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은 삶을 여는 계율-일타스님
교는 부처님의 말씀이여 율은 부처님의 행이니라 어둠과 밝음의 세계 공덕녀와 흑암녀가 언제나 함께 하듯이 몸이 있으면 괴로움이 따르기 마련 어찌 편안함만을 얻으려 할 것인가 공덕녀와 흑암녀 불교의 여러 경전 속에서 공덕녀와 흑암녀 자매가 자주 등장하고 있다. 이 공덕녀와 흑암녀는 지극히 대조적인 인물로서, 그들 자매의 이야기는 우리 인생살이의 상대적인 모습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어느 날, 한 부호장자의 집에 인물이 지극히 아름답고 품위가 넘치는 여인이 찾아왔다. 눈앞이 맑아지는 듯한 아름다움에 넋을 잃고 바라보던 장자는 지극히 부드러운 음성으로 물었다. "그대 이름은 무엇이오?" "공덕녀라 하옵니다." "무엇을 하는 여인이오?" "소녀 같은 사람이 무엇을 제대로 하오리까? 다만 저를 만나는 사람은 모두가 기분이 좋아진다고 하더이다. 또 저를 보고 나면 금은보화가 모여들고 무병장수하며, 재수대통하게 되옵니다." 그토록 아름다운 미모에 재물과 건강과 행복까지 안겨주는 사람이라니! 장자는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바쁘게 함께 살 것을 청하였고, 이에 대해 공덕녀는 한 가지 조건을 제시하였다. "저에게는 결코 떨어질 수 없는 동생이 있습니다. 만약 제 동생도 함께 데리고 살겠다면 기꺼이 응하겠나이다." "낭자의 동생이라면, 앞을 못 보는 장님이라고 한들 내 어찌 마다하리요."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한 여인이 대문을 밀고 들어왔다. 그런데 이 어찌된 노릇인가? 그녀는 언니를 닮은 곳이라고는 한군데도 없었다. 흉측하게 일그러진 얼굴, 거무티티한 피부, 줄줄줄 흘러내리는 눈물과 콧물, 쳐다보기만 하여도 구역질이 나올 듯한 추녀 중의 추녀였다. "제 동생, 흑암녀이옵니다." 장자는 속이 뒤틀리는 것을 참으며 물었다. "그대는 어떤 여자인가?" "나에게는 묘한 재주가 있지요. 나를 보는 사람은 기분이 좋다가도 나빠지고 부유한 사람은 가난해지며, 재수 있던 사람은 재수가 없어집니다." 장자는 기겁을 하여 집 밖으로 내쫓으려 하였으나, 흑암녀는 찢어지는 듯한 음성으로 소리쳤다. "안돼요! 나는 절대로 우리 언니와 떨어질 수 없어요. 내가 가면 우리 언니도 함께 가야 해요." 결국 장자는 공덕녀마저 포기하고 말았다. 어둠에서 밝음의 세계로 이 이야기는 무엇을 깨우치고 있는 것인가? 우리의 인생살이 속에 지극히 아름답고 복덕이, 한량없는 공덕녀와 역겹도록 추하고 불행을 안겨주는 흑암녀가 공존하고 있음을 일깨우고 있다. 마치 손등과 손바닥이 함께 하듯이, 행복과 불행, 좋은 것과 나쁜 것, 밝은 것과 어두운 것은 언제나 붙어 다니기 마련인 것이다. 실로 우리의 삶에는 영원한 행복도 영원한 불행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불행 속에서 행복의 길을 찾을 줄 알아야 하고, 행복 속에 잠겨 있을 때에도 불행을 감지하며 새로운 행복의 길을 닦을 줄 알아야 한다. 행복과 불행, 사랑과 미움, 밝음과 어두움, 모든 상대적인 것이 공존하고 있는 이 순간, 바로 이 순간이 중요하다. 우리는 바로 이 순간의 행복에 도취되어 타락의 길로 빠져들어서도 안 되고, 불행을 비관하여 함부로 포기하거나 제멋대로 살아서도 안 된다. 오히려 지금의 행복과 불행을 기꺼이 받아들여 새로운 밝음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 어둠의 세계에서 밝음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 이것이 불자 생활의 기본자세요 인생살이의 묘미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밝음의 세계, 행복만이 가득한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부처님께서 누누이 말씀하신 삼학을 잘 배워 익히고 닦아야 한다. 곧 삼학은 불자 생활의 기본자세로서 나쁜 일을 모두 끊어버리고 좋은 일을 닦는 계, 마음을 고요히 안정시켜 삼매를 이루는 정, 몸과 마을의 안과 밖을 올바로 관찰하는 혜의 세 가지 기본 수행법이다. 이 세 가지 중 어느 하나라도 잘 닦으며 어둠을 벗어나 밝음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고, 행복이 가득한 해탈의 세계에 도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대반열반경11권에서- 인간의 사유방식이 이분법적(二分法的)이기 때문에, 이원론(二元論, Dualism)이 사람의 직관에 잘 들어맞는다. 선-악이나 정신-물질 이원론은 사람의 직관에 잘 맞을 것이다. 그러나 사물을 세밀하게 관찰하면 이원론으로 세상사를 설명하는 데는 많은 문제점이 따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원론이 아니라면 일원론(一元論, Monism)일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것이 인간의 사유방식이다. 그런데 사실 일원론도 여러 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다. 그러나 이중성(二重性, Duality)이 사물의 본질임을 알게 되면 이런 문제들은 자연스럽게 해소된다.『화엄경(華嚴經)』을 비롯하여 불교의 여러 경전에는 공덕녀(功德女)와 흑암녀(黑暗女)의 얘기가 나온다. 경전마다 얘기의 줄거리는 약간씩 다르지만 내용은 비슷하다. 공덕녀와 흑암녀는 자매로서 떨어질 수 없는 사이다. 둘은 항상 같이 다닌다. 공덕녀는 사람에게 재물과 건강과 행복을 가져다주는 아름다운 천녀(天女)이고 흑암녀는 추악한 여인으로 사람에게 불행과 재난을 가져다주는 악신(惡神)이다. 행과 불행, 부귀와 빈천, 공덕과 재난, 선과 악 등은 대립되는 개념이지만 이들이 같은 뿌리에서 오는 것임을 이 우화는 말하고 있다. 세상사의 이중성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공덕녀와 흑암녀의 얘기를 프로이드 심리학으로 해석하면 삶의 본능(Eros)과 죽음의 본능(Thanatos)이 될 것이다. 인간은 ‘삶의 본능’에 이끌려 삶을 살며 건설적인 행위나 사랑을 하게 되고 ‘죽음의 본능’에 이끌려 증오와 공격 등 파괴적인 행동을 하며 이 본능으로 인해 죽음에 이른다는 것이 이 이론의 골자다. 불교나 물리학이 이중성에 관해 얘기하더라도 보통 사람들이 이중성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 이중성을 이해할 수 있는 좋은 우화(寓話)가 하나 있다. 정신의학자 메닝거(Karl Menninger, 1893-1990)의 유명한 저서 『자기에게 배반하는 자(Man against Himself)』에 나오는 얘기다. 바그다드의 교외에 많은 노예를 거느리며 사는 한 부호가 있었다. 어느 날 이 부호가 한 노예를 바그다드로 심부름을 보냈다. 심부름을 보낸 후 시간이 얼마 지나지도 않아 이 노예가 시킨 일을 하지도 않고 가쁜 숨을 쉬며 되돌아왔다. 왜 심부름을 마치지도 않고 돌아왔느냐고 주인이 물었더니 이 노예가 대답했다. “제가 주인님의 심부름을 위해 바그다드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바로 길에서 죽음의 신을 만났습니다. 너무 무서워서 이렇게 도망쳐 왔습니다. 저는 죽음의 신을 피해 사가랴로 떠날 생각입니다. 지금 출발하면 오늘 저녁 해질 무렵엔 거기에 도착할 수 있을 겁니다.” 노예의 말을 들은 주인은 크게 노했다. “신이라는 자가 약속을 어기다니! 내 노예를 적어도 바그다드에서는 잡아가지 않기로 약속했는데 바그다드에서 너를 잡으려고 하다니! 너는 지금 바로 사가랴로 떠나거라. 부지런히 가면 해질 무렵엔 사가랴에 도착할 수 있을꺼야.” 말을 마치자 주인은 즉시 천상으로 올라가 죽음의 신을 만났다. 주인이 따지자 이번엔 신이 외쳤다. “무슨 소리야 놀란 건 내 쪽이야. 나는 오늘 해가 지면 그를 사가랴에서 잡기로 되어 있었는데 낮에 바그다드에서 그를 만났으니 내가 얼마나 놀랐겠어? 바빠. 나는 그를 잡으러 지금 사가랴로 떠나야 해.” 노예는 삶의 본능에 의해 사가랴로 도망치지만 이 행동이 그대로 죽음의 신한테로 가는 것이 된다. ‘삶의 본능’과 ‘죽음의 본능’은 하나의 뿌리에서 나온 것이다. 둘은 이중성을 이루는 것이다. -옮겨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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