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가르침은 참다운 자유, 참다운 행복, 참다운 평화를 위하는 것입니다.-청화스님
'능념불무량력공덕(能念佛無量力功德)'이라. 앞의 법문이나 거의 같습니다만, 우리가 능히 부처님의 무량의 힘을 생각할 때는 즉시 '입필정(入必定)'이라. 곧바로 참다운 삼매(三昧)에 든다는 말입니다. 문자는 외울 필요가 없다 하더라도 뜻은 잘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부처님의 공덕을 능히 생각할 때는 즉시 반드시 삼매에 든다는 것입니다. 즉 말하자면 우리 마음이 안정이 되고 통일이 되어 간다는 뜻입니다. 우리 마음은 지금 산란스럽지 않습니까. 우리 마음이 오로지 부처님을 지향해서 가야 할 것인데 그렇지 않고 산란스럽습니다. 부처님 공덕이 무량공덕이다. 이렇게 믿는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가 틀림없이 바로 삼매에 든다는 것입니다. 자기 마음을 절대로 비하(卑下)를 마십시오. 자기의 위치가 어느 위치에 있던지 비하할 필요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 마음으로는 바로 석가모니 마음과 똑같습니다. 따라서 그 마음의 무량한 공덕을 그때그때 여러분들이 깊이깊이 생각을 하셔야 합니다. 무량의 공덕을 처음에는 잘 모릅니다. 허나 기도를 잘 모시고 참선을 많이 해 놓으면, 그때는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무량의 힘이 많이는 못 솟아 올라와도, 어느 정도는 자기 공부하는 정도에 따라서 무량의 힘이 나오는 것입니다. 자기한테 물질적으로 돈이 없다고 슬퍼 마십시오. 내가 내 목숨 다 바쳐서 만중생(萬衆生)을 제도해야 되겠다. 이렇게 100% 믿는다고 생각할 때는 틀림없이 물질도 옵니다. 물질 그것도 역시 전여불성이 물질이 되었습니다. 물질이 본래 있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불자님들 물질이라 하는 것도 역시 현상이니까, 이것도 진여불성으로 부터서 잠시간 허깨비같이 상을 낸 것에 불과합니다. 일체 존재 만유는 모두가 한결같이 공(空)이요, 무상(無常)이요 하는 것입니다. 공이고 무상이기 때문에 나라고 할 것이 없습니다. 어느 것도 내 소유는 없습니다. 방금 말씀드린 바와 같이 물질이 없다고 한탄을 마십시오. 금생에 태어나서 한사코 부처님 법을 깨닫고 만중생을 위해서 이 몸뚱이 피 한방울까지 다 바치겠다. 이렇게 마음먹는다고 생각할 때는 꼭 거기에 필요한 것은 따라오는 것입니다. 자기 몸뚱이만을 생각하므로 자기 생각이 안 따라오는 것이지, 정말로 우주가 바로 하나의 생명이기 때문에 그 자리에 우리 마음을 딱 붙여 두고서 우리 행동 말하나 모두가 다 중생의 복리를 위해서 하고, 남한테 베푸는 마음으로 한다고 생각할 때는 꼭 거기에 필요한 물질도 오는 것입니다. 물질이 감정이나 정신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티끌 하나 전자(電子) 하나 모두가 다 부처님의 생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코 우리가 참다웁게 부처님 법대로 따른다고 생각할 때는 꼭 틀림없이 건강도 올 수가 있는 것이고 물질도 올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머리카락부터서 발끝가지 모두가 다 진여불성으로 되어 있습니다. 진여불성은 만유의 생명입니다. 자기를 절대로 과소평가를 마시고 자기 비하를 말으십시오. 부처님을 100% 믿으시는 것이 최상의 행복한 길입니다. 따라서 그렇게 공부하는 것이 바른 견해입니다. 바른 지혜입니다. 반야(般若)의 지혜(智慧)라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분명히 외우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보는 것은 모두가 다 허망합니다. 허망하지 않다고 생각이 되시겠지요.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깊이 생각할수록 지나간, 가사 지금 나이가 50같으면 49년 생활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죽을 때에 자기 한평생을 헤아려 회고해 본다고 생각할 때에 여태까지 산 것이 무엇입니까. 한바탕 꿈이란 말입니다. 인연 따라서 이루어진 이것은 무상(無常)이고 공(空)이고 무아(無我)입니다. 이것은 공식이고 현대 물리학의 공리입니다. 인연 따라서 잠시간 나온 이것은 바로 시간적으로 무상이고 공간적으로 공입니다. 현대물리학도 다 증명을 한 것입니다. 이것은 어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 중생이 상식적으로 보니까 내가 있고, 네가 있고 물질이 있고 무엇이 있다고 보는 것이지 정말로 부처님 지혜로 보고 물리학적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그때는 모두가 다 물질이나 내 몸뚱이나 다 있는 것은 허망 무상한 것입니다. 무상하고 또는 공이고, 무상하고 공이기 때문에 내 것이라고 할 것이 없습니다. 내 몸뚱이도 내 것이라고 할 것이 없습니다. 인생고(人生苦)는 거기서 옵니다. 무상하고 무아인 내 몸뚱이가 나다 하는데서 옵니다. 내 몸뚱이 이것이 나다. 중생들 입장에서 이것은 거짓말이 될 수가 없지요. 그러나 과거 전생에 이 몸뚱이는 없었단 말입니다. 또는 죽은 뒤에 이 몸이 있을 것도 아닌 것이고, 금생에도 순간 찰나도 이 몸뚱이 같지가 않단 말입니다. 따라서 이것이 내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내 것도 네 것도 아닙니다. 내 몸뚱이는 내 것도 네 것도 아닌 것입니다. 인연 따라서 잠시간 상(相)을 내서 상이 지금 변화해 가는 과정(過程)에 불과한 것이지 고유한 내 몸뚱이는 있지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 자리, 진여불성 자리는 영생불멸해서 그때는 조금도 변치가 않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과 같이 낳지 않고, 죽지 않고, 더하지도 않고, 덜하지도 않고, 일체 행복이나 자비나 지혜나 다 갖추고 있어서 원만한 자리, 그 자리가 바로 부처님 자리입니다. 우주에는 부처님만 꽉 차 있습니다. 진여불성 자리와 하나가 되는 것이 인생의 최상의 가치이다. 그 자리를 우리 중생은 보지 못하지만 성자는 그 자리하고 항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행복은 우리 인생의 최상의 가치는 무엇인가? 그 자리를 느끼고 그 자리하고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다른 선택은 없습니다. 핵전쟁의 위험으로부터 인류가 피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나와 남이 본래 둘이 아니고 천지우주가 오직 하나의 생명체이다.'라고 하는 부처님 지혜로 가야만 핵의 위험에서 벗어날 수가 있는 것이고, 이 무서운 환경의 파괴도 이길 수가 있는 것이고, 동시에 인간끼리 단체끼리 호합도 이루어집니다. 부처님 지혜로 해야 만이 비로소 이루어집니다. 나와 남을 둘로 보는 서구적인 사상, 서구식의 분열로 보는, 이것저것을 둘로 보고 셋으로 보는 그런 사고방식 이런 걸로 해서는 절대로 참다운 자유, 참다운 평등이 없습니다. 본래로 나와 남이 둘이 아니다. 이렇게 분명히 느낀다고 생각할 대는 경제적 평등, 정치적 자유 이런 것이 저를 안 올 수가 없단 말입니다. 부처님한테 가는 길은 반야바라밀을 등불로 삼아야 합니다. 우리 나그네 길이 팍팍한 길입니다. 인생이 참 팍팍한 길 아닙니까. 갈등하고 질투하고 헤어지고 생이별, 사이별 이러한 길인데, 이런 길에서 그래도 좀 편하게 살아야 할 것인데, 편하게 살려면 바른 지혜의 등불, 앞서 말씀한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을 등불로 해야 그래야 마음이 편합니다. 자기 몸뚱이 내 것이라고 아무리 지고 가도 변하고 맙니다. 죽을 때 우리가 운다고 안 죽습니까. 우리는 보다 똑바로 봐야 합니다. 반야바라밀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모두가 다 허망 무상한 것입니다. 허망 무상하다고 확실히 느끼면 그 무겁던 몸이 가벼운 것입니다. 인생은 가뿐하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 마음이 주인공이기 때문에 내 몸뚱이 이것이 언제 가도 무방하다. 이렇게 생각하고서 모두는 다 이것은 허망하다. 원래 공이다. 이렇게 확실히 생각할 때는 그렇게 귀찮은 몸이 귀한 몸이 그대는 아무런 무게가 없는 것입니다. 범 세끼한테 이 몸뚱이를 주나 개한테 주나 그때는 아무런 상관이 없단 말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몸도 제일 편하고 마음도 제일 편합니다. 부처님 법은 몸도 마음도 제일 편하게 하는 최상의 길입니다. 이렇게 해서 여러분들이 지금 공부하시는 방법, 화두(話頭)면 화도, 염불(念佛)이면 염불, 주문(呪文)이면 주문 모두가 그 자리를 의미합니다. 차별도 없고 일미평등(一味平等)한 진여불성 자리, 우리 본래면목 자리, 어떤 수행법이나 본래 그 자리를 의미합니다. 그 자리를 의미하는데 우리가 당장에 그 자리를 가지고 깨달으면 좋은데 업장 때문에 습기 때문에 바로 안 되는 것입니다. 나쁜 습관성 때문에 옳다고 이치로는 믿고 생각하지만 그렇게 행동은 안 된단 말입니다. 그러기에 생각생각에 그 부처님 생각, 화두하는 사람들은 화두, 염불하는 사람들은 염불로 해서 실상 자리를 놓치지 않고 습을 녹여야 합니다. 내가 생각할 대는 그럽니다. 부처님이 생명인지라 생명으로 구하면 좋을 것인데 바싹 마르게 화석화시켜서 구한단 말입니다. 내 생명이고 만중생의 생이 바로 이것이 바로 부처님이기 때문에 생명을 생명으로 구하는 것이 염불입니다. 잘 모른 사람들은 공부를 많이 했다는 분도 화두를 하는 것은 보다 고도의 참선인 것이고, 염불은 그냥 근기가 낮은 사람들이 하는 것이다. 부처님 말씀에 그런 말씀이 없습니다. 적어도 달마스님부터 6조 혜능 스님까지는 그런 말씀이 없습니다. 다만 부처님이 우리 몸 밖의 어디에 존재한다. 우리가 염불할 대에 부처님이 우리 몸 밖의 어디에 계시다가 우리가 부처님을 간절히 흠모 추구하고 염불을 하면 나한테 와서 나를 도와준다. 이렇게 생각하는 염불은 참다운 염불이 못됩니다. 그것은 소박한 방편 염불입니다. 그러나 참다운 염불은 무엇인가 하면 부처 자체가 바로 내 생명의 근본 자리이고 근본 성품이고, 우주의 근본 성품이기 때문에 참다운 염불은 바로 우주의 근본 성품을 생각하는 것이다. 다시 말씀드리면 자기 본래면목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염불입니다. 그런데도 그것이 방편이 되겠습니까. 따라서 참선과 참선공부가 아닌 것과 차별은 무엇인가? 이 구분도 분명히 하시기 바랍니다. 구분을 하셔야지 그렇지 못하면 공연히 부처님 법을 비방을 합니다. 참선 이것은 이름이나 상에 걸리지 않고, 명상에 걸리지 않고서 본 성품 자리 본체를 구하는 것입니다. 헛된 가상(假相)이나 가명(假名)이나 그런 것에 걸리지 않고서 근본 성품을 안 여의는 공부는 다 참선입니다. '이뭣고'를 하나 '무자'를 하나 또는 '염불'을 하나 '주문'을 하다 다 참선입니다. 그렇게 되어야 하겠지요. 부처님 가르침은 '대도무문(大道無門)'이라 원래 문이 없이 천주우주가 다 부처님인데 부처님 법 가운데서도 꼭 자기들 하는 식이 옳다고 합니다. 그 외는 옳지 않다고 그럽니다. 그럴 수가 어디가 있습니까? 그것은 아집(我執), 법집(法執)입니다. 그 아만심(我慢心), 법성(法性)을 미처 못 보아 놓으면 법집을 합니다. 그러나 법성을 본 사람은 법집을 하려고 해도 못하는 것입니다. 왜 그러는 것인가? 천지우주가 하나의 법이거니 어떻게 부처님 법 가운데서 어느 것만 옳고 어느 것을 그르다고 하겠습니까? 따라서 참선이라고 하는 것은 설사 하나님을 외운다 하더라도 오직 하나님 그것이 우리 부처님같이 천지우주의 근본 성품을 의미하면 됩니다. 의미가 문제인 것이지 그냥 형식상 그런 가상가명(假相假名) 그런 것은 문제가 안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라고 부르나 또는 '또 마른 막대기'라 부르나 다 상관이 없습니다. 오직 문제는 우리 마음이 진여불성 자리를 안 여의면 된단 말입니다. 부처님 법문은 모두가 다 그 자리를 의미합니다. 다만 중생들이 잘 모르니까 극락세계도 저 서쪽에 있다고 한 것이지, 서쪽이나 동쪽이나 아래나 위나 천지우주가 바로 극락세계인데, 우리 중생이 번뇌에 어두워서 스스로 지옥을 만들고 스스로 극락을 만듭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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