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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 사상

by 회심사 2019. 7. 17.


반야사상

      반야란 사물의 피상적인 모습을 떠난, 절대 완전한 지혜라는 뜻이다.
      즉, 현상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하는 인간이 가장 완벽하고 이지적인 지혜의 눈을 지니게 되는 상태를 의미한다.

      불교 내부에 대승불교운동이 일어나게 되면서 어떠한 사상적인 발전을 하게 되었을까.
      대승불교의 흐름은 크게 반야사상과 유식사상의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먼저, 반야사상에 대해 개괄적으로 살펴본다.
      반야사상은 반야경에 나타나 있는 중심사상이다.
      반야(般若)란 인도어 '프라냐(prajna)'를 음역한 것이다.
      반야란 사물의 피상적인 모습을 떠난, 절대 완전한 지혜라는 뜻이다.
      인간의 삶은 주관적 인식과 그에 따른 객관적 판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사물을 인식하는 주관적인 태도에는 늘 문제가 있다.
      어떤 경우에는 매우 훌륭해 보이다가, 혹은 아주 형편없다고 느껴지기도 한다.
      왜냐하면 인식의 허망성 때문이다.
      언제나 자신의 이기적 편견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객관적인 대상을 제멋대로 변질시킬 우려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이와 같은 인식을 분별지(分別智)라고 한다.
      반야는 이 분별지를 벗어난, 말 그대로 형안(炯眼), 본질적 인식을 말한다. 불교의 수행으로 이 반야지를 얻어야 한다는 것이다. 후에 이 반야사상을 발전시킨 용수는 공(空)·가(假)·중(中)이라는 논리를 펴기도 하였다.

      한 떨기 아름다운 꽃이 피어 있음을 보았을 때 피상적 인식은 아름답다고만 느끼게 된다.
      그러나 반야의 입장에서는 피어 있는 꽃은 아름답기는 하나, 언젠가는 병들고 썩어 없어짐으로 통하리라는 것을 인식할 줄 안다. 따라서 우리는 꽃의 본성이 공이고 헛되다는 것(假)을 알아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꽃의 아름다움에 집착하지 않는다. 동시에 그 말로를 연상하고 서러워하지 않는다. 즉 완벽한 중도의 세계를 펼쳐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반야란 현상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하는 인간이 가장 완벽하고 이지적인 지혜의 눈을 지니게 되는 상태를 의미한다.

      초기의 대승불교운동은 반야사상으로 점철되어 있다. 반야사상의 중심적인 불교경전은 이러하다. 《대반야바라밀다경》600여 권,《반야심경》, 《금강반야바라밀경》3권, 《반야이취경》등이 있다.

      반야심경
      먼저, 가장 간략하게 반야의 사상을 요약한 《반야심경》을 살펴본다.
      이 경은 전문(全文)이 총 260자로 되어 있으며, 본디 이름은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이다.

      마하(maha)란 '거대한, 무한히 큰'의 뜻을 지니고 있고, 반야바라밀다(prajna paramita)는'지혜의 언덕에 도달한 상태'를 의미하며, 심경이란 '중심·심장'의 뜻을 지닌 경전이란 의미이다. 다시 설명하면 '위대한 절대 완전한 지혜로써 열반의 언덕에 도달하는 법을 가르치신 마음의 가르침'이라 할 수 있겠다.

      고래로 《반야심경》은 불자들의 독송용으로 애용되어 왔다. 문장이 간결할 뿐 아니라 담고 있는 의미가 그윽했기 때문이다. 그저 막연히 《반야심경》암송에만 급급할 것이 아니라, 뜻의 의미를 되새기며 우리들에게 하시고자 하는 깊은 말씀을 받아들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반야심경》을 해석해 보며 그 속의 진리들을 함께 음미해 보자.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께서 깊은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密多)를 행할 때 오온(五蘊)이 모두 공(空)함을 밝게 보아 고통과 재난에서 건지느니라.

      여기서 주인공은 관자재보살로 우리들이 흔히 관세음보살이라 부르는 보살이다.
      이분은 자비가 으뜸인 보살로 알려져 있다.

      불교경전에는 수많은 보살들이 등장하고 있다.
      이로 인해 서양학자들이 '불교는 다신교'라고 오해를 일으키기도 했다.
      불교의 보살들은 실재하는 인물이 결코 아니다.
      대승불교에서 상징적으로 내세운 분들로 중생의 고뇌를 덜어 주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이후에 대승불교가 성숙·발달되면서, 보살들은 모두 우리들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나온다고 설명되고 있다. 관세음보살은 자비가 원만한 이상적인 인간상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흔히 천수천안(千手千眼)이라고 하는데 이는 철학적으로 무수하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어 관세음보살의 자비로움은 무수한 눈으로 중생의 고통을 보시고, 무수한 손으로 감싸주시어 그 고통을 잊게 해주신다고 한다.

      사리자여, 물질〔色〕이 허공〔空〕과 다르지 않고 허공이 물질과 다르지 아니하니 물질이 곧 허공이며〔色卽是空〕, 허공이 곧 물질〔空卽是色〕이니라. 감각〔受〕,지각〔想〕, 행함〔行〕, 인식〔識〕도 또한 그러하니라.

      이는 색과 공의 원융한 상태를 나타내는 최고의 경지라 하겠다.
      현실과 이상의 세계는 결국 같은 것으로 지금의 세계에서 열심히 생활해야 한다는 논리이다. 여기서 중생과 부처는 다르다는 이원론이 극복되는 것이며 결국 중생과 부처는 하나가 된다는 새로운 가치관이 성립된다.

      위의 문장에서 색은 중생을 상징하며 공은 부처를 뜻한다.
      그런데 이 둘이 하나일 수밖에 없다는 가르침이다.
      왜냐하면 중생을 떠난 부처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혼자 뛴 육상선수의 일등은 의미가 없는 법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중생 없는 부처를 상정할 수 없다.
      결국 중생의 불교, 중생을 아끼는 불교여야 한다는 논리를 암시하고 있다.

      사리자여, 이 모든 법의 공한 모습이라는 것은 생겨나거나 멸하지 않으며〔不生不滅〕, 더럽지도 깨끗하지도 않으며〔不垢不淨〕, 늘거나 줄지도 않느니라〔不增不減〕.

      불교에서는 이 부분을 바다나 허공에 비유하고 있다.
      즉, 바다는 많은 강줄기가 몰려와도 넘치지 않으며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다.
      허공 또한 끝이 없는 것으로 이렇다 저렇다를 표현할 수는 없다.
      이 세상의 기본 도리인 법(法)이라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언제 비롯되었고 어느 때에 사라질지는 모르지만 참으로 영원한 물줄기가 바로 법이며, 그에 비해 우리의 생명이란 너무도 보잘 것 없음을 느낄 수 있다.

      이와 같이 이 세상 사물의 근원은 움직이지 않는데, 단지 우리 중생들의 어리석은 견해만을 지니고서 자신의 주장대로만 해석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한 까닭에 공(空)한 가운데에는 색도 없고 느낌이나 상상력· 분별력· 잠재력이 있을 수 없으며, 여섯 가지 감각기관인 눈과 귀와 코· 혀· 몸· 뜻도 없고,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 가서 닿는 대상인 빛· 소리· 냄새· 맛· 닿음· 법이 없느니라.

      여기서 여섯 가지 감각기관을 육근(六根)이라 하며 그것이 닿는 여섯 가지 대상을 육경(六境)이라고 한다. 그러나 육근과 육경은 따로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그 본성은 공이며 감각의 주체 또한 허망할 뿐이다. 이를테면 인격의 비영원성을 압축한 문장이라고 볼 수 있다.

      눈이 가서 닿는 경계도 없고 의식할 수 있는 세계도 없으며 무명도 없고, 무명이 다함도 없으며, 죽고 늙음도 없고, 늙고 죽음이 다함도 없느니라.

      이 부분은 열두 가지 인연을 진리화 시킨 소승불교에 대한 상반된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십이인연도 없고 십이인연이 다함도 없다는 뜻이다.
      부처님께서는 고통의 현실에서 벗어나도록 열두 가지 인연을 설하셨음에도 소승불교에서는 이것을 진리화 하여 무명을 극복하면 해탈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대승의 입장에서는 우리의 마음속에 무명이라는 실체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무명이라고 하면서, 평범함 속에서 부처를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즉 개념화되고 실체화되어진 진리에 대한 비판이다. 진리는 생동하는 삶의 현장이다. 높다란 곳에 올려놓고 칭송하는 대상은 아니지 않은가.

      괴로움〔苦〕이나 번뇌〔集〕, 열반〔滅〕,수도〔道〕도 없고, 지혜〔智〕도 없고, 얻을 것〔得〕도 없으니 얻을 것이 아예 없기 때문이다. 보살들도 이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하나니 그러한 까닭에 마음 가운데 걸림이 없고 걸림이 없는 까닭에 두려움이 있을 수 없고, 뒤바뀐 생각을 멀리 여의고 마침내 열반하는 것이며, 삼세의 여러 부처님들도 이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는 까닭에 정각〔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시니.

      삼세(三世)란 과거·현재·미래를 일컫는다.
      또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란 인도어를 음역한 것으로 '올바른 깨달음'이란 뜻이다.

      그러므로 이 반야바라밀다는 가장 신령스럽고 가장 밝은 주문이며, 위가 없는 주문이고, 이것과 비교될 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주문이니 능히 이 모든 괴로움을 없애고 진실하여 허망하지 않느니라. 그러므로 반야바라밀다의 주문을 말하니 다음과 같느니라.

      여기서의 주문(呪文)이란 미신적인 것이 아니라 절대 완전한 힘을 가진 신령스러운 바람이라고 하겠다. 일반적으로 주문이라고 하면 신비스러운 힘을 뜻한다. 인간이 가진 원초적 욕망에 대한 희구심리가 종교에 투영될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갔네, 갔네. 저 언덕에 갔네.
      우리 모두 저 언덕에 갔네.
      오! 깨달음이여,
      축복이 있으소서.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
      원어는 가타(gata)인데, 정규 산스크리트 문법이라기보다는 구어체 형식이다.
      마지막의 사바하(svaha)는 축원문이다.

      이 구절은 해석하지 않는 것이 관례인데, 신비스러운 힘이 사라진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살펴 본 《반야심경》은 반야사상을 가장 간략하게 이야기하면서도 가장 핵심 있게 다룬 내용이다.
반야 사상.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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