠나온 것도 역시 그 자리에서 떠나왔습니다. 진여불성에서 우리가 떠나온 것이고 그러다가 몇 만생을 지옥으로 아귀로 우리가 헤맸습니다. 그러다가 우리가 돌아가는 것도 역시 근본 자리인 진여불성 자리입니다. 삼계유여객사(三界喩如客舍)라. 지옥이나 아귀나 축생이나 또는 욕계나 색계나 무색계나 모두가 다 오랜 '나그네 길'입니다. 욕계에서 우리가 얼마나 많이 헤매어 왔는가, 여기 계시는 분들 과거에는 천상에도 계셨고 그랬으리라 믿습니다만 그렇더라도 역시 지옥, 아귀, 축생을 다 거쳤습니다. 거쳐왔으므로 기분 사나왔을 대 남을 미워하는 것을 보십시오. 금방 그 사람을 때려 죽이고 싶지요. 그것은 바로 지옥같은 마음입니다. 우리한테는 지금 아귀같은 욕심(慾心), 아수라같은 진심(嗔心) 다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 발동을 다 막아야 합니다. 진심이 사무치면 자기 부모도 죽이는 것입니다. 욕심을 내면 그 욕심 때문에 보십시오. 가정불화, 단체불화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 말입니다. 그 하찮은 물질 욕심. 물질은 본래로 없습니다. 우리가 금생에 살기 위해서 몸을 타고 나왔으므로 최소한으로 먹고 최소한으로 살면 되는 것입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지금은 위험스러운 시대입니다. 국제화 시대이기 때문에 다른 민족과도 치열한 경쟁을 하고 있습니다. 경제 경쟁 또는 지식 경쟁 도는 기술 경쟁 각기 민족끼리 경쟁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단시일 내에 일본을 능가할 수가 있습니까? 눈에 보이는 물질로 해서는 지금 다른 선진국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다만 우리 정다운 믿음, 정다운 가치관 이것은 우리 마음먹기에 따라서 그냥 당장에 이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미국이나 일본이나 어떤 나라나 자기들이 애쓰고 물질을 많이 생산하고 풍요를 자랑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네들도 종단에는 부처님 가르침같은 우주의 도리를 따라야 합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우주의 도리입니다. 우주가 부처님의 가르침인 진리의 궤도에 따라야 파멸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네들도 역시 몇 번 시행착오를 경험하다가 종당에는 다 부처님 가르침을 따라야 합니다. 우리가 자기 번뇌를 이기는 것도, 또는 국내 사회에서 자기가 이기는 것도, 또는 국제간에 이기는 것도 모두가 다 방금 말씀드린 바와 같이 다른 것으로 해서는 이길 길이 없습니다. 다른 것은 이겼다 하더라도 별것도 아닙니다. 물질을 남보다 더 많이 가지면 그때는 가난한 사람들이 시기를 하겠지요. 감투나 물질은 그것은 많이 가져 보아도 이것은 사실은 불화의 씨앗밖에는 안됩니다. 그러기에 자본주의 사회를 보십시오. 빈익빈 부익부라. 부자는 더욱 더 부자가 되고 가난한 사람은 더욱 가난합니다. 이렇게 되면 그 계급의 고랑을 메울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결국은 혁명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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