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卍-불법을만나고/卍-법문의도량

인간의 일생 하룻밤의 꿈속이라네

by 회심사 2017. 8. 1.

    해마다 해마다 꽃모양은 같으나 사람의 얼굴은 달라진다. 아는 사람들은 모두 어디로 갔는지 대관절 알지 못하겠다. 그런데 뜰 앞의 복숭아꽃은 옜을 의지해 늘 피어 웃고 있더라. 사람은 가서 흔적이 없는데 뜰 앞의 복숭아꽃은 지난해에도 그 꽃을, 올해도 그 꽃이요 내년에도 그 꽃이라. 이는 우리는 죽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우리의 본마음은 변치 않습니다. 변치 않는 내 주인의 일을 해야 하는데, 눈, 코, 귀, 입, 몸뚱이, 번뇌 망상 도둑놈의 종노릇을 해서야 되겠습니까. 그렇다면 사람 몸을 받아온 보람이 없습니다. 지금 눈으로 보는 고깃덩어리, 송장은 내가 아닙니다. 이 몸뿐만 아니라 마음속에서 나온 착한 마음, 나쁜 마음도 내 마음이 아닙니다. 헛것입니다. 나왔다 없어지는 마음은 내 것이 아닙니다. 변치 않는 내 마음이 있을 뿐인데 세상 사람들은 나왔다 없어지는 마음을 의지해 살아 왔습니다. ‘반야심경’에서는 그것을 "전도몽상"이라고 했습니다. 전도몽상(顚倒夢想), 전부 꿈속의 일을 가지고 넘어지고 엎어지고, 고생을 만들어 되풀이 한다고 부처님이 걱정하지 않았습니까? 착한 일을 해보고 부귀영화를 누리고 별 재주를 다부려 보아야 지옥밖에 갈 곳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참다운 내일을 하는 사람, 살 길을 가는 사람들은 참선밖에 할 일이 없습니다. 참선은 참다운 내 주인, 변함없는 내 주인을 찾는 공부가 아닙니까? 일단 편 다리는 오므리지 못한다. 등은봉 스님의 도 깨달은 이야기입니다. 그는 성이 등씨 이기에 당시에는 등은봉으로 통했습니다. 어려서 똑똑치 못하다 해서 부모가 그의 출가를 허락하지 않았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그 일화에서 알 수 있듯 그는 총명한 편은 못되었습니다. 그러나 굳은 입지와 용맹스러움을 갖추고 있는 장점이 있었습니다. 그는 일찍부터 마조대사의 문하에 들어가 열심히 공부했으나 몇 해가 지나도 깨달음이 열리지 않았습니다. 하루는 마조스님에게 하직 인사를 올렸습니다. “어디로 가려느냐?” “석두스님 회상을 찾아뵙고 오겠습니다.” 석두스님이라 하면 마조스님과 함께 당시의 선문을 대표하는 거물이었습니다. 광서의 마조와 호남의 석두사이를 오가면서 수행하는 것이 당시의 추세로, 선객의 결제안거를 후세에서 광호회라 일컬었으니 선에서 차지하는 석두의 위치를 가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조심해라. 석두의 길이 미끄러우니라. 네가 감당하기 매우 어려운 인물이라는 경고이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광대가 줄을 타듯이 조심하겠습니다.” 등은봉의 의기는 하늘을 찌르는 듯했습니다. 석두암에 이르러 석두 화상의 주위를 한 바퀴 돈 다음 석장을 세우고 물었습니다. “이것은 어떤 종지입니까?” 그러자 석두스님이 소리를 쳤습니다. “창천, 창천” ‘창천’이라는 말은 실망스럽다는 말입니다. 처음부터 말이 막히고 말아 등은봉은 쫓기기라도 하듯 돌아와 그 일을 마조스님에게 보고했습니다. “다시 한 번 가거라. 가서 ‘창천’ 할 때를 기다려 ‘허허’ 해버려라.” ‘허허’는 실망하는 소리를 내는 말입니다. 석두스님 앞에 다시 나타난 등은봉 스님은 그 주위를 돈 다음 석장을 세우고 그 전처럼 물었습니다. “이것은 어떤 종지입니까?” “허허.” 도인이 미리 알고 ‘허허’ 해 버렸던 것입니다. 단 하나밖에 없는 무기를 도인이 먼저 써버렸으니 할 말이 없어 전보다 더 혼이 나 돌아온 등은봉을 보고 마조 대사가 말했습니다. “그러기에 석대사의 길이 미끄럽다고 하지 않았느냐?” 한번은 등은봉 스님이 요즘의 리어카와 같은 작은 수레로 물건을 나르고 있는데 지나는 길에 다리를 뻗고 앉아 있는 마조스님을 보았습니다. 은봉 스님이 소리 질렀습니다. “스님 다리를 오므리세요.” 마조스님이 꼼짝도 하지 않고 말했습니다. “일단 편 다리는 오므리지 못한다.” 이에 지지 않고 은봉스님이 말했습니다. “일단 가던 리어카는 멈추지 못합니다.” 은봉은 그대로 수레를 밀고 지나갔고 마조대사는 다리를 다쳤습니다. 다리를 절뚝거리면서 법당으로가 상단에 앉아 도끼를 들고 마조대사는 외쳤습니다. “아까 내 다리를 다치게 한 놈은 썩 나서 거라.” 마조대사는 소처럼 걸음을 걷고 눈은 호랑이처럼 무서웠답니다. 이렇게 위의가 있는 마조스님이 도끼를 쳐들고 고함을 질렀으니 온 산중이 떨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은봉은 조용히 나와 목을 내밀었고 이를 본 마조대사는 들어 올렸던 도끼를 내려놓았습니다. 이미 과거의 등은봉이 아니었던 것이니 이미 좀 전에 깨달았던 것입니다. 바위에 종자를 심는 사람들 공부를 해 놓으면 나고 죽는 것이 나와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이를 의지해 사는 사람은 고생감입니다. 이 세상과 죽은 세상은 한 집안입니다. 절대 죽지 않습니다. 농사를 지을 때는 급히 서둘지 말라고 합니다. 종자를 고를 때는 늦게 구하더라도 좋은 종자를 구하고, 또 늦더라도 바위 위에나 모래에 심지 말라고 합니다. 급하다고 미련한 마음으로 아무데나 심어버리면 본전도 못 찾기 때문입니다. 참선 공부하지 않고 세상에서 재주 피우려고 하는 사람은 바위 위에 종자를 심는 것과 같습니다. 세상 재주 피우지 말라고 합니다.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은 똑똑한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조그만 재주를 피우려다 해탈을 못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바보 노릇하고 미련한 사람 되라고 하는 것입니다. 옛 스님네들은 요즘처럼 감투 쓰고 돈 벌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무슨 복으로 수행자의 몸을 받고 사람 몸을 받았는가.’ 그것 하나에 만족했습니다. 공부를 하다 하다 안 되면 가사장삼도 벗고 깡통을 차고 거지가 되어 얻어먹으러 다닙니다. 그러면 상좌들이 찾아와 말합니다. “저희들을 두고 왜 이리 고생을 하십니까.” “이렇게 너그러운 생활을 하는데 무슨 고생이란 말이냐. 보잘 것 없는 깡통이니 훔쳐갈 것 없고, 밥을 얻어먹고 사니 누구와 싸울 것도 없지 않느냐. 잘 살려고 하면 누구와 싸워야 하는데 그런 일 없으니 이것이 곧 극락 아니냐. 그렇게 말해도 못 알아듣고 돌아다니는 제자들에게 다시 말합니다. “죽을 때에는 천자의 죽음이나 거지의 죽음이 조금도 다를 것이 없느니라. 업만 따라다닐 뿐,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나그네이니 죽음엔 차별이 없다. 거지 노릇하는 가운데 부처가 나올 수 있지만 세상의 권리와 부귀영화를 누리는 사람들 중에는 부처가 나올 기약이 없다. 연극쟁이로 사는 수행자, 수행자들은 세상을 연극쟁이처럼 거짓으로 삽니다. 잘난 척하고 사는 세상 사람들 제일 불쌍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죽으면 이 사람 몸을 잊어버립니다. 두 다리를 뻗고 길을 막고 있던 마조는 그 자체가 하나의 공안이었습니다. 그 화두에서 깨달아 버린 것입니다. 마조가 왜 다리를 뻗고 오므리지 않았을까? 마조도 헛것이고 등은봉 자신도 헛것이었기에 송장가루를 만들어 버리겠다고 밀고 지나간 것입니다. 똥자루인 이 몸, 송장에 속아서는 안 됩니다. 거지일지라도 이 법을 아는 사람은 부자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욕심이 없는 사람이 제일 부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물질을 많이 가지고 있는 부자도 가지고 있는 것이 모자라 더 구하려고 하니 심장도 타고 간도 타고 오장육보가 다 탑니다. 그런데 옥심이 없는 사람들은 그런 것이 필요 없으니 부자 아닙니까. 행복은 마음속에 있는 것이지 절대 밖에 있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은 모두 없어집니다. 앞으로 하늘도 땅도 달도 다 없어집니다.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거꾸로 서서 죽은 사람이 있느냐 마조스님에게로 전해진 도를 온몸으로 현재에 나타내는 등은봉, 그러기에 마조를 넘는 것은 부처님도 조사도 넘어 버려 본래면목으로 되돌아가는 일이 되고, 그렇게 하지 못했다면 여전히 미혹의 차원에 남아 있었을 터인데, 등은봉은 과감히 수레를 밀어붙임으로써 마지막 장애인 부처나 조사를 뛰어 넘어 버린 것입니다. 밀고 가느냐. 마느냐를 놓고 왜 망설임이 없겠습니까. 그러나 밀고 가기로 결정하는 순간에 온갖 분별망상을 아울러 끊어 버리는 결과가 되었던 것이니, 제자를 위해 몸을 던진 마조스님의 자비심과 스승조차도 눈 안에 두지 않은 제자의 기백이 어우러진 곳에 얻어진 위대한 성과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쨌거나 이를 계기로 등은봉은 걸림이 없는 묘용을 발휘하는 도인으로 바뀌었습니다. 사형인 남전이 등은봉을 찾았을 때의 일입니다. 남전스님이 여러 제자에게 물병을 가리켜 보이면서 말했습니다. “물병은 경계인데 속에는 물이 들어 있다. 자, 이 경계를 조금도 움직이지 않은 채 나에게 물병을 가져와 봐라.” 이에 다른 사람들은 모두 꿈쩍을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등은봉 스님이 앞으로 나가 물병을 잡자 그대로 남전스님 앞에 물을 쏟았습니다. 눈앞에서 콸콸 쏟아지고 있는 물을 보고 남전스님도 더는 대꾸하지 못했습니다. 병을 들고 물을 쏟았으니 경계를 움직인 것이 되지 않는가 생각될지 모릅니다. 그러나 ‘경계를 움직이지 않는다. 함은 ‘경계에 끄달려 물들지 않음’을 이르는 것뿐이니 등은봉의 행위는 조금도 도리에 어긋남이 없습니다. 이런 신통묘용 앞에서야 남전인들 무어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는 죽을 때도 심상치 않았습니다. 제자들에게 그가 물었습니다. “서서 죽는 사람들이 있느냐?” “있습니다.” “그렇다면 거꾸로 서서 죽은 일도 있느냐?”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그러자 등은봉 스님은 물구나무서기를 한 채 숨을 거두었습니다. 바로 누이려고 밀었으나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다시 화장을 하려고 시체를 밀었으나 넘어가지 않은 채 꼼작하지 않았습니다. 수행자가 되어 있는 속가의 누이가 그 말을 듣고 달려왔습니다. “살아서도 법을 따르지 않더니 죽어서도 골탕을 먹이고 이게 무슨 짓이요?” 누이가 이렇게 나무라고 시체를 밀어내자 넘어가니, 비로소 화장을 할 수 있었습니다. 생사자재의 경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속에 이르러서는 털끝만큼이라도 부처나 법이라는 소견이 있다면 벌써 화살은 서쪽 하늘로 지나갑니다. 필경에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높은 봉우리에 이르지 못하면 어찌 세상만사를 알 수 있으리오. 입을 막고 남은 세월 ‘이 뭣고’ 하라 도인은 집(몸뚱이)을 비우고 나갔다가 들어와 법문하기도 합니다. 몸뚱이가 필요 없으니 내버리는 것이지 죽지 않습니다. 공부를 하면 신통력으로 염라국 귀신들에게 잡혀가지 않습니다.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 갓난아기일 때는 부모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 공부도 처음배울 때만 의지해야지 나중에는 부처님도 버려야 합니다. 도만 닦아야 합니다. 깨치기 전에는 안다고 하는 것이 아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 다 모아 놓아도 진정으로 아는 사람 하나 못 당합니다. 그런데 똑같은 사람이 되어 바보들을 따라다닐 것 있습니까. 부처님께선 나만 못한 사람들이 있을 때에는 독보, 홀로 걸어라 그렇게 말하셨습니다. 봄에 씨 뿌릴 시기를 놓쳐 버리면 종자를 심을 수 없지 않습니까. 나중에 씨 뿌려 수확을 할 수 없듯, 사람 몸을 잃어버리면 부처님 법을 만나지 못합니다. 그러니 지금 성불은 못하더라도 종자를 심고 인연을 맺어 놓아야 합니다. 누가 나를 도와주지 않습니다. 관세음보살도 나를 도와주지 않습니다. 내 일은 내가 해야 합니다. 세상을 다 돌아보아도 내가 나를 도와 줄 수 있을 뿐 나를 도와 줄 사람은 없습니다. 또 내가 나를 해칠 뿐 남이 나를 해치는 것은 아닙니다. 죽을 때 고통 받는 것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죽은 뒤 무슨 몸을 받느냐가 문제입니다. 죽지 않는 끝이 없는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항상 몸을 받을 수 있다면 좀 미루어 가면서 공부를 해도 되겠지만 사람 몸 한번 잃어버리면 부처님이라는 이름도 듣지 못합니다. 나중에 피 눈물 흘리고 울어도 소용없으니 입을 막고 남은 세월 ‘이 뭣고’ 하는 일밖에 없습니다. 좀 멀리 보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 인간의 일생이라는 것이 하룻저녁 꿈인데, 어찌 하룻밤 꿈속에서 앞으로 끝이 없는 세상일을 다 망가뜨리느냐 말입니다. 공부하지 않고 게으른 죄가 부모님 천만 명 죽인 죄보다 크다고 했습니다. 세상 재주 배워 남에게 대접 받는 명리 죄가 부모 억 만 명을 죽인 죄보다 커서 황하의 강물로도 씻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남에게 대접 받으려고 하지 마시오. 바보처럼 미련하게 공부하려고 할 뿐, 이 세상일을 잘하려고 하지 마시오. 그 때문에 지옥에 가고 호랑이 밥, 독사 밥을 면치 못하는 것입니다. -혜암 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