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卍-불법을만나고/卍-불교자료실

불타(佛陀)와 불전(佛傳)-붓다의 깨달음[成道]

by 회심사 2017. 5. 2.


-붓다의 깨달음[成道]-
    1. 깨달음의 완성

    싯닷타 태자가 네란자라(Neranjara) 강가에서 목욕하고, 우루벨라(Uruvela) 근처의 세나니 마을의 촌장 세나니(Senani)의 딸 수자따(Sujata, 善生)가 공양 올린 우유죽을 먹고 체력을 회복한 뒤, 근처에 있는 앗삿타(assattha) 나무 아래 홀로 앉아 명상에 들었습니다. 앗삿타 나무는 아사왓타(asvattha) 나무 또는 삡빨라(pippala, 畢鉢羅) 나무라고도 하는데, 무화과 나무의 일종입니다. 거기서 드디어 석존은 '깨달음' (anttara sammasambodhi, anuttara samyaksambodhi, 無上正等覺·無上菩提)을 얻어 붓다(Buddha, 佛陀) 즉 '깨달은 자'[覺者]가 되었습니다. 이것을 중국이나 한국 · 일본에서는 흔히 '성도(成道)'라고 합니다. 이 말은 '깨달음의 완성'이란 뜻입니다.

    태자가 깨달음을 이룬 시기는 35세 때의 일이라고 합니다. 뒷날 붓다가 깨달음을 얻은 이곳을 붓다가야(Buddhagaya, 佛陀伽倻, 현재의 보드가야)라 이름하였으며, 앗삿타 나무를 보리수(菩提樹)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보리수 밑에는 금강보좌(金剛寶座, 성도할 때 앉았다고 하는 돌로 된 좌대)가 있으며 그 옆에는 사각 형태의 대탑(大塔)이 우뚝 솟아 있어 불교도에게 가장 중요한 성지가 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4각4면(四角四面)으로 위쪽으로 갈수록 좁혀져 있는 높이 52미터의 대탑입니다. 이 탑은 굽타 왕조의 위풍을 그대로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고장은 오랫동안 인도교(힌두교)의 손에 있다가 1953년 5월에야 불교도의 관리로 돌아왔습니다. 이곳은 탑 그 자체보다도 사실은 그 뒤에 있는 보리수에 이 성지(聖地)의 의미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부처님이 성도한 것은 이 보리수 아래에서였다고 전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보리수는 부처님이 입멸한 2백년 후에 불교에 귀의한 아쇼카왕(阿育王)을 비롯하여 굽타 왕조 때에도 대대로 존경의 대상이 되어 왔습니다. 중국의 법현(法顯)이나 현장(玄奘) 스님도 여기에 찾아와 보리수 울타리가 쳐 있다는 것과 그 주변에 정사(精舍)와 탑이 세워져 있는 것을 보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유적은 그 뒤 정글에 파묻혀 아는 사람이 없었는데, 1881년에 이르러 영국인 커닝햄이 발굴, 다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붓다의 성도일(成道日)은 후대의 전승에 따라 우리나라에서는 음력 12월 8일이라고 하며 남방의 불교국가에서는 베사카(Vesakha 月)의 만월일(滿月日)로 삼고 있습니다. 이것을 태양력으로 고치면 5월의 만월일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한역경전에서는 2월 8일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곳이 많습니다. 그 까닭은 베사카 달이 인도력의 둘째 달이기 때문입니다. 중국의 역법(曆法)은 자주 바뀌었으나 주(周)의 역법에 의하면 음려의 11월을 첫째 달로 헤아림으로 둘째 달은 음력 12월이 됩니다. 그러므로 중국·한국·일본 등지에서는 붓다의 성도일(成道日)을 음력 12월 8일로 보고 경축하게 되었습니다.

    2. 깨달음에 이르기까지

    석존이 깨달음을 이루기 전후의 사정을 불전문학에서는 아주 장엄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특히 대부분의 불전문학에서는 석존께서 깨달음에 이르기까지 악마(惡魔)와의 싸움을 계속했다는 사실을 매우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팔리어로 씌어진 <마하삿짜까-숫따(Mahasaccaka-sutta, 薩遮迦大經)>에서는 악마와의 싸움 부분을 생략하고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을 소상히 밝히고 있습니다. 경전의 내용을 요약 정리하여 소개하면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이제 나는 단단한 음식이나 끊인 쌀죽을 먹어 힘을 얻어서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버리고 악하고 불건전한 상태를 떠나서, 사유를 갖추고 숙고를 갖추고, 멀리 떠남에서 생겨난 희열과 행복을 갖춘 첫 번째 선정을 성취했습니다. 그러나 내 안에서 생겨난 그러한 즐거운 느낌은 나의 마음을 사로잡지 않았습니다.

    나는 사유와 숙고를 멈춘 뒤, 안으로 고요하게 하여 마음을 통일하고, 사유를 뛰어넘고 숙고를 뛰어넘어, 삼매에서 생겨나는 희열과 행복을 갖춘 두 번째 선정을 성취했습니다. 그러나 내 안에서 생겨난 그러한 즐거운 느낌은 나의 마음을 사로잡지 않았습니다.

    나는 희열이 사라진 뒤, 아직 신체적으로 즐거움을 느끼지만, 깊이 새기고 올바로 알아차리며 평정에 머물렀습니다. 그래서 고귀한 이들이 ?평정하고 새김이 깊고 행복을 느낀다?고 말하는 세 번째 선정을 성취했습니다. 그러나 내 안에서 생겨난 그러한 즐거운 느낌은 나의 마음을 사로잡지 않았습니다.

    나는 행복을 버리고 고통을 버려서, 이전의 쾌락과 근심을 사라지게 하고, 괴로움도 뛰어넘고 즐거움도 뛰어넘어, 평정하고 새김이 깊고 청정한 네 번째 선정을 성취했습니다. 그러나 내 안에서 생겨난 그러한 즐거운 느낌은 나의 마음을 사로잡지 않았습니다.

    이와 같이 마음이 통일되어 청정하고 순결하고 때묻지 않고 오염되지 않고 유연하고 유능하고 확립되고 흔들림이 없게 되자 나는 마음을 전생의 삶에 대한 관찰의 지혜로 향하게 했습니다. 이와 같이 나는 전생의 여러 가지 삶의 형태를 기억했습니다. …… 이것이 내가 밤의 초경에 도달한 첫 번째의 지혜입니다.

    참으로 방일하지 않고 열심히 정진하고 스스로 노력하는 자에게 그것이 나타나듯이, 무명이 사라지자 명지가 생겨났고 어둠이 사라지자 빛이 생겨났습니다. 그러나 내 안에서 생겨난 그러한 느낌은 나의 마음을 사로잡지 않았습니다.

    이와 같이 마음이 통일되어 청정하고 순결하고 때묻지 않고 오염되지 않고 유연하고 유능하고 확립되고 흔들림이 없게 되자, 나는 마음을 뭇삶(중생)들의 삶과 죽음에 대한 관찰의 지혜로 향하게 했습니다. 이와 같이 나는 인간을 뛰어넘는 청정한 하늘눈으로 뭇삶들을 보았습니다. …… 이것이 내가 밤의 이경에 도달한 두 번째의 지혜입니다. ……

    이와 같이 마음이 통일되어 청정하고 순결하고 때묻지 않고 오염되지 않고 유연하고 유능하고 확립되고 흔들림이 없게 되자, 나는 마음을 번뇌의 소멸에 대한 관찰의 지혜로 향하게 했습니다.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나는 있는 그대로 알았습니다. '이것이 괴로움의 발생이다'라고 나는 있는 그대로 알았습니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나는 있는 그대로 알았습니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나는 있는 그대로 알았습니다. ……

    내가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보자,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의 번뇌에서 마음이 해탈되었고 존재의 번뇌에서 마음이 해탈되었고 무명의 번뇌에서 마음이 해탈되었습니다. 해탈되었을 때에 나에게 '해탈되었다'는 앎이 생겨났습니다. 나는 '태어남은 부서지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다. 해야할 일은 다 마치고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라고 분명히 알았습니다. 이것이 내가 밤의 삼경에 도달한 세 번째의 지혜입니다.

    참으로 방일하지 않고 열심히 정진하고 스스로 노력하는 자에게 그것이 나타나듯이, 무명이 사라지자 명지가 생겨났고 어둠이 사라지자 빛이 생겨났습니다. 그러나 내 안에서 생겨난 그러한 느낌은 나의 마음을 사로잡지 않았습니다."

    위 경전의 내용을 요약하면, 태자는 먼저 사선정(四禪定)을 성취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태자의 마음은 고요하고, 맑고, 더러움이 없고, 무엇에 의해서도 장애를 받지 않는 자유로운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태자는 과거를 상기(想起)하고 먼 몇 세대 이전의 일들을 상기하였다고 합니다. 그때 태자는 초경(初更)에 제1의 명지(明知)를 얻고, 이경(二更)에서는 제2의 명지를, 삼경(三更)에서는 제3의 명지를 얻었다고 합니다. 이 세 가지 명지를 한역경전에서는 숙명통, 천안통, 누진통이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여기서 제3의 명지, 즉 누진통은 곧 네 가지 온전한 지혜[四聖諦]를 알고, 세속의 허망함이 연기(緣起)의 탓임을 아는 것과 일치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마지막 지혜가 생긴 것은 새벽이 통틀 무렵이었던 것입니다.

    한편 불전문학에 속하는 <방광대장엄경(方廣大莊嚴經)>에 묘사된 것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마라를 굴복시킨 보살은 사선정(四禪定)을 체험하였다고 합니다. 사선정은 보살만이 아니고 다른 많은 수행자들에게도, 또 나중에는 부처님의 제자에게도 공통되는 수행 방법입니다. 성도한 날 밤의 보살은 이것이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과정으로 되어 있습니다. 성도한 날 밤 보살의 체험은 초저녁(初夜) · 한밤중(中夜) · 새벽(後夜)의 세 단계로 나누어져 있다. 그 중 새벽, 즉 먼둥이 틀 무렵 부처로서의 자각(自覺)에 도달한 것입니다.

    사선정에 의해서 바르게 마음을 통일하고 청정 결백하여 광명으로 빛나며 더러움을 여의고 번뇌를 떨쳐버려 자유로이 활동하게 됩니다. 그러면서도 마음이 부동(不動)의 상태에 도달한 초저녁에 보살은 천안통(天眼通)을 얻었습니다. 천안통에 의해 중생이 살고 죽는 운명을 관찰하여 바른 지(智)를 실현하며, 어둠을 없애고 광명을 일으키고 있을 때 초저녁은 지나갔습니다.

    다음으로 보살은 역시 전과 같이 선정(禪定)에 든 맑은 심성으로 한밤중에는 숙주지(宿住智) 혹은 숙명지(宿命智)를 얻었습니다. '숙주지'라고 함은, 마음을 자유자재로 움직여 자기 자신과 다른 중생들의 무수한 과거의 생애를 생각해 내는 것입니다.

    다음에 보살은 역시 앞에서처럼 선정에 든 맑은 마음으로 새벽에 들어갔습니다. 그 새벽을 맞을 때 보살은 인간적인 고뇌를 말끔히 없애고, 미혹(迷惑)의 근원이 되는 번뇌를 죄다 쳐부수는 지견(智見)의 광명을 향해서 마음을 기울였습니다. 그리하여 보살은 누진지(漏盡智)를 체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때 보살은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합니다.

    "무엇으로 인해 늙음과 죽음이라는 것이 있을까. 도대체 무엇을 원인으로 늙음과 죽음이 있단 말인가. 태어남을 원인으로 해서 늙음과 죽음이 있다. 그러면 무엇으로 인해 태어나게 될까. 생존[有]으로 말미암아 태어난다. 그러면 무엇으로 인해 생존하게 되는 것일까. 집착[取]으로 말미암아 생존이 있다. 무엇으로 인해 집착하게 되는 것일까. 갈망(渴望·愛)으로 말미암아 집착이 있다. 무엇으로 인해 갈망이 생길까. 감수(感受 · 受)로 말미암아 갈망이 있다. 무엇으로 인해 접촉이 생기는가. 여섯 가지 감각[六處]으로 말미암아 접촉이 있다. 무엇으로 인해 여섯 가지 감각이 생기는가. 모양과 물체[名色]로 말미암아 여섯 감각이 있다. 무엇으로 인해 모양과 물체가 생기는가. 인식[識]으로 말미암아 모양과 물체가 있다. 무엇으로 인해 인식이 생기는가. 현상[行]으로 말미암아 인식이 있다. 그러면 무엇으로 인해 현상이 생기는가. 무명(無明)으로 말미암아 현상이 있다."

    이와 같이 해서 인간 고뇌의 원인을 연쇄적으로 차례차례 거슬러 올라가 고찰한 결과, 모든 것의 근원에는 '무명'이 있다는 것을 밝혀냈습니다. 무명에서 시작되는 이 연쇄 즉, 무명(無明)-행(行)-식(識)-명색(名色)-육처(六處)-촉(觸)-수(受)-애(愛)-취(取)-유(有)-생(生)-노사(老死)를 십이인연(十二因緣) 혹은 연기(緣起)라고 합니다.

    3. 깨달음의 내용

    사실 붓다께서 무엇을 깨달았는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동서고금의 수많은 학자들이 자신들의 견해를 밝히고 있습니다. 초기경전에 나타난 성도(成道)의 과정은 일치하지 않으며 많은 이설(異說)들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이루어진 연구에 의하면 이러한 이설은 15가지 정도가 되는데, 크게 네 가지 부류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①사제(四諦)·십이연기(十二緣起)와 같은 이법(理法)의 증득에 의했다고 하는 설.
    ②사념처(四念處)·사정근(四正勤)·사여의족(四如意足)·오근(五根)·오력(五力)·칠각지(七覺支)·팔정도(八正道)(이를 모두 합해 三十七助道品 혹은 菩提分法이라고 함)와 같은 수행도(修行道)의 완성에 의했다고 하는 설.

    ③오온(五蘊)·십이처(十二處)·사계(四界)와 같은 제법(諸法)의 여실한 관찰에 의했다고 하는 설.
    ④사선(四禪)·삼명(三明)의 체득에 의했다고 하는 설.

    이처럼 성도의 과정이 전승하는 바에 따라 일치하지 않은 것은 붓다 자신이 깨달음의 내용을 특정한 교설로서 고정시켜 설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붓다는 듣는 자의 근기에 따라 설하는 방법을 달리했기 때문에 깨달음의 내용이 여러 가지 형태로 전해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의 과정을 나타내는 여러 가지 교설 가운데 만약 가장 근본적인 것이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결국 연기사상(緣起思想)을 들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 경우 연기(緣起)라고 해서 그것이 바로 십이연기(十二緣起)처럼 완성된 형태의 연기설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십이연기와 같은 형태로 정리되기 이전의, 심원한 종교적 체험으로서의 연기(緣起)에 대한 자각이 바로 성도(成道)의 근본적 입장일 것입니다. 마스다니 후미오(增谷文雄)도 "붓다가 깨달은 존재 법칙으로서의 법이란 결국 연기의 도리였음이 확실하다."라고 말했습니다.

    붓다의 성도는 출가의 목적인 해탈의 완성이며 현세에 있어서 '열반(涅槃, nibbana, nirvana)'을 실현한 것입니다. 성도하기 이전의 붓다를 '보살(菩薩, bodhisatta, bodhisattva, '깨달음을 구하는 자'의 뜻)'이라고 하고 붓다가 된 후에는 '세존(世尊, Bhagavad)'이라고 존칭(尊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