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卍-불법을만나고/卍-불교자료실

능엄경의 바른 이해-2. 五十魔를 말하다. 5) 行陰의 魔

by 회심사 2019. 5. 8.



-능엄경의 바른 이해- 5) 行陰의 魔-
    아난아, 삼매를 닦고 익혀서 반야가 어리석은 생각에 가린 것을 벗겨낸 저 맑고 깨끗한 사람이 보통 때에 깨어있을 때나 잠들어 있을 때가 언제나 한결같아 꿈과 생각이 사라지게 되어서 반야와 하나를 이룸으로 생각이 사라져서 맑고 고요하여 마치 구름 한 점 없는 하늘과 같아지면, 두 번 다시는 거칠기 그지없는 번뇌에 의한 어이없고 미덥지 못한 생각으로 저지르는 일들이 사라지게 되어 모든 세상의 산하대지가 마치 거울에 비추어보듯 환히 들여다보여서 생각이 일어나도 시달리지 아니하고, 생각이 스쳐 지나가도 자취를 남기지 아니하나니, 맑고 깨끗하여 텅 비어서 그저 거울처럼 비춰 보일 뿐 그물처럼 엮어진 수없이 펼쳐진 모든 버릇들로부터 벗어나게 되어 오직 참다운 모습인 마음만 남아있게 되어, 나고 사라짐을 만드는 처음자리가 있는 숨김이 없게 되어 그대로 드러나서 온 누리에 있는 열두 종류의 중생을 보려 하면 다 볼 수 있게 되고, 비록 그 중생들의 목숨이 만들어진 이유는 아직 알진 못해도 마치 맑게 갠 벌판에 아지랑이가 아른아른 어지러이 피어오르는 것을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그들의 태어나게 되는 본바탕이 하나인 것만은 낱낱이 바르게 헤아려 살펴볼 수 있게(見) 되어 허망한 생각으로 모습을 이루게 하는 자리인 추혈(樞穴 역주: 創造의 자리, 子宮)을 마침내는 알게 되나니, 이를 일러 ‘어리석음이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기운차게 움직이는 세계(行陰區宇)’라 부르느니라.

    만일 이처럼 맑은 바탕위에 어지러이 아른거리는 본바탕이 맑고 깨끗한 참다운 모습과 어울리어 그 어지러이 아른거리는 본바탕이 맑고 깨끗한 반야(澄)와 하나가 되면, 마치 물결이 사라지게 되면 거울과 같이 맑은 모습을 띄는 것과 같으니, 이를 일러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기운차게 움직이는 어리석음(行陰)’이라 부르며, 이 사람이 중생탁(眾生濁 역주: 衆生이 만들어지는 緣由)에서 벗어나게 되면 어리석음을 바탕으로 함으로써 반야가 움직임에 의한 아른거림으로 사라지게 되어 어이없고 미덥지 못한 생각을 감추고 있는 마음(幽隱)이 만들어 진 것을 헤아려 살펴보았기 때문이니라.

    아난아, 모든 맑고 깨끗한 사람들이 반야(正知)에 기대어 마음집중을 여실히 하게 되어 반야(明)가 오롯하게 엉기어 마음이 올곧아 지면 열 종류의 천마(天魔)가 짬을 내어 비집고 들어오지 못하게 되고 오로지 모든 중생의 본바탕이 만들어지는 이유를 깊고 자세하게 곰곰이 따져 들어가 중생들이 태어나는 이유를 마침내 알게 되면 저 맑고 깨끗한 참다운 모습인 반야의 바탕(淸)위에 있는 어이없고 미덥지 못한 생각으로 찌들어 있는 마음(幽)이 모든 것을 흔들고 어지럽게 하는 본바탕인 것을 헤아려 살펴보게 되어 반야가 어이없고 미덥지 못한 생각으로 이루어진 마음 때문에 중생들의 목숨이 만들어지게 된 것을 깨달았을지라도 그 수행자가 잘못 헤아리게 되면 두 종류의 무인론(無因論)에 떨어지게 되느니라.

    첫 번째는 이 사람이 본바탕은 아무 이유 없이 저절로 생긴다는 생각을 밝히는 것이니라.
    왜냐하면, 이 사람이 중생들의 목숨이라는 것이 만들어지게 된 것을 눈의 팔백 가지 공덕으로 팔만 겁의 시간 속에서 살아온 모든 중생들을 모두 알게 되어서 업의 흐름이 굽이쳐 돌게 되어 여기서 죽어서는 저곳에서 나는지라 다만 중생들이 그러한 곳에서 윤회하는 것만 볼 뿐 팔만 겁 바깥의 것은 어두워 전혀 볼 수 없기에 문득 한 생각내기를 ‘이런 세간들에 사는 모든 중생들이 팔만 겁부터 지금까지 아무 이유 없이 스스로 생겼다.’ 하게 되나니, 이러한 헤아림으로 말미암아 정변지(正遍知)가 사라져서 보리의 참된 모습을 의심하게 되어 외도(外道)에 떨어지게 되느니라. 두 번째는 이 사람이 되갚음 또한 아무 까닭 없이 저절로 받는다는 생각을 밝히는 것이니라.

    왜냐하면, 이 사람이 이미 중생들이 태어나게 되는 그 자리를 보게 되었으므로 ‘사람이 사람을 낳는 것을 알고, 새가 새를 낳는 것을 알고, 까마귀는 원래 까맣고, 고니는 원래부터 희며, 사람과 하늘사람은 서서 걸어 다니고, 짐승들은 네발로 걷고, 하얀색은 씻는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검은 것은 물들어서 이루어 진 것이 아니어서 팔만 겁이 지나더라도 전혀 바뀔 수 없으며 이제 이 모습이 다 하여도 또한 그러하리라 여겨지자 내가 이제껏 보리를 본 적이 없는데, 어찌 다시 보리를 이룰 일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모든 중생들의 모습이 생기게 된 연유가 끝내 까닭이 없음을 알아야 한다.’ 라는 이러한 헤아림으로 말미암아 정변지(正遍知)가 사라져서 보리의 참된 모습을 의심하게 되어 외도(外道)에 떨어지게 되나니, 이를 일러 첫 번째 외도(外道)들이라 부르며, 무인론(無因論)을 세우게 되느니라.

    아난아, 이 맑고 깨끗한 사람이 삼매를 닦아 익히는 동안에 삼매에 의하여 반야(明)가 오롯하게 엉기어 마음을 올곧아 지게 되면 천마(天魔)가 짬을 내어 비집고 들어오지 못하게 되고 모든 중생의 본바탕이 만들어지는 이유를 깊고 자세하게 곰곰이 따져 들어가 중생들이 태어나는 이유를 마침내 알게 되면 저 맑고 깨끗한 참다운 모습인 반야의 바탕(淸)위에 있는 망상으로 찌들어 있는 마음(幽)이 모든 것을 흔들고 어지럽게 하는 본바탕인 것을 헤아려 살펴보게 되어 온 누리에 존재하는 것은 모두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아니하여 변함이 없다고 그 수행자가 잘못 헤아리게 되면 네 종류의 변상론(遍常論)에 떨어지게 되느니라.

    첫 번째는 이 사람이 마음과 마음에 의하여 만들어 지는 모든 현상(境界)의 참다운 모습을 아주 깊고 자세하게 곰곰이 따져보게 되니 ‘마음과 마음에 의하여 만들어 지는 모든 현상이 전혀 아무 이유도 없고’, 삼매를 닦아 익히는 동안에 스스로 이만 겁의 시간 속에서 살아온 모든 중생의 나고 사라짐을 모두 다 알게 되어서는, ‘끊임없이 돌고 돌아 늘어나지도 줄지도 않는다.’ 라고 하여 변함이 없다고 여기게 되느니라.

    두 번째는 이 사람이 지․ 수․ 화․ 풍의 사대를 깊고 자세하게 곰곰이 따져보게 되니 지․ 수․ 화․ 풍의 참다운 모습이 변함이 없음을 알게 되어 삼매를 닦아 익히는 동안에 스스로 사만 겁의 시간 속에서 살아온 모든 중생의 나고 사라짐을 모두 다 알게 되어서는, ‘지․ 수․ 화․ 풍의 본모습은 언제나 바뀌지 아니하여 늘어나지도 줄지도 않는다.’ 라고 하여 변함이 없다고 여기게 되느니라.

    세 번째는 이 사람이 육근을 깊고 자세하게 곰곰이 따져보게 되니 마음속에 분별(末那 역주 : 依他己性-自我의 確立으로 나와 남을 區別하게 됨)과 집착(執受 역주 : 遍界所執性-自我를 유지하기 위한 吸入性)을 곰곰이 헤아려 살펴보게 되니 분별과 집착이 시작되는 곳인 참다운 모습은 언제나 변함이 없음을 알게 되어 삼매를 닦아 익히는 동안에 스스로 팔만 겁의 시간 속에서 살아온 모든 중생의 나고 사라짐을 모두 다 알게 되어서는, ‘끊임없이 돌고 돌아 결코 사라지지 않으며, 처음부터 한결같아서 본바탕(性)은 영원토록 사라지지 않는다.’ 라고 하여 변함이 없다고 여기게 되느니라.

    네 번째는 이 사람이 생각이 일어나는 본바탕이 말끔히 사라져서 마음속에 생각이 일어나고 사라짐이 이제 영원히 사라지게 되어 두 번 다시는 생각에 휘둘리지 아니하게 되어 깊고 자세하게 곰곰이 따져보니(理中) 모든 본질(本質)과 본성(本性)은 나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어서 마음속으로 헤아려 보니 변함이 없다고 여기게 되느니라. 이러한 언제나 변함이 없다고 헤아림으로 말미암아 정변지(正遍知)가 사라져서 보리의 참된 모습을 의심하게 되어 외도(外道)에 떨어지게 되나니, 이를 일러 두 번째 외도(外道)들이라고 부르며, 원상론(圓常論 역주 : 本質과 本性은 常住不變 한다고 여기는 理論)을 세우게 되느니라.

    또 이 맑고 깨끗한 사람이 삼매를 닦아 익히는 동안에 삼매에 의하여 반야(明)가 엉기어 단단하게 굳어져서 마음이 올곧아지게 되면 천마(天魔)가 짬을 내어 비집고 들어오지 못하게 되고 모든 중생의 근본이 만들어지는 이유를 깊고 자세하게 곰곰이 따져 들어가 중생들이 태어나는 이유를 마침내 알게 되면 저 맑고 깨끗한 참다운 모습인 반야의 바탕위에 있는 망상으로 찌들어 있는 마음(幽)이 모든 것을 흔들고 어지럽게 하는 밑바탕인 것을 헤아려 살펴보게 되어 자신과 자신 아닌 것에 대하여 곰곰이 따지게 되어 그 수행자가 잘못 헤아리게 되면, 그러한 사람은 네 종류의 어리석어 거짓을 참이라고 여기는 어이없고 미덥지 못한 생각인, 일분무상일분상론(一分無常一分常論 역주 : 모든 일어나는 현상은 덧없으며 ‘나’라는 것은 언제나 변함이 없다)에 떨어지게 되느니라.

    첫 번째는 이 사람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빼어난 반야로 된 마음이 온 세상에 두루 함을 살펴보게 되어 마지막에 다다르게 된 것으로 잘못 알게 되면 진아(神我 역주 : 참나, 眞我)가 지극히 고요하게 머물고 있는 것으로 헤아리게 되며, 진아(神我)가 온 누리에 두루 하여 반야인 빛으로 이루어져서 전혀 움직임이 없고, 모든 중생들은 자신의 마음속에서 스스로 나고 스스로 죽는다고 여기게 되어 ‘나의 마음이 곧 참다운 모습(性)이어서 오직 변함이 없고, 저 나고 죽는 모든 것들은 참으로 덧없음의 참다운 모습(性)’이라고 부 르느니라.

    두 번째는 이 사람이 온 누리에 있는 모래알만큼 많은 나라들만 헤아려 살펴보고 그 마음은 헤아려 살펴보지 아니하여서 겁이 무너지는 곳을 보고서는 ‘마침내 덧없이 사라지는 것의 참다운 모습(性)이라 부르고, 겁이 무너지지 않는 곳을 보고서는 마지막까지 언제나 변함이 없는 모습’이라 부르느니라.

    세 번째는 이 사람이 자세하고 곰곰이 자신의 마음을 헤아려 살펴보니 마음이 아주 미세하여 그 그윽한 모습이 마치 빛(微塵 역주 : 般若, 여기서는 아주 가느다란 먼지라 해석해서는 절대 안 됨. 微塵을 일곱 조각으로 나누면 그것을 일러 ‘隣虛塵’이라 하고, 이 인허진을 다시 일곱 조각으로 나누어야 眞空이 됨)과 다름이 없음을 알게 되어 온 누리를 두루 비추더라도 참다운 그 모습(性)이 변함이 없나니, 스스로 이 몸으로 인하여 곧 삶과 사라짐이 있다고 여기게 되어, 그 무너지지 않는 참다운 모습은 ‘나의 참다운 모습이라 언제나 변함이 없다.’라고 부르느니라.

    네 번째는 이 사람이 반야를 가린 어리석은 생각(想陰)이 사라지게 되어 행음(行陰 )의 경계에 머무를 때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기운차게 움직이는 어리석음(行陰)이 쉬지 않고 움직이는 것을 헤아려서는 언제나 변함이 없는 참다운 모습이라고 여기고, 색음(色陰)과 수음(受陰) 그리고 상음(相陰)은 이미 사라져버렸기에 덧없음이라 부르느니라. 이러함으로 말미암아 어느 하나는 덧없다고 여기고 어느 하나는 변함이 없다고 헤아리기에 보리의 참된 모습을 의심하게 되어 외도(外道)에 떨어지게 되나니, 이를 일러 세 번째 외도들이라고 부르며, 일분상론(一分常論)을 세우게 되느니라.

    또 이 맑고 깨끗한 사람이 삼매를 닦아 익히는 동안에 삼매에 의하여 반야(明)가 엉기어 단단하게 굳어져서 마음이 올곧아지게 되면 천마(天魔)가 짬을 내어 비집고 들어오지 못하게 되고 모든 중생의 근본이 만들어지는 이유를 깊고 자세하게 곰곰이 따져 들어가 중생들이 태어나는 이유를 마침내 알게 되면 저 맑고 깨끗한 참다운 모습인 반야의 바탕위에 있는 어이없고 미덥지 못한 생각으로 찌들어 있는 마음(幽)이 모든 것을 흔들고 어지럽게 하는 밑바탕인 것을 헤아려 살펴보게 되어 무상한 것과 무상하지 아니한 것에 대하여 곰곰이 따지게 되어 그 수행자가 잘못 헤아리게 되면, 그러한 사람은 네 종류의 끝이 있다는 이론(四有邊論)에 떨어지게 되느니라.

    첫 번째는 이 사람이 마음속으로, ‘태어나게 되는 본바탕은 쉬지 않고 흐르므로 과거와 미래는 끝이 있고, 끊임없이 이어지는 이 마음은 끝이 없다.’ 라고 헤아리게 되느니라.

    두 번째는 이 사람이 팔만 겁 전은 괴괴하여 아무 소문도 들은바 없고, 팔만 겁의 시간 속에 사는 중생만을 오직 볼 수 있어서 스스로 ’괴괴하여 아무 소문도 들은바 없는 것은 끝이 없다 하고 중생들이 머무르는 곳은 끝이 있다.’라고 부르느니라.

    세 번째는 이 사람이 다함이 없는 본바탕(性)을 얻었기에 나는 모르는 것이 없다 여기게 되고, 저 모든 사람들은 나의 알음알이 속에서 나타난 것이어서, 나는 이제껏 어리석어서 본바탕을 알 수는 없지만 저 가없는 마음은 알 수 없기는 하나 다만 끝이 있는 본바탕이라고 부르느니라.

    네 번째는 이 사람이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기운차게 움직이는 어리석음(行陰)을 깊고 자세하게 곰곰이 따진 뒤에 공(空 역주 : 비어서 空이 아니고 참다움이 없기에 空이라고 함)하다고 여기게 되어 행음(行陰)에 대한 생각을 자신의 의견대로 헤아리게 되어서 모든 중생의 몸이 반절은 점점 살아나는 것이고, 반절은 점점 사라지는 것이라고 헤아려 세상에 있는 모든 만물은 분명하게 반은 끝이 있고, 반은 끝이 없다고 헤아리게 되느니라.

    이러함으로 말미암아 어느 하나는 끝이 있고, 어느 하나는 끝이 없다고 헤아리기에 보리의 참된 모습을 의심하게 되어 외도(外道)에 떨어지게 되나니, 이를 일러 네 번째 외도들이라 부르며, 유변론(有邊論)을 세우게 되느니라.

    또 이 맑고 깨끗한 사람이 삼매를 닦아 익히는 동안에 삼매에 의하여 반야(明)가 엉기어 단단하게 굳어져서 마음이 올곧아지게 되면 천마(天魔)가 짬을 내어 비집고 들어오지 못하게 되고 모든 중생의 근본이 만들어지는 이유를 깊고 자세하게 곰곰이 따져 들어가 중생들이 태어나는 이유를 마침내 알게 되면 저 맑고 깨끗한 참다운 모습인 반야의 바탕(淸)위에 있는 어이없고 미덥지 못한 생각으로 찌들어 있는 마음(幽)이 모든 것을 흔들고 어지럽게 하는 밑바탕인 것을 헤아려 살펴보게 되어 끝이 있고, 끝이 없는 것에 대하여 곰곰이 따지게 되어 그 수행자가 잘못 헤아리게 되면, 그러한 사람은 네 종류의 어리석어 거짓을 참이라고 여기는 마음으로 죽지 않는다고 어지러이 속이며 실없이 뭉뚱그려 헤아리게 되는 이론(遍計虛論)에 떨어지게 되느니라.

    첫 번째는 이 사람이 성질과 모양이 바뀌는 본바탕을 깊고 자세하게 살펴보되 시간의 흐름 속에 바뀌는 곳을 보고 ‘달라졌다.’라고 부르고, 끊임이 없이 이어지는 곳을 보고 ‘달라지지 않는다.’라고 부르며, 눈으로 헤아려 볼 수 있으면 ‘자람’이라 부르고, 눈으로 헤아려 볼 수 없으면 ‘사라짐’이라 부르며, 끊어지지 않음으로 하여 이어지는 곳을 ‘늘어남’이라 부르고, 계속 이어짐 속에서 따로 떨어진 곳은 ‘줄어듦’이라 부르며, 따로 따로 자라나는 곳을 ‘존재한다.’라고 부르고, 뒤섞이어 죽는 곳은 ‘없음’이라 부르나니, 앞뒤가 들어맞고 조리가 있도록 자세히 살피고 헤아려 보아야하거늘, 그 마음 씀씀이가 별다르게 헤아려 보았기에 도리를 찾아 헤매는 사람이 찾아와 그 이치를 물으면 ‘나는 지금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하며,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며, 늘어나기도 하고 줄어들기도 한다.’라고 대답하여 어느 때나 그의 말들은 모두 다 어지러워서, 그 앞에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의 말을 새겨듣거나 감상할 수 없게 하느니라. 두 번째는 이 사람이 진실함을 깊고 자세하게 곰곰이 따지던 그 마음으로 뒤섞이어 일어나는 생각들이 아무 곳에서나 아무 이유도 없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깨닫게 되어, 사람이 찾아와 물으면 오직 한마디로 ‘무(無)’라고 답할 뿐, ‘무(無)’를 제외하고는 그 밖의 어떠한 말도 하지 않느니라.

    세 번째는 이 사람이 진실함을 깊고 자세하게 곰곰이 따지던 그 마음으로 모든 중생들이 각기 태어나는 곳이 따로 있고, 태어나는 이유도 분명히 있음을 깨닫게 되어, 사람이 찾아와 물으면 오직 한마디로 ‘시(是)’라고 답할 뿐, ‘시(是)’를 제외하고는 그 밖의 어떠한 말도 하지 않느니라.

    네 번째는 이 사람이 ‘존재함(有)’과 ‘사라짐(無)’을 두루 보게 되어서 그 경계가 두 갈래로 나뉘어 졌으므로 그 마음 또한 어지러워져서 사람이 찾아와 물으면 ‘존재한다는 것도 옳고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도 옳으며, 사라짐도 옳지 않으며 존재함 또한 옳지 않다.’라고 대답하여 말을 뒤흔들어 어지럽게 하므로 마침내는 꾸지람을 듣게 되고 어느 누구도 받아들이지 않게 되느니라.

    이러함으로 말미암아 허무맹랑한 소리로 말을 뒤흔들어 어지럽게 하므로 보리의 참된 모습을 의심하게 되어 외도(外道)에 떨어지게 되나니, 이를 일러 다섯 번째 외도들이라고 부르며, 어리석어 거짓을 참이라고 여기어 어이없고 미덥지 못한 생각을 하게 되는 참다운 모습(顛倒性)이어서, 네 종류의 어리석어 거짓을 참이라고 여기는 마음으로 죽지 않는다고 어지러이 속이며 실없이 뭉뚱그려 헤아리게 되는 이론(遍計虛論)이라 부르느니라.

    또 이 맑고 깨끗한 사람이 삼매를 닦아 익히는 동안에 삼매에 의하여 반야(明)가 엉기어 단단하게 굳어져서 마음이 올곧아지게 되면 천마(天魔)가 짬을 내어 비집고 들어오지 못하게 되고 모든 중생의 근본이 만들어지는 이유를 깊고 자세하게 곰곰이 따져 들어가 중생들이 태어나는 이유를 마침내 알게 되면 저 맑고 깨끗한 참다운 모습인 반야의 바탕위에 있는 망상으로 찌들어 있는 마음이 모든 것을 흔들고 어지럽게 하는 밑바탕인 것을 헤아려 살펴보게 되어 태어나는 것은 끝없이 이어지는 것이라고 그 수행자가 잘못 헤아리게 되면, 그러한 사람은 죽은 뒤에도 그 모습이 존재한다는 어리석어 거짓되고 미덥지 못한 것을 참이라고 여기는(顚倒) 어이없고 미덥지 못한 생각에 떨어지게 되느니라.

    스스로 한결 같이 몸에 대하여 ‘빛(色 역주: 슬기, 반야)이 곧 나다.’라고 이를 뿐만 아니라, ‘나의 몸이 온 세상에 가득하여 모든 나라를 머금었으며, 내가 곧 빛이니라.’라고 보기도 하며, 또는 전생의 인연을 따르게 되어 되돌이켜서 ‘빛이 나와 함께 한다.’하며, 또는 나를 따르기에 몸을 움직일 때에 언제나 따르게 되어 ‘내 안에 빛이 있다.’라고 이르게 되나니, 모든 것을 헤아려서 ‘죽은 뒤에도 모습이 있다.’라고 말하나니, 이와 같이 돌고 돌게 되어서 열여섯 가지의 모습이 있게 되느니라.

    이에 따라서 ‘모든 것이 번뇌일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이 보리이고 번뇌와 보리의 두 본바탕(性)이 나란하여 서로가 부딪힘이 없다.’라고 헤아리게 되느니라.

    이러함으로 말미암아 죽은 뒤에는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고 헤아리게 됨으로 보리의 참된 모습을 의심하게 되어 외도(外道)에 떨어지게 되나니, 이를 일러 여섯 번째 외도들이라고 부르며, ‘오음 속에 있는 것들 중에 행음(行陰)은 죽은 뒤에도 모습을 유지한다,’라는 생각이 어리석어 거짓되고 미덥지 못한 것을 참이라고 여기는 이론을 세우게 되느니라.

    또 이 맑고 깨끗한 사람이 삼매를 닦아 익히는 동안에 삼매에 의하여 반야(明)가 엉기어 단단하게 굳어져서 마음이 올곧아지게 되면 천마(天魔)가 짬을 내어 비집고 들어오지 못하게 되고 모든 중생의 근본이 만들어지는 이유를 깊고 자세하게 곰곰이 따져 들어가 중생들이 태어나는 이유를 마침내 알게 되면 저 맑고 깨끗한 참다운 모습인 반야의 바탕위에 있는 어이없고 미덥지 못한 생각으로 찌들어 있는 마음이 모든 것을 흔들고 어지럽게 하는 밑바탕인 것을 헤아려 살펴보게 되어 먼저 색음(色陰)과 수음(受陰) 그리고 상음(想陰)이 사라져야 진실한 삶이 행음(行陰)속에 머물러 있다고 수행자가 잘못 헤아리게 되면, 그러한 사람은 죽은 뒤에는 모습이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는 어리석어 거짓되고 미덥지 못한 것을 참이라고 여기는(顚倒) 어이없고 미덥지 못한 생각에 떨어지게 되느니라.

    그 빛이 사라지면 모습이 있어야할 이유가 사라진다고 여겨 그 모습이 사라지는 것을 보고 마음 또한 얽어 매일 바가 없다고 보게 되며, 그러한 느낌이 사라지게 되면 뒤이어 나오는 생각 또한 사라지게 되므로, 반야를 가리는 본바탕이 말끔히 흩어져 사라지게 되나니, 가령 태어나는 까닭이 있더라도 느낌과 생각이 없으므로 초목과 매한가지라 ‘그 바탕(此質)이 눈앞에 있을 지라도 전혀 헤아려 볼 수 없을진대, 죽은 뒤에 어떻게 다시 모습이 있을 수 있겠느냐?’ 하고는 이러한 까닭으로 헤아려서 ‘죽은 뒤에는 결코 모습이 있을 수 없다.’라고 가르치게 되므로 이와 같이 돌고 돌게 되어서 여덟 가지의 모습 없음(八無相 역주: 色·受·想·行의 四陰에 現在와 未來에 모습이 없음)이 있게 되느니라.

    이리하여 다르게 헤아리기를 열반이 시작이 되는 이유도 끝마쳐 받게 되는 과보도 모든 것이 공(空) 하여서 다만 이름만 있을 뿐으로 ‘마침내는 사라지는 것’이라 하느니라.

    이러함으로 말미암아 죽은 뒤에는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고 헤아리게 됨으로 보리의 참된 모습을 의심하게 되어 외도(外道)에 떨어지게 되나니, 이를 일러 일곱 번째 외도들이라고 부르며, ‘오음 속에 있는 모든 것이 죽은 뒤에 모습을 유지하는 것은 단 하나도 없다.’라는 생각이 어리석어 거짓되고 미덥지 못한 것을 참이라고 여기는 이론을 세우게 되느니라.

    또 이 맑고 깨끗한 사람이 삼매를 닦아 익히는 동안에 삼매에 의하여 반야(明)가 엉기어 단단하게 굳어져서 마음이 올곧아지게 되면 천마(天魔)가 짬을 내어 비집고 들어오지 못하게 되고 모든 중생의 근본이 만들어지는 이유를 깊고 자세하게 곰곰이 따져 들어가 중생들이 태어나는 이유를 마침내 알게 되면 저 맑고 깨끗한 참다운 모습인 반야의 바탕위에 있는 어이없고 미덥지 못한 생각으로 찌들어 있는 마음(幽)이 모든 것을 흔들고 어지럽게 하는 밑바탕인 것을 헤아려 살펴보게 되어 행음(行陰 역주 :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기운차게 움직이는 어리석음)속에 느낌과 생각이 사라지게 되자, 느낌과 생각이 있다가 사라지게 된 것이 스스로 안에서 서로 부수어 사라지게 되었다고 헤아리게 되면 이 사람은 죽은 뒤를 모두 부정하게 되는 뒤바뀐 이론에 떨어지게 되느니라.

    색음(色陰)과 수음(受陰) 그리고 상음(相陰)으로 헤아려 살펴볼 수 있는 모든 것들은 있으나 있는 것이 아니고, 행음(行陰 :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기운차게 움직이는 어리석음)이 쉬지 않고 바뀌는 것을 자세히 살피어서는 없는 것 같지만 없는 것이 아니라 하여 이와 같이 돌고 돌게 되어서 행음의 세계에 여덟 가지의 모습이 없고(八無相 역주 : 色·受·想·行의 四陰에 現在와 未來에 모습이 없음) 오직 한 가지 얽어 매임(一緣)이 있을 뿐이라고 깨닫게 되면 모든 것에 대하여 ‘있으나 있는 것이 아니고, 없으나 없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게 되느니라.

    또 모든 행음(行陰)의 참다운 모습이 쉬지 않고 움직임으로 거짓이라고 헤아리게 됨으로 마음속에 와 닿아 깨달음을 내게 되면 ‘있다는 것과 없다는 것이 모두 아니다.’라고 하여 허망함과 진실함이 뒤섞이어 도리를 잃게 되느니라. 이러함으로 말미암아 죽은 뒤에는 존재(存在)도 비존재(非在)도 아니라고 헤아려 죽음의 경계를 어리석게 보게 되어서 보리의 참된 모습을 의심하게 되어 외도(外道)에 떨어지게 되나니, 이를 일러 여덟 번째 외도들이라고 부르며, ‘오음(五陰) 속에 있는 모든 것이 죽은 뒤에는 있다는 것도 없다는 것도 모두 아니다.’라는 생각이 어리석어 거짓을 참이라고 여기는 이론을 세우게 되느니라.

    또 이 맑고 깨끗한 사람이 삼매를 닦아 익히는 동안에 삼매에 의하여 반야(明)가 엉기어 단단하게 굳어져서 마음이 올곧아지게 되면 천마(天魔)가 짬을 내어 비집고 들어오지 못하게 되고 모든 중생의 근본이 만들어지는 이유를 깊고 자세하게 곰곰이 따져 들어가 중생들이 태어나는 이유를 마침내 알게 되면 저 맑고 깨끗한 참다운 모습인 반야의 바탕(淸)위에 있는 어이없고 미덥지 못한 생각으로 찌들어 있는 마음(幽)이 모든 것을 흔들고 어지럽게 하는 밑바탕인 것을 헤아려 살펴보게 되어 죽고 나면 죽은 뒤의 세계가 전혀 없다고 수행자가 잘못 헤아리게 되면, 그러한 사람은 일곱 가지의 단멸론(斷滅論)에 떨어지게 되느니라.

    언제나 ‘몸은 반드시 사라진다.’라고 헤아리게 되고, ‘몸이 사라진 뒤에 욕망이 사라지고 욕망이 사라진 뒤에 고통이 사라진다.’고 할 뿐만 아니라 ‘고통이 사라지고 나면 극락이 사라지고 극락이 사라졌다는 그 마음조차도 사라진다.’라고 헤아리게 되어 이와 같이 돌고 돌게 되어서 일곱 곳(七際 역주 : 地獄, 餓鬼, 畜生, 人間, 天, 修羅, 聲聞)을 다 마치게 되어 지금 사라지게 되면 완전하게 사라지는 것이어서 두 번 다시는 되돌아가지 않게 된다고 헤아리게 되느니라.

    이러함으로 말미암아 죽은 뒤에는 모든 것이 사라진다고 헤아려 보리의 참된 모습을 의심하게 되어 외도(外道)에 떨어지게 되나니, 이를 일러 아홉 번째 외도들 이라고 부르며, ‘오음 속에 있는 모든 것이 죽은 뒤에는 사라지게 된다.’는 생각이 어리석어 거짓되고 미덥지 못한 것을 참이라고 여기는 이론을 세우게 되느니라.

    또 이 맑고 깨끗한 사람이 삼매를 닦아 익히는 동안에 삼매에 의하여 반야(明)가 엉기어 단단하게 굳어져서 마음이 올곧아지게 되면 천마(天魔)가 짬을 내어 비집고 들어오지 못하게 되고 모든 중생의 근본이 만들어지는 이유를 깊고 자세하게 곰곰이 따져 들어가 중생들이 태어나는 이유를 마침내 알게 되면 저 맑고 깨끗한 참다운 모습인 반야의 바탕(淸)위에 있는 어이없고 미덥지 못한 생각으로 찌들어 있는 마음(幽)이 모든 것을 흔들고 어지럽게 하는 밑바탕인 것을 헤아려 살펴보게 되어 죽더라도 죽은 뒤의 세계가 반드시 있다고 수행자가 잘못 헤아리게 되면, 그러한 사람은 다섯 가지의 열반론(涅槃論)에 떨어지게 되느니라.

    언제나 올바른 돌고 돎은 욕계(欲界)를 바탕으로 한다고 여겨 온 누리에 가득한 반야인 빛(圓明)은 사랑하여 그리워함으로 이루어지고, 초선의 참모습은 근심이 없는 까닭으로 이루어지고, 두 번째 선정은 마음의 고통이 없는 까닭으로 이루어지고, 세 번째 선정은 지극한 기쁨을 따르는 까닭으로 이루어지고, 네 번째 선정은 고통과 지극한 기쁨조차도 사라지는 까닭으로 이루어지고 윤회를 하지 않게 되는 것은 본바탕이 완전히 사라진 까닭으로 이루어진다고 깊고 자세하게 곰곰이 헤아리게 되어서는 번뇌가 아직 남아있는 하늘을 번뇌가 사라진 하늘로 그릇 되이 알게 되어서는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헤매다가 위의 다섯 곳을 평안하고 고요한 곳인 열반이라고 여겨 아주 빼어난 정토(淨土)로 알고 기대게 되느니라.

    이와 같이 다섯 곳을 돌고 돌아 다 마치고는 이러함으로 말미암아 스스로가 살펴 볼 수 있는 다섯 곳을 열반이라고 헤아리게 됨으로 보리의 참된 모습을 의심하게 되어 외도(外道)에 떨어지게 되나니 이를 일러 열 번째 외도들이라고 부르며, ‘오음 속에 지금 다섯 곳의 열반이 있다.’라는 생각이 어리석어 거짓되고 미덥지 못한 것을 참이라고 여기는 이론을 세우게

    아난아, 이러한 열 가지의 참선(禪那)의 미치고 그릇된 이해는 모두 어리석음이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기운차게 움직이게 되어(行陰) 마음 씀씀이가 그 생각으로 서로 어울렸기에 그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니라. 중생들이 어리석어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헤매어 스스로 어리석은 줄을 헤아리지 못하여 이러한 경계들을 부딪칠 즈음에 어리석음으로 스스로를 헤아리지 못하여 그릇된 이해로 스스로 ‘성인의 자리에 올랐다.’라고 말하게 되면 커다란 망령된 말을 지껄이게 된 것이니 무간지옥에 떨어지게 되느니라.

    너희들은 반드시 여래께서 말씀하신 마음을 바르게 지키는 법을 받아 지니어 내가 열반에 든 뒤에 말법의 세상에 여래께서 말씀하신 올바른 도리를 널리 펴서 모든 중생들로 하여금 이 올바른 도리를 깨닫게 하여 스스로의 마음속에 깊이 잠들어 있는 심마로 하여금 움이 트지 못하게 하고, 올바른 도리를 보호하여 지키고 따르게 하여서 삿된 견해를 버리고, 그들이 몸 마음을 바르게 가르침 받아 참다운 도리를 깨닫게 해야 하고 첫째가는 빼어난 도리를 이루려 하는 동안에 잘못된 길에 들어서지 못하게 해야 하며 마음으로 간절히 구하여 자그마한 성과라도 이룰라치면 만족해서는 결코 아니 되며 부처님(大覺王)께서 가르치신 맑고 깨끗함을 이루기 위하여 마음을 내어야 하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