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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사상-금강경

by 회심사 2019. 7. 17.


반야사상-금강경

      금강경의 본디 명칭은《금강반야바라밀다경》이다.
      혹은 《능단(能斷) 금강반야바라밀다경》이라고도 한다.
      금강(vajracchedika)은 부처님의 반야지(智)를 비유한 것으로, 이 세상의 무엇으로도 깨뜨려지지 않으나, 이 세상의 무엇이든 깨뜨릴 수 있다는 뜻으로 사용된 것이다.

      즉, 무명(無明)이 아무리 무겁고 단단하더라도 능단금강과 같은 반야의 지혜로 깨부술 수 있다고 여겼으므로 '금강과 같은 단단한 지혜로써 깨달음을 얻어 저 언덕에 도달하는 가르침'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금강경》은 산스크리트 원본이 현재 남아있다.

      경전의 역사를 보면 《금강경》이 역대의 경전 중 가장 오래된 것임을 파악할 수 있다.
      그 첫째 이유로 《금강경》에는 공(空)이란 단어가 없다는 것이다. 공(sunya)의 인도어의 뜻은 ①텅 비어 아무 것도 없는 것 ②꽉 차 있어 더 이상 채울 수 없는 상태 ③궁극적인 절대 완전의 진리 등으로 해석된다.

      이에 합당한 중국어가 없어 초기에는 노자의 《도덕경》에서 빌어서 쓰다가 번역상의 한계로 인해 결국 공(空)이란 단어를 창조해서 사용하게 되었다. 언어와 문화라는 것은 이처럼 종교를 통해 많은 영향을 주고받고 있다.

      대부분의 경전에 수없이 등장하는 공(空)이라는 개념이 《금강경》에 나타나지 않았음은 결국 금강경이 오래 전에 성립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둘째로, 대개의 경전들의 경우 시대가 흐르면 흐를수록 서론(序論)부분이 길어졌다. 흔히 '이렇게 저는 들었습니다'로부터 '당시 부처님은 어느 곳에서 누구누구와 함께 계셨다'고 하는 권위를 내세운다. 일종의 과시로서 서론을 장황하게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초창기의 경전일수록 간단하게 이루어져 있다. 간략한 것으로는 《금강경》이 가히 전형이라 하겠다.

      셋째 이유로, 《금강경》에 자주 등장하는 구절을 볼 수 있다.
      "그대가 만약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따른다면 다른 사람들이 그대를 존경하기를 마치 탑(塔)을 공경하는 것과 같게 할 것이다."

      《금강경》이 나올 당시에 탑을 공경하는 신앙이 무척 번성했었음을 파악할 수 있다. 부처님 입멸 후 그분의 진영을 뵈올 수 없게 되자 부처님의 법신을 넣은 탑을 만들어 모든 제자들이 열렬히 신봉을 하였다. 당시가 B. C 2 세기경으로 무불상(無佛象) 시대라고 일컫는다. 이러한 위의 세 가지 이유 등을 종합해 볼 때 《금강경》을 가장 오래된 대승경전 가운데 하나로 평가할 수 있다.

      《금강경》의 본문을 살펴보자.
      "수보리야, 네 생각이 어떠하냐. 가히 몸의 모습을 가지고 여래의 모습을 볼 수 있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몸의 모습을 갖고서는 여래의 모습을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말씀하신 바 몸의 모습은 곧 몸의 모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수보리야, 무릇 있는 바 모습이란 모두 허망한 것이다. 만약 네 눈앞에 있는 모습이 참 모습이 아님을 알게 되면 곧 여래를 볼 수 있느니라"

      이 부분은 수보리가 몸의 모습을 갖고 여래를 볼 수 있는지의 여부를 여쭌 장(章)이다.
      여래는 32상 80종호로 설명되는 훌륭한 몸의 모습을 지니신 분이다.
      때문에 여래의 몸이란 남다르다는 인식을 지닌 상황이다.
      그러나 여래께서는 오직 그 이름이 몸이며 참 몸의 의미는 아니다 라고 설명해 주셨다.
      이 구절을 통해 우리는 많은 것을 배우게 된다.
      우리들 눈앞에 보이는 온갖 미추의 모습들이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보게 되면 바로 여래를 볼 수 있다.

      단지 여래를 못 보는 이유는 눈앞의 사물에 대한 착각 때문인 것이다.
      마음이 하나의 대상에 머무는 것이 아닌, 보다 큰 경지에서 바라보고 수용하는 것이어야 하겠다. 몸의 모습이라는 표현은 결국 인격적 특징을 말한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이 인격성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있다.

      "‥‥수보리야, 내가 말한 반야바라밀은 곧 반야바라밀이 아니니라"(제 13장 중에서)

      언젠가 세존께서는 이러한 예를 들어 보이셨다.
      중생들을 열반의 언덕으로 가게 하려고 반야를 가르쳤다.
      세속의 바다를 건널 때 반야라는 뗏목이 필요하다.'
      일단 우리가 바다를 건너면 그 뗏목은 버려야 한다.
      무명을 제거하기 위해 반야가 설명된 것임에도 반야를 늘 고집하려 함을 종종 볼 수 있다. 결국 반야마저도 버려야 하며, 불교마저도 버린 곳에 불교가 있다는 뜻이다.

      "수보리야, 네 뜻이 어떠하냐. 여래께서 말씀하신 바 법이 있는가."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한 말씀도 하신 것이 없사옵니다."(제 13장 중에서)

      이 구절은 반전의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반전과 포용력을 통해 불교는 새로운 의미를 지니며 새롭게 소생하고 있다.
      만약 여래가 말한 바 있고, 중생들이 배운 바 있다면 우리 또한 집착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
      말했지만 한 바 없다는 표현은 변증법이다.
      즉 부정의 부정을 통한 절대긍정을 시도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질적인 변환이 바로 반야사상의 특징이다.

      "수보리야, 네 뜻이 어떠한가. 가히 32가지의 훌륭한 모습으로써 여래의 모습을 볼 수 있겠는가."
      "세존이시여, 볼 수 없습니다. 결코 32가지의 모습으로는 여래의 모습을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말씀하신 바, 32가지의 모습은 곧 32가지의 모습이 아니며 오직 그 이름만이 32가지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제 13장 중에서)

      일체의 관념과 개념, 일체의 형상화를 모두 부정하는 내용이다.
      이는 현대철학의 부정의 부정을 통한 극도의 질 높은 변증법의 논리이다.
      이를 통해 절대 긍정을 얻는 《금강경》은 변증법을 극대화시킨 논리임을 알 수 있다.
      원래 32가지 모습이란 부처님께만 있는 신체적 특징을 말한다.
      부파불교 당시 부처님에 대한 절대화, 신격화 작업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즉 부처님을 절대적 인격체로 보려고 하는 견해에 대한 비판이다.
      부처님은 결코 인격적 존재가 아니다.
      그분은 살아 생동하는 삶 그 자체이며, 우리들 가슴속에 살아 숨 쉬는 영원한 가능성이다.

      "수보리야, 만약에 보살이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을 갖고 있으면 그는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다."(제 17장 중에서)

      여기서 아상(我相)이란 내가 잘났다고 여기는 생각이며, 인상(人相)은 나는 사람이라는 에고이즘의 입장에서 짐승을 차별하고, 성인과 범인(凡人)등을 비교· 경멸하는 대립적 생각을 말한다.
      또한 중생상(衆生相)은 괴로운 것을 싫어하고, 즐거운 것을 탐내는 동물적인 행동이나 생각의 현상이고, 수자상(壽者相)이란 제행무상의 이치를 잊고 물심(物心)에 마음을 내어 집착함을 말한다.
      혹은 장수에 대한 미련을 가리키기도 한다.
      이러한 네 가지 상을 4상(四相)이라고 한다. 보살들이 경계해야 할 네 가지 생각인 것이다.

      금강경의 사상 (김운학: 전 동국대 선학과 교수)

      <금강경>은 6백부 <대반야경> 가운데 제 577부 16회 제9회에 해당되는 '능단금강분(能斷金剛分)'을 말한 것으로 그 구체적인 명칭은 <금강반야바라밀경> 또는 <능단금강반야바라밀다경>이다.

      범어 vajracchedika-prajna-paramita-sutra에 의한 것으로 <반야경> 가운데 가장 간결하고 중심된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제명(題名)의 뜻으로 보면 가장 굳은 금강석이 능히 모든 것을 끊을 수 있는 것과 같이 가장 단단하고 완벽한 반야의 지혜로 피안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인데, 이것은 <금강경>이 그만큼 모든 집착과 분별을 끊고 바라밀다 즉, 피안에 이를 수 있는 절대적인 법을 설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금강경>은 그 내용이 약 300송(頌) 정도의 분량이기 때문에 <삼백송반야경>이라고도 하는데, 그 성립기는 대개 서기 150~200년 경의 대승불교 최초기로 보고 있다.

      그것은 이 경에 대승이나 소승과 같은 술어도 찾을 수 없고 또 이 경이 공(空) 사상을 설하고 있는데 내용 중에는 공이라는 술어가 나오지 않는 것으로 보아 다른 반야경과 달리 공의 용어가 확립되기 전에 성립했을 것이라는 추측으로 소승과 대승의 두 개념이 분명히 대립되기 전에 성립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여기에는 대승경전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설법 회좌(會座)의 대중도 구체적으로 명기하지 않고 원시경전과 같이 '1,250인의 수행자와 같이'의 극히 간단한 형식을 쓰고 있으며(다만 의정역에는 보살중을 더하고 이다), 그 표현에 있어서도 대승의 정형적이 아닌 청신(淸新)한 사상감이 보이는 것 등을 종합해 보면 역시 대승사상 최초기에 성립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또 이 <금강경>은 상좌부의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와 같은 상층계급적인 것이 아니고 일반 서민적인 동산주부(東山住部), 서산주부(西山住部), 법장부(法藏部)적인 것이라 보는 학자들도 있다. 그것은 이 경에 어떤 물질적인 공양보다 경 독송의 공덕이 헤아릴 수 없이 크다고 일관해 있는 점 등에서 나온 것이다.

      따라서 <금강경>은 대승경전의 가장 초기에 가장 순수하고 가장 참신한 대표적인 경전이라 볼 수 있다.

      이 <금강경>이 구마라집에 의해 처음 한역된 뒤 그것이 동양 삼국에서 가장 많이 독송된 경전 중의 하나라는 것도 역시 이러한 점에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더욱 중국불교에서는 삼론(三論) 법상(法相) 화엄 천태 등의 제종은 물론 선종에서 특히 근본경전으로 널리 독송되고 있는 것은 이 경의 철학이 그만큼 깊고 밝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제 이 <금강경>의 내용은 어떠한가.
      그것이 공사상이고 피안에 이를 수 있는 절대적인 사상임은 분명하지만 <금강경>에 이 내용이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 다음에 간단히 정리해 보자.

      이것은 육조 혜능이 이미 들고 있던 것처럼 무상(無相)을 종(宗)으로 삼고, 무주(無住)를 체(體)로 삼으며, 묘유(妙有)를 용(用)으로 삼는다는 것으로 요약해 보면 적합할 것이다.

      먼저 무상을 종으로 삼는다는 말은, 법에는 어떤 모양도 없다고 하는 것이 근본이 되는 것으로 이것은 일단 모든 것을 부정하는 철학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물질적인 것이나 정신적인 것, 존재하는 것은 다 부정하는 철학이다. 부처님 자신이 수보리와의 대화 중 이것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는데, 그것은 부처님의 성상(聖像)이 되는 32상(相)도 그것이다. 결국 다 없음은 물론 아상(我相)도 없고 인상(人相)도 없으며, 중생상(衆生相)도 수자상(壽者相)도 없다는, 다시 나아가 법의 상도 없고 법상(法相)이 아니라는 것도 없다는 부정의 부정까지를 들고 있는 것이다. 자기와 자기 내부에서 움직이는 사유작용을 철저하게 부정함으로써 참다운 진실을 찾으려고 한 것이다.

      존재를 인정하고 판단을 따른다는 것은 그것이 아무리 높은 경지의 것일지라도 결국 상대적 유(有)의 관계에 불과하기 때문에 이를 철저히 부정하고 그 가운데서 초월적 존재와 자아를 찾는 것이다.

      때문에 경의 내용에도 보면 모든 존재하는 모양은 다 허망하여 이것을 다 모양이 아닌 것으로 보는 것이 참답게 부처를 보는 것이라고 나와 있는 것이다. 부처님이나 진실은, 존재의 것을 존재대로 보는데 있지 않고 그것이 허망하여 없는 것으로 보는데 바로 보는 이치가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다음 주함이 없는 것을(無住) 근본으로 삼는다는 것도 결국 존재와 상황을 인정하지 않는 무상(無相)의 철학 아래서 당연한 귀결이다.

      어느 곳에 머문다고 하는 것은 벌써 집착이 되어 진심을 나타낼 수 없기 때문에 색이나 소리나 냄새나 맛이나 닿음 등에 주착(住着)해서 안 될 것임은 물론, 정신적인 법에도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이 <금강경>의 주장이다.

      즉 물질은 성주괴공(成住壞空)으로 변해가고 정신은 생주이멸(生住異滅)로 흘러가 버리는 것인데, 어느 곳에 주하고 머물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때문에 모든 것은 주할 수도 없고 또 머물러서도 안 된다는 것이 반야의 법인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이 <금강경>의 도리는 모든 것을 부정만 해버리는 멸제(滅諦)의 법에 그치는 것인가. 그러나 <금강경>은 육조도 제시하고 있는 것처럼 이 부정의 가운데서 다시 존재를 인정하는 묘유(妙有)를 들고 있다.

      이것은 앞에서도 든 일체의 존재를 보지 않는 것이 곧 부처를 본다는 구절에서도(若見諸相非相卽見如來) 나타나 있지만 항상 머무르지 않는 가운데서 마음을 쓴다는(應無所住而生其心) 구절에서 더욱 그 활용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 무(無)는 결코 완공(頑空)이 아니고 활공진공(活空眞空)으로서 부정 가운데서 존재를 긍정하는 법인 것이다.

      이렇게 <금강경>은 그 내용과 사상이 간단하면서도 불교의 진수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오늘날에도 많이 애송되고 있는 것이다. 더욱 그 내용이 집착과 분별을 배제시키는 적절한 철학으로 되어 있어 선종(禪宗)에서는 선리(禪理)의 중요한 이론이 되어 일찍이 육조 이후부터 선종의 소의경전이 되어 왔으며, 우리나라에서도 이 전통이 그대로 이어져 온 것이다.

      <금강경>은 참으로 가장 간단하고 깊은 소중한 경전이며 누구나 깊이 간직해야 될 경전임에 틀림없다.
반야사상-금강경.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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