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째. 禪那를 말하여 修行의 諸位를 보이다.2. 修行하는 階位와 經名-
아난아, 이와 같이 하나하나의 중생들 속에 또 각각의 열두 가지의 어리석어 거짓을 참이라고 여기는 어이없고 미덥지 못한 생각을 갖추었으니 마치 허공(虛空)을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고 보고 있으면 고단하여져서 허공(虛空)에 거짓된 꽃이 보이게 되나니, 이루 말할 수 없이 빼어난 모습으로 온 누리와 하나가 되고 참다워서 맑고 깨끗한 반야인 마음이 어이없고 미덥지 못한 생각에 의해 어리석어 거짓을 참이라고 여기는 것이니 이와 같이 허망한 어지러운 모습을 두루 지니게 되는 것이니라.
네가 이제 부처님의 삼매(三昧)를 수행에 들어 깨달으려 하거든, 어지러운 여러 모습이 어리석어 거짓을 참이라고 여기는 어이없고 미덥지 못한 생각을 내는 모든 실마리를 세 가지의 순서에 맞는 수행법을 익혀야만 사라지게 할 수 있게 되나니, 마치 맑고 깨끗한 그릇 속에 독이 들어있는 꿀이 들어있는데 그 독이 들어있는 꿀을 없애려면 끓는 물에 삶고, 여러 가지 재 가루로 그릇을 문지른 다음에 향을 쐰 후에 그 그릇을 깨끗이 씻은 뒤에야 감로(甘露)를 담을 수 있느니라.
무엇을 세 가지 순서에 맞는 수행법이라 부르겠느냐?
첫 번째는 부지런히 닦고 반복하여 익히는 것이니 어리석어 거짓을 참이라고 여기는 어이없고 미덥지 못한 생각을 내게 하는 모든 실마리를 없애버리는 것이고,
두 번째는 참다운 처음자리로 들어가기 위한 수행이니 올바르고 참다운 모습(正性)이 아닌 것은 모두 다 도려내는 것이며,
세 번째는 한 번 더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니, 지금 그대가 지니고 있는 가치 부여한 모든 것들을 철저히 버려서 지금 바로 이 순간에 머무는 것(違其現業)이니라.
무엇을 어리석어 거짓을 참이라고 여기는 어이없고 미덥지 못한 생각을 내게 하는 모든 실마리라고 하느냐?
아난아, 이 세계에 있는 열두 가지의 중생들이 스스로는 만족하지 못하여 네 가지의 먹는 방법을 따르나니, 이른바 이빨로 씹어서 먹고(段食 역주 : 중생의 먹는 버릇), 감각을 느낌으로 인하여 기를 흡수해 먹고(觸食 역주 : 鬼神의 먹는 버릇), 눈으로 보고 생각으로 먹고(思食 역주 : 신들의 먹는 버릇), 중생들이 공양 올린 것이기에 헤아려 드시는 것(識食 역주 : 부처님의 공양) 등이 있느니라.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모든 중생들은 먹어야만 살 수 있다.’ 라고 말씀하시느니라.
아난아, 모든 중생들은 감미로운 것을 먹으면 살 수 있고 독한 것을 먹으면 죽게 되느니라.
이제 모든 중생들이 삼매를 구하려거든 마땅히 세상에 있는 다섯 가지의 매운 나물(五辛 역주 : 파, 마늘, 달래, 부추, 무릇)을 먹지 말아야 하나니, 이러한 다섯 가지의 매운 나물은 먹으면 먹을수록 음탕함이 무르익게 되고, 화가 자주 일어나게 되느니라.
이처럼 이 세계에서 다섯 가지 매운 나물을 먹는 사람은 스스로 십이부경(경전의 형태를 형식·내용에 따라 12종으로 구분한 것)을 널리 펴서 많은 중생들에게 가르치더라도, 온 누리의 하늘과 신선들이 그 더러운 냄새를 싫어하여서 모두 다 멀리 떠나버리고, 모든 아귀들이 그 사람이 밥을 먹을 때마다 입술을 핥으므로 항상 아귀와 함께 머물게 되어서 복과 덕이 나날이 줄어들게 되어 이로운 일이 별로 없게 되나니, 이처럼 다섯 가지 매운 나물을 즐기는 사람은 삼매(三昧)를 닦더라도 보살들과 하늘, 신선, 온 누리의 많은 맑고 깨끗한 신들이 다가와 지켜주지 아니하므로 대력마왕(大力魔王)이 방편을 써서 부처님의 모습으로 나타나서는 참다운 도리(法 역주 : 眞理)라고 떠들어 대길 ‘계율을 지키는 것(禁戒)이 그르다.’ 라고 흉보면서, 음탕하고 화내고 어리석은 것을 칭찬하나니 그 말을 따르게 되면 죽어서는 마왕(魔王)의 가솔이 될 것이며 마왕(魔王)으로부터 받은 복이 다하게 되면 무간지옥에 떨어지게 될 것이니라.
아난아, 보리를 닦아 얻으려는 이는 영원히 다섯 가지 매운 나물을 먹지 말아야 하리니, 이것을 한 번 더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첫 번째로 삼아야 하는 수행의 순서라 부르느니라.
어떠한 것을 올바르고 참다운 모습(正性)이라 하겠느냐?
아난아, 중생들이 삼매에 들어가려거든 우선 맑고 깨끗한 계율을 엄하게 지키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하나니, 음탕한 마음을 영원히 끊어야 하며 술과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야 할 것이며, 음식을 불에 데치거나 구워서 나물의 생기(生氣)를 먹지 말아야 하느니라.
아난아, 수행하는 사람이 음탕함을 끊지 아니하거나 살생을 멈추지 아니하면 삼계를 결코 벗어날 수 없으니, 마땅히 음탕함과 탐욕 보기를 독사와 같이 하고 원수 보듯이 하여야 할 것이며, 우선 성문(聲聞)들이 지키는 계율인 사기(四棄 역주: 殺生, 偸盜, 淫蕩, 妄語)와 팔기(八棄 역주 : 四棄에 飮酒, 높고 큰 평상에 앉지 않음, 꽃과 향·귀금속 들을 몸에 지니지 아니함, 노래를 부르거나 춤추거나 풍악을 연주하지 아니하며 구경도 하지 않는 것)를 몸 마음에 새기어 마음이 흔들리지 않게 한 뒤에 보살의 맑고 깨끗한 계율(律儀)을 마음속에 새기어야만 온갖 삿된 것들이 일어나지 아니하느니라.
계율(戒律)을 굳건히 지키어 계체(戒體)가 이루어지게 되면, 이 세간에서 영원히 맞물려 살며 서로 엇갈려 죽이게 되는 모든 업들이 사라지게 되고, 오랜 겁 동안 행해온 도둑질도 하지 않을 것이며, 서로 간에 갚아야 할 켜켜이 쌓인 빚들도 없어지게 될 뿐만 아니라, 또한 이 세간에서 오랫동안 쌓인 모든 빚들이 다 사라지게 되리니, 이처럼 맑고 깨끗한 사람이 삼매를 닦으면 비록 천안(天眼)은 아니더라도 부모가 물려준 육신의 눈으로 자연스레 온 누리를 헤아려 살펴보게 되어 부처님을 뵈옵고 그 참다운 도리를 듣고 몸소 성스러운 가르침을 받들게 되어서는 위대한 신통을 얻어 온 누리를 두루 다니게 되리니, 맑고 깨끗함으로 인하여 숙명통(宿命通 역주 : 헤아릴 수 없는 과거의 기억을 되살려 아는 것)을 행하는데 아무 거리낌이 없으니, 이것을 한 번 더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두 번째로 삼아야 하는 수행의 순서라 부르느니라.
어떠한 것을 바로 지금 이 순간(現業)이라 하는 것이겠느냐?
아난아, 이처럼 맑고 깨끗하게 계율을 지키어 사는 사람은 마음속에 탐욕과 음탕함이 없으므로 바깥의 여섯 가지 경계(六塵)에 시달리지 않게 되고, 여러 가지 시달림에서 벗어남으로 비롯하여 스스로 참다운 모습으로 돌아가게 되리니, 경계(境界 역주 : 六塵)와 얽어매어지지 아니하게 되어서 여섯 개의 자리(六根 역주: 眼, 耳, 鼻, 舌, 身, 意)와 짝을 이루지 않게 되어 흐름이 처음으로 되돌아가 반야와 하나가 되리니, 여섯 개의 작용(六識 역주 : 眼識, 耳識, 鼻識, 舌識, 身識, 意識)이 멈추어 버리면, 온 누리의 모든 나라들이 맑고 깨끗한 모습으로 또렷이 들어나게 되어, 마치 유리구슬 속에 밝은 달이 걸려 있는 듯 몸 마음이 가뿐하여져서 이루 말할 수 없이 빼어나 온 누리 하나 가득한 반야와 하나가 되어 커다란 편안함을 얻게 되리니, 깨끗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으나 깊이 숨겨져 있으면서 온 누리에 가득한(密圓 역주 : 如來藏) 모든 여래의 참다운 도리가 모두 바로 지금 이 순간(現業)에 들어나게 되느니라.
이러한 사람은 나고 사라짐이 없는 참다운 모습을 깨달아 알고 거기에 머물러 움직이지 아니하는 것(無生法印)을 얻게 되어 점점 수행의 깊이를 더해 감에 따라(漸修) 머무는 곳마다 성인의 과위(果位)에 알맞은 움직임을 보여 주리니 이것을 한 번 더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세 번째로 삼아야 하는 수행의 순서라 부르느니라.
아난아, 이 맑고 깨끗한 사람이 애욕이 말라버려 몸 안의 여섯 자리(六根)와 바깥의 여섯 경계(六境)가 서로 어울리지 아니함으로 눈앞의 바로 이 몸이 다시는 태어나지 않게 되어서, 마음이 허공(虛空)과 같이 순수하여지고 반야인 빛(明)과 하나가 되어서 지혜의 자리인 본바탕이 반야의 빛으로 가득하게 되니(明圓), 온 누리가 환하여져서 그 반야가 온 누리(乾)에 두루 있나니 건혜지(乾慧地)라 부르는 것이며, 처음 온 누리(乾)에 가득하더라도 탐욕심이라는 버릇이 남아 있기에 아직은 여래의 참다운 도리의 감로수(法流水)와 서로 어울리지 못하느니라.
바로 이 마음이 점점 안으로 흘러 들어가서 중심에 다다르게 되면 막힘이 없이 온 누리에 가득한 반야의 빛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널리 펼쳐지게 되고, 이 마음이 진실로 이루 말할 수 없이 온 누리에 가득한 반야의 빛을 따르게 되면 다시 한 번 진실로 이루 말할 수 없이 빼어나 온 누리에 가득한 반야의 빛이 뿜어져 나와 이루 말할 수 없이 빼어난 믿음에 의해 결코 변하지 않게 됨으로 모든 망상들이 남김없이 사라지게 되어 참다운 도리를 회복하여 흔들림이 없는 그 마음속에 완전한 순수함만 남게 되나니, 이를 일러 믿음에 의한 마음이 머무르는 곳(信心住)이라 부르느니라.
마음이 진실한 믿음과 하나가 되면 뚜렷하게 모든 것을 알게 되어 모든 것이 막힘이 없이 온 누리에 가득한 반야의 빛이 오음(五陰)과 십이처(十二處)와 십팔계(十八界)를 두루 비추게 되어 가로막혀 거치적거리는 것이 전혀 없게 될 뿐만 아니라 과거와 앞으로 다가올 세상의 헤아릴 수 없는 겁 중에서 이 몸 버리고 다시 몸 받던 모든 버릇들이 바로 눈앞에 펼쳐지게 되리니, 이 맑고 깨끗한 사람은 모든 것을 스스로 생각하고 기억하게 되어 단 하나도 잊어버리지 아니하나니, 이를 일러 생각하고 기억하는 마음이 머무르는 곳(念心住)이라 부르느니라.
이루 말할 수 없이 빼어나 온 누리에 가득한 반야의 빛이 완전한 순수함과 하나가 되면 참다운 반야의 빛이 뿜어져 나와 아득한 옛적부터의 모든 버릇(習氣)들이 깨끗하고 밝은 반야와 하나가 되어 깨끗하고 밝음만을 애써 구하려 함으로 진실로 깨끗하고 밝음을 취하여 나아가게 되나니, 이를 일러 어이없고 미덥지 못한 생각을 여의고 참다운 도리와 하나가 되는 마음(精進心)이라 부르느니라.
마음이 깨끗하고 밝아지면 바로 눈앞에 모든 것을 슬기로 알게 되나니, 이를 일러 슬기로운 마음이 머무르는 곳(慧心住)이라 부르느니라.
슬기인 반야(明)에 의지하게 되면 주변이 맑고 고요하여져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그 고요함에 언제나 머무르게 되나니, 이를 일러 삼매에 드는 마음이 머무르는 곳(定心住)이라 부르느니라.
삼매(定)에 의해 빛이 환하게 드러나게 되면 반야(明)인 본바탕(性)이 점점 더 깊이 참다운 도리에 다가가게 되어 오직 나아갈 뿐 수행에 물러남이 없게 되나니, 이를 일러 수행에서 물러나지 않는 마음(不退心)이라 부르느니라.
마음이 수행에 의해서 참다운 도리와 하나가 되면, 모든 것이 편안하여져서 어이없고 미덥지 못한 생각이 일어나지 아니하여 잃을 것이 전혀 없게 되어 온 누리의 모든 여래들의 능력과 맞닿아 나누어 가지게 되나니, 이를 일러 참다운 도리를 보호하는 마음(護法心)이라 부르느니라.
반야와 하나가 되어서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짓을 가리게 되어 스스로에게 있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빼어난 능력으로 부처님의 자애로운 슬기의 빛을 돌리어서 부처님께서 언제나 편안히 머무르시는 곳으로 향하게 되어, 마치 두 개의 거울이 빛을 서로 마주 대하면 그 가운데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은 그림자들의 모습이 겹겹이 들어있나니, 이를 일러 스스로 닦은 착함의 공덕을 모든 중생들에게 돌려 중생을 구제하고 스스로는 성인의 과위에 돌려 깨달음을 얻게 되는 마음(廻向心)이라 부르느니라.
마음속의 거룩한 반야가 참다운 모습인 처음자리로 되돌아가면 부처님의 첫째가는 빼어난 이루 말할 수 없이 깨끗함에 언제나 머물러 있게 되어 그윽한 고요함인 열반에 편안히 머물러 전혀 번뇌가 새어 나오지 아니하나니, 이를 일러 계율을 지키는 마음이 머무르는 곳(戒心住)이라 부르느니라.
계율에 머무름이 자유로워지면 스스로 온 누리의 세계를 내키는 대로 거닐 수 있게 되어 가고 싶은 곳에 갈 수 있으니, 이를 일러 내키는 대로 거닐 수 있는 마음이 머무르는 곳(願心住)이라 부르느니라.
아난아, 이 맑고 깨끗한 사람이 진실한 방편을 닦아 이러한 열 가지 마음이 드러나게 된다면, 마음속의 참다운 모습이 반야의 빛을 뿜어내게 되어 모든 벌어지는 일들(十用)이 막힘이 없어 온 누리에 가득한 반야의 빛과 마음이 하나가 되나니, 이를 일러 마음속의 참다운 모습이 머무르는 곳(發心住)이라 부르느니라.
마음속의 반야가 환하게 드러나게 되면, 마치 유리와 같이 맑아져서 안에 있는 변하지 않는 참다운 모습(精金)이 눈앞에 드러나게 되고, 그 드러난 이루 말할 수 없이 빼어난 참마음이 머무르는 자리(地 역주: 果位)를 이루게 되나니, 이를 일러 마음을 다스려 각각의 성인의 과위를 얻어 머무르는 곳(治地住)이라 부르느니라.
마음과 참다운 모습이 머무르는 자리가 서로 미치어서 분별하게 되면, 모든 것을 환하게 알게 되어 온 누리를 두루 돌아다니더라도 전혀 거리낌이 없게 되나니, 이를 일러 닦고 익히어서 진실함에 머무르는 곳(修行住)이라 부르느니라.
행하는 모든 일이 언제나 부처님과 다르지 않아서 부처님으로부터 능력을 나누어 받음이 마치 중음신(中陰身)이 스스로 부모를 구하는 것처럼 지극한 믿음으로 인하여 그윽한 어둠 속에서도 거리낌이 없이 여래께서 머무르는 참다운 자리에 들어가게 되나니, 이를 일러 스스로 존귀함에 머무르는 곳(生貴住)이라 부르느니라.
이미 머리 위에 화신(化身 역주: 意生身, 中陰身)이 만들어 지기 시작하여 스스로 깨달음과 하나가 되어지면, 마치 뱃속의 아이가 다 이루어지듯이 머리위에 사람의 모습을 띤 화신이 완벽하게 갖추게 되나니, 이를 일러 육바라밀이 이루어져서 구현되어 머무르는 곳(方便具足住)이라 부르느니라.
용모가 마치 부처님과 같아지고 마음이 또한 닮아가는 것을 일러 분별하지 아니하여도 올바르게 마음이 머무르는 곳(正心住)이라 부르느니라.
몸 마음이 하나가 되어 나날이 부처님을 향해 나아가는 것을 일러 물러남이 없이 머무르는 곳(不退住)이라 부르느니라.
모습이 완전히 이루어져서(十身 역주 : 佛地의 初地인 法雲地) 몸 마음(靈相)이 한 순간에 새로 태어나는 것을 일러 어이없고 미덥지 못한 생각이 완전히 사라진 순수한 마음(意識 역주 : 意識의 깨어남으로 無意識이 점차 사라지게 됨)이 머무르는 곳(童眞住)이라 부르느니라.
화신(化身 역주 : 意生身, 中陰身)이 완전히 이루어져 유리구슬 속(胎 역주 : 유리구슬 속에 4~5세의 동자의 모습으로 三昧속에 들어있으며 윗입술 바로 밑까지 양수가 차 있고, 그 양수는 修行의 힘으로 修行者의 精이 변하여 된 水銀으로, 그 水銀이 精進을 통하여 끓게 되며, 끓을 때에 그 水銀속에서 精金이 티끌만큼 톡톡 튀어 올라와 아이의 입속으로 들어가면서, 化身은 점점 더 完成되어짐)으로부터 나오게 되어, 스스로 보살마하살(佛子 역주 : 法王子)이 됨으로 이를 일러 보살마하살이 머무는 곳(法王子住)이라 부르느니라.
화신(化身)이 완전히 어른의 모습을 갖추게 되면, 한 나라의 왕이 태자가 장성하면 나라의 여러 가지 일들을 태자에게 나누어 맡기려고 그 나라의 많은 신하들과 함께 대관식(灌頂)을 치르나니, 이를 일러 법 왕자가 부처님으로부터 감로수로 머리를 감게 되어 머무르는 곳(灌頂住)이라 부르느니라.
아난아, 이 맑고 깨끗한 사람이 보살마하살을 이루게 되면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여래의 공덕을 지니게 되어 온 누리의 모든 중생들이 기꺼이 따르게 되나니, 이를 일러 기쁨과 즐거움이 넘쳐나는 행동(歡喜行)이라 부르느니라.
첫째가는 빼어난 착함은 스스로 모든 중생들을 이롭게 하는 것이나니, 이를 일러 넉넉함이 넘쳐나는 행동(饒益行)이라 부르느니라.
스스로 깨달음을 이루어서 다른 중생들도 깨달음을 이루게 하는데, 전혀 거스름이 없는 것을 일러 성냄과 원한이 사라진 행동(無瞋恨行)이라 부르느니라.
여러 가지 중생의 몸으로 태어나서 다가오는 세상이 끝날 때까지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중생들과 함께 어울리되 온 누리의 모든 중생들의 뜻을 막힘이 없이 두루 다 알아 그 소원을 모두 들어주나니, 이를 일러 다함이 없이 모든 소원을 들어주는 행동(無盡行)이라 부르느니라.
모든 중생들이 한 자리에 모인 곳에서 가지가지의 법문을 펼칠 때에도 참다운 도리와 다르거나 어김이 전혀 없나니, 이를 일러 어리석음을 여의고 중생을 힘써 돕는 행동(離癡亂行)이라 부르느니라.
중생들과 항상 함께 하더라도 그 빼어남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며 하나하나의 두드러진 모습들이 단 하나도 부처님의 가르침과 다르지 아니하나니, 이를 일러 첫째가는 빼어난 착함이 드러난 행동(善現行)이라 부르느니라.
이와 같을 뿐만 아니라 온 누리의 허공(虛空)에 가득한 빛(微塵)과 그 하나하나의 빛줄기 속에 있는 온 누리의 모든 세계가 나타나게 되고, 그 속에 허망한 모습(塵)이 나타나고 장소가 나타나더라도 전혀 걸림이 없나니, 이를 일러 집착이 전혀 없는 행동(無著行)이라 부르느니라.
눈앞에 나타나는 가지가지의 여러 모습들이 모두 다 첫 번째인 보시바라밀을 이루기 위함임을 알아 힘써 따르나니, 이를 일러 온 누리에서 제일 존귀한 분(世尊)께 다시 한 번 귀의하는 행동(尊重行)이라 부르느니라.
이와 같이 마음이 스스로 온 누리의 모든 여래들께서 이루신 참다운 도리(軌則)와 하나로 통하여 아무 걸림이 없게 되나니, 이를 일러 착함을 몸소 실천하는 행동(善法行)이라 부르느니라.
하나하나의 행동이 모두 다 옳아서 맑고 깨끗하여 번뇌가 전혀 일어나지 아니하니, 오직 이 하나가 진실로 나고 사라짐을 여읜 그윽하고 편안(無爲, 涅槃)한 본래의 참다운 모습(性)이므로, 이를 일러 참된 수행의 결과로 얻은 행동(眞實行)이라 부르느니라.
아난아, 이 맑고 깨끗한 사람이 여섯 가지 신통으로 부처님께서 바라시는 일들을 모두 다 이루게 되고, 몸 마음이 맑고 깨끗하여 순수하고 진실함으로 모든 근심걱정을 멀리 여의게 되어서 중생을 생사 번뇌의 고해에서 건져 극락세계로 인도하려 할 적에도 중생을 건진다는 생각을 결코 내지 않아서 나고 사라짐을 여읜 그윽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열반의 길로 들어서나니, 이를 일러 모든 중생을 돕고 보호하면서도 결코 중생을 돕는다는 생각을 내지 않고 스스로 닦은 맑고 깨끗함(善)의 공덕을 모든 중생들에게 돌려 중생을 구제하고 스스로는 성인의 과위에 돌려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이라 부르느니라.
영원하지 아니한 것에는 결코 의지하지 아니하며, 진실하지 않은 것은 멀리 여의게 되나니, 이를 일러 진실한 것에 귀의하여 스스로 닦은 착함의 공덕을 모든 중생들에게 돌려 중생을 구제하고 스스로는 성인의 과위에 돌려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이라 부르느니라.
본바탕인 깨달음(本覺)은 그윽하고 평온하여 그 깨달음은 부처님의 깨달음과 버금가기에, 이를 일러 남김 없는 열반을 증득한 깨달음은 모든 부처님의 깨달음과 다름이 없기에 스스로 닦은 착함의 공덕을 모든 중생들에게 돌려 중생을 구제하고 스스로는 성인의 과위에 돌려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이라 부르느니라.
순수하고 진실함이 환하게 드러나게 되면 스스로의 머무르는 마음자리가 부처님께서 머무르신 그 자리와 다름이 없기에, 이를 일러 온갖 것에 관심을 기울이던 헤아릴 수 없는 많은 헛된 생각(妄想)들이 사라져 진실함만 남게 되어 스스로 닦은 착함의 공덕을 모든 중생들에게 돌려 중생을 구제하고 스스로는 성인의 과위에 돌려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이라 부르느니라.
온 누리와 여래께서 머무르신 참된 자리를 넘나들더라도 전혀 걸림이 없나니, 이를 일러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공덕을 쌓아야만 모든 장애가 사라지고 자유로워져서 스스로 닦은 착함의 공덕을 모든 중생들에게 돌려 중생을 구제하고 스스로는 성인의 과위에 돌려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이라 부르느니라.
부처님이 머물러 계신 곳에 함께 있거나 각각의 다른 곳에 머물러 있을 적에도 맑고 깨끗함을 비롯하여 태어남으로 맑고 깨끗함을 비롯하기에 반야의 빛이 드러나게 됨으로 나고 사라짐을 여읜 그윽하고 편안한 길에 들어서게 되나니, 이를 일러 모든 일에 고분고분하여 거스르지 아니하고 따르는 진실로 맑고 깨끗한 마음자리에 머무르게 되어 스스로 닦은 착함의 공덕을 모든 중생들에게 돌려 중생을 구제하고 스스로는 성인의 과위에 돌려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廻向)이라 부르느니라.
진실로 맑고 깨끗한 마음자리에 이르게 되면 온 누리의 모든 중생들이 다 나의 본래 참다운 모습이어서 그 참다운 모습이 막힘이 없이 온 누리에 가득한 반야의 빛을 이루게 되어서는 중생들을 결코 놓치지 아니하고 구제함으로, 이를 일러 모든 일에 고분고분하여 거스르지 아니하고 따르며 모든 중생들이 나와 하나인 줄을 알아서 스스로 닦은 착함의 공덕을 모든 중생들에게 돌려 중생을 구제하고 스스로는 성인의 과위에 돌려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이라 부르느니라.
모든 일어나는 현상인 순간과 모든 허망한 모습들을 멀리 여읜 영원성, 오직 순간과 영원이라는 이 두 가지조차도 결코 집착하지 아니하여야만, 이를 일러 진실로 참다운 모습이 있는 그대로임을 깨달아 스스로 닦은 착함의 공덕을 모든 중생들에게 돌려 중생을 구제하고 스스로는 성인의 과위에 돌려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이라 부르느니라.
진실로 참다운 모습이 있는 그대로임을 깨닫게 되면 온 누리의 모든 세계가 거리낌이 없게 됨으로, 이를 일러 모든 존재로부터 얽매이지 않게 되어 나고 사라짐을 여읜 그윽하고 편안함을 얻게 되어 스스로 닦은 착함의 공덕을 모든 중생들에게 돌려 중생을 구제하고 스스로는 성인의 과위에 돌려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이라 부르느니라.
참다운 모습의 공덕인 반야의 빛이 막힘이 없이 온 누리에 가득하게 되면 모든 현상이 일어나는 온 누리가 허망한 줄을 알게 되나니, 이를 일러 모든 온 누리가 거짓된 모습임을 깨달아 스스로 닦은 착함의 공덕을 모든 중생들에게 돌려 중생을 구제하고 스스로는 성인의 과위에 돌려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이라 부르느니라.
아난아, 이 맑고 깨끗한 사람이 이처럼 맑고 깨끗한 사십 일가지의 마음가짐을 다한 뒤에야 네 가지의 이루 말할 수 없이 빼어난 반야의 빛이 막힘이 없이 온 누리에 가득하게 되는 더 공덕이 빼어난 행동을 할 수 있게 되느니라.
부처님의 깨달음의 자리에 오르는 것을 이미 스스로 마음을 먹었으나 번뇌와 망상으로부터 벗어날 듯 벗어날듯 하다가도 아직 벗어나지 못한 것이 마치 나무를 서로 비벼서 불을 일으키려 하는 것과 다름이 없나니, 이를 일러 열심히 닦고 익혀서 반야의 빛을 얻으려는 마음이 머무르는 자리(爲煖地)라 부르느니라.
또 이미 마음으로는 부처님께서 이루신 자리에 이르렀으나 부처님께서 행하신 바대로 한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여 마치 높은 산의 정상에 오르면 몸은 허공(虛空) 속에 머물러 있으나 아직 발밑은 땅을 밟고 있는 것과 같으니, 이를 일러 생각하는 마음으로 오를 수 있는 최고의 경지까지 오른 마음이 머무르는 자리(爲頂地)라 부르느니라.
마음과 부처님이 하나가 된 듯 하여 진실로 맑고 깨끗한 마음으로 참다운 모습인 그윽하고 편안한 자리(中道)에 들게 되어 마치 일을 끝마치려고 하는 사람은 아무리 힘이 들어도 기꺼이 참으며 힘써 일하는 것과 같이 참는 다는 생각이 있지도 아니하며 없지도 아니하나니, 이를 일러 즐거움 속에서 마땅히 해야 할 바를 기꺼이 하는 그 마음이 머무르는 자리(忍地)라 부르느니라.
마음속에 헤아림이 모두 다 사라져서 갈피를 못 잡는 헤맴이나 깨달음이 참다운 모습인 그윽하고 편안한 자리에서는 결코 머무를 수 없나니, 이를 일러 번뇌와 망상이 완전히 사라진 무심(無心)이 머무르는 자리(世第一地)라 부르느니라.
아난아, 이 맑고 깨끗한 사람이 지극히 맑고 깨끗한 마음으로 거룩한 보리를 환히 알게 되어서 그 깨달음이 여래의 마음과 이어지게 되어 부처님이 머무르는 자리에 다다르게 되나니, 일러 기쁨과 즐거움이 우러나오는 마음이 머무르는 자리(歡喜地 역주 : 禪定의 第一地, 수다원과, 初地菩薩, 禮節이 익는 자리)라 부르느니라.
존재 전체의 참다운 모습 속으로 녹아 들어가 하나로 어울리게 되며 하나로 어울려 뭉쳐진 참다운 모습조차도 사라지나니, 이를 일러 번뇌·망상이 사라진 마음이 머무르는 자리(離垢地 역주 : 禪定의 第二地, 사다함행, 二地菩薩, 禮의 完成-질서 의식의 회복)라 부르느니라.
이루 말할 수 없이 깨끗하여지면 반야의 빛이 드러나게 되나니, 이를 일러 반야의 빛인 참다운 마음이 머무르는 자리(發光地 역주 : 禪定의 第三地, 사다함과, 三地菩薩, 義로움이 익는 자리)라 부르느니라.
반야의 빛이 온 누리에 가득하여지면 깨달음이 이루어지나니, 이를 일러 반야가 햇살처럼 뿜어져 나와 어리석음이 머무를 곳이 없어지는 그 마음이 머무르는 자리(焰慧地 역주 : 禪定의 第四地, 아나함행, 四地菩薩, 義로움의 完成)라 부르느니라.
모든 분별이 사라져서 중생심이 다시는 발붙일 곳이 없게 되어 참다운 공(眞空)을 처음 맛보게 되나니, 이를 일러 예로부터 수행자가 닦고 익혀서 올라가기 정말 어려운 그 마음이 머무는 자리(難勝地 역주: 禪定의 第五地, 아나함과, 五地菩薩, 仁이 익는 자리)라 부르느니라.
나고 사라짐을 여읜 그윽하고 편안한 결코 변하지 않는 참다운 모습인 본바탕(性)이 지극히 맑고 깨끗하여 져서 반야의 빛이 드러나게 되나니, 이를 일러 삼계의 모든 것을 다 헤아려 볼 수 있는 그 마음이 머무르는 자리(現前地 역주: 禪定의 第六地, 阿羅漢行, 六地菩薩, 功德이 익는 자리)라 부르느니라.
삼계의 참다운 모습이 허망함으로 이루어진 것을 완전히 체험하여 두 번 다시 태어나지 않게 되나니, 이를 일러 삼계의 모든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열반으로 향하는 그 마음이 머무르는 자리(遠行地 역주 : 禪定의 第七地, 阿羅漢果, 七地菩薩)라 부르느니라.
오직 하나 참다운 성품인 진실한 마음만으로 머물러 있게 되나니, 이를 일러 번뇌가 완전히 사라져 윤회의 속박에서 완전히 벗어난 그 마음이 머무르는 자리(不動地 역주 : 禪定의 第八地, 八地菩薩, 머리 약 15cm 위에 육체의 자궁이 아닌 마음으로 만든 자궁에 意生身이 머무르는 자리)라 부르느니라.
참다운 모습인 반야의 빛을 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하여 다시 일곱 번째 자리(遠行地 역주 : 육체적으로 九地菩薩의 자리와 七地菩薩의 자리는 同一한 머리 위 頭頂임)로 돌아오게 되나니, 이를 일러 지극히 맑고 깨끗한 마음과 반야로 중생을 구제하기 위한 그 마음이 머무르는 자리(善彗地 역주 : 禪定의 第九地, 九地菩薩)라 부르느니라.
아난아, 이와 같이 모든 보살들이 이미 쌓아야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공덕을 다 쌓고 그 마음을 닦고 익힘을 마치게 되어 그 공덕이 점점 더 온 누리에 가득하여질수록 수행의 결과에 따라 그 마음이 머무르는 각각의 자리에 들게 되나니, 이를 일러 초지(初地)에서 구지(九地)까지는 힘써 닦고 익히며 공덕을 한없이 쌓아야만 오를 수 있는 그 마음이 머무르는 자리(修習位)라 부르느니라.
모든 중생을 지극히 사랑하는 마음(慈陰)과 이루 말할 수 없이 빼어난 반야의 빛인 깨달음이 완성되어 그 깨달음으로 삼계를 두루 감싸 안으니, 이 자리에서 보살은 불지(佛地)에 들게 되어 그 모습이 열반의 바다(香水海)에서 아침 해가 솟아오르는 모습과 같으며 여기에서 새로 태어나 새로운 몸을 이루게 되나니, 이를 일러 삼계를 헤아릴 수 없는 자비심으로 감싸 안는 그 마음이 머무르는 자리(法雲地 역주 : 禪定의 第十地, 十地菩薩, 佛陀初地, 佛像의 頭頂과 白毫의 중간자리, 明點-빈두-이라 부름)라 부르느니라.
여래께서는 사바세계의 모든 중생을 구하려 이 세상에 내려오시고 이 보살마하살은 더욱더 앞으로 나아가 법계의 모든 비밀이 담겨있는 방을 완전히 알게 되나니(覺際入交 역주 : 六地菩薩의 자리와 佛陀二地의 자리는 서로 같은 위치임, 等覺菩薩은 여기에서 法界의 비밀창고인 七百개의 방을 다 들여다보고 法界의 모든 비밀을 훤히 알게 됨), 이를 일러 부처님께서 알고 계시는 만큼 이 보살의 버금가게 알게 되는 그 마음이 머무르는 자리(爲等覺 역주 : 十一地)라 부르느니라.
아난아, 십지(十地)인 건혜지(乾慧地)라는 마음부터 십오지(十五地)인 완성의 자리(等覺)에 이르기까지 이 깨달음이라는 결코 무너지지 않는 마음(金剛心 역주 : 金剛喩定, 金剛三昧)은 십지(十地)인 건혜지(乾慧地)로부터 얻게 되나니 이것은 세 겹으로 쌓여 있기에(역주 : 欲界의 일곱 개의 寺院, 色界의 다섯 개의 寺院, 無色界의 세 개의 寺院의 合이니 모두 열다섯 개의 寺院으로 이루어져 있음, 열세 번째 寺院은 완벽한 至滅의 자리인 無如涅槃의 자리이기에 이곳에서 十五地 까지는 逆流가 안 됨) 이렇게 한번 깨닫고 두 번 깨닫고 세 번째 깨달음에 의해서 십이지(十二地)에 오게 되며 이루 말할 수 없이 빼어난 그 깨달음이 다 하여서 첫째가는 올바른 도리(無上道)를 이루게 되느니라.
이렇게 가지가지의 마음이 머무르는 자리는 결코 무너지지 않는 궁극(金剛)으로써 마음을 집중(奢摩他)하는 가운데 거짓된 모습인 번뇌와 망상을 자세히 살피어 얻게 되는 열 가지의 깊은 깨달음으로 모든 여래의 자세히 살피어 증명하는 관법(역주 : 身受心法의 위빠사나, 小乘과 大乘의 觀法은 약간의 차이가 있음)에 의해 맑고 깨끗하게 닦고 익히어 증명하며 참다운 모습인 여래께서 머무르는 자리에 점점 더 깊이 들어가는 것이니라.
아난아, 이러한 모든 것이 세 가지의 닦아 익히어 점점 더 깊이 들어가는 것(三增進 역주 : 첫째는 修習, 둘째는 眞修, 셋째는 增進)이어서 쉰다섯 가지의 마음이 머무르는 자리(역주 : 十信, 十住, 十行, 十廻向, 十地, 四加行, 等覺)인 참다운 깨달음의 길(眞菩提路)이 지극한 맑고 깨끗함에 의해 스스로 이루어지게 되나니, 이와 같이 자세히 살피어 수행하는 사람을 바른 관법(正觀)을 이루었다 부르며 이와 다르게 살피어 수행하는 사람은 삿된 관법(邪觀)을 이루었다 부르느니라.”
이때에 문수사리보살마하살이 대중가운데서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 발에 정례(頂禮)를 올리고 나서 부처님께 말하였다.
“이 경을 무엇이라 불러야 하며, 저와 모든 중생들이 어떻게 받들고 따라야 하나이까?”
부처님께서 문수사리보살마하살에게 말씀하시었다.
“이 경의 이름은 거룩한 부처님 정수리 위에 부처님의 법신이 푸른 보배 연꽃 위에 앉으시어 첫째가는 빼어난 보배광명으로 온 누리를 두루 비추는 것으로 온 누리의 모든 여래께서 한량없는 자비로 모든 중생을 구제하는 맑고 깨끗한 향수의 바다같은 모든 중생을 두루 살피는눈(大佛頂 悉怛多般怛囉 無上寶印 十方如來 清淨海眼)이라 부르며,
또 오백생동안의 부부의 인연으로 마등가(性比丘尼)에 의한 음탕한 몸짓으로 아난의 계체가 훼손됨을 벗어나게 하고 보호하여 깨달음을 얻게 하고 반야의 바다인 참다운 모습 속에 들게 함이라 부르며, 또 여래께서 오직 진실한 수행자에게만 비밀스레 닦아 증명하도록 하는 마지막 가르침(如來密因修證了義)이라 부르며,
또 온 누리에 자비로 두루 계시어 푸른 연꽃 위에 앉아 모든 법계의 왕이신 부처님께서 수행자들이 반야를 잊지 않고 기억하여 보리를 드러내도록 하는 주문(大方廣 妙蓮華王 十方佛母 陀羅尼咒)이라 부르며,
또 관정(灌頂)에 대한 이야기이니, 모든 보살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공덕을 쌓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닦고 익히어 그 공덕이 빼어났을 때 부처님께서 감로수로 머리를 감기어주시어 깨달음을 증명하여 줌(灌頂章句 諸菩薩萬行 首楞嚴)이라 부르나니 너희들은 마땅히 받들고 따라야 하느니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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