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卍-불법을만나고/卍-불교자료실

적멸보궁엔 왜 불상이 없나요?

by 회심사 2019. 5. 7.



-적멸보궁엔 왜 불상이 없나요?-
    문 : 석가모니 부처님의 사리를 모신 적멸보궁에 가끔 가서 기도를 합니다.
    그런데 부처님의 사리도 친견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불상도 없기 때문에 가끔은 기도를 마친 후에 허전해지기도 합니다.
    일정한 때를 정해 사리를 친견할 수 있게 하거나 아니면 차라리 불상을 모시고 기도하면 더 나은 방법이 아닐까요?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변하는 허상
    참된 부처님의 실체는 적멸한 평화

    답: 석가모니부처님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모신 곳을 적멸도량(寂滅道場) 또는 적멸보궁(寂滅寶宮)이라고 하며, 그 법당은 불상을 모시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리 친견도 할 수 없는데다 불단의 빈자리나 빈 벽을 향해 기도해야하는 입장에서는 좀 막연할 수도 있겠지요.

    물론 통도사처럼 유리벽을 통해 사리탑을 보면서하는 경우는 좀 나을 수도 있겠군요. 그러나 불상과 사리탑은 모두가 거울과 같은 작용을 하는 것이고, 거울작용이라는 것은 관상기도(觀相祈禱)인 셈입니다. 즉 장엄한 불상을 보건 빈 벽을 보건 마음에 부처님을 떠올려 그 체온과 향기를 느끼며 기도할 때만이 관상기도의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더 중요한 것은 관상기도를 넘어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초보자일 경우에는 시청각적인 것에 의지해 방향을 잡고 그 방향을 따라 나아가면 되지만, 그것은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보이려 했던 깨달음의 자리와는 너무나 멀리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다음에는 눈에 보이는 불상이 아닌 마음에 그려지는 부처님의 모습을 관하는 기도를 하는 것이고, 이 경지가 되면 언제 어디서나 부처님의 형상을 관하면서 기도를 할 수 있게 됩니다.

    하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에도 분명히 말씀하셨듯이 형상 있는 모든 것은 그림자 같고 물거품 같은 것일 뿐입니다. 그것을 붙들고 집착하게 되면 다시 또 큰 병통이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결국은 형상 없는 자리로 향해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행복의 조건이라고 생각하는 대부분의 것들은 사실은 스스로가 일으킨 욕망의 그림자입니다. 이 욕망의 그림자는 커질수록 더 허전한 마음도 동시에 커지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치 바다에 표류하는 이들이 목마르다고 바닷물을 마시게 되면 잠깐은 나아진듯하지만 곧바로 걷잡을 수 없는 갈증이 생기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다음 단계로는 욕망을 다스릴 수는 있지만 아직도 손에 잡히는 물질적인 것에 의존하는 심리입니다. 주머니에 돈이 없으면 괜히 불안해하다가 얼마간의 돈이 있으면 든든하게 생각하는 심리입니다. 이것이 사람들로 하여금 막연한 행복감을 갖도록 착각을 일으키게 합니다. 이윽고는 정신적 만족감이 사람들로 하여금 행복하다고 착각하게 만듭니다.

    이 경우는 학문적인 업적이 될 수도 있고, 예술적 성취감도 될 수 있으며, 종교적 신앙심도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도 또한 순간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결국은 더 높은 곳을 향해서 맹목적으로 치닫게 만듭니다.

    이상에서 살펴본 행복의 조건들은 언제나 더 많이 채워야 한다는 특징을 갖는데, 그게 마음대로 될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그래서 결국은 고뇌로 가득 차게 됩니다. 그러므로 선지식들은 앞의 원인부터 완전히 비우라고 합니다. 완전히 비운 자리를 일반적인 용어로 표현하자면 한없는 평화인데, 그것을 불교에서는 적멸이라고도 하지요.

    우리는 부처님을 끝없이 밖에서 찾고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엔 우리가 찾던 것이 그저 허상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하여 부처님은 내 안에 살아 있음을 자각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것이 진정한 적멸도량입니다.
    물론 그 도량에 ‘나와 내 것’은 없지요.

    송강스님 / 개화사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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